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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와 시련은 곧 끝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7절)
< 시련은 필요합니다 >
1980년대 초, 소련의 우주비행사 2명이 우주에서 211일 동안 있다가 지구로 귀환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아주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지구로 귀환하면서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 고동에 이상이 생기고, 심한 현기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또한 1주일 간 걷지 못했고, 1달 이상 약해진 근육과 심장을 강화시키는 치료를 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런 압력에 없는 무중력 상태에 있으면 근육이 점차 퇴화됩니다. 그것을 방지하려고 소련에서는 우주비행사들을 위한 힘든 훈련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펭귄복(penguin suit)’이라는 고무 밴드가 달린 운동복을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우주비행사가 움직이는 방향의 반대로 저항력이 생기게 해서 힘을 쓰도록 하는 옷이었습니다.
그런 훈련과정을 잘 소화해서 1987년 12월 29일, 소련의 두 명의 우주비행사가 당시 우주에 머문 최고기록인 326일 간의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했을 때는 아무런 건강의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훈련과 시련과 외부의 압력과 스트레스를 싫어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축복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 합니다. 문제가 없고, 기적과 성공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이 축복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내가 이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라고 간증하지만 기적은 성도의 전유물만은 아닙니다.
2004년에 휴스톤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어느 날, 루이스 폴 캐들섹(Louis Paul Kadlecek)이란 술주정뱅이 청년이 텍사스 브래조리아 공항(The Brazoria County Airport)의 격납고에서 비행기를 훔쳤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매뉴얼대로 이륙을 했다가 곧 10만 볼트의 전기선과 부딪쳐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공항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유능한 비행사도 그렇게 추락하면 1000번 중에 999번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케들섹은 멀쩡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체험했지만 과거의 전과 경력 때문에 20년 형을 언도받고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기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기적으로 보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없는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좋은 길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련도 허락하십니다.
<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 >
누가 진짜 성공한 사람일까요?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승리한 사람이 진짜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1.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현재의 고난은 다가올 영광의 전주곡임을 역설하는 책입니다. 왜 그런 역설을 베드로가 강조합니까?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 로마 황제들은 노골적으로 성도들을 핍박했고, 이 서신이 기록되고 1년쯤 후에는 네로의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박해를 예상하고 엄청난 고난을 준비하도록 이 서신을 썼습니다.
당시 폭군 네로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광적으로 즐겼습니다. 그는 쇼의 규모가 클수록 좋아해서 검투장에서 수백 명의 검투사들이 싸움을 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는 원형극장인 콜로세움을 물로 가득 채워 거기에 배를 띄운 후 해상전투 쇼를 하게 했고, 그것도 만족하지 못해 로마 시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불이 자신에게 예술적 감흥을 준다고 하면서 로마가 불타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면서 수금을 탔습니다.
그처럼 그는 불타는 로마를 보며 즐거워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때 네로는 시민들의 분노를 달랠 희생양을 찾다가 마침내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습니다. 네로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는 로마로 향하는 도로마다 기독교인들을 화형에 처한 불타는 십자가들로 전봇대가 늘어선 것처럼 가득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이 서신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서신은 지금 고난에 빠진 사람들과 앞으로 대 환난을 준비해야 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서신입니다. 그처럼 마음의 준비를 하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커집니다. 그리고 준비할 때 무엇보다 성령님이 나를 사로잡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썼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무식할 것 같은 베드로가 이런 서신을 쓰지 못할 것 같지만 위대한 선생이신 예수님 밑에서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은 그는 더 이상 무식한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 충만해서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을 감화시켰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지혜가 생기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사람들 앞에 서면 온몸이 떨리는 현상이 심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심리적 차단 현상이 생겨 기도제목도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합니까? 경험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지금도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힘을 주시니까 매번 강단에 담대하게 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면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통해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역설하는데, 그도 성령 충만 전에는 고난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실 때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했고 주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하녀 앞에서조차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후에는 고난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행 5:41).
