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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3:1~13
2006년 새해 첫 주일 예배에 참예하신 여러분과 가정 위에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 첫날입니다. 우리 앞에 2006년 365일이 펼쳐져 있습니다. 마치 새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처럼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느냐에 따라 1년 동안의 인생이 좌우될 겁니다. 더 나아가 남은 인생이 만들어져 갈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내딛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발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입니다. 인생은 선택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물론 인생 가운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 가문, 혈통 등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지혜롭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잘 선택하면 승리와 축복의 인생이 되고, 잘못 선택하면 실패와 저주의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현재 나의 모습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만족스럽습니까? 그렇다면 과거, 작년, 어제까지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불만족스럽습니까? 그렇다면 과거, 작년, 어제까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펼쳐진 2006년을 승리와 축복으로 장식하고 싶습니까? 남은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가고 싶습니까? ‘지혜로운 선택의 기술’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순간의 선택은 하루를 좌우할 수 있고, 1년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고, 영원까지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 또한 선택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처럼 선택한 대로 인생을 거두게 됩니다. 갈6: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 본문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의 선택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길에서 각각 어떤 선택을 했는가?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지혜로운 선택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006년 한 해, 더 나아가 남은 생애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 : 가나안 땅 vs. 소돔 성
아브라함은 본래 그 고향이 갈대아 우르(현재의 이라크 남부 지역)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입니다. 그곳은 문명이 발달된 반면 하나님 대신 월신(月神)을 섬기는 우상 숭배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세우시고자 그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창12:2~3 약속의 말씀 주시면서 ... 어떤 약속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큰 민족을 이뤄주시겠다는 것, 둘째는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 셋째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 등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미지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까 현실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뭄과 흉년이 있고, 원주민들의 텃세가 있고 ... 그래서 한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창12:10~20 참조) 그러다 혼이 난 후 그는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와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산도 많이 늘었고,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가축들이 늘어감에 따라 조카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아브라함은 좀더 넓은 땅으로 흩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제안합니다. 8절~9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 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때 롯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새 땅을 선택합니다. 10절~11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 ” 조금씩 이동하던 롯은 마침내 소돔까지 갑니다. 12절(하).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요즘으로 말하면 신도시가 형성된 지역에 정착한 겁니다. 그곳에 소돔 성이 있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그대로 가나안 땅을 선택합니다. 12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 ”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을 그대로 선택했고, 롯은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 소돔을 선택한 겁니다.
[2] 선택의 결과 : 승리와 축복 vs. 실패와 저주
여러분!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얼른 보면 누가 더 잘 선택한 것 같습니까? 당연히 롯이죠. 기왕이면 문명이 발달해서 편리하고 풍요로운 지역으로 가는 게 훨씬 낫죠. 그런데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과연 누가 지혜로운 선택을 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끝까지 가나안 땅을 선택함으로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요(마1:1),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상, 곧 믿음의 조상이 됐습니다.(롬4:16)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다 이뤄진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족속이 구원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애 과정 속에서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2절에서 보는 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고, 무자하던 그에게 이삭이 태어났고, 창세기 22장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 사건 이후에는 형통하는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창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정말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그가 가나안 땅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롯은 소돔 성을 선택함으로 어떤 결과를 얻게 됩니까? 당시에 롯은 스스로 선택을 잘 했다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자기 앞에 성공적인 인생과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리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웬걸 그는 실패와 저주를 맛보게 됩니다. 창세기 14장 보니까, 소돔 성에 거주하는 동안 전쟁을 만납니다. 있던 재산 다 빼앗기고 포로 신세가 됩니다. 다행히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간 아브라함이 구해 주었지만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그때 경고를 받고 정신 차렸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소돔 땅에 눌러앉음으로 유황불 심판을 만났고, 겨우 몸만 구원받았지만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롯의 가족을 끄집어 낸 덕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 보면, 가족들이 몸만 달랑 빠져 나오는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두 딸과 롯이 겨우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롯과 두 딸은 근친상간의 무서운 죄악을 범하고 맙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대대로 원수가 된 이방 민족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창19:37~38)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한 길을 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큰 복을 누릴 수 있는데, 소돔 땅에 들어감으로 이런 꼴로 망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3] 선택의 기준 : 하나님 중심적인 기준 vs. 인간 중심적 기준
