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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진목사 (와싱톤한인교회)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물론 견고한 기정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세워지는 기초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이 반석 위에 세워질 수 있습니까?
Lawrence J. Crabb 박사가 쓴 "The Marriage Builder(결혼 건축가)"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리스도인으로 멋과 재능과 경제력 또 인품을 갖추고 교회 활동도 활발히 하는 한 중년부부가 Crabb 박사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먼저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위선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리 교회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가장 결혼을 잘한 부부 열 쌍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마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우리의 이름을 포함시킬 겁니다. 함께 성가대원인데다 사람들과 다 사이도 좋고 또 교회 사람들을 집에도 자주 초대하여 대접도 하고 그러니까요. 우리는 정말 한 몫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우리의 관계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잘해나가고 있지만 각자 따로 따로입니다. 나는 결코 남편에게 내 기분을 그대로 얘기 할 수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그럴라 치면 이이는 언제나 화를 내면서 손찌검을 하거나 아니면 며칠이고 말을 안하기가 일쑤지요. 저는 정말이지 우리가 언제 한번 가까운 사이로 지내본 적이 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해왔습니다. 애들도 문제없고 또 집사람은 주일학교 교사를 맡고 있으며 주님은 제 사업을 축복해 주고 계십니다. 이거면 된거죠. 그따위 ....." 이때 Crabb박사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기분, 바램, 꿈 등을 - 참으로 얼마만큼이나 아내와 나누고 있습니까?"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내가 그런걸 한번 해보려고 할 때마다 아내는 별로 관심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뭐 지금은 신경 안쓰고 지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내가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그랬다구요? 당신이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면 저도 들었을 거예요! 당신 생각에 나눈다는 것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강의예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게 하라고 나한테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거라구요. 내가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난 도대체 이해가 안가''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대화라니 정말 끔찍해요."
이 부부의 이야기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가정들, 아니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정들이 아픔과 상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다 괜찮은 것 같은데, 조금 깊이, 조금 자세히, 조금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가정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저는 여덟 번에 걸쳐서 가정의 회복을 위한 성경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금년도 주제를 가정과 연결시켜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I.
먼저 오늘은 금번 연속설교의 서론이면서 동시에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마태복음 7:24 이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명한 Sermon on the Mount,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건축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다른 한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별다른 불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가 오고 바람 불고 홍수가 찾아올 때입니다. 이사벨 같은 태풍이 불어올 때입니다. 이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버틸 수 있습니다. 비바람 속에서도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견딜 도리가 없습니다. 무너지고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의 이 비유 속에서 오늘의 가정들을 봅니다. 집(House)이 아닌 가정(Home)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 비바람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둥번개도 없고, 홍수도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또 가정은 여기 저기에서 홍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장대비와 거센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 이런 어려움이 다가올 때 견고히 설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어떤 가정이 흔들림이 없이 비바람을 뚫고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반석 위에 세워진 가정입니다. 견고한 터전 위에 세워진 가정입니다. 좀 시간이 걸려도, 좀 어리석어 보여도 기초를 충실히 닦고 세운 가정입니다. 쉽게, 별다른 생각 없이 세워진 가정은 비바람을 견딜 수 없습니다. 태풍 앞에서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은 건축의 기본 상식입니다. 기본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월드컵에서 한국대표 축구팀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을 통하여 가슴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기초가 중요합니다. 가정이 세워지는 터전이 중요합니다. 가정이라는 집을 세우는 그 터전, 그 기초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II.
