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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근목사 (승리교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2003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일년의 길이가 짧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온도에도 체감 온도라는 것이 있듯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것도 체감 속도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자동차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10대의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시속 10마일로 가는 거와 같다.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지 않는지 빨리 어른이 되고 미성년자 딱지 떼고 싶은데 참 시간이 잘 안가지요? 그런데 20대는 시속 20마일 30대는 시속 30마일 시속50마일이 되고 보니까 세월이 참 빠르게 느껴지네요. 60대 70대에는 세월이 더 빠르게 느껴지겠지요. 자동차 백미러에 보면 이런 글이 적혀있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물체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백미러로 보면 물체가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은 물체가 더 가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아있는 것 같습니까? 일년에 마지막이 있듯이 인생에도 마지막이 있을텐데. 내 마지막이 얼마나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까?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속 60마일, 70마일 가속도 붙으면 금방 도착하거든요. 아니 벌써 내 인생이 끝났단 말인가 봉사할 기회, 충성할 기회 많이 있을 줄 아는데 벌써 끝났단 말인가 그렇게 안타까워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히브리서 9장 27절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주님께로부터 어떤 판결을 받을까요? 굉장히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이지요. 이 때 주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유익하겠지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인데 심판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재물을 맡겼습니다. ‘여보게들 내가 먼 나라를 상당한 기간동안 여행을 해야 할 터인데 그동안 내 재산을 좀 관리해주게.’ 그리고 한사람에겐 5달란트 한사람에겐 2달란트 한사람에겐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1달란트는 금화의 명칭인데 6천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럼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치면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니까 3억입니다. 상당히 많은 액수이지요. 자네는 15억을 맡아주게. 아니 이렇게 많이 맡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자네는 6억을 맡아주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각기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가서 그 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3억을 맡아주게. 사실 3억도 작은 돈이 아니죠. 작은 돈이 아닌데 아니 저 사람은 15억 주고 저 사람은 6억 주고 나는 겨우 3억이야 하는 섭한 마음이 들었나봐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 돈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결국 주인이 다 가질 것이고 손해 보면 나중에 나에게 배상하라 할 터이니 내가 짱구냐 그러고는 그 돈을 땅에 묻어 둔 거예요.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열심히 일한 사람 그 돈을 땅에 묻어둔 사람 돈을 땅에 묻어둔 사람이 훨씬 더 재밌게 살아요. 일 할 것도 없이 자유롭잖아요. 여기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사람. 빈둥빈둥 노는 사람. 훨씬 더 노는 사람이 한국적인 표현으로 팔자가 좋아보입니다. 주인이 돌아오자 사정이 달라졌어요. ‘열심히 일한 사람은 주인님이여 여기 갑절을 남겼나이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듣습니다. 상급을 누립니다. 1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여기 1달란트 있습니다’. 했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꾸중을 듣고 붸겨 났습니다. 결국은 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인가. 사는 동안 재미나게 즐기면서 산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인가 중간을 보고는 모릅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딱 서봐야 그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지 혹은 실패의 삶을 살았는지 판결이 날 것입니다.
