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많은 크리스천  (마태복음 16장 5~12절)

예수님이 12살 되시던 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들은 예수님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성경을 논하고 계셨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착각이 우리들에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예수님을 잃어버려 전혀 예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그것도 예수를 아주 열심히 잘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우리들에게 보편적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최소한 자신에게 예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예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착각하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고 위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다행히도 하루 만에 자신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찾아서 다행히도 예수님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예수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까딱 잘못하면 끝까지 자신이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를 열심히 그리고 잘 믿는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서 걸어서 계단을 올라갔는데 열쇠를 1층 자동차에 놓고 올라간 것이나 같습니다. 열심히 올라가기는 하였으나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열심히 올라간다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열쇠를 가지고 올라가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를 하고 직분을 맡는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예수를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끝까지 그와 같은 착각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산 대표적인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저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서기관과 율법사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선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저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고사하고 나중에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들의 입에서는 밤낮 하나님에 대한 말과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팔아 밥을 먹고 권력을 누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들은 열쇠 없이 계단을 오른 사람과 같아서 끝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잃어 버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들은 예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는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그의 요한복음에서 단적으로 말씀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 : 1)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법을 의미하고 식을 의미하고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식과 하나님의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범죄 하여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법과 식 그리고 시스템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여 타락한 이후에 세상에는 하나님의 식과 법과는 전혀 다른 식과 법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세상 식’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고 죄는 세상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원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라 살기 보다는 세상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이 편합니다. 죄인이 우리에게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식과 법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자동적으로 잃어나는 일이요, 아주 순간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잃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본능과 무의식 속에는 잃어버린 예수를 되찾고 싶지 않은 본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착각하며 자신을 속이고 살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편해하고 좋아하는 세상 식을 따라 살고 싶은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하면 끝까지 자신을 속이고 그와 같은 착각 속에 살 수 있는가?’ 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보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을 합리화 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말씀대로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니까 자기는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예수를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결국 속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보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 것이 쉽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주 재미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아주 재미있습니다.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아주 건전하며 유익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교회는 더 재미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면서 교회 안에 돈도 있고 권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보다 그와 같은 권력을 얻기가 쉽기 때문에 아주 매력적입니다.

아주 역설적입니다만 그런 면에서 교회는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찾을 가능성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은, 특히 중요한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려서 목사와 장로 같은 사람들은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자신들이 예수를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히려 세리와 창기보다도 예수를 되찾을 확률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이 오히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 보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섬기던 교회에 아주 교회에 열심인 교인 하나가 있었습니다.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심방을 받을 때마다 집에서 식사 대접을 하는데 그 정성이 얼마나 지극한지 작지 않은 교회의 교역자들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직분이 없었습니다. 교회가 그에게 직분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권찰 직분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부인과 가정이 있는 남자의 작은 부인 노릇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허물을 가리 우기 위해, 누구보다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과 구제도 열심히 하고, 심방도 열심히 받고 뿐만 아니라 점심 대접도 분에 넘치게 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교회의 권찰과 집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무의식적이지만 그와 같은 교회의 직분을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한 면죄부와 같이 생각하는 듯 싶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직분 얻기를 사모하며 열심히 봉사하였지만 교회는 그에게 교회의 직분을 맡길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잘못된 생활을 청산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그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면 당장 생계가 막막한 형편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잘못된 줄을 알면서도 그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는데, 제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과감하게 그와 같은 생활을 청산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일러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가 제 권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잘못된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를 교회의 권찰로 추천하였습니다. 많은 교역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잘못된 생활을 이야기하며 반대 하였을 때 제가 자세한 보고를 하였습니다. 모두가 기뻐하며 그를 교회의 권찰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후에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마치고 여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제 목회 생활 중 가장 보람 있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드러난 죄인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봉사를 하고 직분을 맡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숨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직분을 맡는 것으로 자신을 얼마든지 합리화하고 숨길 수 있습니다. 그는 드러난 죄인이었기 때문에 회개하고 직분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기쁨과 은혜로 직분을 맡아 교회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나타난 현상은 회개하기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열심이었지만 후에는 자신이 죄 사함 받고 구원 얻은 것이 너무 기뻐서 직분을 맡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보다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었고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끝까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를 잃어버린 채 그 인생을 끝내지 않습니다. 저들은 결국 예수를 팔아먹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를 팔아 자기의 배를 채우고 욕망을 채웁니다.

예수님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율법사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팔아 자신의 배와 욕망을 채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쯤 되면 회개가 불가능해 집니다. 세상 식대로 사는 세상 사람보다 더 세상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팔아먹기 위해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공통점과 특징 중에 하나는 저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말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이 아니라 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정의하고 표현하였습니다. 삶이 말씀을 몸이 되게 합니다. 몸이 없는 말씀은 그냥 말이 됩니다. 그것은 떡 없는 누룩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말로 바꾸어 말로만 예수를 믿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몇해 전에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청부론’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저의 ‘청부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청부’를 비판하며 ‘청빈’과 ‘자발적 가난’을 내세우는 분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비판과 주장이 나오는 것이 솔직히 힘들지만,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러나 그와 같은 일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주장과 이론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다 설명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단번에 동전의 양면을 보지 못하듯 진리의 양면을 한꺼번에 설명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대개 동전의 한 면 밖에는 잘 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느 한 사람의 주장과 이론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과 이론을 가진 두 사람에 의하여 밝혀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저의 ‘청부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부’와 ‘청빈’을 주장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론적으로 ‘청부론’이 더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청부론의 기준과 표준을 세우고 참으로 힘들고 어렵지만 그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질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청부론을 쉽게 생각하여 넓은 길을 가는 것으로 오해합니다만 저는 청부론이 그 어떤 길보다 좁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끗하게 돈을 버는 것도 불가능하리만큼 어렵지만 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일단 내 주머니에 들어 온 돈을 몫에 따라 나누며 다시 내 보내는 것이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얼마나 손과 마음을 많이 떨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청빈론의 이론과 주장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청빈론의 구체적인 기준과 표준은 무엇이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표준과 기준대로 살기 위하여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논리를 좋아하지만 제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론과 논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론과 논리대로 과연 기준과 표준을 정하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말이 아주 엉뚱한 데로 갔습니다. 그리고 매우 위험해 졌습니다. 자칫 오해하면 나는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이고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분들은 다 예수를 잃어버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 같아졌기 때문입니다. 양심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예수를 입으로만,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 되지 않고 몸과 삶으로 믿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수는 말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식과 법 그리고 하나님의 시스템을 좇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괜히 거창한 이론과 논리를 앞세워 말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매력적인 교회 속에 숨어 자신을 합리화하지 말고 하나님의 식과 법을 회피하려고 하는 자신의 죄 된 본능을 꺽고 범사에 그의 뜻과 식대로 살기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렸다고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헌금을 하고 구제를 하며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를 섬긴다고 자신이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목사라고, 장로라고, 집사와 권사라고, 교회를 다닌지 수 십 년이 넘었다고 당연히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떡 없는 누룩처럼, 예수와 말씀 없는 삶을 살면서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하신 말씀의 참 뜻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가 열쇠입니다. 말씀이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 그리고 시스템이 키입니다. 그 열쇠와 키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키와 열쇠로 세상과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이 땅에서도 천국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