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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7-11절
< 돈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
가수 마돈나(Madonna)는 돈도 많고 남자 편력으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남자를 바꾸어 살면서도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묻자 자신은 그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돈과 성공이 행복을 주지 않음을 잘 말해줍니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미국 18세 이상 인구의 9.5%인 1880만 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취학 전 아동의 4%인 100만 명 이상이 유아 우울증을 앓고 있고, 그 증가비율이 매년 23%씩 늘어나면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의료시장이 취학 전 아동을 위한 항 우울제 시장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그렇게 된 것도 역시 물질이 행복을 주지 않음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는 부자가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행복도 커집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시하고, 우리를 지켜보며, 삶의 전 과정에서 우리를 돕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환경에 따라 쉽게 마음이 높아지거나 낮아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자신감을 주고, 삶의 위기를 잘 극복하게 만듭니다.
물론 믿는 사람도 디프레스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경제적 문제나 질병 등의 외적인 문제가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 행복을 빼앗는 3가지 요소 >
어떻게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 설교의 일부분인데, 이 말씀을 통해 행복을 빼앗는 대표적인 것 3가지를 살펴보면서 역설적으로 행복의 3대 비결을 깨닫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로부터 행복을 빼앗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1. 환경 중심적인 마음(circumstance-centered mind)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주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환경에 행복의 근거를 두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항상 힘든 문제를 만납니다. 그때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고 문제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환경을 더 믿습니다. 그처럼 환경을 크게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항상 원망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은혜로 그들을 출애굽 시켰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물과 음식이 없다고 금방 불평하며 그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하루살이 믿음을 가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2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염려했던 의식주 문제를 40년 동안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했던 일들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염려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바라보고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환경보다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문제와 고난은 하나님께서 더 나은 축복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수영을 1년 4개월째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 물이 가끔 끊겨서 수영을 다녔다가 나중에는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교회에 앉아있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수영할 때 어깨에 담이 걸린 것처럼 통증이 생깁니다. 그때마다 수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언뜻 들지만 고통 중에도 수영을 계속하면 며칠 후에 통증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물과 상당히 친해졌습니다.
고통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계속 가면 그 수고가 먼저 있는 고통을 밀어냅니다. 그처럼 고통을 밀어내려면 계속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와 환경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문제는 지속되지 않고 반드시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끝없이 오래 지속됩니다.
환경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환경은 오직 위협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으면 얼마 후에 고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 남을 것이고, 그때 우리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자기중심적인 마음(self-centered mind)
본문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은 이 구절에서 두 번이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 거하고 요구하며 살면 있는 행복도 사라지고, 사랑 안에 거하고 베풀며 살면 없는 행복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행복을 막는 제일 요소는 바로 요구하는 심령(demanding spirit)입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축복을 받는 것만 좋아하고 축복을 나누고 사명을 행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요구하는 심령은 하나님을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는 채무자처럼 생각하고,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언제 무너질까 아슬아슬합니다.
어떤 집회에서는 이렇게 선동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차와 좋은 집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낫고, 돈도 많이 벌게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멘!”을 합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천상의 심부름꾼 소년처럼 여기는 모습입니다.
미국의 한 TV 복음전도자는 청중들에게 집에 있는 냉장고에 그들이 원하는 것의 그림을 붙이게 하고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계속 바라보고 고백하면 정말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장고에 캐딜락, 집,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붙이게 했고, 심지어는 잘 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를 붙이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기쁘게 보시겠습니까? 아마 제일 싫어하실 것입니다. 기복주의는 신앙의 제일 적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공중으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소리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을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뤄줘야 할 범위까지 지정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요구하는 심령에는 찾아오지 않고 순종하는 심령에 찾아옵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의 사단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채무자로 몰면서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해달라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특히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바라보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물질적인 축복과 연결시키면 ‘요구하는 심령’만 커지게 되고, 그런 심령을 가지면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항상 문제와 고통은 있기 마련이고, 기복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하면 문제와 고통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구하는 심령은 자꾸 남과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돈을 버는 것 같은데 자신은 힘들면 그것이 상처가 됩니다. 어떤 부부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상처가 됩니다. 