이제 이 예화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칭찬들은 사람이 있고 꾸중들은 사람이 있는데 칭찬들은 사람은 왜 칭찬 들었습니까? 얼핏보면 갑절을 남겼기 때문에 업적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칭찬을 자세히 보면 업적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넌 다섯 남겼구나, 넌 둘 남겼구나’ 그런 말은 없지요. 그리고 업적에 따라서 평가한다고 그러면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한테 더 큰 칭찬을 해줘야 할텐데 다섯 남긴 사람이나 둘 남긴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해 주십니다. 그리고 칭찬의 내용은 착하고 충성되다는 것입니다. 업적이 아니고 과정을 중히 여긴 것이고 중심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에 의해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그림자인 교회도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 의해 유지되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지요. 이번 주는 주보가 좀 두툼합니다. 안에 뭐가 많이 들었지요. 우리 권사님들이 토요일마다 모이셔가지고 이 주보 내용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집어넣고요. 그냥 인쇄소에서 올 때 펼쳐져서 오면 다 접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개인 주보함에 하나하나 꽂아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편하게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밖에 춥지만 주차부에서는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배 끝나고 나갈 땐 따끈한 차가 여러분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지요. 교회 들어올 때 영접하시는 분들, 안내하시는 분들, 또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이렇게 아름답게 성전을 꾸미시는 분들, 청소하시는 분들 또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어린 심령들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교사들 또 성가대원들 헌금 수납하시고 하루종일 계수하시고 곳곳에 수많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있기에 이렇게 원만하게 예배가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같이 수고하며 예수 믿는 사람이 있고 별 다른 수고 없이 편하게 와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같이 천국은 갈거예요. 그러나 상급은 다를 겁니다. 어떻게 신앙생활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믿는 것이 지혜롭게 믿는 것인가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제 나름대로 남보다 봉사를 많이 하고 내가 많이 맡았다 생각되는 사람은 두 가지 조심할게 있습니다. 하나는 일하지 않는 사람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5달란트 맡은 사람, 2달란트 맡은 사람이 한 달란트 맡았던 사람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험 들겠지요. 아니 다 같은 종인데 누구는 이렇게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누구는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놀고만 있느냐. 그 모습을 보고 일했더라면 별로 일할 맛이 안 나겠지요? 그러나 종은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귀중한 것을 맡겨 주셨는데 고맙지. 이 고마우신 주인께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그 마음으로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은 바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 모든 봉사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며 일해야 됩니다. 사람의 인정 칭찬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보고 일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보고 일한다면 주인만 보고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새해에도 귀한 직분 주님께서 주시거든 사람 시선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충성을 다하시는 일꾼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남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다섯 받은 사람이 그저 적당하게 해도 셋이 남았습니다. 근데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 남겼습니다. 그래도 내가 더 많이 남겼네 그리 생각하고 셋만 남기고 그냥 이만하면 됐지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위험이 있는 거죠. 그러나 둘 받은 사람이 둘 남겼다면 다섯 받은 사람은 얼마를 남겨야겠습니까? 다섯을 남겨야 되는거예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각자의 최선입니다. 얼마만큼 남겼느냐 그것은 주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얼마나 충성됐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봉사라는 게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다 봉사자이지요 사실 모든 직장은 바로 봉사의 일터인 거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보수를 받겠습니다만 그러나 보수가 문제가 아니고 모든 일은 섬김인데 여러분의 최선을 다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악가 조수미씨 아시죠. 얼마나 목소리가 아름다운지 몰라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인데 잠시 후에 인천 주안교회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콘서트를 할겁니다. 몇 년 전에 대담 프로에서 조수미씨가 나와서 인터뷰하는 것을 잠시 들었는데 사회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당신의 목소리는 참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 목소리의 결점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니까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결점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요 그걸 듣고 제가 와 이 여자 대개 교만하네 음악 하는 사람들은 교만하더니만 이 여자 교만하네 이렇게 교만해도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잠시 후에 설명하는데 들어보니까 그게 아니더구만요. ‘전 제 노래에 결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훈련을 해서라도 반드시 그 결점을 극복하고야 맙니다. 그 결점이 극복되기 전에는 절대로 무대에 서지 않습니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그 결점을 극복하고서야 무대에 섭니다.’ 그것을 듣고 과연 세계적인 성악가가 다르긴 다르구나 저 같은 노력이 있었기에 계속 저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조수미씨가 연습 따로 하지 않아도 우리보다 노래 잘하지요. 그렇다고 그냥 있으면 주님께로부터 칭찬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의 최선인 것입니다. 주님은 충성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공하라는 거 아니에요. 성공했기 때문에 상 받은 거 아닙니다. 