그렇다면 여러분, 반석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기초 위에 세워야 우리의 가정이 흔들림없이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까? 우리 가정이 비바람 속에서도 튼튼히 설 수 있는 그 기초, 그 반석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속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그렇습니다. 반석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면 우리는 반석 위에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가정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진리입니다. 길입니다. 생명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우리의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떤 풍랑, 어떤 비바람 속에서도 우리의 가정을 붙들어 주고, 지켜줍니다. 그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삶은 참으로 반석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설 수 있는 참으로 견고한 기초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가정의 기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은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시작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 가정이 존재하게 된 이면에 어떤 뜻, 어떤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까? 우리는 이 가정의 시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가정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라고. 그런데 가정은 교회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함께 살게 하신 창세기의 이야기는 바로 가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의 확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형제와 자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2) 이같이 가정의 시작을 말씀 속에서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다면 그 가정을 주신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목적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결혼하면 가정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까 얼마동안 고민하다가, 지치면 그냥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아갑니다. 왜 사는지, 가정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외칩니다. 가정을 주신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거친 세상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정 속에서 서로를 붙들어 주고 격려하면서 하나 되어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주신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생들에게 사랑과 격려, 성장과 안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가정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목적을 깨닫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뜻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가슴 아픈 것은 많은 가정들이 사랑과 감사의 터전이 되기보다는 상처와 고통의 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널리 알려진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되는 TV 프로그램 가운데 부부가 나와서 문제를 맞치는 쇼가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나오셨는데 마침 주어진 문제가 "평생 연분" 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누워서 떡먹기라는 생각으로 이 단어를 설명했습니다. "여봐 그거 있지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 그거 말이야" 그때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네 자로 된 것 왜 있잖아?"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평생 웬수?"
평상시 하던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험한 세상 동반자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격려하고, 자라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가정이 원수의 관계로 변해있다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셋째로 가정이 걸어가야 하는 길, 참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과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우리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 할 때가 많습니다. 구태여 그리스도인 된 티를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우리 삶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많습니다. 물론 별다른 차이가 없을 때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를 때도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떼어놓으면 아무런 의미도, 뜻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을 건지는 길, 가정이 나가야 할 길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습니다. 오늘 흔들리는 가정의 질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해결의 길이 열린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많은 경우 그 가정을 모래 위에 세웠기에 조그마한 비바람 앞에서도 가정들이 무너지고 떠내려감을 우리는 봅니다. 가정이 다시 사는 길, 가정의 회복은 바로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반석이 없습니다.
III.
지난 여름 저희 교회 전교우 수양회에 오셔서 말씀을 주셨던 정태기 교수님의 "내면세계의 치유" 라는 책 속에서 읽은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이겠습니다.
어느 날 40대의 한 남자가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김집사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자조적인 말투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돈을 좀 벌었는데 자식농사는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에 다니는 세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 모두 가출을 밥먹듯 하고 본드를 마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가출을 하면 막내아들만 수원시에서 발견될 뿐, 두 아들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되곤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때는 대구 경찰서에서, 어느 때는 목포 경찰서에서 아이들을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궁리 끝에 그는 대학생 두 명을 고용해서 아이들을 감시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어떻게든 집을 빠져나가 버리곤 했습니다. 어느 땐가는 한밤중에 화장실 문을 뜯어내고 가출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이런 아이들 때문에 김집사는 반미치광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김집사의 가정 역시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싸움을 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만큼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쏟아내었으며 육탄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아이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곤 했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들 부부는 매일같이 싸웠고 그나마 싸움을 하지 않는 날은 살벌한 말들로 서로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한쪽이 큰소리로 "야!" 하고 부르면 한쪽이 볼멘 소리로 "왜 그래?" 하고 맞받아 치니 싸움이 안 될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이 지경이고 보면 아이들이 집에 정을 붙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노릇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김집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찾아올 생각을 하셨습니까?" "방송에서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혹시 우리 아이들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나마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여 가슴이 찡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렇게 부부싸움을 하면서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가셨나보죠? 집사까지 되신 걸 보니..." "주일마다 감사헌금은 꼬박꼬박 합니다."