또한 어떤 교회는 잘 크는 것 같은데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상처가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있는 사람, 즐겁게 사는 사람에 대해 분노를 느끼다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에게는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 축복하고 싶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요구하는 심령에서 사랑하는 심령으로 극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심령은 고난 중에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뚜렷하게 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번성할 때보다 고난 중에 더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님도 사람과 함께 고통을 체험하시기 위해서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의 고통을 가장 극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는 생각은 절대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는 어느 때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십니다. 교회도 부흥할 때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심령을 버리고 사랑하는 심령을 가지면 사단은 결코 우리의 행복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새 사정상 교회를 정하지 못하신 분들 중에 저희 요삼일육선교회로 십일조를 내는 분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저희 선교회로 십일조를 보내오면서 앞으로 계속 십일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자신의 소중한 십일조가 교회 건축보다는 선교사님들과 우리의 문서선교 사역을 위해 보다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낮에는 자기 일을 하고 밤에는 식당 일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밤에 하는 일은 선교사님을 보다 많이 돕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선교와 구제에 힘쓰고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사단은 그런 사람의 행복을 결코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3. 과업 중심적인 마음(work-centered mind)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십자가의 낌새를 눈치 채고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있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 설교를 하시면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하게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행복을 막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놀이의 부족(A lack of play)’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살기 때문에 놀 시간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산책할 시간도 없고, 수영할 시간도 없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없고, 웃을 시간도 없고, 장난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처럼 무엇인가 항상 일을 해야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중세의 위대한 수도사 겸 신학자였습니다. 언뜻 보면 그런 분에게 노는 얘기를 꺼내면 당장 벼락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십니다. 하나님은 놀려고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노는 일도 소중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놀이가 넘치는 그분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셨다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은 너무 심각하게 삽니다. 그래서 농담을 전혀 할 수 없고, 그런 분들 옆에 가면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마치 큰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곁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대개 보면 다 좋은 분들입니다. 속으로는 마음도 따뜻합니다. 그러나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가까이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면 무엇인가 고칠 부분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성경적인 이해와 신앙적인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관계는 신앙생활의 핵심 요소입니다. 인격 관계에서 승리해야 신앙생활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심각하고 너무 바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바쁜 것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바쁘지 않는 것을 게으르게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항상 팽팽한 상태로는 살 수 없습니다. 활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 줄을 풀어놓아야 활의 탄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긴장을 풀고 재미있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대개 보면 유머를 잘하는 사람이 충성심도 있고,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난 중에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그처럼 남을 즐겁게 해주는 유머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남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입니다. 왜냐하면 유머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이 오해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유쾌한 장난은 인간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쾌한 장난을 잘해야 합니다. 부부가 가장 행복해지고 그 관계가 견고해지는 때는 유쾌한 장난을 주고받는 때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핸드폰으로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워서 아내에게 장난 문자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 유쾌한 장난은 아내에게 진주목걸이를 선물하는 것보다 더 부부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작은 장난의 알갱이들이 모여서 진짜 영적인 진주목걸이가 만들어집니다.
자녀들도 언제 가장 행복과 안정감을 느낍니까? 엄마 아빠가 자신들과 함께 장난쳐줄 때입니다. 그처럼 놀이와 유머와 장난은 행복의 필수요소입니다. 우리는 너무 심각하거나 바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바쁠 때일수록 과감히 일에서 벗어나, 가끔 여행을 통해 가족들이 함께 신기한 모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경탄하는 서프라이즈(surprise!)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연에서 놀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함께 놀아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에스라 선지자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을 때,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8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패 속에서 통곡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기뻐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넉넉한 웃음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해야 웃겠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행복해서 웃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웃다보면 행복해집니다. 웃으면 복을 받습니다. 웃으면 장수합니다. 요새 웃음 요법 원리에 의하면 웃으면 암도 낫는다고 합니다.
최고의 보약은 웃음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주고, 사람과 하나님을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도 웃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웃으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웃으면 창조력도 생깁니다. 환경에 반응하며 살면 웃을 일이 별로 없지만 환경을 극복하고 창조적으로 살면 웃음이 넘치게 됩니다. 아무리 큰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아름답게 끊임없이 창조할 때 사람은 진짜 아름답게 됩니다.