그러면 아브라함과 롯이 각각 어떤 기준을 선택했는가? 그것을 보면서 지혜로운 선택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했고, 롯은 인간 중심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영적인 눈(靈眼)이 밝았습니다. 반면에 롯은 영적인 눈이 어두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롯의 이름의 뜻입니다. 그 이름은 본래 ‘가리었다’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눈이 먼 롯과 잘 어울리는 이름인 셈입니다. 롯은 영적인 소경이요, 영적인 까막눈이었던 것입니다. 롯은 육신의 눈에 불을 켜고 선택했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10절. “눈을 들어 본즉 ... ” 육적인 눈이 있으나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① 영원의 선택 vs. 순간의 선택 :
아브라함은 매사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당장 현실은 힘들고 불편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미래와 영원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나중에야 어떻든 당장 좋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한 여름 밤에 모닥불을 지펴놓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불나비나 날벌레가 날아듭니다. 밝은 빛이 좋다고 돌진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살행위입니다. 여러분, 자기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입니까? 롯은 마치 ‘불나비와 같은 선택’을 한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미래와 영원을 선택한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는 애굽의 공주 양자였습니다. 그는 애굽 왕자로서의 영화를 포기합니다. 왜 그랬나요?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② 공의의 선택 vs. 이익의 선택 :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사실 롯은 조실부모해서 어린 시절부터 아브라함의 손이 자란 사람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따지면 당연히 아브라함이 지시할 수도 있고, 롯이 아브라함을 존중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무엇이 바른가를 생각한 사람입니다. 반면 롯은 도리나 공의가 문제가 아니라 이익만이 문제였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그냥 선택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공의롭지 못한 사람인지 창세기 19장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소돔성에 가서 물들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전부터 그 속에 그런 사악한 싹이 내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소돔 성 심판을 경고하러 온 천사들이 롯의 집에 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밤중에 몰려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상관해야 되니까 넘겨 달라는 겁니다. 그들은 동성애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롯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롯이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을 달랜답시고 그가 한 말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자기에게 처녀 딸 둘이 있는데 내 줄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가 얼마나 공의롭지 못하고 윤리 의식이 결핍된 부도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의로운’ 쪽이 아니라 ‘이로운’ 쪽만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선택으로 실패와 저주의 길을 간 겁니다.
지난 해 연말에 전 국민이 우울한 가운데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황우석 교수 사태 이야기입니다. 과학자가 세계적으로 발표된 논문을 조작했다니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그분에게만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 더욱 우울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사태가 폭로되기 전에 연구원 난자를 윤리 규정을 무시하고 사용한 것이 드러나서 기자 회견을 했을 때 이미 그분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분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는 일과 성취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 속에 그의 잘못이 나타나 있습니다. 1등을 위해, 명예와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그때라도 정직하게 고백했었더라면 좀더 쉽게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을까 아쉬운 생각을 해봅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잘못을 저지르면 결국 나중에 가서는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겁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주재 일본 대사 스기하라 대사의 이야기입니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당하던 유태인들이 탈출하고자 일본 입국 비자를 신청합니다. 그들을 도우려고 여러 번 본국에 허락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합니다. 그는 고민 끝에 바자를 발급해 줌으로 많은 유대인을 구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대사직을 잃고 말았고, 말년을 초야에서 쓸쓸히 보냈습니다. 하지만 후일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아들과 후손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옳은 것을 선택하셨고, 성공하신 겁니다.”
세상에서는 혹시 반칙이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반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롯은 공의를 무시하고 이익을 추구하다 오히려 큰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공의를 선택하기 우해 작은 것을 포기함으로 큰 것을 얻었습니다.
③ 영적인 것 선택 vs. 육신적인 것 선택 :
아브라함은 육신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영혼의 만족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때 애굽에 내려갔다가 영혼의 고통 맛본 적이 있었습니다. 육신의 안락을 우해 애굽에 갔다가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고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육신은 안락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큰 고통을 당했던 겁니다. 그때 그는 영혼의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을 끝까지 선택한 것입니다.
반면 롯은 육신의 안일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을 훌쩍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 했음을 의미합니다. 소돔성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빵점입니다. 신앙생활에 적합한 동네가 아닙니다. 그런데 롯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육신은 편하니까 선택해 버린 겁니다. 거기 갔다가도 실상을 보고 돌이켰어야 하는데 그냥 눌러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소돔성에서 육신적으로 안일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벧후2:8은 이를 증거합니다. 롯은 무법천지 음란한 소돔 성에 살면서 그 심령이 상했습니다.
