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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기도 (출애굽기 32: 30-35; 로마서 9: 1-3)
저는 이 시간, 낙산교회에 대한 저의 사랑의 표현을 오늘 읽은 성서본문과 그 본문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전달해 보려고 합니다. 4개월이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주어진 시간을 저로서는 말씀 전달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 해 보았습니다만, 역시 잠언 16장 1절이 말씀하고 있듯이,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께서 하신다"라는 말씀대로, 저는 저의 최선을 다하고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그 결실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 결정하실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거운 생각을 접고 용감하게 오늘 말씀을 들고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서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그동안 많은 사랑과 격려를 보내 주신데 대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모세"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그 이름을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위대한 민족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태생은 천한 히브리인이었지만 그는 이집트 공주의 양자가 되어 이집트 왕국의 왕자 대접을 받으며 왕궁에서 자라며 왕실교육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인 "모세"는, 이집트 고대 왕국 제 18대 왕조 때부터 그 이름이 등장하였던 왕들이 "카모세"(Kamose) "아모세"(Amosis) "투트모세"(Thutmosis) 등등 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그의 이름은 이집트식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저 웅대한 피라밋 문명국의 왕실에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이, 그리고 수준 높은 왕실교육을 받아 온 기원 전 13세기 시대를 주름잡은 최상의 엘리뜨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 들어 성년이 되어 가면서 그러한 화려한 왕궁생활이 오히려 수치스럽다는 것, 즉 저 거대한 애굽 문화 건설에 동원되어 갖은 고통을 다 겪는 자기 동족의 아픔을 생각하면, 그러한 왕궁생활이란 하나의 죄악으로만 여겨져서 그 모든 것을 다 벗어 던지고 왕궁을 뛰쳐 나와 고통받는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 갔습니다. 그리고는, 거기 애굽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히브리 동족들을 그 곳에서부터 이끌어내어 그 무산대중들에게 아무리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어도 야훼 하나님을 자유로이 섬길 수도 없고 예배할 수도 없으며 마음 놓고 자유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자유가 없는 이집트의 종살이란 결코 인간다운 인간의 삶은 아니라고 깨우치고 계몽시켜 준 그 시대의 위대한 히브리인 선각자였었습니다. 또한 모세 그는 노예근성에 얽매여 사는 그 종살이의 삶이 오히려 하늘이 내려 준 하나의 운명인양 생각하는 무기력한 저 떠돌이 무리인 히브리 민중들을 충동하여 저 거대한 이집트의 피라밋 문화에 도전하여 감히 저 이집트 대제국을 극복해 이겨 보자는 출애굽 혁명의 깃발을 들게 한 위대한 민족운동의 기수였었습니다.
또한 "모세," 그는 역사의식이 미약하였던 민중들에게 "고난받는 민중"이 세계역사의 핵이요 세계 문화 건설의 축이라는 새로운 역사의식과 엘리트 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인류 역사란 운명의 수레바퀴를 따라 정해진 회로를 쳇바퀴 돌듯 돌아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주 야훼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새 창조의 한 과정"이라고 하는 또하나의 새로운 역사의식을 고취시킨 중동지역을 비춘 하나의 "별"이요 "빛"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 그는,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소아시아, 시리아, 남부 팔레스틴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소위, "반달모양의 옥토지대"의 초원을 찾아 다니며 구걸하듯 유랑하든 저 소수의 힘없는 짚시 유민들에게 그 짚시안적인 유랑생활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하늘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선민"(選民)이라는, 세계 역사의 중심 돌쩌귀 역할을 하는 "엘리트 민족"이라는 확고한 민족의식과 우월감을 갖게 해 준 그 시대의 위대한 정신적 지주였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 그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성서기자들과 현대의 많은 성서학자들이 믿고 있는 바, "이스라엘"에게 "야훼 종교"를 처음으로 소개하여 그 야훼신앙을 가지고 각양각색의 이질 문화를 갖고 있는 다양한 종족들을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신앙으로 뭉쳐진 강력한 "야훼 신앙공동체"로 창출해 낸 전대미문의 강력한 신앙 지도자였었습니다. 더욱이, 먹을 것, 마실 것 없는 사막, 저 불붙는 시나이 반도, 그 멀고도 먼 사막 길을 젖먹이 아이를 제외하고서도 60만에 가까운 그 많은 무산대중들을 이끌고 나와, 저 죽음의 사막 길을 인도해 가겠다고 나선 집념의 사나이가 바로 "모세"였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끄시면 능히 홍해도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고 사막도 야자수 우거진 오아시스 지역을 지나가듯 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신앙의 사람이 모세 였었습니다.
