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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고 충성된 사람들 (마 25:20-3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5:20-30)
어떤 주인이 외국 출장을 가면서 종 세 사람을 불렀습니다. 각각 달란트를 나눠주면서 지혜롭고 충성되게 관리할 것을 당부한 후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은 예수님이고 종들은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이고, 종들과 계산한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14절을 보면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맡겼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주인의 돈"이라고 했고, 25절에서는 "당신의 달란트"라고 했고, 27절 역시 "내 돈"이라고 했습니다. 그 돈의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종의 특징은 자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물질도, 소유도, 자유도 주인의 것입니다. 종의 것이 아닙니다.
"맡겼다"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융자를 준 것도 아니고, 선물로 준 것도 아닙니다. 보너스를 준 것도 아니고, 상금으로 준 것도 아닙니다. 맡겼습니다.
고린도전서 4:1-2을 보면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맡은 자」라는 말은 집이라는 말과 다스리는 자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두 단어가 합성되어 맡은 자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여기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맡은 자일뿐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도 주목해야 합니다. "각각 재능대로" 다섯달란트를, 두달란트를, 한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 당시 금화 한달란트는 현재 시가로 5억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5달란트는 25억 정도의 큰 돈이 되는 셈입니다.
어쩌면 그 주인은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맡기고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달란트는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능을 달란트(talent)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탤런트는 재주꾼, 재능이 많은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재능과 여건과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달란트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입니다. 관리 결과에 따라 상벌과 성패와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1. 달란트 받은 사람들
16절을 보면 "바로 가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은행에 예금할까? 장기 투자 은행에 예치할까? 주식을 살까? 부동산에 투자할까? 따지고 생각하고 사색하지 않고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바로 가서"가 중요합니다.
주인이 돈을 주면서 "뭘 하라"고 지침을 내린 일이 없습니다. 그냥 맡기고 떠났습니다.
두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대로 했습니다. 순종은 바로 해야 합니다. 결단은 즉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달랐습니다. 18절을 보면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가는 것은 같았지만 땅을 파고 감춘 것은 달랐습니다. 은행제도가 없었던 고대에는 보물을 보관하는 방법이 땅을 하고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인의 뜻이 땅을 파고 감추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감출 바엔 주인이 직접하지 왜 종에게 시켰겠습니까?
달란트로 장사해 이익을 남긴 사람과 땅 속에 감추어둔 사람의 차이점은 주인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관리 방법, 갈무리 방법이 달랐습니다.
2. 드디어 회계할 때가 돌아왔습니다.
19절을 보면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 할새"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의미하고 회계했다는 것은 계산하고 정산하고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잘한 사람은 상급 받는 것이고, 못한 사람은 책망 받고 심판 것을 말합니다.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 받았던 종들에게 내린 칭찬과 상급은 유사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고, 23절을 보면 두달란트를 더 남긴 종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했고, 많은 것을 더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는 것입니다. 다섯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준 상급을 살펴보십시다.
1)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2)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했습니다.
3)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4)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했습니다.
이 종은 주인의 신임을 받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더 많은 재산을 맡게 되었고 주인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된 것입니다.
본래 종은 잔치에 수종드는 사람이지 참예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특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배설한 잔치를 21절에서는 "주인의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의 잔치는 즐거운 잔치입니다. 계시록 19:9을 보면 장차 어린 양 예수의 혼인 잔치가 하늘에서 벌어집니다. 바로 그 잔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게 벌리는 하늘나라의 축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한달란트는 5억 상당의 거금입니다. 그런데 그는 땅을 파는 감추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27절을 "네가 마당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 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본 전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은행 이자라도 가져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28절 30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1) 한달란트를 빼앗아 열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 으리라
가진 것을 빼앗겼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았습니다. 집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했습니다.
지옥을 음부 혹은 스올, 어두운데라고 합니다. 집안에서 집밖으로 쫗겨 났다는 것은 구원 공동체에서 지옥으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뜨겁고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불리 끓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영원히 불에 타 죽지도 않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는 사람마다 슬피 울부짖고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왜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을까?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24절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섯달란트나 두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오해한 것입니다.
"굳은 사람, 심지 않고 거두는 사람,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이라는 것은 전형적 유대인 수전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요. 그런 수전노, 앞뒤가 막힌 사람, 인정사정없는 사람이 5억, 10억, 25억을 선뜻 맡길 수 있습니까?