충성했기 때문에 상 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꾸중들은 사람은 왜 꾸중들었는가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들었는가 꾸중의 내용은 그게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꾸중합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보니까 금방 표가 나는데 악한 것 같진 않은데요. 아니 본전 떼어먹는 못된 사람도 얼마나 많이 있는데 본전은 가져왔잖아요. 그런데 왜 악하다고 이렇게 꾸중하는 것입니까. 이 종의 마음 중심이 문제입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스켈레로스라는 이 단어의 뜻은 잔혹하다 잔인하다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독한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장사하다가 실패해서 손해보게되면 악착같이 그것을 배상시킬 그런 사람입니다. 만약 이익을 남기게 되면 당신이 다 가지겠지요. 그런데 나는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주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주인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지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스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바에 대해서 하나님 공평하십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없다면 악한 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불공평함 속에 공평입니다. 여러분 공평한 게 뭡니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아주 추운 날 마음씨 좋은 분이 어린 아이들에게 장갑을 나누어준다고 합시다. 여기 손이 큰 아이가 왔습니다. ‘야, 넌 이 장갑을 가져라’ 큼지막한 장갑을 줍니다. 이제 손이 작은 작은 아이가 왔습니다. ‘넌 이것을 가지라’고 작은 장갑을 줍니다. ‘아니 아저씨 얘는 큰 장갑을 주고 저는 작은 장갑을 줘요? 나도 똑같이 큰 장갑 줘요’ 그래서 두 사람에게 똑같이 큰 장갑 주는 게 공평입니까? 아니면 손 큰 아이에게 큰 장갑 주고 손이 작은 아이에게 작은 장갑 주는 게 공평입니까? 공평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능력대로 줬다고 했잖아요. 다섯을 능히 감당할 자에게는 다섯을 맡기고 한 달란트 밖에 감당 못할 자에게는 한 달란트 준겁니다 그건 공평한 겁니다. 왜 내게는 이 정도의 재산밖에 안 줍니까? 왜 내겐 이 정도의 건강 밖에 안 주는 겁니까? 왜 내겐 이 정도의 지위 밖엔 안 주는 겁니까? 불공평합니다 하나님 그런 마음 품으면 주님을 위해서 일 할 마음이 없지요. 사실 대부분의 우리 인생은 내가 지금 처해 있는 모든 환경은 물론 나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성격이 어떠하냐 건강 상태가 어떠하냐 집안이 어떠하냐 국적이 어떤 국적이냐 대부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주어진 나의 나됨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야 이 고마우신 주님을 위해서 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 불공평하십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 마음 품으면 그 마음 가지고는 일 할 수 없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뇌성마비 장애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내가 비록 남보다 건강 갖지 못했지만 나는 남이 갖지 않은 것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바에 대해서 하나님 공평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이 마음을 품고 일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게으르다 했습니다. 왜 게으르다 했습니까? 실패했기 때문에 게으르다는 게 아닙니다.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장사하면 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아예 장사는 시작도 하지 않고 묻어둔 것입니다. 묻어두었기 때문에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내 시간 내 것입니까? 내 재능 내 것입니까? 내 물질 내 것입니까? 다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것 내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 내게는 없습니다. 마음대로 묻어둘 권리가 내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해야 됩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많이 받은 사람보다는 적게 받은 사람이 묻어둘 확률이 많습니다.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니까 교회 직분 받은 사람보다는 아무 직분 받지 않은 사람이 묻어둘 확률이 더 많은 것이지요. 아무 직분도 맡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초신자입니까? 조심하십시오. 직분 맡지 않은 사람도 해야할 일이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필요 없는 지체 하나도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 땅에 남겨 두실리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지요 왜 땅에 살게 하시겠습니까?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을 이 교회에 보내셨겠습니까? 이 교회 속에서 여러분이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그 일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새 가족들은 이 교회에는 사랑이 없냐 인사도 안 하고 날 몰라준다 생각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할게 아니고 생각을 좀 바꿔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먼저 인사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훈훈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새 가족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구만 이 교회에는, 그렇게만 생각할게 아니고 새 가족 내가 돌보자 아니 나는 믿음의 어린아인데 어떻게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돌봅니까? 아니요. 어린아이를 제일 잘 보는 사람은 어린아이입니다. 놀러 갈 때 어른에 애 하나 딸려 가면 애 하나에 어른하나 따라가서 애하고 같이 놀아줘야 돼요. 그런데 이쪽 집에도 애 하나 있고 저 쪽 집에도 애 하나 있고 그러면 간단합니다. 애들끼리 두면 재미나게 잘 놀아요. 새 가족의 가장 좋은 친구는 또 다른 새 가족이지요 뭐 복잡하게 잘 모르니까 취미클럽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축구 선교단 만들었습니다만 아직 나머지는 못 만들었어요. 골프 선교단 만들어도 되고 테니스 선교단 만들어도 되고 볼링, 당구 할거 많이 있지요. 꽃꽂이 만들어도 되겠고 여러 가지 취미클럽을 만드십시오.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이 교회는 다니지만 친구는 전부 예수 안 믿는 친구들이에요.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신앙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클럽 안에 예수 믿는 사람끼리 어울리다 보면 믿음도 자라게 되고 그리고 자기 믿음도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그 취미 클럽에 그 친구를 데리고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도 가능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을, 묻어둘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패는 또 다른 성공의 기회입니다. 사실 사람이 성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만 성공하게 되면 그 업적에 마음을 빼앗기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많이 배우는 것은 실패를 통해서 많이 배우는 것이지요.