과연, 그는 그의 믿음과 그의 집념대로 살기를 품고 추격해 오던 초강대국 이집트의 정예군대들을 따돌리고 저 홍해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서 불모의 사막길을 도보로 만 2개월, 이집트를 떠난지 셋째 달 초 하루 날(출 19:1), 드디어 그들의 첫 목적지인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신체적 조건으로 보아서는 전적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낮에는 구름 그늘로, 밤에는 별들의 불빛으로 인도하시면서 먹을 것이 없는 황무지의 사막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저들을 먹이시고 바위를 쳐서 물이 나게 하시어 목마른 그들로 마시게 하여 드디어 그들을 인도하시던 하나님의 현존 장소인 시내산에까지 오게된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여기 이 곳에서 꼭 하여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무산 대중이, 다시 말해서, 야훼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잡다한 종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 혼합 민중들이 하나의 구심점(求心點)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 즉 세계를 움직이는 "열국의 빛"(a light to the nations)의 기능을 담당할 "선민(選民)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는!! 그 무엇보다 야훼 하나님의 뜻으로 무장하는 일!!, 이른 바, "이스라엘을 진정한 선민 공동체로서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무지한 민중이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어서는 세계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뜻은 모르는체 마구잡이의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에 만 숙달된 이 무산 대중이 "선민 공동체"로 완전 탈바꿈을 하기 위하여서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고 의식화되는 교육 기간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 민중의 또다른 지도자인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명을 대동하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 선민(選民)이 지켜야 할 계율인 "토라" 즉 율법을 받고 그 토라를 가운데 두고 서로가 이 "토라"에 성실할 것을 서약하는 계약을 하나님 앞에서 맺고 하산(下山)하여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엄히 가르치고 당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는 자신의 부관인 여호수아 만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구술로만 전수하신 그 계명들을 돌판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것을 받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아론과 훌에게 백성을 위탁하고 부관인 여호수아 한 사람 만을 데리고 40일을 작정하고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 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 지도자인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의 "리트릿"(retreat)이었습니다. 토라를 한자 한자 돌판에 기록하면서 민족의 미래, 특히 앞으로 남은 가나안을 향한 그 길고도 지루한 광야행군을 어떻게 인도할지를 되새김하면서 자기 정화의 시간을 갖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모세는 아직도 미숙하고 잘 다듬어지지 않은 민중들을 아론과 훌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산에서의 놀라운 경험을 공유하였었던 70인 장로들에게 그들 백성을 맡겨 놓고 40일 간의 "리트릿"을 하기 위하여 여호수아 만을 데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다시 올라 갔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 기간이 그 무엇보다 매우 중요하였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선교의 첫 출발을 할 때, 광야로 40일 간 물러가서 "리트릿"을 한 것과 꼭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진솔한 자기 반성과 기도의 시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모세는 40일 간의 "리트릿트"(retreat)를 마치고 야훼 하나님께서 손수 써 주신 두 계명 돌판을 손에 들고 하산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독촉이 큰 영향을 발휘하였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서 내려 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도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금으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그것에게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神)이다'라고 외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격분한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이 백성을 지금 즉각 응징하여 진멸시키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 이 다급한 상황에서 민족 지도자인 모세가 취하였던 즉각적인 반응은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단코 임기응변의 순간적 대응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틀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명성에 의지하여 용서를 호소하고 분노를 거두어 주시기를 비는 길 밖에 달리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이것은 분명 기원 전 13세기 중동 세계의 최대 지성인인 모세가 신속히 대처한 반응이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모든 자존심을 다 내어 던지고 자신의 영혼을 내어 던져 이렇게 하나님께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야훼여,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산에서도 죽게 하고 광야에서도 죽게 하였다 라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켜 주십시오. 주의 백성에게 내릴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은혜와 긍휼의 신이신 야훼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즉각적 심판을 유예하시게 하였고 서둘러 자기 백성이 있는 곳으로 내려 오게 된 것입니다.
