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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세가지 축복 (출 20:1~6, 마 16:16~20)
우리 교회의 창립 110주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110년이란 지난 역사와 전통 보다 110주년 이후의 시대가 더 중요합니다. 과거보다 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미래도 없기에 과거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며 교과서입니다. 11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보다 이웃을 더 생각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문 안 보다 영문 밖을 보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형학(Typology)에 따르면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며 모형입니다. 구약의 인물이나 사건은 예수 사건의 그림자이며 모형입니다. 구약도 신약도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오랜 세월 종살이를 하다가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세상에 묻혀 살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교회의 삶을 사는 모형입니다. 광야는 그들의 삶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교회가 우리의 삶의 최종 목적지는 아닙니다. 우리도 죽음의 강을 건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광야란 교회입니다. 광야는 그들의 임시 거처입니다. 교회가 우리의 임시 거처입니다. 광야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의 훈련 장소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의 훈련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출애굽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놓여 광야에 나오게 하셨습니까? 종살이가 불쌍해서입니까? 그들의 고역이 애처로워서입니까? 이 모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게 위함입니다. 예배가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출애굽기 3:12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는 백성들에게 여러 번 반복하여 가르칩니다. “너희가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것이다.”
사흘 길이란 야곱에 처음 애굽에 갔을 때에 바로에게서 목축을 위하여 얻었던 고센에서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까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무데서나 제사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산에서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별한 백성들에게 성별된 장소인 하나님의 산에서 제사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산에서 제사하겠다고 하자 바로의 유혹은 집요했습니다. 이 땅에서 제사하라고 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과 여인들은 빼놓고 장정들만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들의 재산인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 끊임없는 유혹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끝까지 사흘 길을 고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희생을 드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애굽의 신인 이방신을 섬겼습니다. 종살이하면서 주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하나님은 합당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끌어내어 사흘 길을 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얼마든지 예배하고 경건하게 산다면 굳이 구원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교회에 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뭘 교회까지 가느냐고 합니다. 본교회가 먼데 가까운데 가도 하나님이 계신데 가까이서 예배드리고 말자고 합니다. 그 정도 설교는 나도 하겠던데 우리끼리 집에서 예배드리자고 합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는 스타 목사님들이 다 나오는데 그 설교 듣고 예배드리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내 교회 이상으로 은혜 되는 곳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멀어도 며칠 씩 걸려서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자신의 희생이 없이 희생을 드리려는 인간의 욕구가 날로 증대된다”. 내 얘기 아닙니까?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는 시골에서 몇 시간을 걸어 교회에 갔습니다. 예배 한번 드리기 위하여 엄청난 수고를 하였습니다. 깜깜한 새벽에 몇십 분씩을 걸어 새벽 기도에 나갔습니다. 이런 모든 역사들이 이제는 옛 이야기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쇠퇴할 때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회의는 빠지지 않지만 예배는 빠지고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주5일 근무제가 자리를 잡아 가는 듯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내 자신을 위하여 주일을 성수하여야 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목적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온 정성을 다 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 교회가 교회 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야말로 전 신앙의 여정에 있어서 핵심이며 전제이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교회의 현현입니다. 예배는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삶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벧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시다고 합니다. 그가 임재를 체험하였을 때에 돌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돌에 기름을 붓는 심정의 예배가 필요합니다. 찬송과 기도와 봉헌과 설교와 교제와 광고,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사와 축복의 예배이어야 합니다.
구원받고 예배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은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총을 값으로 따지고, 은총을 외면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배은망덕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의 시험문제에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알맞은 인사말은 무엇일까요? 옆집 아주머니께서 떡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아이가 답을 했습니다. “안 사요”. 은혜를 값으로 따지고, 은혜를 외면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아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얻었던 그 축복은 지금 우리 교회에 주신 축복입니다. 광야에서 주셨던 만나도 율법도 성막도 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찮은 것이라고 외면합니다. “안 사요”라고 배척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지 못하고 삽니다.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이 축복이 우리 교회의 감사의 조건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축복은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제일 처음 경험한 놀라움은 만나였습니다. 이것이 첫째 축복입니다. 출애굽기 16:13-18에는 아침과 저녁의 각각의 양식이 나옵니다. 아침에는 만나를 주셨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아침 메뉴였고, 메추라기는 저녁 메뉴였습니다. 우선 가장 시급한 양식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만나는 매일의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의 기준이었습니다. 욕심으로 너무 많이 거두게 되면 벌레가 생겨서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분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벌레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먹는 게 신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는 새벽에 거두게 하신 음식입니다. 해가 나면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새벽에 일어나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거두게 하셨습니다. 주시는 분과 거두는 사람을 구분하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거두는 것은 내 몫입니다. 내가 거두어야 먹을 수 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입니다. 하나님은 거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만들지 못합니다. 거두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한 훈련입니다. 훈련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절대로 훈련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벌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40년을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40년 내내 새벽마다 경이롭고 신비한 음식으로 주셨습니다. 감사함으로 먹는 음식이 축복입니다. 감사하면 맛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중국의 서안에 가보시면 진시황제의 위용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권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입맛도 까다로워 3년 동안 매끼를 다른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은 음식의 종류가 많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먹은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겠습니까?
수도원의 음식은 최소한의 음식입니다. 맛도 없는 매일 똑같은 음식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비가 있으면 매일 맛있어요. 감사함으로 먹는 음식이 맛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면 모든 음식은 비로소 맛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똑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천만에요. 날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도 똑같은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다른 설교합니다. 매번 결혼식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합니다. 장례식 때마다 가보면 다른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상담을 해보면 매번 다른 케이스입니다. 얼마나 다양하고 즐거운지 모릅니다.