또한 성령 충만하면 평안도 생기지만 평화도 추구하게 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이 서신을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냈습니다. 이 소아시아 지역들은 베드로가 선교했던 지역인데, 자세히 보면 당대 최고의 선교사인 사도 바울의 선교지와 별로 겹치지 않습니다. 아마 둘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협력하며 평화롭게 선교를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할 때 성령님이 허락하지 않고 유럽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비두니아는 베드로가 선교하는 지역이었기에 사도 바울이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성령님이 막으셨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화평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서 나를 다스리고, 환경을 극복하고, 이웃과 화평하면 어떤 시련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2. 확신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주님은 죽어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친히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 있어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반드시 승리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베드로는 희망을 잃고 예수님을 부인한 슬픔만 되씹고 있었습니다. 또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죄책감 때문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산 소망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산 소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 그리고 열등감과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있으면 콧노래가 나오고,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마음속에 생수가 솟아납니다. 찬송가 539장 1절을 불러보십시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확신이 있으면 원망거리가 노래거리가 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재벌 2세가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받는 것을 부러워하지만 성도는 훨씬 더 귀한 기업을 상속받은 존재입니다. 또한 기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이 구절에서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는 말씀은 잠깐의 근심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근심이 없으면 금방 교만해지고 결국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하나님의 필요를 깨닫게 하시려고 근심거리와 시련을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련은 인생의 가장 좋은 양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저는 날씨가 좋았다가 갑자기 쌀쌀해지면 김 목사님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외로울까? 빨리 장가를 가야 될 텐데.” 그처럼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하나님이 더 생각나고, 외로운 이웃들이 더 생각나고, 아내가 더 생각납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으면 나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1987년 직장을 그만 두고 선교사가 되려고 미국으로 유학 가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이미 미국으로 가셨고, 7명의 누님과 형님들은 모두 가정을 이뤘고, 저는 서울 명일동에 있는 연립주택에서 쓸쓸하게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을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그때 형님과 형수님이 찾아와 저를 석촌호수에 데리고 가서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고독할 때 그런 관심과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사람이 이렇게 진지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시련이 다가오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시련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시련 속에서 겸손히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면 시련 중에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시련이 있어도 속으로는 그 시련 때문에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선원들 말에 의하면 바다의 표면의 해류와 깊은 바다의 해류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그처럼 성도의 삶은 표면에는 근심의 물줄기가 흘러도 내면에는 기쁨의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고,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이 커집니다. 시련은 잠깐이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런 확신과 소망이 분명할 때 어떤 시련도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3. 더욱 정결해져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보면 ‘믿음의 시련’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그 말은 믿음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시련이 없는 믿음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고 물이 없는 우물과 같습니다. 시련은 믿음의 명예이자 증거입니다. 큰 믿음을 원하면 큰 시련도 기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이 왔을 때 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22장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왜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까? 첫째,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시련과 문제가 올 때 불신자처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면 그것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진실성은 축복과 성공을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평가됩니다.
둘째, 믿음의 시련이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양적인 것으로 성공을 판단하지만 양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톤의 광석에서 그 백만분의 1인 1그램의 금이 있어도 금광석이라고 합니다. 금광석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상 터무니없이 양만 많은 것입니다.
그 금광석을 캐내어 제련 과정을 거쳐 순금을 만듭니다. 그때 급속한 양적 축소가 있으나 사실상 손실은 없고, 오히려 진짜 가치와 효용성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의 시련을 주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한국인 중에 말을 잘하고 논리에 탁월한 3인방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말을 잘하는 것 때문에 적도 많이 생기고, 미움도 많이 사고, 갈등도 많이 일어났고, 목사가 된 뒤에도 그런 성향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연세가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많이 싫어했고, 그것 때문에 목회에도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런 시련들을 통해 이분들이 깎이기 시작했습니다.
총회에 갈 때마다 그분들은 눈물겹게 사투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를 꾹 참고, 얼마나 많이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한국에 있어서 총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는데, 2-3년에 한번씩 참석할 때마다 그분들은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낍니다. 요새는 표정도 인자한 표정이 나오고, 말도 아주 인자하게 합니다.
언젠가 한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나는 말 때문에 항상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 문제만 생각하면 회개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총회에 참석하기 전에는 항상 이번 총회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참석할 때가 많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기를 극복해가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만약 그분들에게 시련이 없었더라면 갈등은 계속되고 상처는 커졌을 것입니다. 결국 시련이 그분들을 정제시켰습니다.
시련은 내게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도구입니다. 그 불순물이 아직 제거되지 않으면 또 시련이 있게 됩니다. 그런 시련 과정을 통해 얻어진 정결한 믿음은 태산을 옮기는 능력이 되고, 결국 7절 하반부 말씀처럼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시련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임재도 시련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임재는 뜨거운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의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시련이기도 합니다.