< 진정한 행복을 찾으십시오 >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며 살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창조하며 살라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행복은 많은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모습대로 자기 일을 찾아 창조적으로 살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욕심을 부릴 때 대개 ‘깊이에 대한 욕심’보다는 ‘넓이에 대한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넓은 삶’보다는 ‘깊은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은 다 갖고 싶어 하지만 부모들은 다 사주지 않습니다. 돈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다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과 물질과 인생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좋게 보이는 것을 다 하겠다고 문어발 인생으로 사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왜 우리나라에 IMF가 생겼습니까? 당시 재벌들이 차입을 통해 문어발 경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좋게 보이는 것을 다 하려고 하니까 하나도 전문화 되지 못하고 모두가 부실한 기업이 된 것입니다. 왜 요새 제 2의 IMF 위기가 생기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차입을 통해 문어발 부동산 투자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 일만 잘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남을 쳐다보며 다 잘하려고 하면 부실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특성대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수평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년 수십만 명이 똑같은 시험지를 놓고 시험을 쳐서 점수를 잘 맞는 학생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내가 잘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공헌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공부도 타고 나야 합니다. 어떤 학생은 책상에 앉았다 하면 12시간 동안 먹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공부만 합니다. 너무 그러니까 부모님이 걱정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1시간도 책상에 앉아있지 못하고 한눈을 파는 아이에게 공부해서 박사 되라고 하면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아이를 붙들고 부모들이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면서 공부시키니까 진짜 행복이 죽어버립니다.
인생에서 공부 말고도 행복과 성공의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행복은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에 있습니다. 과정에서도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수십만 명이 매달려 경쟁하는 레드 오션(red ocean)에서 허우적거리게 하지 말고 자기만의 불루 오션(blue ocean)을 즐기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원리이고, 중요한 인생 행복의 요소입니다.
레드 오션에서 남을 죽이고 이기는 것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불루 오션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고 그것이 진짜 행복을 줍니다. 남을 누르고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남과 함께 이기면서 행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함께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말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진 사람의 고통만큼 그림자가 남는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기고 얻는 통쾌함만큼 진 사람에게는 쓰라림의 그림자가 남는다는 말입니다. 진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승리이고, 최대의 승리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가짜 행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처럼 살기가 힘들 때는 더욱 진짜 행복이 필요합니다. 행복은 고난을 이기는 최상의 힘입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다락방에서 절망 속에 숨어살면서도 매일 빠짐없이 가족들에게 “나는 행복해요”라고 말하면서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행복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주님은 3가지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약속 안에 거하고, 둘째, 사랑 안에 거하고, 셋째, 기쁨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환경도, 그리고 무서운 사단도 우리로부터 결코 행복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함으로 행복하게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 돈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
가수 마돈나(Madonna)는 돈도 많고 남자 편력으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남자를 바꾸어 살면서도 그녀는 그 사실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묻자 자신은 그때까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돈과 성공이 행복을 주지 않음을 잘 말해줍니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미국 18세 이상 인구의 9.5%인 1880만 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취학 전 아동의 4%인 100만 명 이상이 유아 우울증을 앓고 있고, 그 증가비율이 매년 23%씩 늘어나면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의료시장이 취학 전 아동을 위한 항 우울제 시장이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그렇게 된 것도 역시 물질이 행복을 주지 않음을 잘 말해줍니다.
우리는 부자가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행복도 커집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시하고, 우리를 지켜보며, 삶의 전 과정에서 우리를 돕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환경에 따라 쉽게 마음이 높아지거나 낮아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자신감을 주고, 삶의 위기를 잘 극복하게 만듭니다.
물론 믿는 사람도 디프레스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경제적 문제나 질병 등의 외적인 문제가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 행복을 빼앗는 3가지 요소 >
어떻게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 설교의 일부분인데, 이 말씀을 통해 행복을 빼앗는 대표적인 것 3가지를 살펴보면서 역설적으로 행복의 3대 비결을 깨닫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로부터 행복을 빼앗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1. 환경 중심적인 마음(circumstance-centered mind)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주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환경에 행복의 근거를 두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항상 힘든 문제를 만납니다. 그때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고 문제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환경을 더 믿습니다. 그처럼 환경을 크게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항상 원망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은혜로 그들을 출애굽 시켰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물과 음식이 없다고 금방 불평하며 그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하루살이 믿음을 가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2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염려했던 의식주 문제를 40년 동안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했던 일들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염려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바라보고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환경보다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문제와 고난은 하나님께서 더 나은 축복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수영을 1년 4개월째 다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 물이 가끔 끊겨서 수영을 다녔다가 나중에는 하루에 15시간 이상을 교회에 앉아있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수영할 때 어깨에 담이 걸린 것처럼 통증이 생깁니다. 그때마다 수영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언뜻 들지만 고통 중에도 수영을 계속하면 며칠 후에 통증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은 물과 상당히 친해졌습니다.
고통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야 할 일을 하고 가야 할 길을 계속 가면 그 수고가 먼저 있는 고통을 밀어냅니다. 그처럼 고통을 밀어내려면 계속 수고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와 환경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문제는 지속되지 않고 반드시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끝없이 오래 지속됩니다.