이 종은 주인을 불신하고 악담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을 믿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그런 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감격도 은총에 대한 감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 다섯 사람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 A가 말했습니다. "예수가 죽었대" B 할머니 "십자가에 걸려 못에 찔려 죽었대며?" C할머니 "그래 맞아. 예수 그 양반 머리 풀고 다닐 때부터 알아 봤지. 그럴 줄 알았대니까" D할머니 "예수가 누구야?" E할머니 "우리 며느리가 아버지 아버지 불러 대는 것 보니까 우리 사둔 영감인가봐"
신학교 교수님이 저에게 해준 유머입니다. 예수를 보는 눈이 다 다릅니다. 해석도 각각 다릅니다. 그러다보니 말도 다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어떤 예수로 보느냐 입니다. 그 관점과 신앙에 따라 다섯달란트 맡은 종처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 사람의 종들과 같습니다. 각각 재능대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5, 3, 1 중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얼마를 남겼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 가능성, 내 능력, 내 재능을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최근 개발 도입된 PET(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로 촬영하면 5미리 크기 정도의 종양도 발견 할 수 있고 전이, 재발여부, 항암 제 투여 효과까지 확인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볼 수 없는 종양의 위치, 전이여부 등을 PET는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에 맞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금년 한 해 어떻게 갈무리 했습니까? 배를 남겼습니까? 땅에 묻어 두었습니까?
요즘은 모든 분야에 평가제가 도입되었습니다. 대학 교수도 실력과 강의가 평가 이상일 때 연임이 가능합니다.
전문 경영인도 평가가 어떠냐에 따라 년봉이 결정되고 지위가 보장됩니다. 일을 안하거나 못하면 나이 상관없이 밀려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한달란트 받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해 한달란트를 더 남겼다면 다른 종과 똑같은 예우와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비꼬고 비난하고 악평하면서 자기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 받았고, 가진 것을 빼앗겼고, 쫓겨났고 그리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지옥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교회 일, 교회 직분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땅을 파고 감추어 두지 맙시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1:10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쓰느냐에 따라 칭찬과 책망, 상급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유익한 종이 되길 원합니까? 무익한 종이 되길 원합니까?
이상근 박사님은 "무익한 종은 결국 해로운 종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달란트를 감춰두거나 땅에 묻어 놓는 종은 무익한 종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해를 끼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 주님의 일은 일할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 할 줄 아는 사람(재능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 맡았으면 최소한 배는 남겨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엔 이자라도 남겨야 합니다.
* 칭찬받고 인정받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 더 많은 것을 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국엔 주인이 배설한 잔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태복음 25:20-30)
어떤 주인이 외국 출장을 가면서 종 세 사람을 불렀습니다. 각각 달란트를 나눠주면서 지혜롭고 충성되게 관리할 것을 당부한 후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은 예수님이고 종들은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신다는 것이고, 종들과 계산한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14절을 보면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맡겼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주인의 돈"이라고 했고, 25절에서는 "당신의 달란트"라고 했고, 27절 역시 "내 돈"이라고 했습니다. 그 돈의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종의 특징은 자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도, 물질도, 소유도, 자유도 주인의 것입니다. 종의 것이 아닙니다.
"맡겼다"는 말씀도 주목해야 합니다. 융자를 준 것도 아니고, 선물로 준 것도 아닙니다. 보너스를 준 것도 아니고, 상금으로 준 것도 아닙니다. 맡겼습니다.
고린도전서 4:1-2을 보면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맡은 자」라는 말은 집이라는 말과 다스리는 자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두 단어가 합성되어 맡은 자라는 말이 되었습니다.
여기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맡은 자일뿐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5절도 주목해야 합니다. "각각 재능대로" 다섯달란트를, 두달란트를, 한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 당시 금화 한달란트는 현재 시가로 5억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5달란트는 25억 정도의 큰 돈이 되는 셈입니다.
어쩌면 그 주인은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맡기고 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달란트는 단순히 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능을 달란트(talent)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탤런트는 재주꾼, 재능이 많은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재능과 여건과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달란트를 어떻게 관리하느냐 입니다. 관리 결과에 따라 상벌과 성패와 생사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1. 달란트 받은 사람들
16절을 보면 "바로 가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했습니다. 은행에 예금할까? 장기 투자 은행에 예치할까? 주식을 살까? 부동산에 투자할까? 따지고 생각하고 사색하지 않고 바로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바로 가서"가 중요합니다.
주인이 돈을 주면서 "뭘 하라"고 지침을 내린 일이 없습니다. 그냥 맡기고 떠났습니다.
두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대로 했습니다. 순종은 바로 해야 합니다. 결단은 즉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달랐습니다. 18절을 보면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가는 것은 같았지만 땅을 파고 감춘 것은 달랐습니다. 은행제도가 없었던 고대에는 보물을 보관하는 방법이 땅을 하고 감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인의 뜻이 땅을 파고 감추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감출 바엔 주인이 직접하지 왜 종에게 시켰겠습니까?
달란트로 장사해 이익을 남긴 사람과 땅 속에 감추어둔 사람의 차이점은 주인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관리 방법, 갈무리 방법이 달랐습니다.
2. 드디어 회계할 때가 돌아왔습니다.