"감사헌금을 하시기 전에 부부 문제부터 해결하셔야죠. 이제부터 매주 금요일 이 시간에 이곳으로 상담하러 나오십시오." 그날부터 김 집사는 어김없이 금요일마다 나를 찾아왔습니다. 김집사와 세 번째 만나던 날, 정태기 교수님께서는 흉측한 환상을 보셨습니다. 다 자란 그의 세 아들 모두 푸른 죄수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습니다. 김 집사의 아이들을 그대로 놔둔다면 틀림없이 저런 모습이 되고 말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더욱 경악할 만한 영상이 뒤를 이었습니다. 김집사의 두 아들이 교수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김 집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김집사는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모진 사람이었지만 자식의 처참한 장래를 예견하는 것에 대해 듣고 나자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어떻게 하느냐며 내게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막으려면 지금 당장 부부싸움을 중지하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 집사의 큰아들이 가출했고 경기도 광주의 한 경찰서에서 아들을 데려가라는 연락이 왔다고 전해왔습니다. "교수님, 가슴이 떨려서 죽겠습니다.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어쩔 줄 모르겠어요." "아이를 데려오시면 절대로 때리지 마세요. 만일 이전처럼 아이를 구타한다면 집사님은 더 이상 저와 상담을 계속 진행할 수 없습니다." 김 집사는 이런 일로 경찰서를 들락거릴 때마다 반쯤 미쳐버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서 경찰서 문을 나서는 대로 아들을 태권도 3단의 실력으로 때려눕히고 구둣발로 짓밟고 주먹질을 해댔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성격이 걱정스러워 나는 여러 번 그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김 집사님, 이번에 아이를 만나면 절대로 욕하거나 때리지 마세요. 꼭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라고 말하세요. 알았지요?"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교수님은 이런 일을 안 당해봐서 제 심정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경찰서에 앉아 있는 애새끼를 보는 순간 패 죽이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이 나와요? 전 닭살 돋아서 못 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집사님을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아이들을 살려낼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아들을 붙잡지 않으면 머지 않아 아이들에게 환상에서 본 일들이 그대로 일어날 거예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애새끼를 보면 나도 모르게 또 눈이 뒤집힐까봐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경찰서에 가면서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라는 말을 계속 연습하면서 가세요. 그러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김 집사는 교수님께서 시킨 대로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라고, 수백 번도 더 연습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부인과 싸우며 갔을 테지만 이 말을 연습하느라 싸우는 일도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경찰서 문을 들어서자 김 집사는 목이 메여왔습니다. 처음으로 ''나 때문에 내 자식이 이런 곳을 드나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서약서를 쓰자 유치장에 있던 큰아이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오다가 아버지 얼굴을 본 아들은 금세 사색이 되어 반사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단옆차기가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머릿속은 이미 도망갈 궁리로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집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그를 따라왔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처음으로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서 자기를 바라보자 아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이는 성큼 뒤로 물러서며 방어자세를 취했습니다. 감정이 거의 폭발할 것 같은 순간에 아버지 입에서 말이 떨어졌습니다.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 아이가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짜장!"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너무나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태도에 잠시 넋이 나가버린 것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중국집에 들어간 부부는 짜장면 두 그릇을 허겁지겁 비워내는 아들을 보면서 또 다시 울컥하고 가슴이 메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부부는 나와 약속한 다섯 가지 행동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가지 행동이란 첫째, 부부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기, 둘째, 부부가 함께 두 번씩 찬송하기, 셋째, 부부가 함께 성경을 교독하기, 넷째, 함께 시장보기, 다섯째, 저녁 설거지는 반드시 남편이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모든 행동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아이들에게 하던 잔소리를 뚝 그치라고도 했습니다.