아, 그러나, 목이 곧고 고집이 센 이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위임한 아론과 훌의 지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 긍휼의 인내와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 땅의 농경문화에서 횡횡하던 저 바알주의적인 송아지 상 숭배의 예배와 광적 댄스(cultic dance)로 야훼주의 정신을 깡그리 짓밟아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범한 대단한 오만과 배신의 야만적 신성모독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출발했던 때의 그 정신을 완전히 내어 버리고 그들이 그토록 청산하자고 외쳤던 그 청산해야 할 낡은 물질주의와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이방 종교를 오히려 다시 끌어 들이고 그것을 칭송하며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뻔뻔스러운 자세로, 그 세워 놓은 금송아지 상 앞에서 광적인 춤을 추며 노래하면서 힘의 논리를 상징하는 우상 앞에 부복하고서 온갖 아부와 아첨과 아양을 다 떨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만 자제력을 잃어버렸고 격분한 나머지 조심스럽게 모시듯 손에 들고 내려 왔던 그 두 계명 돌판을 저 저주스러운 금 송아지 상을 향해 힘껏 내어 던져 깨뜨려버렸던 것입니다. 그 다음 모세는 그 송아지 상을 불에 태워 가루가 될 때까지 빻아서 그 가루를 사면에 뿌려 버렸습니다. 그러나, 모세 그는, 아, 영원한 지도자인 모세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저들 백성들을 단념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도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셨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불붙는 동족애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 자기 백성의 용서를 빌기 위하여 하나님의 산으로 다시 올라가 사생결단의 기도, 즉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기도를 자기 심혼을 다 쏟아 부어 기도를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감히 이와 같이 수준 높은 기도를 저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적소에 인용하여 대중을 향하여 읽을 수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경건한 마음으로 제가 다시 한 번 더 31절부터 35절까지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주께로 돌아가서 아뢰었다. "아,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金)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감히 아뢰오니, 이제 주께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해 주시지 않으시려면, 주께서 기록하신 생명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생명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약속한 땅으로 저 백성을 인도하여 가거라. 보아라,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만은 꼭 기억해 두어라. 죄를 물어야 할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 그 뒤, 먼 후일에,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첫째는 모세의 기도는 매우 성공적인 응답을 이끌어 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재앙 내리시는 것을 과감히 거두시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그 길을 모세로 하여금 계속 인도하여 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의 천사를 모세에게 보내시어 모세로 하여금 천사를 대동(帶同)하게 하시기끼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 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즉 (2)둘째로는 모세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부터 지워달라는 요청에 대하여서는 거절하시면서 그 대신 하나님의 응답의 가능성을 좀 더 넓고 길게 열어 두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중요성이 들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응답의 두 번 째 요소 속에는 openness와 patience 즉 "열어 두심"과 "인내하심"이라는 이중적 요소가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openness는 이중적 성격을 띄었습니다. 즉 잠정적 용서와 하나님의 인내가 상호작용하는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대하여 그의 긍휼하심의 자극을 받아 즉각적인 응징은 거두시고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분노(憤怒)를 영원히 거두어 들이실 수 있도록 회개(悔改)하는 가를 두고 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열어두심"과 "인내하심" 즉 "openness"와 "patience"는 이와 같이 긴밀한 역학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본질(本質)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노(怒)하기를 더디! 하시기는 하시지만, 죄를 물을 때가 되면 반드시 죄를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영원히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모세의 기도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목숨을 건 중보 기도 덕분에 우리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나, 그 가능성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5절 말씀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그 뒤에 야훼께서는 아론이 수송아지를 만든 일로,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절은 결정론적인 성격의 말씀이거나 운명론적인 성격의 말씀이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성격의 결정론이나 운명론이나 숙명론과 같은 그런 것은 본래부터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는 늘 "운명과 자유"가 공존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서의 기본 입장입니다.
