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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려진 드라크마 (눅15:8-10)
1962년에 세상을 떠난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자기가 사용하는 악기에 만족을 못하고 좋은 악기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선활동에 열심이다보니 유명한 음악가이면서도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가 여행하다가 아주 질이 좋은 뛰어난 바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 다시 올 터이니 가급적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을 한후 돈을 마련하여 그 악기점을 방문했더니 이미 다른 악기 수집가에게 팔린 후였습니다. 그래서 그 악기 수집가가 사는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가서 그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이미 그 악기 수집가는 자신의 콜렉숀 목록에 들어가서 어쩔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포기하고 그 집을 떠나려고 현관을 향하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돌아서더니 그러면 그 악기가 침묵하기 전 저에게 한번만 연주할 기회를 주겠느냐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허락을 하자 그는 이 악기를 들고 한 10여분동안 신들린 듯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연주가 계속되면서 계속 심각한 표정을 하던 이 악기 수집가는 그의 연주가 끝나자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돌려 드리지요"하고 그 악기를 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악기는 프리츠의 손에서 신기한 음악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손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은 사실상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떠난 모든 인간은 잃어버려진 실존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우리가 방황하는 까닭, 우리의 인생이 음악을 상실한 원인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찾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우리의 안내자자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누가복음15장의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의 실존이 잃어버려진 드라크마(은전)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 잃어 버려진 드라크마(은전)에서 배워야 할 인간 실존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1. 이 은전은 집에서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말틴이라는 이름의 미술 작품 수집상이 있었습니다. 여러해전 그가 유럽 스페인에 날아가서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피카소의 이름난 작품 한점도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이 수집상의 결혼 기념일이어서 두주간의 크루즈 선상 유럽여행을 하고 조금 늦게 도착해 보니 피카소의 작품만 실종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배달 경로에서 착오가 있었거나 도난당했다고 판단한 그는 전 유럽 우편 시스템을 접촉하여 찾았으나 찾을길이 없었습니다. 10여년 후에 그는 잃어버렸던 작품을 우연히 그의 집 창고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추적해본 결과 그가 그 작품은 특별히 잘 배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기에 일반 우편경로가 아닌 특별 미술품 우송 통로로 배달했는데 이 그림을 팔았던 사람은 그 기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서 그에게 특별배달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 작품을 접수한 자기 창고 관리인은 새로 고용된 사람이었는데 너무 '그림같지 않은 그림'(피카소의 그림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이 배달되어 창고 한구석에 쳐박아 놓았는데 주인은 일반 우편 시스템으로 배달된 작품만을 추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찾고 있었던 작품은 10년이나 그의 집 한구석에서 잃어버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집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은전,데나리온)를 찾습니다. 오늘의 이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둘째 비유가 첫째 비유와 구별되는 것은 한 마리의 양은 들판에서 잃어 버려졌는데 이 은전은 집에서 잃어 버려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잃어버린 영혼들이 저 먼 나라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의 집 아주 가까이 어쩌면 우리 집안에서 잃어 버려져 있는지 모릅니다. 이 비유는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영혼들에게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8의 교훈과도 일치하지 않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먼저는 예루살렘입니다. 우리가 살고 일하고 오가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전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만나시는 분들이 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들이 구원의 기쁨속에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라면 바로 그분들이 당신의 태신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들부터 찾으십시오. 그 소중한 영혼 드라크마들이 당신의 목전에서, 당신의 집안에서 혹은 집 가까이에서 잃어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2. 이 은전은 스스로 잃어버려진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질병을 앓고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병은 자각증세가 있어서 병을 조기에 발견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전혀 자각증세가 없다가 어느날 병세를 자각했을때는 이미 늦어버린 때였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각하고 사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전혀 죄의 자각증세 없이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15장에서도 첫 번째 비유의 경우 길을 잃어버린 양은 어느정도 자신이 길을 잃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번째 비유속에서의 잃어버려진 은전이 자기의 잃어버려진 상태를 자각했을까요? 아니지요. 어쩌면 이 은전은 집안 한구석 먼지속에 편안히 묻혀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잃어버려진 사실 그 자체를 알지 못한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둘째 이야기에서 안타까운 것은 본래 이 은전의 주인이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잃어버려진 인간을 바라보시는 자신의 안타까움,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이 은전은 바로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죄인의 실존이라 할만 합니다. 죄인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절실하게 인지하지 못합니다.(피상적인 자각은 있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그는 그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져 있는 존재임을 실존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직면하여 전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구주로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를 이렇게 말합니다."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그러므로 먼저 개인적으로 복음을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사람들은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고백하며 주께 돌아옵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찾아질수 없는 실존-이것이 성경이 본 인간 드라크마의 실존입니다.