여러분,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장 육신이 편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영혼에 만족과 기쁨, 평안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 하나님 문지기로 사는 게 악인의 고대광실에서 사는 것보다 영적으로 더 편하고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사는 게 악한 세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가치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4] 지혜로운 선택 : 작은 선택, 큰 축복
여러분 이런 것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른 보면 각도 1도가 얼마나 근소한 차이입니까? 하지만 갈수록 벌어집니다. 나중에는 영영 벌어져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롯이 요단들을 선택하고 떠난 후 아브라함이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자기도 육신을 가진 사람인데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선택을 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위로하시고 축복하십니다. 14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다시 한번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크게 위로 받고 감사예배를 드립니다.(18절)
그리고 그 후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당시에는 작은 선택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보니까 얼마나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롬8:18 말씀 그대로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서 당장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악인들이 더 잘 되는 모습으로 보고 불평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러면 곤란합니다. 조금 후면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시37:1~6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37: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의인의 축복은 점진적이지만 확실한 겁니다. 잠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 ” 그러므로 지혜로운 선택을 한 후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선택의 지혜를 주실 겁니다. 또 기도하십시오. 영안을 환하게 열어주실 겁니다. 혹시 지난 날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까? 하나님이 지금부터 다시 인도해 주실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크게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금년 한 해 아브라함처럼 비록 작을지라도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큰 축복으로 채워지실 줄로 믿습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
2006년 새해 첫 주일 예배에 참예하신 여러분과 가정 위에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새해 첫날입니다. 우리 앞에 2006년 365일이 펼쳐져 있습니다. 마치 새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처럼 우리의 발자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걸음을 내딛느냐에 따라 1년 동안의 인생이 좌우될 겁니다. 더 나아가 남은 인생이 만들어져 갈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내딛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의 발걸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발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입니다. 인생은 선택으로 만들어져 갑니다. 물론 인생 가운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 가문, 혈통 등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에는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 되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지혜롭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됩니다. 잘 선택하면 승리와 축복의 인생이 되고, 잘못 선택하면 실패와 저주의 인생이 됩니다.
여러분! 현재 나의 모습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만족스럽습니까? 그렇다면 과거, 작년, 어제까지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불만족스럽습니까? 그렇다면 과거, 작년, 어제까지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펼쳐진 2006년을 승리와 축복으로 장식하고 싶습니까? 남은 인생을 아름다운 인생으로 만들어가고 싶습니까? ‘지혜로운 선택의 기술’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순간의 선택은 하루를 좌우할 수 있고, 1년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고, 영원까지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인 토머스 칼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영원하다.” 또한 선택은 마치 씨앗과 같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처럼 선택한 대로 인생을 거두게 됩니다. 갈6: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 본문 성경은 아브라함과 롯 두 사람의 선택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길에서 각각 어떤 선택을 했는가?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지혜로운 선택의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꼭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2006년 한 해, 더 나아가 남은 생애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 : 가나안 땅 vs. 소돔 성
아브라함은 본래 그 고향이 갈대아 우르(현재의 이라크 남부 지역)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입니다. 그곳은 문명이 발달된 반면 하나님 대신 월신(月神)을 섬기는 우상 숭배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을 세우시고자 그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창12:2~3 약속의 말씀 주시면서 ... 어떤 약속입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큰 민족을 이뤄주시겠다는 것, 둘째는 이름을 창대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 셋째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 등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미지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니까 현실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뭄과 흉년이 있고, 원주민들의 텃세가 있고 ... 그래서 한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습니다.(창12:10~20 참조) 그러다 혼이 난 후 그는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와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산도 많이 늘었고,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가축들이 늘어감에 따라 조카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본 아브라함은 좀더 넓은 땅으로 흩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제안합니다. 8절~9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 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때 롯이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새 땅을 선택합니다. 10절~11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 ” 조금씩 이동하던 롯은 마침내 소돔까지 갑니다. 12절(하).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요즘으로 말하면 신도시가 형성된 지역에 정착한 겁니다. 그곳에 소돔 성이 있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그대로 가나안 땅을 선택합니다. 12절.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 ”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가나안 땅을 그대로 선택했고, 롯은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 소돔을 선택한 겁니다.