모세는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고!! 자기 민족의 용서와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의 목숨 포기는 보통 말하는 "목숨 포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록(生命錄)에서 자신의 이름이 영원히 지워져 버리는, 이른 바, 이 세상에서는 가장 저주스러운 "생명 포기"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한 때는 이러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인 바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 본문, 로마서 9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절규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제 양심이 성령 안에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제게는 제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제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저는, 육신으로 제 동족 제 겨레를 위하는 일이라면, 제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부르짖은 적이 있었습니다.
외람되지만, 제게도 이런 문맥 속에 들어오는 "하나님 경험"이 있었습니다. 나이 만 28세, 그러니까, 1968년 겨울, 구정이 가까웠던 때였습니다.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끝내고 모든 훈련이 끝나, 목사가 되려는 무렵, 저는 너무 많은 각혈로 인하여 거의 탈진이 된 상태로, 마치 걸레 조각처럼 되어, 사력을 다하여 서울발 경북 청도행 기차를 타고 무작정 고향으로 내려 갔었습니다. 시골 초가집 방 한칸, 창호지로 바른 조그만 창이 남쪽을 향해 있는 한 작은 공간 안에서 저는 마치 시체처럼 누워서 7개월의 시간을 "중증 폐결핵"이라는 저승사자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력을 다하여 쓴 "김이곤 사망"이라는 다섯 글자의 조전문을 막내 동생에게 넘겨 주면서 "내가 죽으면 서울에 계시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김정준 박사에게 이 조전을 쳐라"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동생은 울었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시간 시간들, 그러나, 새벽마다 새벽기도회 시간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제가 신학대학 재학 시절에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던 그 고향 교회 제자들이, 그 때 겨우 10대 중 후반되는 청소년들이 저희 집으로 몰려 와서는 조막손 같은 손들을 두손 모아 울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부지예, 우리 김선생님 살려 주이소. 예?"라고 외치며 울부짖는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특히 그 모든 기도들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있는 기도는 밤을 지새우다시피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 오신 저의 어머님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아부지예, 저 이고(이곤)이를 한번만 살려 주이소. 저게 목사가 되겠다고 하도 케사서 신학교를 보냈더니 이제 신학 공부도 다마치고 목사가 될라고 카는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꺼? 이제 저 놈이 죽으면 이 청도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는 일 이 안되겠십니꺼? 저 놈을 정말로 데리고 가실라 카시면, 마, 차라리 이 늙은 어미를 저 이고(이곤)이 대신 데리고 가이소!!"