상태가 너무나 심각한 가정이어서 교수님께서는 극성스럽게 이 부부를 챙겼습니다. 매일 저녁 11시면 하루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고, 심지어 지방출장을 갈 때도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실천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처음에 김집사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교수님, 오늘도 죽지 못해서 쇼를 했습니다."라고 말하던 김 집사가 3주쯤 지나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오늘은 쇼가 아니었어요. 이 소중한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나 감사한지요. 시장바구니를 들고 집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시장 사람들이 다 나와서 구경을 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울고, 아이들 이름을 부르다가도 울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바보처럼 계속 울고 말았습니다." 이런 부모의 변화를 민감한 아이들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고 어느새 다른 어느 곳보다 집이 편안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형제끼리 오손도손 우애를 나누게 된 것은 이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3개월쯤 지나서 김 집사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습니다. "교수님, 이 새끼들(아이들)이 나갈 생각을 안 해요!" 지금쯤이면 한두 놈이 가출했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져야 할 텐데, 한 녀석도 가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김 집사의 보고 내용은 "오늘도 아이들이 가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들은 가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섯 가지 행동을 실천에 옮긴 지 9개월이 될 무렵 김 집사는 평생 잊지 못할 감격스런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던 김 집사의 눈에 아들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습니다. ''녀석들, 불을 끄고 자야지...'' 무심코 문을 열어본 그의 눈에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는 공부하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고, 중3인 큰아들은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것입니다. 김 집사에게는 아이들이 그저 얌전히 집에 있어주는 것만도 신통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김 집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큰아이가 아버지를 보고 멋쩍은 듯 씩 웃었습니다. "아빠, 내가 전에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 김 집사의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들었습니다.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는 말아. 이제 그만 자야지, 몸 상한다." 방문을 닫고 나온 김 집사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박고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이, 어찌 이런 행복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김 집사를 울렸던 큰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미국의 한 명문대에 유학중이라고 합니다.
가정 회복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비바람 속에서도 우리의 가정이 흔들림이 없이 설 수 있는 반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반석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길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 오늘 흔들리는 우리의 가정을 세울 수 있는 반석이 있습니다. ???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물론 견고한 기정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 세워지는 기초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이 반석 위에 세워질 수 있습니까?
Lawrence J. Crabb 박사가 쓴 "The Marriage Builder(결혼 건축가)"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리스도인으로 멋과 재능과 경제력 또 인품을 갖추고 교회 활동도 활발히 하는 한 중년부부가 Crabb 박사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먼저 아내가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슨 위선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리 교회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가장 결혼을 잘한 부부 열 쌍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마 한사람도 빼놓지 않고 우리의 이름을 포함시킬 겁니다. 함께 성가대원인데다 사람들과 다 사이도 좋고 또 교회 사람들을 집에도 자주 초대하여 대접도 하고 그러니까요. 우리는 정말 한 몫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우리의 관계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잘해나가고 있지만 각자 따로 따로입니다. 나는 결코 남편에게 내 기분을 그대로 얘기 할 수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그럴라 치면 이이는 언제나 화를 내면서 손찌검을 하거나 아니면 며칠이고 말을 안하기가 일쑤지요. 저는 정말이지 우리가 언제 한번 가까운 사이로 지내본 적이 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해왔습니다. 애들도 문제없고 또 집사람은 주일학교 교사를 맡고 있으며 주님은 제 사업을 축복해 주고 계십니다. 이거면 된거죠. 그따위 ....." 이때 Crabb박사가 말을 끊고 끼어들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기분, 바램, 꿈 등을 - 참으로 얼마만큼이나 아내와 나누고 있습니까?" 남편이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내가 그런걸 한번 해보려고 할 때마다 아내는 별로 관심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뭐 지금은 신경 안쓰고 지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내가 소리쳤습니다. "당신이 그랬다구요? 당신이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면 저도 들었을 거예요! 당신 생각에 나눈다는 것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강의예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게 하라고 나한테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거라구요. 내가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난 도대체 이해가 안가'' 그런식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대화라니 정말 끔찍해요."
이 부부의 이야기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상은, 많은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가정들, 아니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정들이 아픔과 상처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다 괜찮은 것 같은데, 조금 깊이, 조금 자세히, 조금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린 가정들이 많습니다. 앞으로 저는 여덟 번에 걸쳐서 가정의 회복을 위한 성경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금년도 주제를 가정과 연결시켜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교우 여러분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I.