한 번은 제가 사무실에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무개 집사입니다,. 한참 생각하니까 알 것 같아요. 꽤 오래 전에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 예배를 드려줬던 그런 집사님인데 이 분은 큰 의류회사에 원단을 제공하는 그런 업자입니다. 꽤 큰 사업체를 유지했었는데 제가 몇 번 가서 예배를 드려주고 그랬는데 어느 날 소식을 들으니까 부도가 났다는 것입니다. 수금 받아야 할 업체가 도산되니까 이 업체도 부도가 나가지고 교도소에 갔답니다. 경제사범이 되가지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겠다는 겁니다. 주위에서 ‘목사님이 좀 말려주세요. 저 사람 또 사업하려고 하는데 또 망합니다. 말려주세요.’ 절 찾아와서 ‘개업예배 좀 드려주세요’ 그래가지고 ‘아니 집사님 또 하실 겁니까?’ ‘예 또 해야지요. 제가 교도소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하는 거 쭉 보니까 일리가 있어요. 실패 이유를 깨달았으니 이제 이것만하지 않으면 이번엔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목사님 예배 좀 들여주세요. 그래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전 세상에 그렇게 작은 사무실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쪼그마한 사무실에 직원은 사장 한 명 전화 받는 여직원 한 명 두 명입니다. 두 명 앉혀 놓고는 개업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를 드려 달라는 거예요. 예배를 드려달라는데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몇 번 예배를 드려줬지요. 그리고 직원 두 명 되는 것보고 제가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꽤 많은 세월이 흘렀지요. 그리고 지금 전화가 온 겁니다. 집을 새로 하나 샀는데 꼭 목사님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가보니까 논현동에 거기 집 값 비싼데죠. 아주 큰 대저택을 샀어요. 그래서 한 쪽은 살림집으로 쓰고 한 쪽은 개조를 해 가지고 회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원이 한 이십 여명 되고요. 아주 이방면에서 알아주는 아주 탄탄한 중소기업이 됐습니다. 지금 이렇게 불황인데도 이 회사는 이렇게 날로 날로 매출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감사한데 처음 예배드릴 때 목사님 생각나서 꼭 목사님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래서 감격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여러분 실패한 적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둘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그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기를 내시고 하시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달란트를 묻어두는 자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특별히 우리 승리교회에서는.
제 목회의 큰 두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천국 가서 최상의 상급을 받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천당만 가면 됩니다. 상급은 안 받아도 됩니다. 그런 분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상급 받는 것하고 천국 가는 것하고 관련이 있어요. 천국이 뭡니까? 천국은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상급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랑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그 믿음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셨다 그 대속의 십자가의 공로로 내가 구원받았다 그거 아닙니까? 그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겠습니까?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이 칠십이 넘어서면 할 수 있으면 주보라도 접어야지 그 맘이 있는 거예요. 뭔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제 일년의 끝이 왔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지요. 인생의 끝도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멍청하게 있을 틈이 없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하여 활용할 것입니다. 성공 실패 여부를 떠나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서는 날,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칭찬과 환영을 받을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2003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일년의 길이가 짧아지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온도에도 체감 온도라는 것이 있듯이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것도 체감 속도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자동차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10대의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시속 10마일로 가는 거와 같다. 왜 이렇게 시간이 가지 않는지 빨리 어른이 되고 미성년자 딱지 떼고 싶은데 참 시간이 잘 안가지요? 그런데 20대는 시속 20마일 30대는 시속 30마일 시속50마일이 되고 보니까 세월이 참 빠르게 느껴지네요. 60대 70대에는 세월이 더 빠르게 느껴지겠지요. 자동차 백미러에 보면 이런 글이 적혀있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물체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백미러로 보면 물체가 멀리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상은 물체가 더 가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내 인생이 얼마나 남아있는 것 같습니까? 일년에 마지막이 있듯이 인생에도 마지막이 있을텐데. 