3. 이 은전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었으나 잊혀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려진다는 것은 확실히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찾은바 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에 나타난 드라크마는 잃어버렸으나 잊혀 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여주인이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드라크마는 잊을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차지하는 자산이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양은 100마리중 하나이었으나, 두 번째 드라크마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는 10개중 하나이었습니다. 당시의 드라크마(데나리온과 동일)는 하루 일군의 품삯이었는데 10개중 하나를 잃은 것은 당시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습니다. 어떻게 찾았습니까? 본문에 보면 등불을 켜고, 집안의 구석구석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의 옛집 특히 서민의 집들은 대부분 집에 창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은전을 잃어버린 사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등불을 켭니다. 그리고 집의 구석구석을 먼지를 일으키며 쓸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식구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이 여인은 부지런히 찾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찾았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여기에서 왜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주인을 여인으로 묘사했는가를 가지고 논란을 벌립니다. 분명히 잃어버린 하나의 양을 찾는 목자는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누가복음 15장의 세 번째 비유인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둘째 비유에서 이 여인은 잃어버린 인간을 찾으시는 성령 하나님이실까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성령님으로 보기 보다 교회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대사명(Great Commision)이 바로 잃은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옵숀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능적인 의무중의 하나가 아닌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일에 본문에 나타난 여인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최선-그것이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오늘날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최선에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최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그리스도인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한분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침례교 집사 지미 카터일 것입니다. 수년전 타임지는 지미 카터를 가르쳐 대통령 퇴임후 오히려 더 큰 존경을 받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지도자로 그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그는 세계 분쟁이 있는 모든 곳에서 화해의 사신으로 봉사하고, 해비타트 프로젝트로 전세계 여러나라에 망치를 들고 뛰어가 집없는 사람들의 집을 직접 지어줍니다. 매주일이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한달에 한번씩 그의 아내와 더불어 교회청소를 하고, 전도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인생 좌우명은 "Why not the best?"-곧 '최선'입니다. 이 좌우명은 본래 그가 사관학교 졸업후 해군제독과 임관 인터뷰를 할 때 제독이 그의 학교 성적에 대해 질문한후 "그것이 당신의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땀을 흘리며 그는 "글쎄요. 물론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 드릴 수는 없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제독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단 말인가?"고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마치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 그가 처음 한국 방문을 했을 때 주일에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예배드린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이신 한기만 목사님이 저에게 직접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예배후 아래층에 내려와 목사님 사무실에서 차한잔을 나눌 때 한 목사님이 "부탁드릴일이 있습니다."했더니 얼굴이 상기가 되고 긴장하면서 "뭐냐?" 하더래요. 그래서 "잠시후 박대통령을 만나 뵙거든 예수 믿으시라고 전도를 해 주십시오"하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러지 않아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왔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나중에 지미 카터가 박대통령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외신에 알려지면서 미국국내에서 구설수에 올랐을 때 그는 이렇게 기자들에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정식 회의 시간에는 미합중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박대통령과 정치-외교 현안들을 최선을 다하여 의논했습니다. 그후 개인적인 시간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인간 박정희에게 제가 믿는 저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최선을 다하여 전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 시간이 끝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는 기자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다시 예수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하여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했더니 기자들이 다 도망가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선입니다. 추수의 계절-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최선을 다하여 잃어버려진 이웃들, 그러나 잊혀져서는 안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찾아야 할 은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집 가까이 아주 가까이 에서 그들은 여러분과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중한 우리의 드라크마를 찾아 등불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1962년에 세상을 떠난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자기가 사용하는 악기에 만족을 못하고 좋은 악기를 찾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선활동에 열심이다보니 유명한 음악가이면서도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그가 여행하다가 아주 질이 좋은 뛰어난 바이올린을 발견하게 되었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 다시 올 터이니 가급적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을 한후 돈을 마련하여 그 악기점을 방문했더니 이미 다른 악기 수집가에게 팔린 후였습니다. 