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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누가복음 10:38~42)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의 기록을 보면 그 마을의 이름은 예루살렘 근방의 베다니였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에 사는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주님! 다른 특별한 계획이 없으시면 오늘은 저희 집에 머무시지요. 식사라도 하시면서 쉬었다 가시면 참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녀는 기쁘고 즐겁게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게 된 그녀는 가장 좋은 방을 치우고 예수님과 그 일행이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쉬지 않으시고 거기서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랍비의 가르침을 받을 때 취하는 자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결코 랍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매우 분주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본문 40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음만 분주했겠습니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아주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이 분주하다’고 한 말의 본래 뜻은 ‘사방에서 마음을 잡아당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서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나 혹은 교회에서 잔치를 치러 봤으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나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마음 먹은 대로 준비가 잘 되지 않아서 속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손님들에게 거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그녀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동생 마리아가 생각났습니다. “아니 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예수님이 오셔서 정신 없는데...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게 도리인 줄 뻔히 알 텐데...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해서 큰 복을 받았는데... 도대체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런데 그 마리아는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가 볼 때 참으로 철없는 짓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이나 듣고 있다니... 그녀는 동생과 눈을 맞춰 빨리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그녀는 할 수 없이 헛기침을 하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손짓하는 것을 보시고 하시던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마도 이렇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그녀는 얼굴이 벌개져서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공동번역 성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아마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제가 오늘 이렇게 땀 흘리는 게 누구 때문인 줄 아십니까? 모두 예수님 때문이지요. 저는 예수님을 위해서 많이 준비해서 예수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또 좀 쉬셨으면 해서 이렇게 땀 흘리고 있는데 철없는 쟤는 거기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어요. 예수님도 그렇지요. 제가 바쁘다는 걸 뻔히 아실 텐데 쟤를 좀 보내 주시면 안 되나요? 제 말은 안 들어도 예수님 말씀은 들을 테니 가서 언니가 하는 일 좀 거들어 주라고 말씀 좀 해 주세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하는 말이 바로 이런 불평 아닙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늘 투덜거리는 것도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아니 우리가 툭하면 교회에서 쏟아내는 불평과 원망이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왜 늘 나만 수고해야 합니까?” “왜 언제나 나만 땀 흘려야 합니까?” 마르다가 투덜대는 그 말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녀는 동생을 비난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귀한 손님도 제대로 대접할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비난은 그 대상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뿐 아니라 그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가족 누군가를 비난한 적이 없습니까?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그 누군가를 비난한 적이 없습니까? 아니 교회에서도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그 누군가를 비난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그렇게 심하게 비난할 정도로 그 사람이 잘못했습니까?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녀는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을 비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동생은 틀렸고 자기는 옳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분주한지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했다 하면 확실히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동생과 확실히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나는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는데 누구는 그냥 왔다 갔다만 하고...” “나는 이렇게 열심히 주방에서 봉사하는데 누구는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으려고 하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또한 그녀는 예수님이 자기 입장을 인정해 주시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도와 주지 않고 있는 동생에 대한 서운한 마음과 자기 자신의 정당함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부르신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요청이 상당히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비난하면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녀는 어리석게도 자기 입장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그와 같은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분주하게 섬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준비하는 일로 마음이 많이 분주한 마르다에게 그런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사람은 분명히 마르다였습니다. 그녀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졌고 결국 그것이 염려와 근심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하고, 그 예수님을 정성껏 섬기는 일이 처음에는 즐겁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준비하는 일로 말미암아 그녀는 어느 새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모신 마르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금새 염려와 근심으로까지 발전하여 스스로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오늘도 또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이 좋은 편입니다. 음식 준비 때문에 마음이 분주한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편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을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어서 정작 귀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아니 말씀하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들입니까? 삶 자체가 정말 분주하지 않습니까? 특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은 정말로 분주합니다. 일인 이역, 삼역을 하면서 정신 없이 뛰어도 마냥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쓸데없는 것들은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좋은 편을 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주님과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 속에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은혜가 지금 여기서부터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과 12장의 기록을 보면 그 마을의 이름은 예루살렘 근방의 베다니였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에 사는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주님! 다른 특별한 계획이 없으시면 오늘은 저희 집에 머무시지요. 식사라도 하시면서 쉬었다 가시면 참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녀는 기쁘고 즐겁게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게 된 그녀는 가장 좋은 방을 치우고 예수님과 그 일행이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쉬지 않으시고 거기서도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랍비의 가르침을 받을 때 취하는 자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결코 랍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여간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동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매우 분주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본문 40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마음만 분주했겠습니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아주 분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이 분주하다’고 한 말의 본래 뜻은 ‘사방에서 마음을 잡아당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공동번역 성서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나 혹은 교회에서 잔치를 치러 봤으면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은 마치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이 많은 일을 어떻게 나 혼자서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마음 먹은 대로 준비가 잘 되지 않아서 속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렇다고 손님들에게 거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그녀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동생 마리아가 생각났습니다. “아니 얘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예수님이 오셔서 정신 없는데...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게 도리인 줄 뻔히 알 텐데...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해서 큰 복을 받았는데... 도대체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한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거야?”