내 마지막이 얼마나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까?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속 60마일, 70마일 가속도 붙으면 금방 도착하거든요. 아니 벌써 내 인생이 끝났단 말인가 봉사할 기회, 충성할 기회 많이 있을 줄 아는데 벌써 끝났단 말인가 그렇게 안타까워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히브리서 9장 27절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주님께로부터 어떤 판결을 받을까요? 굉장히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이지요. 이 때 주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굉장히 유익하겠지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인데 심판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어떤 주인이 종들에게 재물을 맡겼습니다. ‘여보게들 내가 먼 나라를 상당한 기간동안 여행을 해야 할 터인데 그동안 내 재산을 좀 관리해주게.’ 그리고 한사람에겐 5달란트 한사람에겐 2달란트 한사람에겐 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1달란트는 금화의 명칭인데 6천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럼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치면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니까 3억입니다. 상당히 많은 액수이지요. 자네는 15억을 맡아주게. 아니 이렇게 많이 맡겨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자네는 6억을 맡아주게.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각기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가서 그 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3억을 맡아주게. 사실 3억도 작은 돈이 아니죠. 작은 돈이 아닌데 아니 저 사람은 15억 주고 저 사람은 6억 주고 나는 겨우 3억이야 하는 섭한 마음이 들었나봐요. 가만 생각해 보니까 이 돈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결국 주인이 다 가질 것이고 손해 보면 나중에 나에게 배상하라 할 터이니 내가 짱구냐 그러고는 그 돈을 땅에 묻어 둔 거예요.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열심히 일한 사람 그 돈을 땅에 묻어둔 사람 돈을 땅에 묻어둔 사람이 훨씬 더 재밌게 살아요. 일 할 것도 없이 자유롭잖아요. 여기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사람. 빈둥빈둥 노는 사람. 훨씬 더 노는 사람이 한국적인 표현으로 팔자가 좋아보입니다. 주인이 돌아오자 사정이 달라졌어요. ‘열심히 일한 사람은 주인님이여 여기 갑절을 남겼나이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을 듣습니다. 상급을 누립니다. 1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여기 1달란트 있습니다’. 했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꾸중을 듣고 붸겨 났습니다. 결국은 누가 성공적인 인생을 산 것인가. 사는 동안 재미나게 즐기면서 산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인가 중간을 보고는 모릅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딱 서봐야 그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지 혹은 실패의 삶을 살았는지 판결이 날 것입니다.
이제 이 예화를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칭찬들은 사람이 있고 꾸중들은 사람이 있는데 칭찬들은 사람은 왜 칭찬 들었습니까? 얼핏보면 갑절을 남겼기 때문에 업적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칭찬을 자세히 보면 업적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넌 다섯 남겼구나, 넌 둘 남겼구나’ 그런 말은 없지요. 그리고 업적에 따라서 평가한다고 그러면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한테 더 큰 칭찬을 해줘야 할텐데 다섯 남긴 사람이나 둘 남긴 사람이나 똑같이 칭찬해 주십니다. 그리고 칭찬의 내용은 착하고 충성되다는 것입니다. 업적이 아니고 과정을 중히 여긴 것이고 중심을 중히 여긴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같이 착하고 충성된 종에 의해서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그림자인 교회도 바로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 의해 유지되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이지요. 이번 주는 주보가 좀 두툼합니다. 안에 뭐가 많이 들었지요. 우리 권사님들이 토요일마다 모이셔가지고 이 주보 내용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집어넣고요. 그냥 인쇄소에서 올 때 펼쳐져서 오면 다 접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개인 주보함에 하나하나 꽂아주세요. 그래서 우리가 편하게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밖에 춥지만 주차부에서는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배 끝나고 나갈 땐 따끈한 차가 여러분을 위해서 대기하고 있지요. 교회 들어올 때 영접하시는 분들, 안내하시는 분들, 또 주방에서 봉사하시는 분들, 이렇게 아름답게 성전을 꾸미시는 분들, 청소하시는 분들 또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어린 심령들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교사들 또 성가대원들 헌금 수납하시고 하루종일 계수하시고 곳곳에 수많은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있기에 이렇게 원만하게 예배가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같이 수고하며 예수 믿는 사람이 있고 별 다른 수고 없이 편하게 와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같이 천국은 갈거예요. 그러나 상급은 다를 겁니다. 어떻게 신앙생활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믿는 것이 지혜롭게 믿는 것인가 깊이 생각하십시오.
