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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운명을 좌우한다 (마 22장 37~40절)
구약성경의 계명이 전부 몇 개나 될까요? 모두 합해서 613개나 됩니다. 여기서 긍정적인 계명 즉 “하라”는 계명이 248개이고, 부정적인 계명 즉 “하지 말라”는 계명은 365개나 됩니다.
또 이 계명들을 “무거운 계명”(heavy)과 “가벼운 계명”(light), 둘로 나누기도 합니다. 무거운 계명은 중요한(important) 계명을 의미하고 가벼운 계명은 덜 중요한 계명을 의미하는데 무거운 계명은 꼭 지켜야 되지만 가벼운 계명은 안 지켜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쉐마”라고 해서 신명기 6장 4~5절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왜 “쉐마”(shema)라고 하는가 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말씀인데 첫 글자 “들으라”(hear)가 “shema”입니다. 그래서 이 계명을 “쉐마”라고 해서 이마에도 써 붙이고 손목에도 써 붙이고 대문간에도 써 붙이고 날마다 읽고 외웁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22:36) 하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613가지 계명을 10가지로 간추린 것이 10계명이고 이 계명을 둘로 줄이면 위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을 하나로 줄인다면 “사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에 대한 말씀이 요한일서 3장 10~18절에 설명되어 있는데 특별히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과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려면 먼저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에 먼저 생각을 바로 해야 합니다. 선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선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1.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
가령 창녀굴에 빠진 여자가 있다고 하면 더럽고 추한 여자로 보고 정죄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가정환경이 나빴으면 저런 죄에 빠졌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버지니아 공대에서 조승희 씨가 총기난사로 32명이나 애꿎은 젊은이들을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우리는 대뜸 고약한 놈, 잔인한 놈, 나라 망신까지 시킨 놈, 하며 별별 악한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얼마나 왕따를 당하고, 알아주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고 대화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그렇게 폭발을 했을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들고, 도와주지 못하고 대화의 대상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가 오죽했으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신 이 말씀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때” 가능합니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저가 무엇을 원할까를 생각해야 남을 바르게 대접할 수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내가 시어머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이해할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내가 저 며느리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고 바꾸어 생각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제일이라고 합니다. 40% 이상이니까 10가정이 결혼하면 4가정 이상이 이혼을 하는데 그 원인도 부부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자기 자존심만 세우려고 하니까 결국은 이혼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상대편의 입장을 생각한다면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입장을 생각하고 교인들은 목사의 입장을 생각하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나 같은 사위를 두었다면 장인, 장모가 만족하실까?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부족함이 많은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 한 남자가 어린 아기를 업고 가는데 그 아기가 얼마나 울어재끼는지 온 기차간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더랍니다. 참다못해 한 여자가 “그 아기 좀 엄마에게 갖다줘서 젖을 물리게 해서 울지 않게 못합니까?” 하고 화를 내니까 아기를 등에 업은 남자가 대답하기를 “아기 엄마가 있으면 왜 안 그랬겠습니까? 이 아기 엄마가 죽어서 저 뒤 칸에 시체를 싣고 가는 중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모두 숙연해지면서 그 남자를 동정하더랍니다. 오늘날 너무 이기주의가 팽배해서 자기밖에 모르고 남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이 여자를 돌로 치리이까 말리이까” 했을 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있으면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씀하시니까 모두 가책을 느끼고 한 사람씩 돌을 버리고 다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예. 없나이다”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하시며 선뜻 용서해서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쉽게 용서해 보내신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고 합니다. “너, 왜 그런 죄를 범했느냐? 너 그럴 수가 있느냐? 너 양심이 있냐? 없냐? 이 나쁜 여자야!” 등등 좀 책망이라도 했음직한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그 여자의 과거, 환경, 입장을 다 이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이 범죄하거나 실수하면 온갖 악담, 저주를 다 퍼붓습니다. 혹독하게 비판합니다. 실상, 자기는 더 큰 죄인인데도 남을 무섭게 정죄합니다.
2. 결과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하기 전에 이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에 “생각하는 모자를 쓰라”, “thinking cap을 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그 말의 결과를 생각해본 다음에 말하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놀라게 한 조승희 군이 32명이나 사살한 참사의 결과를 생각했다면 차마 그런 행동을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오랫동안 외롭게 살고 이해하거나 대화해주는 사람이 없이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정신병에 걸렸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좌우간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죄의 결과는 생각 아니하고 당장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우니까 우선 선악과를 자꾸 쳐다보다가 무서운 죄를 범하고 온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한 믿음이 독실한 미군이 동양 어느 나라에서 근무하던 중 너무 외로우니까 처음에는 맥주를 마시다가 그 다음에는 양주를 마시다가 춤을 추고 놀다가 양공주와 잠을 잤습니다. 근무를 다 마치고 귀국하여 고귀한 가정의 규수와 결혼을 했고 드디어 아기를 가지고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나왔는데 의사가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 귀한 아들이 성병 매독균에 감염되어 눈에 고름이 차고 코가 비틀어지는 등 불구자로 태어났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죄의 결과를 생각지 않고 일시적인 충동을 못 이겨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달콤한 맛으로 유혹합니다.
“괜찮아,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 뭐” 하고 유혹하지만 결과는 100배, 1000배 쓴 맛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에 쓰디 쓴 맛을 주다가 후에 100배, 1000배 달콤한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매일 씨를 심으며 삽니다. 하나님은 매일 우리의 행실을 저울로 달아보고 계십니다. 말이나 행동이나 씨를 심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는 것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결과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성령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도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모든 고난과 시험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심지어 굶주린 사자굴에 빠져 잡혀 먹일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자기와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믿음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임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강단 의자에 좋은 방석을 깔아놓고 아무도 그 자리에 못 앉게 하고 자기도 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이 그 강단에 늘 임재해 계심을 실감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미신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며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서간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 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바라보라. 주만 바라보라. 잠시라도 딴눈 팔지 말고 오직 주만 바라보세”.
전남 광주에 부흥회 인도 차 갔다가 특이하게 목회하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주일 낮 예배나 밤 예배나 수요일 예배, 새벽기도까지 모이는 숫자가 똑같습니다. 강단에 말구유 같은 것을 올려놓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까지 탄생하신 것을 늘 생각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교회 이름도 “예수님의 교회”인데 꼭 “님”자를 붙이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 “예수가”라고 하면서 “님”자를 안 붙이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그 표현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당신, 당신”이란 말을 많이 듣는데(우리 교회는 절대 안 그러지만) 어떻게 육신의 부모한테도 “당신”이라고 못하는데 지극히 존귀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당신”이라고 합니까? “당신”은 3인칭 단수일 때만 극존칭이 됩니다. 가령 제가 누구와 대화하면서 “당신, 참 고집이 세셔” 하고 다른 데 계신 부모님을 당신이라고 할 때 극존칭입니다. 결코 실례가 아닙니다. 그러나 2인칭 단수일 때는 친구나 아랫사람한테나 “당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결코 존칭이 아닙니다. 가령 제 아이들이 저한테 “당신”이 어쩌구 하면 불벼락이 떨어질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1~10절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지켜보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며, 일의 결과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출처/김홍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