먼저 오늘은 금번 연속설교의 서론이면서 동시에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마태복음 7:24 이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명한 Sermon on the Mount,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건축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한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고 다른 한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평소에는 두 사람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별다른 불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비가 오고 바람 불고 홍수가 찾아올 때입니다. 이사벨 같은 태풍이 불어올 때입니다. 이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버틸 수 있습니다. 비바람 속에서도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견딜 도리가 없습니다. 무너지고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의 이 비유 속에서 오늘의 가정들을 봅니다. 집(House)이 아닌 가정(Home)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정 속에 비바람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둥번개도 없고, 홍수도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또 가정은 여기 저기에서 홍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장대비와 거센 바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난, 이런 어려움이 다가올 때 견고히 설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어떤 가정이 흔들림이 없이 비바람을 뚫고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반석 위에 세워진 가정입니다. 견고한 터전 위에 세워진 가정입니다. 좀 시간이 걸려도, 좀 어리석어 보여도 기초를 충실히 닦고 세운 가정입니다. 쉽게, 별다른 생각 없이 세워진 가정은 비바람을 견딜 수 없습니다. 태풍 앞에서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초가 중요하다는 것은 건축의 기본 상식입니다. 기본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월드컵에서 한국대표 축구팀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을 통하여 가슴 절절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기초가 중요합니다. 가정이 세워지는 터전이 중요합니다. 가정이라는 집을 세우는 그 터전, 그 기초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II.
그렇다면 여러분, 반석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기초 위에 세워야 우리의 가정이 흔들림없이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습니까? 우리 가정이 비바람 속에서도 튼튼히 설 수 있는 그 기초, 그 반석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속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그렇습니다. 반석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면 우리는 반석 위에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가정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진리입니다. 길입니다. 생명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를, 우리의 가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어떤 풍랑, 어떤 비바람 속에서도 우리의 가정을 붙들어 주고, 지켜줍니다. 그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삶은 참으로 반석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설 수 있는 참으로 견고한 기초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먼저 우리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가정의 기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은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시작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 가정이 존재하게 된 이면에 어떤 뜻, 어떤 목적이 담겨져 있습니까? 우리는 이 가정의 시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가정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라고. 많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라고. 그런데 가정은 교회가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함께 살게 하신 창세기의 이야기는 바로 가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의 확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형제와 자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2) 이같이 가정의 시작을 말씀 속에서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다면 그 가정을 주신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목적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생각 없이 인생을 살아갑니다. 결혼하면 가정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고,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까 얼마동안 고민하다가, 지치면 그냥 세월 흘러가는 대로 살아갑니다. 왜 사는지, 가정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갑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외칩니다. 가정을 주신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거친 세상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정 속에서 서로를 붙들어 주고 격려하면서 하나 되어서 행복과 기쁨을 누리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주신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인생들에게 사랑과 격려, 성장과 안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가 가정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목적을 깨닫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뜻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가슴 아픈 것은 많은 가정들이 사랑과 감사의 터전이 되기보다는 상처와 고통의 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습니까?
널리 알려진 유머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방영되는 TV 프로그램 가운데 부부가 나와서 문제를 맞치는 쇼가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나오셨는데 마침 주어진 문제가 "평생 연분" 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누워서 떡먹기라는 생각으로 이 단어를 설명했습니다. "여봐 그거 있지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 그거 말이야" 그때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네 자로 된 것 왜 있잖아?"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평생 웬수?"
평상시 하던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험한 세상 동반자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격려하고, 자라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가정이 원수의 관계로 변해있다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셋째로 가정이 걸어가야 하는 길, 참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습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과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하는 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우리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 할 때가 많습니다. 구태여 그리스도인 된 티를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우리 삶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때도 많습니다. 물론 별다른 차이가 없을 때도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를 때도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떼어놓으면 아무런 의미도, 뜻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정을 건지는 길, 가정이 나가야 할 길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습니다. 오늘 흔들리는 가정의 질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해결의 길이 열린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많은 경우 그 가정을 모래 위에 세웠기에 조그마한 비바람 앞에서도 가정들이 무너지고 떠내려감을 우리는 봅니다. 가정이 다시 사는 길, 가정의 회복은 바로 주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반석이 없습니다.
III.
