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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영광 (렘 35:18- 36:3)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 가운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도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십자가를 등지고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임에도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내용을 보면 에피큐러스라고 하는 향락주의자들의 단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내용은 저희의 신은 배요, 저희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끄러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부부가 결혼을 하면 부부가 함께 복되게 살아가야 하는데 첩을 여러 명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들은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향락주의, 쾌락주의 자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즐기는데 언제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늘의 것은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놀러 갈까?, 누구와 놀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먹고 마실까? 그저 쾌락만 추구합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신앙인의 영광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인정의 영광 (35:18)
한번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끝에 가면 심판대가 베풀어지고 천하만민이 그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섞여 있는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다는 것입니다. 즉 염소는 따로 골라내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과 같은 교인들에게는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찾아보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감옥에 갔을 때 시중을 들어 주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양과 같은 교인들이 "우리는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니다 너희 이웃에 있는 소자 즉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너희들이 돌보아 주지 않았느냐 그들에게 한 것이 다 나에게 한 것이니라" 이처럼 양과 같은 교인들은 주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왼편에 있는 염소 같은 교인들에게는 그와 반대로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도 주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 찾아오는 법이 없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일이 없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염소와 같은 교인들이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님이 굶으신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주님이 굶주리셨다면 우리가 먹지 않고도 가져다 드렸고, 주님이 헐벗었다면 우리가 30리라도 찾아가서 우리가 입었던 옷이라도 벗어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이 언제 아파 누우셨습니까? 만약 주님이 아파 누우셨다면 우리가 밤을 새워가면서 간호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 너희 주위에 있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그 사람들에게 하지 않은 것은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야. 불붙는 곳에나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지옥에 처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는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어울려서 교회 생활을 하였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이 천년 전에 양을 칠 때 양의 숫자에 비해서 염소를 꼭 함께 넣었습니다. 양들은 다정하기 까닭에 함께 살을 대고 자게 되면 털이 많고 열이 많은지라 피부병에 걸립니다. 그러면 주인이 양들을 일일이 떼어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염소를 넣어 둡니다. 염소는 다정한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달려가서 양을 받아 버립니다. 그러면 양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또 양들은 다정하기 까닭에 모여서 자는데 겹쳐서 자다가 깔려 죽는 양도 있곤 합니다. 그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염소가 달려가서 양들을 받아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놓습니다. 주인이 염소의 고약한 성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염소는 남을 괴롭히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끼는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양 의 우리에 염소를 함께 섞어서 키웠습니다. 말세에 그것을 갈라내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는 양과 같은 교인도 있지만 염소와 같은 교인도 있습니다. 남을 받아 버리고 남이 고통스러워하면 거기에서 쾌감을 느끼는 악질들입니다. 그렇게 까닭에 염소 같은 교인은 30년이 아니라 평생을 믿어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 같은 교인은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과 못 받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장 18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준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시켜서 레갑 자손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큰방으로 모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모아 놓은 다음에 예레미야를 통해서 포도주 한 사발씩을 안겨주면서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레갑 자손들이 일제히 "우리는 마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거부하였습니다.
레갑 자손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장인의 족속입니다. 미디안에 살다 왔기 까닭에 미디안 족속의 일파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선민을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부터 그 족속을 겐 족속이라고 불렀습니다. 겐 족속 가운데 레갑이라고 하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 후에는 그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레갑 자손이라고 합니다. 레갑이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 중에 요나답이라고 하는 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요나답이 죽을 때에 세가지 신앙적인 유훈을 남겼습니다. 첫째 포도주를 절대로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게 되면 방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절대로 목축업을 할지라도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한 곳에 정착을 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되면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족속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드시 천막을 치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도시 생활을 의미합니다. 도시 생활에는 온갖 타락과 부패가 만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골에서 천막을 짓고 살면 그 부패와 타락을 면할 수 있기 까닭입니다. 이런 좋은 신앙적인 유훈을 하였는데 그 레갑 자손들이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레갑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저들은 저들의 조상 요나답의 유언을 저렇게 잘 지키지 않느냐? 