또한 축복도 시련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물질이 있는 것이 가난보다 더 가혹한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없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보다 물질이 있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 잘되고 세상에서 출세할수록 교만해지지 않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더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도 시련의 한 형태입니다. 누가 찾아와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요!”라고 말할 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그 말 때문에 자기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무서운 일입니다. 그처럼 시련은 다양하게 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어도 감사를 잃지 말고, 우리 자신을 잘 성찰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하고 겸손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을 주십니다. 그 시련에는 어떤 해도 없습니다. 모든 시련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시련도 하나님의 결재와 허락 없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세월을 보면 최악의 날들이 최선의 날들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이제 시련이 있을 때 남이 위로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오히려 축하해주기를 바라십시오. 시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시련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큰 유익을 끼친 후에 곧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운 눈물과 시련 중의 감사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작년 7월 초, 사랑칼럼 출판을 위해 원고를 몇몇 출판사로 보내보기로 했습니다. 사랑칼럼이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내용이기에 먼저 일반 출판사인 김영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7월 18일 답장이 왔습니다. “선생님의 원고는 저희 회사의 출판 방향과 다소 맞지 않고, 시장성(판매) 면에서 확신하기 어려워 출판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편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내긴 했지만 퇴짜를 맞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달래며 다음날 새벽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는 기독교 출판사 한 군데만 더 보내겠습니다. 이번에도 퇴짜 맞으면 더 이상 원고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두란노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 만인 작년 7월 21일에 출판이 어렵겠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연속으로 퇴짜를 맞고 그것도 이틀 만에 퇴짜를 맞으니까 그날 기분은 더 안 좋았습니다.
그날부터 계속 하나님 앞에 새벽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며칠 후에 하나님께 감동을 주셨습니다. “미션퍼블릭에서 직접 출판을 해보라.” 그때까지 미션퍼블릭에서는 저의 설교 파일을 정리해서 후원금을 받고 목사님들에게 공급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 일로 이미 상당히 많은 목사님들을 고정 독자로 확보한 상태였는데, 그 설교파일 사역을 그때부터는 직접 출판하는 사역까지 확대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직접 출판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원고는 10번 이상 교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출판이 진행되어 1달 만에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가 나왔습니다. 작년 9월 초에 산더미 같은 책이 미션퍼블릭 사무실에 쌓였습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저걸 언제 다 파나?” 총판과 서점에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판로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처럼 아무 방법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저의 글에 감동을 받은 사랑칼럼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감동’을 선물하겠다고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해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대량으로 사랑칼럼을 구입해서 고맙다고 하니까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고맙습니다. 영화 한편을 봐도 8천원이고, 선물용 고급 카드 한 장도 3천원인데, 절반 가격으로 책을 주니까 5천원으로 감동을 선물할 수 있어서 제가 더 기쁩니다. 받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개업할 때 하객들에게 사랑칼럼을 한 권씩 선물할 것이고, 앞으로 자녀들 결혼할 때도 하객들에게 사랑칼럼을 한 권씩 선물할 겁니다.”
결국 산더미 같이 쌓인 책이 2달 만에 인터넷을 통해 다 팔렸고, 재판을 찍고 지금도 서점은 무관심한데 인터넷을 통해 계속 나가서 얼마 후에는 3판을 찍게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두 번째 책 ‘하나님과 깊은 만남’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저의 글을 신뢰하는 사랑칼럼 독자들이 또 많이 선물용으로 사주고 계십니다.
정말 감동의 연속입니다. 사랑칼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워준다고 그 사역을 시작했다가 지금은 오히려 사랑칼럼 독자들로부터 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작년 여름에 두 출판사에서 퇴짜를 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 그 시련이 있었기에 사역의 보람도 훨씬 커졌고 선교헌금도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페인(pain,고통)이 없으면 게인(gain,유익)도 없고, 크로스(cross,십자가)가 없으면 크라운(crown,왕관)도 없습니다. 우리가 시련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산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면 근심과 문제는 곧 끝나고 찬란한 영광의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항상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시련을 잘 이겨내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
< 시련은 필요합니다 >
1980년대 초, 소련의 우주비행사 2명이 우주에서 211일 동안 있다가 지구로 귀환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 아주 나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지구로 귀환하면서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 고동에 이상이 생기고, 심한 현기증으로 고생했습니다. 또한 1주일 간 걷지 못했고, 1달 이상 약해진 근육과 심장을 강화시키는 치료를 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런 압력에 없는 무중력 상태에 있으면 근육이 점차 퇴화됩니다. 그것을 방지하려고 소련에서는 우주비행사들을 위한 힘든 훈련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펭귄복(penguin suit)’이라는 고무 밴드가 달린 운동복을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우주비행사가 움직이는 방향의 반대로 저항력이 생기게 해서 힘을 쓰도록 하는 옷이었습니다.