그런데 그 마리아는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시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르다가 볼 때 참으로 철없는 짓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이나 듣고 있다니... 그녀는 동생과 눈을 맞춰 빨리 나오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그녀는 할 수 없이 헛기침을 하면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가 손짓하는 것을 보시고 하시던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마도 이렇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그녀는 얼굴이 벌개져서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공동번역 성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아마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제가 오늘 이렇게 땀 흘리는 게 누구 때문인 줄 아십니까? 모두 예수님 때문이지요. 저는 예수님을 위해서 많이 준비해서 예수님을 즐겁게 해 드리고 또 좀 쉬셨으면 해서 이렇게 땀 흘리고 있는데 철없는 쟤는 거기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어요. 예수님도 그렇지요. 제가 바쁘다는 걸 뻔히 아실 텐데 쟤를 좀 보내 주시면 안 되나요? 제 말은 안 들어도 예수님 말씀은 들을 테니 가서 언니가 하는 일 좀 거들어 주라고 말씀 좀 해 주세요.”
어디서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정에서 흔히 하는 말이 바로 이런 불평 아닙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늘 투덜거리는 것도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아니 우리가 툭하면 교회에서 쏟아내는 불평과 원망이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왜 늘 나만 수고해야 합니까?” “왜 언제나 나만 땀 흘려야 합니까?” 마르다가 투덜대는 그 말 속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그녀는 동생을 비난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귀한 손님도 제대로 대접할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비난은 그 대상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뿐 아니라 그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가족 누군가를 비난한 적이 없습니까?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그 누군가를 비난한 적이 없습니까? 아니 교회에서도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그 누군가를 비난한 적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그렇게 심하게 비난할 정도로 그 사람이 잘못했습니까?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녀는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을 비난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동생은 틀렸고 자기는 옳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분주한지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했다 하면 확실히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동생과 확실히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나는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는데 누구는 그냥 왔다 갔다만 하고...” “나는 이렇게 열심히 주방에서 봉사하는데 누구는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으려고 하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또한 그녀는 예수님이 자기 입장을 인정해 주시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도와 주지 않고 있는 동생에 대한 서운한 마음과 자기 자신의 정당함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부르신 것으로 볼 때 그녀의 요청이 상당히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선거에서 상대 후보를 비난하면서 자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녀는 어리석게도 자기 입장을 예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그와 같은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분주하게 섬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준비하는 일로 마음이 많이 분주한 마르다에게 그런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한 사람은 분명히 마르다였습니다. 그녀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해졌고 결국 그것이 염려와 근심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하고, 그 예수님을 정성껏 섬기는 일이 처음에는 즐겁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준비하는 일로 말미암아 그녀는 어느 새 염려하고 근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모신 마르다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금새 염려와 근심으로까지 발전하여 스스로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괜히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오늘도 또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이 좋은 편입니다. 음식 준비 때문에 마음이 분주한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편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마음을 사방으로 잡아당기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어서 정작 귀한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아니 말씀하시는 주님께 집중할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들입니까? 삶 자체가 정말 분주하지 않습니까? 특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은 정말로 분주합니다. 일인 이역, 삼역을 하면서 정신 없이 뛰어도 마냥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쓸데없는 것들은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좋은 편을 택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하시는 주님과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의 삶 속에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은혜가 지금 여기서부터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