레갑 자손은 죽은 조상의 유언도 잘 지키는데 선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책망하기 위해서 레갑 자손을 이용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레갑 자손들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폴란드에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아노 공부를 했지만 그를 가르치는 선생마다 너는 손가락이 짧기 때문에 피아노 못 친다고 하였습니다. 손가락이 길어야 건반을 칠 때 이곳에서 저곳까지 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이 부드러워야하는데 손이 뻣뻣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을 하고 좌절을 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코넷을 불어라" 코넷이라고 하는 것은 나팔처럼 입으로 부는 악기입니다. 코넷을 사 가지고 가르치는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얼마 동안을 배웠는데 선생님이 "너는 안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안됩니까?" "입술이 코넷을 불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야"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까닭에 역시 좌절을 했습니다. 낙심 중에 있다가 어느 큰 연회에 초청을 받아 피아노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동안 배운 피아노 솜씨가 있으니 피아노를 좀 쳐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피아노를 열심히 쳤습니다. 그 연회에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러시아의 루빈스타인이라고 하는 피아니스트가 참석했었습니다. 루빈스타인이 연회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피아노 앞으로 가서 그 소년의 어깨를 치면서 "넌 참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에 일곱시간은 반드시 연습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았으면 일곱시간만 연습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 폴란드에서는 그를 따라오는 피아니스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폴란드가 공화정이 되어 폴란드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파데레브스키입니다. 동네 선생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는 실망과 좌절이 되었지만 세계적인 권위자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때 힘을 얻고 성공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고,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신앙 생활도 인정받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약속의 영광 (35:19)
달란트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최선을 다하였고 주인이 돌아와 계산하자 할 때 역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주인이 "잘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은 "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충성된 종아"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이상 칭찬할 말이 있습니까? 더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주인의 칭찬과 아울러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칭찬을 하였는데 칭찬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제 큰 잔치를 베풀 것인데 너희들은 종노릇하지 말고 내 옆에 앉으라는 뜻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주인의 약속은 종에게 최고의 영광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약속을 할 경우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세월이 지나다 보니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세월이 더 지나서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은 다음에 손바닥에 싸인을 하고 복사를 해서 주는 것입니다. 복사를 해서 받아야 요즘의 약속은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들의 장난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약속을 하고 종은 주인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종으로서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온갖 책망을 받고 나중에는 빼앗기고 쫓겨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과 함께 큰 잔치가 열렸을 때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밖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고있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천국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레갑 족속은 본래 이방인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온 후 귀화하여 이스라엘화 선민화가 된 사람들입니다. 본래 유대인이 아닌데도 하나님 앞에 설자 즉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일 일꾼들이 자자손손 또는 영원히 그리고 줄줄이 끊어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그들에게 얼마나 귀한 축복이요, 영광입니까?
우리 기독교 특히 우리 장로교가 선교를 받은지 100주년을 기념할 때 잠실에 있는 학생 체육관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그 큰 체육관의 자리를 꽉 메우고 100주년 기념 잔치를 할 때 너무나 멋진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4대로 목사가 된 집안을 골라 보았는데 한 집안이 있었습니다. 노량진 교회를 시무하시는 림인식 목사님의 집안입니다. 요즘은 4대가지나 5대까지 내려가는 집안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그 집안에 영광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상을 받고 싶었지만 받을 자격이 있어야 받지 않겠습니까?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로 하나님 앞에 설자가 끊어지지 아니한 집안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손들이 하나님 앞에 설자 즉 큰 일꾼들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레갑 자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지극히 큰 영광이었습니다.
미국의 농촌은 우리처럼 큰 동네를 이루지 않습니다. 워낙 농토가 넓기 때문에 여기에 한 집 저기에 한집이 있습니다. 그 농촌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어느 한 가정이 농촌 한적한 길가에 조그만한 음식점을 차려 놓고 겨우 밥을 벌어먹고 살았습니다. 그 집안은 10리, 20리를 걸어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아들이 교회에 가보면 좋은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성경책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서 얼마나 어머니를 졸라대는지 모릅니다. 치마 자락을 붙잡고 부엌으로 가면 부엌으로 따라가고 식탁으로 나오면 식탁으로 따라왔습니다. 그 때 그 식당에서 신사 다섯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더니 그 중에 한 신사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네가 그렇게 성경이 가지고 싶으냐?" "그러면 이 아저씨가 성경을 사 줄까?" "내가 그럼 약속을 하지" 약속을 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내가 사서 보내주마" 그 아이가 얼마나 그 약속만 믿고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매일 같이 기다렸습니다. 몇 일이 지난 후에 배달부 아저씨가 소포를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소포를 풀러 보니 좋은 성경책인데 그 성경책에 이름을 쓰고 싸인을 했습니다. 그 싸인은 대통령의 싸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곳에 와서 식사를 하던 다섯분의 신사들은 대통령과 친구들이었습니다. 대통령 행세를 하지 않으면서 민정 시찰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성경은 두고 두고 그 집안의 가보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대통령의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이 이루어 졌으니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놀라운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각자가 나와 내 가정에 약속한 말씀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엄청난 약속들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꼭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셋째, 사죄의 영광 (36:1-3)