우리의 20%의 생각은 80%의 삶을 좌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각이 바뀌면 모든 것이 즐겁고, 모든 것이 재미있고, 모든 것이 맛있습니다.
리더십의 대가인 존 맥스웰은 “생각의 법칙”(Thinking for Change)에서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이로움의 삶을 살았습니다. 매일 먹거리로 풍성하고, 매일 새벽이 신비롭고 은혜가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축복이 우리 교회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출애굽기 16:35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라고 합니다. 그들은 40년을 이 축복으로 살았습니다. 이 만나가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만나를 법궤 안에 두 돌비와 아론의 삯난 지팡이와 함께 보관할 만큼 소중한 축복이었습니다. 이런 축복의 삶이 우리의 남은 여정에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축복은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산에 오르게 하십니다. 광야 생활 처음 3개월 동안 모세는 무려 8번이나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중에서 두 번은 40일간 금식 기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가지고 내려 왔을 때 이스라엘 공동체는 큰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금을 모아 송아지 상을 만들었고 거기에 절하고 춤을 추며 광란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받아 가지고 오는데 그들은 율법의 첫 두 계명을 어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어기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출애굽 후에 주신 축복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간섭하시는 귀찮은 올가미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받는 자답게 살도록 하시는 은총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자는 율법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받았으니 이제 율법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입니다. 절대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하나님께 대한 대가입니다. 구원의 조건과 구원의 결과는 다릅니다. 구원의 조건은 은혜이지만 구원의 대가는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았기에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계명을 주실 때에 “너희를 위하여”란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 우리가 대단한 일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 스스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은총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들이 율법입니다.
예배와 성수주일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우리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실 일이기 이전에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십일조와 봉헌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복받는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덕 보시는 일이 아닙니다. 교제와 섬김도 그렇습니다. 교제하고 섬기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가 즐거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총회나 우리 교회가 정한 작은 법까지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법질서가 자리 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 법이라도 잘 지키고 법을 존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판결에 승복하고 더 이상 혼란이 없기를 바랍니다.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부의 결정을 국민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법은 지켜야 비로소 가치가 있습니다.
원래 규칙을 뜻하는 ‘rule’이란 말의 어원은 회초리(rod)를 뜻하는 라틴어 ‘rugula’에서 온 말입니다. 통치자라는 말의 ruler도 같은 맥락입니다. 규칙은 형식적인 절차와 만연하는 관료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인 동시에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율법을 주셨지요? 하나님이 왜 율법 주셨을까요? 율법을 행함으로, 바른 것을 행함으로 의가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낡은 것이고, 깨지는 것이고, 의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이상의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포르투갈 속담에 “하나님은 구부러진 선을 곧게 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부러지고 복잡한 율법을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한번에 바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10계명을 기초로 하여 유대인은 613개의 율법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후에 예수님은 613개를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온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배운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네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그 사랑은 영원하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축복입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바르게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사랑으로 채우신 것이 축복입니다. 이 두 번째 축복이 교회에서 잘 집행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축복은 성막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여섯 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있을 때에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라고 하시셨습니다. 성막에 대한 모든 규범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광야에서의 축복입니다. 출애굽기 25장 이하의 말씀에는 성막의 건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엄청난 선물이었습니다.
성막의 의미는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출애굽기 25:8에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만들어 만나고 만남으로 죄가 사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뜨거운 친교가 이루어지는 장소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개별적인 장소입니다. 출애굽기 25:22에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라고 하셨습니다.
축복인 성막의 건축은 즐겁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25:2에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가 내게 바치는 모든 것을 너희는 받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위해 지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5:8에는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라고 합니다. 이 성막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전입니다. 그리고 성막은 하나님의 식양대로 지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5:9에는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지으면 되는 것입니다. 옛날 노아도 방주를 지을 때에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지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명하심과 같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첫 번째 기적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막 건축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입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모름지기 교회에 나오기를 즐겨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성막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생활은 교회 중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도 직장도 일터도 다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의 중심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22:1에는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정말 교회에 올라오는 일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생각만 해도 기뻐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도리입니다. 성도의 축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성막이나 예루살렘의 성전이나 지금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복을 받고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얼마 전 신문에 이 시대의 슬픈 기사가 났습니다. 죽음으로 끝난 10억원 만들기입니다. 세무공무원으로 퇴직한 어느 분이 퇴직금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부인과 사별하고 딸과 함께 상경해서 옥탑방에서 부녀가 살면서 10억원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주식에 투자하고, 로또복권을 샀습니다. 이들은 1년 4개월 만에 돈을 모두 날리고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딸은 죽고 아버지는 구속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1년 이내에 10억을 만들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하여 퇴직금을 모두 투자하였다가 다 날린 것입니다. 가장 큰 축복인 생명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꾼 것입니다. 세상에는 축복을 저주로 바꾼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반면에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사람도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에 북군의 장군이었던 윌리엄 넬슨(William Nelson)은 켄터키 전투에서 말다툼 끝에 가슴에 총을 맞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사소한 말다툼 끝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병사들이 장군에게 달려갔을 때 장군은 “목사님 불러주게. 세례 받고 싶네”라고 하였답니다. 남은 자신의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었습니다. 이 때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을 생각했겠습니까?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겠습니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영혼을 준비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것입니다.
교회에 주신 만나도, 율법도, 성막도 다 현재와 영혼을 이어주는 은총입니다.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입니다. 생명을 다 하여 지켜야 할 축복입니다. 영혼을 향한 현재적 은총입니다. 현재를 살면서 현재에 골몰하여 축복을 상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교회를 통해 주시는 만나와 율법과 성막의 축복을 잘 지켜 우리의 인생 여정에 복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