지난 여름 저희 교회 전교우 수양회에 오셔서 말씀을 주셨던 정태기 교수님의 "내면세계의 치유" 라는 책 속에서 읽은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제 설교를 줄이겠습니다.
어느 날 40대의 한 남자가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왔습니다. 자신을 김집사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자조적인 말투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돈을 좀 벌었는데 자식농사는 완전히 망쳐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 4학년에 다니는 세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 아들 모두 가출을 밥먹듯 하고 본드를 마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가출을 하면 막내아들만 수원시에서 발견될 뿐, 두 아들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되곤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때는 대구 경찰서에서, 어느 때는 목포 경찰서에서 아이들을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궁리 끝에 그는 대학생 두 명을 고용해서 아이들을 감시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은 어떻게든 집을 빠져나가 버리곤 했습니다. 어느 땐가는 한밤중에 화장실 문을 뜯어내고 가출을 하기도 했다고 하니 문제가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이런 아이들 때문에 김집사는 반미치광이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김집사의 가정 역시 문제 투성이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싸움을 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을 만큼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쏟아내었으며 육탄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아이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벌벌 떨곤 했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들 부부는 매일같이 싸웠고 그나마 싸움을 하지 않는 날은 살벌한 말들로 서로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한쪽이 큰소리로 "야!" 하고 부르면 한쪽이 볼멘 소리로 "왜 그래?" 하고 맞받아 치니 싸움이 안 될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이 지경이고 보면 아이들이 집에 정을 붙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노릇입니다.
교수님께서는 김집사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찾아올 생각을 하셨습니까?" "방송에서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혹시 우리 아이들 문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나마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여 가슴이 찡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렇게 부부싸움을 하면서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가셨나보죠? 집사까지 되신 걸 보니..." "주일마다 감사헌금은 꼬박꼬박 합니다."
"감사헌금을 하시기 전에 부부 문제부터 해결하셔야죠. 이제부터 매주 금요일 이 시간에 이곳으로 상담하러 나오십시오." 그날부터 김 집사는 어김없이 금요일마다 나를 찾아왔습니다. 김집사와 세 번째 만나던 날, 정태기 교수님께서는 흉측한 환상을 보셨습니다. 다 자란 그의 세 아들 모두 푸른 죄수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했습니다. 김 집사의 아이들을 그대로 놔둔다면 틀림없이 저런 모습이 되고 말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 더욱 경악할 만한 영상이 뒤를 이었습니다. 김집사의 두 아들이 교수대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김 집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김집사는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모진 사람이었지만 자식의 처참한 장래를 예견하는 것에 대해 듣고 나자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어떻게 하느냐며 내게 매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막으려면 지금 당장 부부싸움을 중지하고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 집사의 큰아들이 가출했고 경기도 광주의 한 경찰서에서 아들을 데려가라는 연락이 왔다고 전해왔습니다. "교수님, 가슴이 떨려서 죽겠습니다.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나서 가슴이 벌렁거려 어쩔 줄 모르겠어요." "아이를 데려오시면 절대로 때리지 마세요. 만일 이전처럼 아이를 구타한다면 집사님은 더 이상 저와 상담을 계속 진행할 수 없습니다." 김 집사는 이런 일로 경찰서를 들락거릴 때마다 반쯤 미쳐버리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어서 경찰서 문을 나서는 대로 아들을 태권도 3단의 실력으로 때려눕히고 구둣발로 짓밟고 주먹질을 해댔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성격이 걱정스러워 나는 여러 번 그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김 집사님, 이번에 아이를 만나면 절대로 욕하거나 때리지 마세요. 꼭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라고 말하세요. 알았지요?" "꼭 그렇게 말해야 합니까? 교수님은 이런 일을 안 당해봐서 제 심정을 모르시는 것 같은데 경찰서에 앉아 있는 애새끼를 보는 순간 패 죽이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이 나와요? 전 닭살 돋아서 못 합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집사님을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아이들을 살려낼 기회가 없습니다. 지금 아들을 붙잡지 않으면 머지 않아 아이들에게 환상에서 본 일들이 그대로 일어날 거예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애새끼를 보면 나도 모르게 또 눈이 뒤집힐까봐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경찰서에 가면서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라는 말을 계속 연습하면서 가세요. 그러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김 집사는 교수님께서 시킨 대로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라고, 수백 번도 더 연습하면서 갔다고 합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부인과 싸우며 갔을 테지만 이 말을 연습하느라 싸우는 일도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경찰서 문을 들어서자 김 집사는 목이 메여왔습니다. 