이제 나름대로 남보다 봉사를 많이 하고 내가 많이 맡았다 생각되는 사람은 두 가지 조심할게 있습니다. 하나는 일하지 않는 사람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5달란트 맡은 사람, 2달란트 맡은 사람이 한 달란트 맡았던 사람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험 들겠지요. 아니 다 같은 종인데 누구는 이렇게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누구는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놀고만 있느냐. 그 모습을 보고 일했더라면 별로 일할 맛이 안 나겠지요? 그러나 종은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귀중한 것을 맡겨 주셨는데 고맙지. 이 고마우신 주인께 내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 그 마음으로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은 바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 모든 봉사자들은 주님을 바라보며 일해야 됩니다. 사람의 인정 칭찬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보고 일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보고 일한다면 주인만 보고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새해에도 귀한 직분 주님께서 주시거든 사람 시선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충성을 다하시는 일꾼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는 남과 비교해서 평가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다섯 받은 사람이 그저 적당하게 해도 셋이 남았습니다. 근데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 남겼습니다. 그래도 내가 더 많이 남겼네 그리 생각하고 셋만 남기고 그냥 이만하면 됐지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위험이 있는 거죠. 그러나 둘 받은 사람이 둘 남겼다면 다섯 받은 사람은 얼마를 남겨야겠습니까? 다섯을 남겨야 되는거예요.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각자의 최선입니다. 얼마만큼 남겼느냐 그것은 주님의 관심이 아닙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얼마나 충성됐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봉사라는 게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다 봉사자이지요 사실 모든 직장은 바로 봉사의 일터인 거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보수를 받겠습니다만 그러나 보수가 문제가 아니고 모든 일은 섬김인데 여러분의 최선을 다했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악가 조수미씨 아시죠. 얼마나 목소리가 아름다운지 몰라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성악가인데 잠시 후에 인천 주안교회에서 불우한 이웃을 위해서 콘서트를 할겁니다. 몇 년 전에 대담 프로에서 조수미씨가 나와서 인터뷰하는 것을 잠시 들었는데 사회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당신의 목소리는 참 아름답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당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 목소리의 결점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보니까 ‘자기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결점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해요 그걸 듣고 제가 와 이 여자 대개 교만하네 음악 하는 사람들은 교만하더니만 이 여자 교만하네 이렇게 교만해도 되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잠시 후에 설명하는데 들어보니까 그게 아니더구만요. ‘전 제 노래에 결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훈련을 해서라도 반드시 그 결점을 극복하고야 맙니다. 그 결점이 극복되기 전에는 절대로 무대에 서지 않습니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서 그 결점을 극복하고서야 무대에 섭니다.’ 그것을 듣고 과연 세계적인 성악가가 다르긴 다르구나 저 같은 노력이 있었기에 계속 저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조수미씨가 연습 따로 하지 않아도 우리보다 노래 잘하지요. 그렇다고 그냥 있으면 주님께로부터 칭찬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의 최선인 것입니다. 주님은 충성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공하라는 거 아니에요. 성공했기 때문에 상 받은 거 아닙니다. 충성했기 때문에 상 받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 꾸중들은 사람은 왜 꾸중들었는가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들었는가 꾸중의 내용은 그게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렇게 꾸중합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보니까 금방 표가 나는데 악한 것 같진 않은데요. 아니 본전 떼어먹는 못된 사람도 얼마나 많이 있는데 본전은 가져왔잖아요. 그런데 왜 악하다고 이렇게 꾸중하는 것입니까. 이 종의 마음 중심이 문제입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스켈레로스라는 이 단어의 뜻은 잔혹하다 잔인하다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독한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장사하다가 실패해서 손해보게되면 악착같이 그것을 배상시킬 그런 사람입니다. 만약 이익을 남기게 되면 당신이 다 가지겠지요. 그런데 나는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주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없습니다. 