그런 훈련과정을 잘 소화해서 1987년 12월 29일, 소련의 두 명의 우주비행사가 당시 우주에 머문 최고기록인 326일 간의 우주여행을 마치고 지구로 귀환했을 때는 아무런 건강의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훈련과 시련과 외부의 압력과 스트레스를 싫어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축복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 합니다. 문제가 없고, 기적과 성공의 주인공이 되는 것만이 축복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내가 이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라고 간증하지만 기적은 성도의 전유물만은 아닙니다.
2004년에 휴스톤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어느 날, 루이스 폴 캐들섹(Louis Paul Kadlecek)이란 술주정뱅이 청년이 텍사스 브래조리아 공항(The Brazoria County Airport)의 격납고에서 비행기를 훔쳤습니다. 그리고 비행기 매뉴얼대로 이륙을 했다가 곧 10만 볼트의 전기선과 부딪쳐 추락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공항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유능한 비행사도 그렇게 추락하면 1000번 중에 999번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케들섹은 멀쩡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체험했지만 과거의 전과 경력 때문에 20년 형을 언도받고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기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기적으로 보고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시련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없는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좋은 길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련도 허락하십니다.
< 시련을 이겨내는 방법 >
누가 진짜 성공한 사람일까요?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승리한 사람이 진짜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시련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1.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현재의 고난은 다가올 영광의 전주곡임을 역설하는 책입니다. 왜 그런 역설을 베드로가 강조합니까?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쓸 당시 로마 황제들은 노골적으로 성도들을 핍박했고, 이 서신이 기록되고 1년쯤 후에는 네로의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박해를 예상하고 엄청난 고난을 준비하도록 이 서신을 썼습니다.
당시 폭군 네로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광적으로 즐겼습니다. 그는 쇼의 규모가 클수록 좋아해서 검투장에서 수백 명의 검투사들이 싸움을 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는 원형극장인 콜로세움을 물로 가득 채워 거기에 배를 띄운 후 해상전투 쇼를 하게 했고, 그것도 만족하지 못해 로마 시내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는 불이 자신에게 예술적 감흥을 준다고 하면서 로마가 불타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면서 수금을 탔습니다.
그처럼 그는 불타는 로마를 보며 즐거워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때 네로는 시민들의 분노를 달랠 희생양을 찾다가 마침내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습니다. 네로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는 로마로 향하는 도로마다 기독교인들을 화형에 처한 불타는 십자가들로 전봇대가 늘어선 것처럼 가득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이 서신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 서신은 지금 고난에 빠진 사람들과 앞으로 대 환난을 준비해야 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서신입니다. 그처럼 마음의 준비를 하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훨씬 커집니다. 그리고 준비할 때 무엇보다 성령님이 나를 사로잡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이 구절을 보면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썼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무식할 것 같은 베드로가 이런 서신을 쓰지 못할 것 같지만 위대한 선생이신 예수님 밑에서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은 그는 더 이상 무식한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는 성령 충만해서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을 감화시켰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지혜가 생기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사람들 앞에 서면 온몸이 떨리는 현상이 심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심리적 차단 현상이 생겨 기도제목도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합니까? 경험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지금도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힘을 주시니까 매번 강단에 담대하게 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면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통해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역설하는데, 그도 성령 충만 전에는 고난을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실 때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했고 주님이 십자가를 질 때는 하녀 앞에서조차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후에는 고난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행 5:41).