예수님께 어느 이른 아침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무리가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양손에는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주님 이 여자가 어제 밤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돌로 칠까요? 말까요? 모세 율법에는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으니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잡고 고소하려 한 것입니다. 만약에 돌로 치라고 하면 그 때 당시는 유대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까닭에 로마법에 유대인의 총독이 아니면 사형 집행을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라고 하시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므로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죽기를 한사코 지키는 모세 율법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게 된 것입니다. 참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한들 그들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아우성을 치면서 재촉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 글에 대해서 이런 해석 저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썼다는 등 그 외에 별별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조용히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글씨를 쓰실 때 그 무리가 왜 조용히 했겠습니까? 추측해 봅니다. 제일 앞장 서서 못되게 구는 사람의 죄를 썼을 것입니다. 아무 아무개 언제 어디서 무슨 죄, 그 다음에 두번째 사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죄,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써 내려갔을 것이라는 나의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다 주님이 알고 계셔서 모두 들통이 나고 있는 형편인데 누가 돌을 들어 치겠습니까? 안치고 있자니 너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취급을 받게 되었고 돌로 치자니 양심이 괴로웠습니다. 결국 돌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여인은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서 끌려왔을 것입니다. 정신이 있었겠는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 여인은 죽고 사는 것입니다. 여인의 운명은 예수님께 달린 것입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너를 고소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문밖을 나가면 세살난 아이가 고소를 해도 고소 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여인이 "나를 정죄하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끌려나왔을지라도 예수 앞에 선 사람을 누구가 감히 정죄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죄라 할지라도 너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깨끗이 사죄함을 받는 순간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이제 나는 살았다" 싶은 순간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죄사함을 받은 것이 그 여자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여자보다 낫습니까? 영원히 지옥에 멸망을 당할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천국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죄함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렇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6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두루마리 책을 취하여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열방에 대하여 나의 네게 이른 모든 말을 그것에 기록하라 유다 족속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한 모든 재앙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듯 하니라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바로 직전의 사건입니다. 레갑 자손의 그 모습을 보여 주면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이래도 회개치 않겠느냐'고 교훈하신 사건입니다. 죽은 조상의 유훈도 지키는데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살아 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길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갑 자손의 모습을 보고 이 백성들이 '이것이 아니었구나'하고 잘 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면 이 백성들의 악과 죄를 없었던 것처럼 사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돌이키는 사람 즉 자기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묻지 않고 어떤 죄든지 악이든지를 막론하고 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살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살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켰을 때 살았고 구원을 얻었고 천국의 후사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깨끗이 십자가로 도말하시고 용서해 주셨다는 사죄함은 신앙인의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항상 기뻐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죄함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인의 영광은 첫째로 인정의 영광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들처럼, 레갑 자손들처럼 하나님께 여러분들이 신앙이 인정받을 때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둘째로 약속의 영광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은 주인의 칭찬 받을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주인의 약속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시는 영광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사죄의 영광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죄는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감격을 선물하였습니다.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 여인만 못하지 않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사죄함을 받고 천국의 후사가 된 우리 모두 이 영광을 기뻐하시고, 이 영광을 만천하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 가운데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도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십자가를 등지고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임에도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내용을 보면 에피큐러스라고 하는 향락주의자들의 단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내용은 저희의 신은 배요, 저희의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끄러운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부부가 결혼을 하면 부부가 함께 복되게 살아가야 하는데 첩을 여러 명을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볼 때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신들은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향락주의, 쾌락주의 자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즐기는데 언제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늘의 것은 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로 놀러 갈까?, 누구와 놀까?, 무엇을 할까? 무엇을 먹고 마실까? 그저 쾌락만 추구합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인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신앙인의 영광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인정의 영광 (35:18)