주인의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지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스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바에 대해서 하나님 공평하십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없다면 악한 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불공평함 속에 공평입니다. 여러분 공평한 게 뭡니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아주 추운 날 마음씨 좋은 분이 어린 아이들에게 장갑을 나누어준다고 합시다. 여기 손이 큰 아이가 왔습니다. ‘야, 넌 이 장갑을 가져라’ 큼지막한 장갑을 줍니다. 이제 손이 작은 작은 아이가 왔습니다. ‘넌 이것을 가지라’고 작은 장갑을 줍니다. ‘아니 아저씨 얘는 큰 장갑을 주고 저는 작은 장갑을 줘요? 나도 똑같이 큰 장갑 줘요’ 그래서 두 사람에게 똑같이 큰 장갑 주는 게 공평입니까? 아니면 손 큰 아이에게 큰 장갑 주고 손이 작은 아이에게 작은 장갑 주는 게 공평입니까? 공평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능력대로 줬다고 했잖아요. 다섯을 능히 감당할 자에게는 다섯을 맡기고 한 달란트 밖에 감당 못할 자에게는 한 달란트 준겁니다 그건 공평한 겁니다. 왜 내게는 이 정도의 재산밖에 안 줍니까? 왜 내겐 이 정도의 건강 밖에 안 주는 겁니까? 왜 내겐 이 정도의 지위 밖엔 안 주는 겁니까? 불공평합니다 하나님 그런 마음 품으면 주님을 위해서 일 할 마음이 없지요. 사실 대부분의 우리 인생은 내가 지금 처해 있는 모든 환경은 물론 나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성격이 어떠하냐 건강 상태가 어떠하냐 집안이 어떠하냐 국적이 어떤 국적이냐 대부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졌습니다. 주어진 나의 나됨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먼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야 이 고마우신 주님을 위해서 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 하나님 불공평하십니다. 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 마음 품으면 그 마음 가지고는 일 할 수 없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뇌성마비 장애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내가 비록 남보다 건강 갖지 못했지만 나는 남이 갖지 않은 것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바에 대해서 하나님 공평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이 마음을 품고 일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게으르다 했습니다. 왜 게으르다 했습니까? 실패했기 때문에 게으르다는 게 아닙니다.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장사하면 망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아예 장사는 시작도 하지 않고 묻어둔 것입니다. 묻어두었기 때문에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내 시간 내 것입니까? 내 재능 내 것입니까? 내 물질 내 것입니까? 다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것 내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 내게는 없습니다. 마음대로 묻어둘 권리가 내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해야 됩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많이 받은 사람보다는 적게 받은 사람이 묻어둘 확률이 많습니다.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니까 교회 직분 받은 사람보다는 아무 직분 받지 않은 사람이 묻어둘 확률이 더 많은 것이지요. 아무 직분도 맡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십시오. 초신자입니까? 조심하십시오. 직분 맡지 않은 사람도 해야할 일이 있는 거예요. 우리 모두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필요 없는 지체 하나도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 땅에 남겨 두실리가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지요 왜 땅에 살게 하시겠습니까?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을 이 교회에 보내셨겠습니까? 이 교회 속에서 여러분이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그 일을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새 가족들은 이 교회에는 사랑이 없냐 인사도 안 하고 날 몰라준다 생각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할게 아니고 생각을 좀 바꿔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먼저 인사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훈훈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새 가족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구만 이 교회에는, 그렇게만 생각할게 아니고 새 가족 내가 돌보자 아니 나는 믿음의 어린아인데 어떻게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돌봅니까? 아니요. 어린아이를 제일 잘 보는 사람은 어린아이입니다. 놀러 갈 때 어른에 애 하나 딸려 가면 애 하나에 어른하나 따라가서 애하고 같이 놀아줘야 돼요. 그런데 이쪽 집에도 애 하나 있고 저 쪽 집에도 애 하나 있고 그러면 간단합니다. 애들끼리 두면 재미나게 잘 놀아요. 새 가족의 가장 좋은 친구는 또 다른 새 가족이지요 뭐 복잡하게 잘 모르니까 취미클럽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축구 선교단 만들었습니다만 아직 나머지는 못 만들었어요. 골프 선교단 만들어도 되고 테니스 선교단 만들어도 되고 볼링, 당구 할거 많이 있지요. 꽃꽂이 만들어도 되겠고 여러 가지 취미클럽을 만드십시오. 처음 예수 믿은 사람이 교회는 다니지만 친구는 전부 예수 안 믿는 친구들이에요. 그들과 어울리다 보면 신앙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클럽 안에 예수 믿는 사람끼리 어울리다 보면 믿음도 자라게 되고 그리고 자기 믿음도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그 취미 클럽에 그 친구를 데리고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전도도 가능해지는 것이죠.