또한 성령 충만하면 평안도 생기지만 평화도 추구하게 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이 서신을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냈습니다. 이 소아시아 지역들은 베드로가 선교했던 지역인데, 자세히 보면 당대 최고의 선교사인 사도 바울의 선교지와 별로 겹치지 않습니다. 아마 둘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협력하며 평화롭게 선교를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려고 할 때 성령님이 허락하지 않고 유럽으로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비두니아는 베드로가 선교하는 지역이었기에 사도 바울이 그곳으로 가지 못하게 성령님이 막으셨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화평의 영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서 나를 다스리고, 환경을 극복하고, 이웃과 화평하면 어떤 시련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2. 확신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주님은 죽어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친히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 있어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과는 반드시 승리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자 베드로는 희망을 잃고 예수님을 부인한 슬픔만 되씹고 있었습니다. 또한 닭 우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죄책감 때문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산 소망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산 소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확신이 없으면 평안도 없습니다. 확신이 없으면 원망과 불평, 그리고 열등감과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있으면 콧노래가 나오고,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고, 마음속에 생수가 솟아납니다. 찬송가 539장 1절을 불러보십시오.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확신이 있으면 원망거리가 노래거리가 됩니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재벌 2세가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받는 것을 부러워하지만 성도는 훨씬 더 귀한 기업을 상속받은 존재입니다. 또한 기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이 구절에서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는 말씀은 잠깐의 근심은 꼭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근심이 없으면 금방 교만해지고 결국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하나님의 필요를 깨닫게 하시려고 근심거리와 시련을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련은 인생의 가장 좋은 양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저는 날씨가 좋았다가 갑자기 쌀쌀해지면 김 목사님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외로울까? 빨리 장가를 가야 될 텐데.” 그처럼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하나님이 더 생각나고, 외로운 이웃들이 더 생각나고, 아내가 더 생각납니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지 못했으면 나도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1987년 직장을 그만 두고 선교사가 되려고 미국으로 유학 가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이미 미국으로 가셨고, 7명의 누님과 형님들은 모두 가정을 이뤘고, 저는 서울 명일동에 있는 연립주택에서 쓸쓸하게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을에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그때 형님과 형수님이 찾아와 저를 석촌호수에 데리고 가서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고독할 때 그런 관심과 배려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사람이 이렇게 진지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시련이 다가오는 목적과 이유입니다. 시련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시련 속에서 겸손히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면 시련 중에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시련이 있어도 속으로는 그 시련 때문에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선원들 말에 의하면 바다의 표면의 해류와 깊은 바다의 해류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그처럼 성도의 삶은 표면에는 근심의 물줄기가 흘러도 내면에는 기쁨의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수록 더 강해지고,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상급이 커집니다. 시련은 잠깐이지만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런 확신과 소망이 분명할 때 어떤 시련도 넉넉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3. 더욱 정결해져야 합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을 보면 ‘믿음의 시련’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그 말은 믿음에는 반드시 시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시련이 없는 믿음은 앙꼬 없는 찐빵과 같고 물이 없는 우물과 같습니다. 시련은 믿음의 명예이자 증거입니다. 큰 믿음을 원하면 큰 시련도 기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이 왔을 때 순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22장 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왜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까? 첫째, 믿음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이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시련과 문제가 올 때 불신자처럼 똑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낙심하면 그것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진실성은 축복과 성공을 통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평가됩니다.
둘째, 믿음의 시련이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양적인 것으로 성공을 판단하지만 양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톤의 광석에서 그 백만분의 1인 1그램의 금이 있어도 금광석이라고 합니다. 금광석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상 터무니없이 양만 많은 것입니다.
그 금광석을 캐내어 제련 과정을 거쳐 순금을 만듭니다. 그때 급속한 양적 축소가 있으나 사실상 손실은 없고, 오히려 진짜 가치와 효용성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의 시련을 주십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한국인 중에 말을 잘하고 논리에 탁월한 3인방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말을 잘하는 것 때문에 적도 많이 생기고, 미움도 많이 사고, 갈등도 많이 일어났고, 목사가 된 뒤에도 그런 성향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연세가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많이 싫어했고, 그것 때문에 목회에도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런 시련들을 통해 이분들이 깎이기 시작했습니다.
총회에 갈 때마다 그분들은 눈물겹게 사투했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를 꾹 참고, 얼마나 많이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한국에 있어서 총회에 자주 참석하지 못하는데, 2-3년에 한번씩 참석할 때마다 그분들은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낍니다. 요새는 표정도 인자한 표정이 나오고, 말도 아주 인자하게 합니다.
언젠가 한 목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나는 말 때문에 항상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 문제만 생각하면 회개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총회에 참석하기 전에는 항상 이번 총회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참석할 때가 많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자기를 극복해가는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만약 그분들에게 시련이 없었더라면 갈등은 계속되고 상처는 커졌을 것입니다. 결국 시련이 그분들을 정제시켰습니다.
시련은 내게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도구입니다. 그 불순물이 아직 제거되지 않으면 또 시련이 있게 됩니다. 그런 시련 과정을 통해 얻어진 정결한 믿음은 태산을 옮기는 능력이 되고, 결국 7절 하반부 말씀처럼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시련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임재도 시련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임재는 뜨거운 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의 불순물들이 다 제거되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시련이기도 합니다.
