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자  (민수기 21:4-9  히브리서 12:1-7)  
  
바라봄의 법칙

한 감옥 안에 두 죄수가 있었습니다. 이 감옥에서 외부 세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머리조차 내밀 수 없는 작은 창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 작은 창문으로 바깥 세계를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한 낮의 태양을 보며, 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떴다가 사라지는 달을 보며, 계절이 바뀌는 바람 향기를 맡으며, 봄이면 활짝 피는 갖가지 꽃을 보고, 초여름의 신록과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눈꽃을 바라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가족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사람은 비현실적 몽상가라고 동로들에게 놀림을 당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창문으로 감시등이 켜져 있고 무장 경비원이 지키는 철책과 비온 후의 진흙탕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범죄로 유혹한 사회의 공정치 못함에 분개하며, 자신을 처벌한 경찰관과 검사와 판사를 미워합니다.

이 두 사람 모두에게 출옥의 날이 왔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가족이 영접을 왔습니다. 이 사람은 몽상가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다시 범죄를 하자고 찾아오는 유혹의 손길도 없었습니다. 새 삶이 그에게 열렸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출옥하여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이 바라봄의 법칙 속에 몇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바라보는 것은 관심이다.

첫째 바라보는 것은 관심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현실적인 특정한 두 사람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중에 있는 두 가지 타입의 사람들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감옥에 갇혀 산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서 감옥에 갇힌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도다” 하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둘째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식의 감옥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식의 감옥은 완전히 폐쇄된 것은 아니고, 좁은 창문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작은 방입니다. 이 좁은 창문으로는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보고싶어 하는 현실만을 겨우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외부적 현실을 인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감옥 속에서의 관심사는 출옥 후에 현실 세계가 되었습니다. 여인과의 결혼을 꿈꾸던 사람은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부정적인 현실을 보았던 사람은 부정적인 현실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육체적 감옥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관심사의 감옥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의 감옥에 갇혀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감옥이 아니라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 감옥은 벗어날 지라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관심의 감옥은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의 감옥은 남이 강제로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옥살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걸맞는 현실을 만들어 나가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현실의 모든 면을 겪으면서 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제한된 현실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관심사에 걸맞는 미래가 열리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미래란 시간적으로 현재보다 나중에 있기 때문에 현재가 미래를 좇아 가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현재의 산물이고, 현재의 관심사의 산물입니다. 도리어 미래가 현재를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적 관심사를 가질 때 희망적 미래가 열리고, 단순히 현재적 관심사만을 갖는다면, 미래는 단순히 현재의 반복일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실의 반복이 아닌 희망적 미래를 꿈꾸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빌립보서 3:12).

사도 바울의 이 말은 ‘내가 소원하고 있는 일을 내가 이미 성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향한 관심사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이 관심사에 잡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잡혀 있는 이 관심사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고 풀어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관심사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2.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다.

둘째,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희망하는 것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관심 있는 것을 바라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우리의 관심사를 예수님께 두라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과 ‘예수님께 관심을 두는 일’을 운동경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먼저, 많은 관중들과 응원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결코 외롭지 않고, 혼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주위에 구름 같은 수 많은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증인들은 진리의 증인들입니다.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우리의 응원자들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라톤의 거의 모든 코스를 다 뛰고 결승 지점인 스타디움에 들어와서 마지막 한바퀴를 돌 때 힘이 들고 지쳐서 쓰러질 때, 스타디움의 몇 만 명의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를 응원해 주는 것과 같은 광경을 머리속에 그리시기 바랍니다.

운동경기의 마지막에는 선수들이 모두 지쳐있습니다. 온 몸에 힘이 없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때 그라운드에 들어선 선수에게 누가 먼저 보이느냐가 중요합니다. 야유하는 적들도 있습니다. 다 달리지 말고 ‘포기하라 포기하라’ 하고 소리를 지르는 유혹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응원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고난을 통과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요, 승리자요, 챔피언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얘야, 끝까지 달려라. 얘야 별 것 아니다. 나도 그 길을 너보다 먼저 달려왔어. 돌에 걸려 넘어졌니? 힘이 없어서 쓰러졌니? 내가 너를 도와 줄게 일어나서 달려라.’ 우리는 예수님의 격려를 받아 인내로써 우리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경기자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경기자가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경기에 불필요한 짐들을 모두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아 가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짐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관심사들을 모두 내려 놓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를 가장 얽어 매고 있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유혹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습관들을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관심사를 흩어버리는 잘못된 관심사를 모두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진지한 경기입니다. 최후에 받을 생명을 위한 경기입니다. 그러므로 경기에 장애가 되는 어떠한 짐도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 신앙 경기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시에 이 경기의 힘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운동경기에서 목표를 바라보면 더욱 힘이 나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 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인 예수님을 바라보면 신앙의 경기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마치 달리는 사람이 맨 앞에 달리는 사람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 안에서 신앙 경주의 기준과 모범을 발견하게 됩니다.