그리고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을, 묻어둘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패는 또 다른 성공의 기회입니다. 사실 사람이 성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만 성공하게 되면 그 업적에 마음을 빼앗기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많이 배우는 것은 실패를 통해서 많이 배우는 것이지요.
한 번은 제가 사무실에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무개 집사입니다,. 한참 생각하니까 알 것 같아요. 꽤 오래 전에 제가 부목사로 있을 때 예배를 드려줬던 그런 집사님인데 이 분은 큰 의류회사에 원단을 제공하는 그런 업자입니다. 꽤 큰 사업체를 유지했었는데 제가 몇 번 가서 예배를 드려주고 그랬는데 어느 날 소식을 들으니까 부도가 났다는 것입니다. 수금 받아야 할 업체가 도산되니까 이 업체도 부도가 나가지고 교도소에 갔답니다. 경제사범이 되가지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하겠다는 겁니다. 주위에서 ‘목사님이 좀 말려주세요. 저 사람 또 사업하려고 하는데 또 망합니다. 말려주세요.’ 절 찾아와서 ‘개업예배 좀 드려주세요’ 그래가지고 ‘아니 집사님 또 하실 겁니까?’ ‘예 또 해야지요. 제가 교도소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하는 거 쭉 보니까 일리가 있어요. 실패 이유를 깨달았으니 이제 이것만하지 않으면 이번엔 틀림없이 성공합니다. 목사님 예배 좀 들여주세요. 그래가지고 예배를 드리는데 전 세상에 그렇게 작은 사무실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쪼그마한 사무실에 직원은 사장 한 명 전화 받는 여직원 한 명 두 명입니다. 두 명 앉혀 놓고는 개업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를 드려 달라는 거예요. 예배를 드려달라는데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몇 번 예배를 드려줬지요. 그리고 직원 두 명 되는 것보고 제가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꽤 많은 세월이 흘렀지요. 그리고 지금 전화가 온 겁니다. 집을 새로 하나 샀는데 꼭 목사님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거예요. 가보니까 논현동에 거기 집 값 비싼데죠. 아주 큰 대저택을 샀어요. 그래서 한 쪽은 살림집으로 쓰고 한 쪽은 개조를 해 가지고 회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사원이 한 이십 여명 되고요. 아주 이방면에서 알아주는 아주 탄탄한 중소기업이 됐습니다. 지금 이렇게 불황인데도 이 회사는 이렇게 날로 날로 매출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감사한데 처음 예배드릴 때 목사님 생각나서 꼭 목사님 모시고 싶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래서 감격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여러분 실패한 적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둘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그 실패를 성공의 디딤돌로 삼고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기를 내시고 하시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달란트를 묻어두는 자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특별히 우리 승리교회에서는.
제 목회의 큰 두 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천국 가서 최상의 상급을 받는 거예요. 목사님 저는 천당만 가면 됩니다. 상급은 안 받아도 됩니다. 그런 분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상급 받는 것하고 천국 가는 것하고 관련이 있어요. 천국이 뭡니까? 천국은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상급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랑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그 믿음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날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주셨다 그 대속의 십자가의 공로로 내가 구원받았다 그거 아닙니까? 그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내가 주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겠습니까? 진정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믿음이라면 주님을 위해서 뭔가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이 칠십이 넘어서면 할 수 있으면 주보라도 접어야지 그 맘이 있는 거예요. 뭔가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제 일년의 끝이 왔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지요. 인생의 끝도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멍청하게 있을 틈이 없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됩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하여 활용할 것입니다. 성공 실패 여부를 떠나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서는 날,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의 칭찬과 환영을 받을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