환경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환경은 오직 위협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으면 얼마 후에 고통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만 남을 것이고, 그때 우리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자기중심적인 마음(self-centered mind)
본문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은 이 구절에서 두 번이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 거하고 요구하며 살면 있는 행복도 사라지고, 사랑 안에 거하고 베풀며 살면 없는 행복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행복을 막는 제일 요소는 바로 요구하는 심령(demanding spirit)입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축복을 받는 것만 좋아하고 축복을 나누고 사명을 행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요구하는 심령은 하나님을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는 채무자처럼 생각하고,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언제 무너질까 아슬아슬합니다.
어떤 집회에서는 이렇게 선동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좋은 차와 좋은 집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병이 다 낫고, 돈도 많이 벌게 됩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멘!”을 합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천상의 심부름꾼 소년처럼 여기는 모습입니다.
미국의 한 TV 복음전도자는 청중들에게 집에 있는 냉장고에 그들이 원하는 것의 그림을 붙이게 하고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라고 했습니다. 계속 바라보고 고백하면 정말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장고에 캐딜락, 집,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붙이게 했고, 심지어는 잘 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를 붙이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기쁘게 보시겠습니까? 아마 제일 싫어하실 것입니다. 기복주의는 신앙의 제일 적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공중으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소리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을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뤄줘야 할 범위까지 지정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요구하는 심령에는 찾아오지 않고 순종하는 심령에 찾아옵니다. 우리는 기복주의의 사단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잘 지키고 하나님을 채무자로 몰면서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해달라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특히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바라보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물질적인 축복과 연결시키면 ‘요구하는 심령’만 커지게 되고, 그런 심령을 가지면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항상 문제와 고통은 있기 마련이고, 기복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하면 문제와 고통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구하는 심령은 자꾸 남과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돈을 버는 것 같은데 자신은 힘들면 그것이 상처가 됩니다. 어떤 부부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상처가 됩니다. 또한 어떤 교회는 잘 크는 것 같은데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상처가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있는 사람, 즐겁게 사는 사람에 대해 분노를 느끼다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에게는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 축복하고 싶으시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요구하는 심령에서 사랑하는 심령으로 극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심령은 고난 중에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뚜렷하게 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번성할 때보다 고난 중에 더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님도 사람과 함께 고통을 체험하시기 위해서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의 고통을 가장 극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는 생각은 절대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고난 중에는 어느 때보다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십니다. 교회도 부흥할 때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심령을 버리고 사랑하는 심령을 가지면 사단은 결코 우리의 행복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요새 사정상 교회를 정하지 못하신 분들 중에 저희 요삼일육선교회로 십일조를 내는 분들이 조금씩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어떤 분이 저희 선교회로 십일조를 보내오면서 앞으로 계속 십일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자신의 소중한 십일조가 교회 건축보다는 선교사님들과 우리의 문서선교 사역을 위해 보다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낮에는 자기 일을 하고 밤에는 식당 일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밤에 하는 일은 선교사님을 보다 많이 돕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선교와 구제에 힘쓰고 남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사단은 그런 사람의 행복을 결코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3. 과업 중심적인 마음(work-centered mind)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십자가의 낌새를 눈치 채고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있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 설교를 하시면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하게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행복을 막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놀이의 부족(A lack of play)’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살기 때문에 놀 시간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산책할 시간도 없고, 수영할 시간도 없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없고, 웃을 시간도 없고, 장난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처럼 무엇인가 항상 일을 해야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중세의 위대한 수도사 겸 신학자였습니다. 언뜻 보면 그런 분에게 노는 얘기를 꺼내면 당장 벼락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십니다. 하나님은 놀려고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노는 일도 소중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놀이가 넘치는 그분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셨다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은 너무 심각하게 삽니다. 그래서 농담을 전혀 할 수 없고, 그런 분들 옆에 가면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마치 큰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곁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대개 보면 다 좋은 분들입니다. 속으로는 마음도 따뜻합니다. 그러나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처럼 가까이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면 무엇인가 고칠 부분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성경적인 이해와 신앙적인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관계는 신앙생활의 핵심 요소입니다. 인격 관계에서 승리해야 신앙생활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심각하고 너무 바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바쁜 것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바쁘지 않는 것을 게으르게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항상 팽팽한 상태로는 살 수 없습니다. 활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 줄을 풀어놓아야 활의 탄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긴장을 풀고 재미있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대개 보면 유머를 잘하는 사람이 충성심도 있고, 오히려 그런 사람이 고난 중에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그처럼 남을 즐겁게 해주는 유머도 좋은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남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입니다. 왜냐하면 유머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이 오해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유쾌한 장난은 인간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쾌한 장난을 잘해야 합니다. 부부가 가장 행복해지고 그 관계가 견고해지는 때는 유쾌한 장난을 주고받는 때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핸드폰으로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워서 아내에게 장난 문자를 많이 보냈습니다. 그런 유쾌한 장난은 아내에게 진주목걸이를 선물하는 것보다 더 부부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작은 장난의 알갱이들이 모여서 진짜 영적인 진주목걸이가 만들어집니다.