그래서 그 악기 수집가가 사는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가서 그에게 그 바이올린을 팔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이미 그 악기 수집가는 자신의 콜렉숀 목록에 들어가서 어쩔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가 포기하고 그 집을 떠나려고 현관을 향하다가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돌아서더니 그러면 그 악기가 침묵하기 전 저에게 한번만 연주할 기회를 주겠느냐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허락을 하자 그는 이 악기를 들고 한 10여분동안 신들린 듯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연주가 계속되면서 계속 심각한 표정을 하던 이 악기 수집가는 그의 연주가 끝나자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돌려 드리지요"하고 그 악기를 그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악기는 프리츠의 손에서 신기한 음악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손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은 사실상 잃어버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떠난 모든 인간은 잃어버려진 실존입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우리가 방황하는 까닭, 우리의 인생이 음악을 상실한 원인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찾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우리의 안내자자이신 성령님이십니다. 누가복음15장의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의 실존이 잃어버려진 드라크마(은전)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 잃어 버려진 드라크마(은전)에서 배워야 할 인간 실존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1. 이 은전은 집에서 잃어버린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말틴이라는 이름의 미술 작품 수집상이 있었습니다. 여러해전 그가 유럽 스페인에 날아가서 여러 작품을 한꺼번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피카소의 이름난 작품 한점도 끼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이 수집상의 결혼 기념일이어서 두주간의 크루즈 선상 유럽여행을 하고 조금 늦게 도착해 보니 피카소의 작품만 실종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배달 경로에서 착오가 있었거나 도난당했다고 판단한 그는 전 유럽 우편 시스템을 접촉하여 찾았으나 찾을길이 없었습니다. 10여년 후에 그는 잃어버렸던 작품을 우연히 그의 집 창고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추적해본 결과 그가 그 작품은 특별히 잘 배달해 달라는 부탁을 했기에 일반 우편경로가 아닌 특별 미술품 우송 통로로 배달했는데 이 그림을 팔았던 사람은 그 기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서 그에게 특별배달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편, 이 작품을 접수한 자기 창고 관리인은 새로 고용된 사람이었는데 너무 '그림같지 않은 그림'(피카소의 그림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이 배달되어 창고 한구석에 쳐박아 놓았는데 주인은 일반 우편 시스템으로 배달된 작품만을 추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찾고 있었던 작품은 10년이나 그의 집 한구석에서 잃어버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집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은전,데나리온)를 찾습니다. 오늘의 이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둘째 비유가 첫째 비유와 구별되는 것은 한 마리의 양은 들판에서 잃어 버려졌는데 이 은전은 집에서 잃어 버려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잃어버린 영혼들이 저 먼 나라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들의 집 아주 가까이 어쩌면 우리 집안에서 잃어 버려져 있는지 모릅니다. 이 비유는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는 영혼들에게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8의 교훈과도 일치하지 않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먼저는 예루살렘입니다. 우리가 살고 일하고 오가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전도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만나시는 분들이 다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들이 구원의 기쁨속에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아니라면 바로 그분들이 당신의 태신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들부터 찾으십시오. 그 소중한 영혼 드라크마들이 당신의 목전에서, 당신의 집안에서 혹은 집 가까이에서 잃어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2. 이 은전은 스스로 잃어버려진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질병을 앓고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병은 자각증세가 있어서 병을 조기에 발견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전혀 자각증세가 없다가 어느날 병세를 자각했을때는 이미 늦어버린 때였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자각하고 사는 분들이 있는가하면 전혀 죄의 자각증세 없이 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누가복음15장에서도 첫 번째 비유의 경우 길을 잃어버린 양은 어느정도 자신이 길을 잃고 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의 두 번째 비유속에서의 잃어버려진 은전이 자기의 잃어버려진 상태를 자각했을까요? 아니지요. 어쩌면 이 은전은 집안 한구석 먼지속에 편안히 묻혀 있었을지 모릅니다. 자기가 잃어버려진 사실 그 자체를 알지 못한채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둘째 이야기에서 안타까운 것은 본래 이 은전의 주인이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은 잃어버려진 인간을 바라보시는 자신의 안타까움, 하나님의 안타까움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이 은전은 바로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죄인의 실존이라 할만 합니다. 죄인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절실하게 인지하지 못합니다.(피상적인 자각은 있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비로소 그는 그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져 있는 존재임을 실존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직면하여 전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구주로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를 이렇게 말합니다."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그러므로 먼저 개인적으로 복음을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 사람들은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께서 구주이심을 고백하며 주께 돌아옵니다. 누군가의 손길이 미치지 않으면 찾아질수 없는 실존-이것이 성경이 본 인간 드라크마의 실존입니다.