한번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끝에 가면 심판대가 베풀어지고 천하만민이 그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섞여 있는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다는 것입니다. 즉 염소는 따로 골라내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과 같은 교인들에게는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찾아보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감옥에 갔을 때 시중을 들어 주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양과 같은 교인들이 "우리는 그런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니다 너희 이웃에 있는 소자 즉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너희들이 돌보아 주지 않았느냐 그들에게 한 것이 다 나에게 한 것이니라" 이처럼 양과 같은 교인들은 주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왼편에 있는 염소 같은 교인들에게는 그와 반대로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도 주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 찾아오는 법이 없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일이 없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염소와 같은 교인들이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님이 굶으신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주님이 굶주리셨다면 우리가 먹지 않고도 가져다 드렸고, 주님이 헐벗었다면 우리가 30리라도 찾아가서 우리가 입었던 옷이라도 벗어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이 언제 아파 누우셨습니까? 만약 주님이 아파 누우셨다면 우리가 밤을 새워가면서 간호하지 않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아, 너희 주위에 있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그 사람들에게 하지 않은 것은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야. 불붙는 곳에나 들어가라"고 하시면서 지옥에 처넣으셨다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는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어울려서 교회 생활을 하였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지만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이 천년 전에 양을 칠 때 양의 숫자에 비해서 염소를 꼭 함께 넣었습니다. 양들은 다정하기 까닭에 함께 살을 대고 자게 되면 털이 많고 열이 많은지라 피부병에 걸립니다. 그러면 주인이 양들을 일일이 떼어놓아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염소를 넣어 둡니다. 염소는 다정한 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달려가서 양을 받아 버립니다. 그러면 양들이 고통을 당하면서 뿔뿔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또 양들은 다정하기 까닭에 모여서 자는데 겹쳐서 자다가 깔려 죽는 양도 있곤 합니다. 그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염소가 달려가서 양들을 받아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어 놓습니다. 주인이 염소의 고약한 성질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염소는 남을 괴롭히고 거기에서 쾌감을 느끼는 족속들입니다. 그래서 양 의 우리에 염소를 함께 섞어서 키웠습니다. 말세에 그것을 갈라내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는 양과 같은 교인도 있지만 염소와 같은 교인도 있습니다. 남을 받아 버리고 남이 고통스러워하면 거기에서 쾌감을 느끼는 악질들입니다. 그렇게 까닭에 염소 같은 교인은 30년이 아니라 평생을 믿어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양 같은 교인은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과 못 받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장 18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준종하여 그 모든 훈계를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행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시켜서 레갑 자손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큰방으로 모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모아 놓은 다음에 예레미야를 통해서 포도주 한 사발씩을 안겨주면서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레갑 자손들이 일제히 "우리는 마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거부하였습니다.
레갑 자손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세의 장인의 족속입니다. 미디안에 살다 왔기 까닭에 미디안 족속의 일파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모세가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선민을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그 때부터 그 족속을 겐 족속이라고 불렀습니다. 겐 족속 가운데 레갑이라고 하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 후에는 그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레갑 자손이라고 합니다. 레갑이라고 하는 사람의 아들 중에 요나답이라고 하는 더 훌륭한 사람이 태어납니다. 요나답이 죽을 때에 세가지 신앙적인 유훈을 남겼습니다. 첫째 포도주를 절대로 마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게 되면 방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절대로 목축업을 할지라도 농사를 짓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한 곳에 정착을 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되면 외국의 침략을 받아서 족속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반드시 천막을 치고 살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은 도시 생활을 의미합니다. 도시 생활에는 온갖 타락과 부패가 만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골에서 천막을 짓고 살면 그 부패와 타락을 면할 수 있기 까닭입니다. 이런 좋은 신앙적인 유훈을 하였는데 그 레갑 자손들이 충실히 지켰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레갑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저들은 저들의 조상 요나답의 유언을 저렇게 잘 지키지 않느냐? 레갑 자손은 죽은 조상의 유언도 잘 지키는데 선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책망하기 위해서 레갑 자손을 이용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 레갑 자손들의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폴란드에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아노 공부를 했지만 그를 가르치는 선생마다 너는 손가락이 짧기 때문에 피아노 못 친다고 하였습니다. 손가락이 길어야 건반을 칠 때 이곳에서 저곳까지 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이 부드러워야하는데 손이 뻣뻣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을 하고 좌절을 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코넷을 불어라" 코넷이라고 하는 것은 나팔처럼 입으로 부는 악기입니다. 코넷을 사 가지고 가르치는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배웠습니다. 얼마 동안을 배웠는데 선생님이 "너는 안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안됩니까?" "입술이 코넷을 불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야"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기 까닭에 역시 좌절을 했습니다. 