자녀들도 언제 가장 행복과 안정감을 느낍니까? 엄마 아빠가 자신들과 함께 장난쳐줄 때입니다. 그처럼 놀이와 유머와 장난은 행복의 필수요소입니다. 우리는 너무 심각하거나 바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바쁠 때일수록 과감히 일에서 벗어나, 가끔 여행을 통해 가족들이 함께 신기한 모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경탄하는 서프라이즈(surprise!)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연에서 놀고 계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과 함께 놀아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에스라 선지자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을 때,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8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패 속에서 통곡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기뻐하는 것을 더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항상 넉넉한 웃음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행복해야 웃겠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행복해서 웃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웃다보면 행복해집니다. 웃으면 복을 받습니다. 웃으면 장수합니다. 요새 웃음 요법 원리에 의하면 웃으면 암도 낫는다고 합니다.
최고의 보약은 웃음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주고, 사람과 하나님을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도 웃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웃으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웃으면 창조력도 생깁니다. 환경에 반응하며 살면 웃을 일이 별로 없지만 환경을 극복하고 창조적으로 살면 웃음이 넘치게 됩니다. 아무리 큰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아름답게 끊임없이 창조할 때 사람은 진짜 아름답게 됩니다.
< 진정한 행복을 찾으십시오 >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며 살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창조하며 살라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행복은 많은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모습대로 자기 일을 찾아 창조적으로 살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욕심을 부릴 때 대개 ‘깊이에 대한 욕심’보다는 ‘넓이에 대한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넓은 삶’보다는 ‘깊은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은 다 갖고 싶어 하지만 부모들은 다 사주지 않습니다. 돈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다 하지 못하게 막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간과 물질과 인생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좋게 보이는 것을 다 하겠다고 문어발 인생으로 사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왜 우리나라에 IMF가 생겼습니까? 당시 재벌들이 차입을 통해 문어발 경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좋게 보이는 것을 다 하려고 하니까 하나도 전문화 되지 못하고 모두가 부실한 기업이 된 것입니다. 왜 요새 제 2의 IMF 위기가 생기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차입을 통해 문어발 부동산 투자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한 가지 일만 잘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남을 쳐다보며 다 잘하려고 하면 부실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특성대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수평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년 수십만 명이 똑같은 시험지를 놓고 시험을 쳐서 점수를 잘 맞는 학생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사람은 내가 잘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공헌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공부도 타고 나야 합니다. 어떤 학생은 책상에 앉았다 하면 12시간 동안 먹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공부만 합니다. 너무 그러니까 부모님이 걱정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1시간도 책상에 앉아있지 못하고 한눈을 파는 아이에게 공부해서 박사 되라고 하면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래도 그런 아이를 붙들고 부모들이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면서 공부시키니까 진짜 행복이 죽어버립니다.
인생에서 공부 말고도 행복과 성공의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행복은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에 있습니다. 과정에서도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수십만 명이 매달려 경쟁하는 레드 오션(red ocean)에서 허우적거리게 하지 말고 자기만의 불루 오션(blue ocean)을 즐기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원리이고, 중요한 인생 행복의 요소입니다.
레드 오션에서 남을 죽이고 이기는 것은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불루 오션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고 그것이 진짜 행복을 줍니다. 남을 누르고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남과 함께 이기면서 행복하려고 해야 합니다. 함께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말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진 사람의 고통만큼 그림자가 남는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기고 얻는 통쾌함만큼 진 사람에게는 쓰라림의 그림자가 남는다는 말입니다. 진짜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승리이고, 최대의 승리는 사랑과 용서와 화해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가짜 행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처럼 살기가 힘들 때는 더욱 진짜 행복이 필요합니다. 행복은 고난을 이기는 최상의 힘입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다락방에서 절망 속에 숨어살면서도 매일 빠짐없이 가족들에게 “나는 행복해요”라고 말하면서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행복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주님은 3가지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약속 안에 거하고, 둘째, 사랑 안에 거하고, 셋째, 기쁨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환경도, 그리고 무서운 사단도 우리로부터 결코 행복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고, 사랑을 실천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함으로 행복하게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