[2] 선택의 결과 : 승리와 축복 vs. 실패와 저주
여러분!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얼른 보면 누가 더 잘 선택한 것 같습니까? 당연히 롯이죠. 기왕이면 문명이 발달해서 편리하고 풍요로운 지역으로 가는 게 훨씬 낫죠. 그런데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과연 누가 지혜로운 선택을 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끝까지 가나안 땅을 선택함으로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이 됐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요(마1:1),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상, 곧 믿음의 조상이 됐습니다.(롬4:16)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다 이뤄진 것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고, 그로 인해 많은 족속이 구원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생애 과정 속에서도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본문 2절에서 보는 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고, 무자하던 그에게 이삭이 태어났고, 창세기 22장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 사건 이후에는 형통하는 말년을 보내게 됩니다. 창24:1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정말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그가 가나안 땅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롯은 소돔 성을 선택함으로 어떤 결과를 얻게 됩니까? 당시에 롯은 스스로 선택을 잘 했다고 자부했을지 모릅니다. 자기 앞에 성공적인 인생과 행복한 인생이 펼쳐지리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웬걸 그는 실패와 저주를 맛보게 됩니다. 창세기 14장 보니까, 소돔 성에 거주하는 동안 전쟁을 만납니다. 있던 재산 다 빼앗기고 포로 신세가 됩니다. 다행히 그 소식을 듣고 쫓아간 아브라함이 구해 주었지만 목숨까지 잃을 뻔했습니다. 그때 경고를 받고 정신 차렸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소돔 땅에 눌러앉음으로 유황불 심판을 만났고, 겨우 몸만 구원받았지만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롯의 가족을 끄집어 낸 덕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 보면, 가족들이 몸만 달랑 빠져 나오는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고, 두 딸과 롯이 겨우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롯과 두 딸은 근친상간의 무서운 죄악을 범하고 맙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대대로 원수가 된 이방 민족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됩니다.(창19:37~38)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한 길을 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큰 복을 누릴 수 있는데, 소돔 땅에 들어감으로 이런 꼴로 망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3] 선택의 기준 : 하나님 중심적인 기준 vs. 인간 중심적 기준
그러면 아브라함과 롯이 각각 어떤 기준을 선택했는가? 그것을 보면서 지혜로운 선택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했고, 롯은 인간 중심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영적인 눈(靈眼)이 밝았습니다. 반면에 롯은 영적인 눈이 어두웠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롯의 이름의 뜻입니다. 그 이름은 본래 ‘가리었다’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눈이 먼 롯과 잘 어울리는 이름인 셈입니다. 롯은 영적인 소경이요, 영적인 까막눈이었던 것입니다. 롯은 육신의 눈에 불을 켜고 선택했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10절. “눈을 들어 본즉 ... ” 육적인 눈이 있으나 영적인 눈이 멀어버린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① 영원의 선택 vs. 순간의 선택 :
아브라함은 매사에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당장 현실은 힘들고 불편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미래와 영원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나중에야 어떻든 당장 좋으면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한 여름 밤에 모닥불을 지펴놓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불나비나 날벌레가 날아듭니다. 밝은 빛이 좋다고 돌진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일지 모르지만, 결국은 자살행위입니다. 여러분, 자기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불나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입니까? 롯은 마치 ‘불나비와 같은 선택’을 한 겁니다.
아브라함처럼 미래와 영원을 선택한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그는 애굽의 공주 양자였습니다. 그는 애굽 왕자로서의 영화를 포기합니다. 왜 그랬나요?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② 공의의 선택 vs. 이익의 선택 :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양보합니다. 사실 롯은 조실부모해서 어린 시절부터 아브라함의 손이 자란 사람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따지면 당연히 아브라함이 지시할 수도 있고, 롯이 아브라함을 존중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무엇이 바른가를 생각한 사람입니다. 반면 롯은 도리나 공의가 문제가 아니라 이익만이 문제였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그냥 선택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공의롭지 못한 사람인지 창세기 19장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소돔성에 가서 물들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전부터 그 속에 그런 사악한 싹이 내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소돔 성 심판을 경고하러 온 천사들이 롯의 집에 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밤중에 몰려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상관해야 되니까 넘겨 달라는 겁니다. 그들은 동성애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롯은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롯이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을 달랜답시고 그가 한 말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자기에게 처녀 딸 둘이 있는데 내 줄 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가 얼마나 공의롭지 못하고 윤리 의식이 결핍된 부도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의로운’ 쪽이 아니라 ‘이로운’ 쪽만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선택으로 실패와 저주의 길을 간 겁니다.