19절을 보면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 할새"라고 했습니다.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의미하고 회계했다는 것은 계산하고 정산하고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잘한 사람은 상급 받는 것이고, 못한 사람은 책망 받고 심판 것을 말합니다.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 받았던 종들에게 내린 칭찬과 상급은 유사합니다.
21절을 보겠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했고, 23절을 보면 두달란트를 더 남긴 종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했고, 많은 것을 더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는 것입니다. 다섯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준 상급을 살펴보십시다.
1)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했습니다.
2)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했습니다.
3)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4)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했습니다.
이 종은 주인의 신임을 받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더 많은 재산을 맡게 되었고 주인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된 것입니다.
본래 종은 잔치에 수종드는 사람이지 참예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특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인이 배설한 잔치를 21절에서는 "주인의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의 잔치는 즐거운 잔치입니다. 계시록 19:9을 보면 장차 어린 양 예수의 혼인 잔치가 하늘에서 벌어집니다. 바로 그 잔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게 벌리는 하늘나라의 축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한달란트는 5억 상당의 거금입니다. 그런데 그는 땅을 파는 감추어 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27절을 "네가 마당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 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본 전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은행 이자라도 가져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28절 30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1) 한달란트를 빼앗아 열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 으리라
가진 것을 빼앗겼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았습니다. 집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했습니다.
지옥을 음부 혹은 스올, 어두운데라고 합니다. 집안에서 집밖으로 쫗겨 났다는 것은 구원 공동체에서 지옥으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뜨겁고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불리 끓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영원히 불에 타 죽지도 않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는 사람마다 슬피 울부짖고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한달란트 받은 사람은 왜 땅을 파고 감추어 두었을까?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24절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섯달란트나 두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오해한 것입니다.
"굳은 사람, 심지 않고 거두는 사람, 헤치지 않고 모으는 사람"이라는 것은 전형적 유대인 수전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요. 그런 수전노, 앞뒤가 막힌 사람, 인정사정없는 사람이 5억, 10억, 25억을 선뜻 맡길 수 있습니까?
이 종은 주인을 불신하고 악담하고 오해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을 믿지도 않고, 신뢰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그런 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감격도 은총에 대한 감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할머니 다섯 사람이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할머니 A가 말했습니다. "예수가 죽었대" B 할머니 "십자가에 걸려 못에 찔려 죽었대며?" C할머니 "그래 맞아. 예수 그 양반 머리 풀고 다닐 때부터 알아 봤지. 그럴 줄 알았대니까" D할머니 "예수가 누구야?" E할머니 "우리 며느리가 아버지 아버지 불러 대는 것 보니까 우리 사둔 영감인가봐"
신학교 교수님이 저에게 해준 유머입니다. 예수를 보는 눈이 다 다릅니다. 해석도 각각 다릅니다. 그러다보니 말도 다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어떤 예수로 보느냐 입니다. 그 관점과 신앙에 따라 다섯달란트 맡은 종처럼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 사람의 종들과 같습니다. 각각 재능대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5, 3, 1 중 어느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얼마를 남겼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내 가능성, 내 능력, 내 재능을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나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최근 개발 도입된 PET(양전자 방출 단층 촬영)로 촬영하면 5미리 크기 정도의 종양도 발견 할 수 있고 전이, 재발여부, 항암 제 투여 효과까지 확인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내가 볼 수 없는 종양의 위치, 전이여부 등을 PET는 알아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에 맞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금년 한 해 어떻게 갈무리 했습니까? 배를 남겼습니까? 땅에 묻어 두었습니까?
요즘은 모든 분야에 평가제가 도입되었습니다. 대학 교수도 실력과 강의가 평가 이상일 때 연임이 가능합니다.
전문 경영인도 평가가 어떠냐에 따라 년봉이 결정되고 지위가 보장됩니다. 일을 안하거나 못하면 나이 상관없이 밀려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한달란트 받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해 한달란트를 더 남겼다면 다른 종과 똑같은 예우와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을 비꼬고 비난하고 악평하면서 자기 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 받았고, 가진 것을 빼앗겼고, 쫓겨났고 그리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지옥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교회 일, 교회 직분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땅을 파고 감추어 두지 맙시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1:10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쓰느냐에 따라 칭찬과 책망, 상급과 심판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유익한 종이 되길 원합니까? 무익한 종이 되길 원합니까?
이상근 박사님은 "무익한 종은 결국 해로운 종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달란트를 감춰두거나 땅에 묻어 놓는 종은 무익한 종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해를 끼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 주님의 일은 일할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 할 줄 아는 사람(재능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 맡았으면 최소한 배는 남겨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엔 이자라도 남겨야 합니다.
* 칭찬받고 인정받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 더 많은 것을 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국엔 주인이 배설한 잔치,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