또한 축복도 시련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물질이 있는 것이 가난보다 더 가혹한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이 없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보다 물질이 있기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이 잘되고 세상에서 출세할수록 교만해지지 않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더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도 시련의 한 형태입니다. 누가 찾아와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요!”라고 말할 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나 그 말 때문에 자기가 진짜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무서운 일입니다. 그처럼 시련은 다양하게 올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시련이 있어도 감사를 잃지 말고, 우리 자신을 잘 성찰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결하고 겸손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어야 합니다.
<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하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을 주십니다. 그 시련에는 어떤 해도 없습니다. 모든 시련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시련도 하나님의 결재와 허락 없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세월을 보면 최악의 날들이 최선의 날들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이제 시련이 있을 때 남이 위로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오히려 축하해주기를 바라십시오. 시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시련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큰 유익을 끼친 후에 곧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주님은 우리의 의로운 눈물과 시련 중의 감사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작년 7월 초, 사랑칼럼 출판을 위해 원고를 몇몇 출판사로 보내보기로 했습니다. 사랑칼럼이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내용이기에 먼저 일반 출판사인 김영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7월 18일 답장이 왔습니다. “선생님의 원고는 저희 회사의 출판 방향과 다소 맞지 않고, 시장성(판매) 면에서 확신하기 어려워 출판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편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내긴 했지만 퇴짜를 맞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달래며 다음날 새벽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는 기독교 출판사 한 군데만 더 보내겠습니다. 이번에도 퇴짜 맞으면 더 이상 원고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두란노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틀 만인 작년 7월 21일에 출판이 어렵겠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연속으로 퇴짜를 맞고 그것도 이틀 만에 퇴짜를 맞으니까 그날 기분은 더 안 좋았습니다.
그날부터 계속 하나님 앞에 새벽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며칠 후에 하나님께 감동을 주셨습니다. “미션퍼블릭에서 직접 출판을 해보라.” 그때까지 미션퍼블릭에서는 저의 설교 파일을 정리해서 후원금을 받고 목사님들에게 공급하는 일만 했습니다. 그 일로 이미 상당히 많은 목사님들을 고정 독자로 확보한 상태였는데, 그 설교파일 사역을 그때부터는 직접 출판하는 사역까지 확대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직접 출판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원고는 10번 이상 교정된 상태였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출판이 진행되어 1달 만에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가 나왔습니다. 작년 9월 초에 산더미 같은 책이 미션퍼블릭 사무실에 쌓였습니다. 그 책을 볼 때마다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저걸 언제 다 파나?” 총판과 서점에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판로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처럼 아무 방법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저의 글에 감동을 받은 사랑칼럼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감동’을 선물하겠다고 선물용으로 많이 구입해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대량으로 사랑칼럼을 구입해서 고맙다고 하니까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고맙습니다. 영화 한편을 봐도 8천원이고, 선물용 고급 카드 한 장도 3천원인데, 절반 가격으로 책을 주니까 5천원으로 감동을 선물할 수 있어서 제가 더 기쁩니다. 받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개업할 때 하객들에게 사랑칼럼을 한 권씩 선물할 것이고, 앞으로 자녀들 결혼할 때도 하객들에게 사랑칼럼을 한 권씩 선물할 겁니다.”
결국 산더미 같이 쌓인 책이 2달 만에 인터넷을 통해 다 팔렸고, 재판을 찍고 지금도 서점은 무관심한데 인터넷을 통해 계속 나가서 얼마 후에는 3판을 찍게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두 번째 책 ‘하나님과 깊은 만남’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저의 글을 신뢰하는 사랑칼럼 독자들이 또 많이 선물용으로 사주고 계십니다.
정말 감동의 연속입니다. 사랑칼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워준다고 그 사역을 시작했다가 지금은 오히려 사랑칼럼 독자들로부터 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작년 여름에 두 출판사에서 퇴짜를 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 그 시련이 있었기에 사역의 보람도 훨씬 커졌고 선교헌금도 훨씬 더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페인(pain,고통)이 없으면 게인(gain,유익)도 없고, 크로스(cross,십자가)가 없으면 크라운(crown,왕관)도 없습니다. 우리가 시련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산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면 근심과 문제는 곧 끝나고 찬란한 영광의 날이 곧 오게 될 것입니다. 항상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시련을 잘 이겨내고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