지난 해 연말에 전 국민이 우울한 가운데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황우석 교수 사태 이야기입니다. 과학자가 세계적으로 발표된 논문을 조작했다니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그분에게만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서 더욱 우울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사태가 폭로되기 전에 연구원 난자를 윤리 규정을 무시하고 사용한 것이 드러나서 기자 회견을 했을 때 이미 그분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분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에는 일과 성취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말 속에 그의 잘못이 나타나 있습니다. 1등을 위해, 명예와 이익을 위해 불법을 저질렀다는 겁니다. 그때라도 정직하게 고백했었더라면 좀더 쉽게 사태가 수습되지 않았을까 아쉬운 생각을 해봅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잘못을 저지르면 결국 나중에 가서는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겁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주재 일본 대사 스기하라 대사의 이야기입니다. 나치 독일의 박해를 당하던 유태인들이 탈출하고자 일본 입국 비자를 신청합니다. 그들을 도우려고 여러 번 본국에 허락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합니다. 그는 고민 끝에 바자를 발급해 줌으로 많은 유대인을 구해 주었습니다. 물론 그 일로 인해 대사직을 잃고 말았고, 말년을 초야에서 쓸쓸히 보냈습니다. 하지만 후일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아들과 후손들은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옳은 것을 선택하셨고, 성공하신 겁니다.”
세상에서는 혹시 반칙이 통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반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롯은 공의를 무시하고 이익을 추구하다 오히려 큰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공의를 선택하기 우해 작은 것을 포기함으로 큰 것을 얻었습니다.
③ 영적인 것 선택 vs. 육신적인 것 선택 :
아브라함은 육신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영혼의 만족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때 애굽에 내려갔다가 영혼의 고통 맛본 적이 있었습니다. 육신의 안락을 우해 애굽에 갔다가 아내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고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육신은 안락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큰 고통을 당했던 겁니다. 그때 그는 영혼의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을 끝까지 선택한 것입니다.
반면 롯은 육신의 안일만 생각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을 훌쩍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 했음을 의미합니다. 소돔성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일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빵점입니다. 신앙생활에 적합한 동네가 아닙니다. 그런데 롯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육신은 편하니까 선택해 버린 겁니다. 거기 갔다가도 실상을 보고 돌이켰어야 하는데 그냥 눌러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소돔성에서 육신적으로 안일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벧후2:8은 이를 증거합니다. 롯은 무법천지 음란한 소돔 성에 살면서 그 심령이 상했습니다.
여러분,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장 육신이 편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영혼에 만족과 기쁨, 평안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 하나님 문지기로 사는 게 악인의 고대광실에서 사는 것보다 영적으로 더 편하고 좋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루를 사는 게 악한 세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나은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가치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4] 지혜로운 선택 : 작은 선택, 큰 축복
여러분 이런 것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른 보면 각도 1도가 얼마나 근소한 차이입니까? 하지만 갈수록 벌어집니다. 나중에는 영영 벌어져서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선택을 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롯이 요단들을 선택하고 떠난 후 아브라함이 얼마나 착잡했겠습니까? 자기도 육신을 가진 사람인데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선택을 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위로하시고 축복하십니다. 14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 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다시 한번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크게 위로 받고 감사예배를 드립니다.(18절)
그리고 그 후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당시에는 작은 선택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보니까 얼마나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롬8:18 말씀 그대로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서 당장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악인들이 더 잘 되는 모습으로 보고 불평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러면 곤란합니다. 조금 후면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시37:1~6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37:6)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의인의 축복은 점진적이지만 확실한 겁니다. 잠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 ” 그러므로 지혜로운 선택을 한 후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선택을 하기 위해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선택의 지혜를 주실 겁니다. 또 기도하십시오. 영안을 환하게 열어주실 겁니다. 혹시 지난 날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까? 하나님이 지금부터 다시 인도해 주실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앞날을 크게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금년 한 해 아브라함처럼 비록 작을지라도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큰 축복으로 채워지실 줄로 믿습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