이것이 그토록 오랜 동안 계속된 제 어머님의 기도들의 내용 전부였었습니다. 비록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名聲]에 호소하는 차원 높은 신학도 들어 있기는 있었습니다만, 어머님의 기도는 그러한 기도의 격식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전(全) 영혼의 분출, 그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기도 앞에서, 즉 이 병든 못난 자식 대신에 자신을 대신 데려가시어 달라시며 한사코 매달리시는 그 대속적 기도 앞에서 신학이니 종교 교리니 제도적 종교관행이니 하는 것들이란 참으로 하잘 것없고 무기력하며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다른 언어가 거기에 더이상 필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 어머님의 기도는 마냥 그런 식으로만, 그냥 그렇게 그대로만, 무려, 약 3개월이나 계속되었을 무렵, 저는, 가망없다고 의사들이 다들 머리를 내어 두르든 제가, 놀라웁게도 조금씩 조금씩 회복세를 나타내어 보이더니 드디어는 회복기미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부터 약 4개월 쯤이나 지났을 때인 1968년 8월 초, 즉 고향으로 내려 온지 만 7개월쯤이나 되었을 때, 저는, 전혀 예기치 못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나서, 그것도 모교인 한국신학대학으로부터 전임강사로 선임이 되었으니 올라오라 라는 학교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 비록 완전한 몸은 아니었지만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되었으며 기억도 생생하게 1968년 8월 15일자로 전임교원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잠시 학교에 분규가 있었을 때, 짧은 기간 동안 진주와 대구 지역에서 목회를 하였었던 3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33년의 세월인 제 일생을 모교에서 구약학 교수로서의 생활을 지금까지 해 온 것입니다. 돌이켜 보니 그 때가 바로 제가 감히 하나님을 만났던 하나님 경험의 때였었음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 모세의 마음이 바로 이러한 저의 어머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마음도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마음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날 밤, 십자가에 달리시기로 결심하시고 그 십자가 사형일을 바로 내일로 앞두고서 기도하시는 그 날 밤, 예수님은 근심하며 괴로워 하시면서 기도하시기를 "나의 아버지시여,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왜냐하면, 저들은 저들의 죄를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모세, 예수, 그리고 사도 바울로 이어지는 이 하나님의 종들의 기도와 제 어머님의 기도는,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도 세계와는 이런 점에서 많이 달랐다고 하겠습니다. 이 "모세의 중재 기도" 중에서 우리에게로 양심을 찌르며 다가오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 즉 "열어 놓으심"과 "인내하심" "openness"와 "patience"의 그 역설적 긴장관계를 통하여 우리 앞에 던져진 운명적 숙제인 "회개의 결단" 그것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이러한 "미래"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적인 미래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그렇게 해서 이런 미래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이 인내하심"(divine patience)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모든 어리석음과 그 모든 완고함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오랫동안 참아 주시고 분노하시기를 더디하여 주신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20년이 아니라 40년인들 못 참으셨겠습니까? 그러나, 영원히 참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물을 때가 오면 반드시 그 죄를 물으시는 분도 우리 주 야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8. 15 해방 기념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군 요시야 왕의 의로움으로서도 유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맊을 수 없었듯이, 정말, 진실로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도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 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그 사도신조 중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사를 고백하는 그 고백문 끝부분에서 우리는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신앙고백도 아울러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입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놓쳐서도 안되는 기회입니다. 모세가 십계명 두 돌판을 내어 던지며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통곡하며 살신성인 간구하는 그 때가 바로 그 기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죄를 스스로는 알지 못합니다. 만일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만일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지 않으시려면 차라리 주님께서 기록하신 그 생명책에서 이 <모세>라는 저의 이름을 지워 주십시오"라고 하나님의 종이 기도하고 있을 바로 그 순간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입니다.
"가능성"은 지금도 열려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갈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내하심 만이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아직은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 요나서 설교를 통하여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만이 그러한 가능성을 가능하게 만들고 현실화시켜 줍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우리 각자의 그 "금 송아지"를 깨뜨려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내어 버리는 결단을 하여야 할 때는 지금입니다.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그 금송아지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우 지혜로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가리켜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더욱 급박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잘못을 깨닫는 시간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허물이 무엇인지는 우리 자신이 너무도 환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또한 아직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도 또한 아직은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의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선택받아 성령을 받은 우리들까지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알고 계셔서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때는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회개(悔改)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물을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그 죄를 응징(膺懲)으로 물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Repent! Repent! Repent! The Kingdom of God is at hand.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