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셋째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신앙 생활의 모범을 발견합니다. 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은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 보고서, 현실의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시고 십자가의 수치스런 현실을 견디어 내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그 분의 전체 생애를 무시한 채 육체적인 죽음의 한 순간에서만 찾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일생 동안의 인내와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내로 고난을 참으신 분입니다. 본문 1절 하반절에서 말씀하시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도록 모범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5장 8절에서는 그가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 순종함을 배웠습니다”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육체적인 고난뿐만이 아니라, 더욱 괴로운 것은 완전한 고독을 맛보아야 했던 사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완전한 버림을 받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침 밷고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외치셨습니다. 고독은 사람들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져도 아무도 그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고독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고독 속에서는 삶의 허무를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예수님이 고난을 참고 이기신 분이므로,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의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독을 겪으신 분이므로 우리를 고독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당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인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미래가 우리에게 열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시작자요 완성자이십니다. 신앙의 시작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고, 신앙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신앙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불신앙으로 유혹하는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우리를 절망시키는 잘못된 현상에 눈멀지도 말고, 현실을 이기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4. 바라보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넷째 바라보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본문은 십자가에 달리사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신앙적 훈련을 견디어 나가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학습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모방은 모범상을 보아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이 계셔서 그 분을 모범상으로 삼고 열심히 바라보고 모방할 때, 제대로 된 배움이 시작됩니다. 사람은 보고 들어서 머리 속에 그림이 있어야 그 그림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방의 단계에 충실해야 창조적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보고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혼자하는 학습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꺼내는데 불과합니다. 내면적인 자원을 다 쓰고 나면 더 이상의 자원이 없기 때문에 발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고 배우지 않고는 능력을 확대할 수 없습니다. 혼자 배우는 운동, 혼자 배우는 악기, 혼자 하는 학문 등등은 한계가 있습니다.

선생님을 보고, 열심히 학습을 해야 그 선생님만큼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선생님은 지식을 넘어서 능력을 배양합니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선생님은 삶을 가르칩니다. 훌륭한 선생님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며, 그가 그 일에 적합한 사람으로 되는 것을 친히 보여줍니다. 훌륭한 음악가는 음악적 지식을 넘어서 음악가로서의 삶을 보여줍니다. 훌륭한 철학자는 철학적 지식을 넘어서서 철학자로서의 삶을 보여줍니다. 훌륭한 신앙인은 신학적 지식을 넘어서서 신앙적 삶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소위 기술을 배우고 지식을 배우고, 다음으로 ‘끼’를 배우고, 마지막에 삶과 인격까지 배울 수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식과 기능과 존재가 조화되고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훈련하시거든 그것을 견디어 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녀에게 대하듯이 여러분을 대하십니다. 부모가 훈련하지 않는 자녀가 무슨 자녀이겠습니까? 모든 자녀가 받는 훈련을 여러분이 받지 않는다고 하면, 여러분은 사생아이지, 참 자녀가 아닙니다. 모든 훈련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연단받은 사람들에게 의로움이 깃든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히 12:7-8, 11).

이 훈련은 교회에서의 훈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훈련은 삶의 모든 면에서 받는 훈련입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도대체, 오늘 하루를 내가 왜 살아야 하나? 무엇을 위해서 오늘 하루를 바쁘게 일해야 하나?’ 하는 근본적인 삶의 관심사에 대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예수님을 향한 결단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5. 바라보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바라보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주를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 되심을, 구세주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인간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것입니까? 인간의 장점을 바라봐도 별 것 아니고, 인간의 단점을 물고 늘어져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 하나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단점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말입니까? 자신의 일도 스스로 다루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환경을 보되 환경의 노예가 되시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을 가기 위해서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광야 생활이 오랜 기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고통을 당하고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원망합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고, 우리가 이 보잘것없는 음식을 더 이상은 먹기 싫다고 했습니다. 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하나님은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했습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사람이 놋뱀을 쳐다볼 때 모두 살게 되었습니다(민21:4-9).

모세가 만든 놋뱀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여러분, 위에 계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분은 영광의 주님이 아닙니다. 성공의 주님이 아닙니다. 좌절당하고, 패배당하고,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찢기시고, 벌거벗기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양손과 발에 못을 박히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의 고난을 위함이요. 그분의 벌거벗기심은 우리의 정직함을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십자가의 주를 보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주저마십시오. 영접하신 분들은 예수님의 주권(lordship)을 확인하십시오. 예수님의 주인 됨은 반복 된다고 해서 지겨운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확인해야 할 것이 바로 주님의 주인되심입니다.

군인이 상관을 향하여 인사 때마다 ‘충성’을 외칩니다. 한두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인 한에 있어서 상관을 향하여 죽을 때까지 ‘충성’ 하면서 충성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도 한두번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한 계속 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주님의 주인되심도 영원히 반복되고 확인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으신 분이 있으면 저를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고백하신 분들은 다시 한번 확인하며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신 내 구세주이십니다.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 제 마음의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시옵소서. 그리고 모든 결정을 주님께 맡깁니다. 저의 주인이 되셔서 제 삶을 인도해 주세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그 이름과 정체성에 걸맞는 관심사를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현실의 창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수 많은 믿음의 조상들과 믿음의 동역자들과 천군 천사들의 응원소리를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에게 용서와 화해의 기쁨이 있고, 구원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이 예수님을 계속 바라보는 복된 눈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