처음으로 ''나 때문에 내 자식이 이런 곳을 드나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서약서를 쓰자 유치장에 있던 큰아이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오다가 아버지 얼굴을 본 아들은 금세 사색이 되어 반사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단옆차기가 언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머릿속은 이미 도망갈 궁리로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집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그를 따라왔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처음으로 측은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서 자기를 바라보자 아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이는 성큼 뒤로 물러서며 방어자세를 취했습니다. 감정이 거의 폭발할 것 같은 순간에 아버지 입에서 말이 떨어졌습니다. "너 배고프지, 뭐 먹을래?" 아이가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짜장!"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너무나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태도에 잠시 넋이 나가버린 것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중국집에 들어간 부부는 짜장면 두 그릇을 허겁지겁 비워내는 아들을 보면서 또 다시 울컥하고 가슴이 메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부부는 나와 약속한 다섯 가지 행동을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가지 행동이란 첫째, 부부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기, 둘째, 부부가 함께 두 번씩 찬송하기, 셋째, 부부가 함께 성경을 교독하기, 넷째, 함께 시장보기, 다섯째, 저녁 설거지는 반드시 남편이 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모든 행동을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아이들에게 하던 잔소리를 뚝 그치라고도 했습니다.
상태가 너무나 심각한 가정이어서 교수님께서는 극성스럽게 이 부부를 챙겼습니다. 매일 저녁 11시면 하루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고, 심지어 지방출장을 갈 때도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실천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처음에 김집사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교수님, 오늘도 죽지 못해서 쇼를 했습니다."라고 말하던 김 집사가 3주쯤 지나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오늘은 쇼가 아니었어요. 이 소중한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나 감사한지요. 시장바구니를 들고 집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시장 사람들이 다 나와서 구경을 해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울고, 아이들 이름을 부르다가도 울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바보처럼 계속 울고 말았습니다." 이런 부모의 변화를 민감한 아이들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전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졌고 어느새 다른 어느 곳보다 집이 편안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형제끼리 오손도손 우애를 나누게 된 것은 이전에 맛보지 못한 새로운 기쁨이었습니다. 3개월쯤 지나서 김 집사가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습니다. "교수님, 이 새끼들(아이들)이 나갈 생각을 안 해요!" 지금쯤이면 한두 놈이 가출했다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져야 할 텐데, 한 녀석도 가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며칠이 지나도록 김 집사의 보고 내용은 "오늘도 아이들이 가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들은 가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섯 가지 행동을 실천에 옮긴 지 9개월이 될 무렵 김 집사는 평생 잊지 못할 감격스런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오던 김 집사의 눈에 아들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습니다. ''녀석들, 불을 끄고 자야지...'' 무심코 문을 열어본 그의 눈에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는 공부하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고, 중3인 큰아들은 그때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온 것입니다. 김 집사에게는 아이들이 그저 얌전히 집에 있어주는 것만도 신통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새벽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김 집사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큰아이가 아버지를 보고 멋쩍은 듯 씩 웃었습니다. "아빠, 내가 전에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 김 집사의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들었습니다.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는 말아. 이제 그만 자야지, 몸 상한다." 방문을 닫고 나온 김 집사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박고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어떻게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이, 어찌 이런 행복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날 밤 김 집사를 울렸던 큰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미국의 한 명문대에 유학중이라고 합니다.
가정 회복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비바람 속에서도 우리의 가정이 흔들림이 없이 설 수 있는 반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반석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 길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 오늘 흔들리는 우리의 가정을 세울 수 있는 반석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