3. 이 은전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었으나 잊혀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려진다는 것은 확실히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찾은바 될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에 나타난 드라크마는 잃어버렸으나 잊혀 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여주인이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드라크마는 잊을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차지하는 자산이었을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양은 100마리중 하나이었으나, 두 번째 드라크마 비유에서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는 10개중 하나이었습니다. 당시의 드라크마(데나리온과 동일)는 하루 일군의 품삯이었는데 10개중 하나를 잃은 것은 당시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노동자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잃은 은전을 찾습니다. 어떻게 찾았습니까? 본문에 보면 등불을 켜고, 집안의 구석구석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방의 옛집 특히 서민의 집들은 대부분 집에 창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은전을 잃어버린 사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등불을 켭니다. 그리고 집의 구석구석을 먼지를 일으키며 쓸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신과 식구들에게 상당한 불편을 감수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이 여인은 부지런히 찾습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찾았던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여기에서 왜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주인을 여인으로 묘사했는가를 가지고 논란을 벌립니다. 분명히 잃어버린 하나의 양을 찾는 목자는 성자 하나님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면 누가복음 15장의 세 번째 비유인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둘째 비유에서 이 여인은 잃어버린 인간을 찾으시는 성령 하나님이실까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성령님으로 보기 보다 교회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님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대사명(Great Commision)이 바로 잃은 영혼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옵숀이 아닙니다. 교회의 기능적인 의무중의 하나가 아닌 존재이유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일에 본문에 나타난 여인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최선-그것이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오늘날 예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최선에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최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그리스도인 평신도 지도자 가운데 한분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침례교 집사 지미 카터일 것입니다. 수년전 타임지는 지미 카터를 가르쳐 대통령 퇴임후 오히려 더 큰 존경을 받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지도자로 그를 소개한바 있습니다. 그는 세계 분쟁이 있는 모든 곳에서 화해의 사신으로 봉사하고, 해비타트 프로젝트로 전세계 여러나라에 망치를 들고 뛰어가 집없는 사람들의 집을 직접 지어줍니다. 매주일이면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한달에 한번씩 그의 아내와 더불어 교회청소를 하고, 전도지를 늘 가지고 다니며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의 인생 좌우명은 "Why not the best?"-곧 '최선'입니다. 이 좌우명은 본래 그가 사관학교 졸업후 해군제독과 임관 인터뷰를 할 때 제독이 그의 학교 성적에 대해 질문한후 "그것이 당신의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땀을 흘리며 그는 "글쎄요. 물론 최선을 다했다고 말씀 드릴 수는 없겠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제독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단 말인가?"고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마치 주님의 음성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 그가 처음 한국 방문을 했을 때 주일에 여의도 침례교회에서 예배드린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이신 한기만 목사님이 저에게 직접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예배후 아래층에 내려와 목사님 사무실에서 차한잔을 나눌 때 한 목사님이 "부탁드릴일이 있습니다."했더니 얼굴이 상기가 되고 긴장하면서 "뭐냐?" 하더래요. 그래서 "잠시후 박대통령을 만나 뵙거든 예수 믿으시라고 전도를 해 주십시오"하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그러지 않아도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왔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나중에 지미 카터가 박대통령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외신에 알려지면서 미국국내에서 구설수에 올랐을 때 그는 이렇게 기자들에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정식 회의 시간에는 미합중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 박대통령과 정치-외교 현안들을 최선을 다하여 의논했습니다. 그후 개인적인 시간에 저는 그리스도인으로 한 인간 박정희에게 제가 믿는 저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최선을 다하여 전했습니다. 저는 이 인터뷰 시간이 끝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기를 원하는 기자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다시 예수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하여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했더니 기자들이 다 도망가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선입니다. 추수의 계절-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최선을 다하여 잃어버려진 이웃들, 그러나 잊혀져서는 안될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찾아야 할 은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집 가까이 아주 가까이 에서 그들은 여러분과 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중한 우리의 드라크마를 찾아 등불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