낙심 중에 있다가 어느 큰 연회에 초청을 받아 피아노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동안 배운 피아노 솜씨가 있으니 피아노를 좀 쳐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피아노를 열심히 쳤습니다. 그 연회에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러시아의 루빈스타인이라고 하는 피아니스트가 참석했었습니다. 루빈스타인이 연회가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피아노 앞으로 가서 그 소년의 어깨를 치면서 "넌 참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이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하루에 일곱시간은 반드시 연습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았으면 일곱시간만 연습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 폴란드에서는 그를 따라오는 피아니스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폴란드가 공화정이 되어 폴란드 공화국이 수립된 후에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파데레브스키입니다. 동네 선생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는 실망과 좌절이 되었지만 세계적인 권위자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때 힘을 얻고 성공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인정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도 인정을 받고,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신앙 생활도 인정받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약속의 영광 (35:19)
달란트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과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최선을 다하였고 주인이 돌아와 계산하자 할 때 역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기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 주인이 "잘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은 "착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충성된 종아"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이상 칭찬할 말이 있습니까? 더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주인의 칭찬과 아울러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칭찬을 하였는데 칭찬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제 큰 잔치를 베풀 것인데 너희들은 종노릇하지 말고 내 옆에 앉으라는 뜻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주인의 약속은 종에게 최고의 영광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약속을 할 경우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세월이 지나다 보니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세월이 더 지나서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은 다음에 손바닥에 싸인을 하고 복사를 해서 주는 것입니다. 복사를 해서 받아야 요즘의 약속은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이들의 장난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약속을 하고 종은 주인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종으로서 최고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은 온갖 책망을 받고 나중에는 빼앗기고 쫓겨났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은 주인과 함께 큰 잔치가 열렸을 때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밖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고있었습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천국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레갑 족속은 본래 이방인이 아닙니까? 이스라엘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온 후 귀화하여 이스라엘화 선민화가 된 사람들입니다. 본래 유대인이 아닌데도 하나님 앞에 설자 즉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일 일꾼들이 자자손손 또는 영원히 그리고 줄줄이 끊어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그들에게 얼마나 귀한 축복이요, 영광입니까?
우리 기독교 특히 우리 장로교가 선교를 받은지 100주년을 기념할 때 잠실에 있는 학생 체육관에서 하지 않았습니까? 그 큰 체육관의 자리를 꽉 메우고 100주년 기념 잔치를 할 때 너무나 멋진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 4대로 목사가 된 집안을 골라 보았는데 한 집안이 있었습니다. 노량진 교회를 시무하시는 림인식 목사님의 집안입니다. 요즘은 4대가지나 5대까지 내려가는 집안도 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그 집안에 영광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 상을 받고 싶었지만 받을 자격이 있어야 받지 않겠습니까?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로 하나님 앞에 설자가 끊어지지 아니한 집안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손들이 하나님 앞에 설자 즉 큰 일꾼들이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레갑 자손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지극히 큰 영광이었습니다.
미국의 농촌은 우리처럼 큰 동네를 이루지 않습니다. 워낙 농토가 넓기 때문에 여기에 한 집 저기에 한집이 있습니다. 그 농촌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 어느 한 가정이 농촌 한적한 길가에 조그만한 음식점을 차려 놓고 겨우 밥을 벌어먹고 살았습니다. 그 집안은 10리, 20리를 걸어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집의 아들이 교회에 가보면 좋은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성경책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서 얼마나 어머니를 졸라대는지 모릅니다. 치마 자락을 붙잡고 부엌으로 가면 부엌으로 따라가고 식탁으로 나오면 식탁으로 따라왔습니다. 그 때 그 식당에서 신사 다섯분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더니 그 중에 한 신사가 그 아이를 불렀습니다. "네가 그렇게 성경이 가지고 싶으냐?" "그러면 이 아저씨가 성경을 사 줄까?" "내가 그럼 약속을 하지" 약속을 하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내가 사서 보내주마" 그 아이가 얼마나 그 약속만 믿고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매일 같이 기다렸습니다. 몇 일이 지난 후에 배달부 아저씨가 소포를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소포를 풀러 보니 좋은 성경책인데 그 성경책에 이름을 쓰고 싸인을 했습니다. 그 싸인은 대통령의 싸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곳에 와서 식사를 하던 다섯분의 신사들은 대통령과 친구들이었습니다. 대통령 행세를 하지 않으면서 민정 시찰을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성경은 두고 두고 그 집안의 가보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대통령의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이 이루어 졌으니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중에는 놀라운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각자가 나와 내 가정에 약속한 말씀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엄청난 약속들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꼭 이루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셋째, 사죄의 영광 (36:1-3)
예수님께 어느 이른 아침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무리가 젊은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양손에는 돌을 들고 있었습니다. "주님 이 여자가 어제 밤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돌로 칠까요? 말까요? 모세 율법에는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으니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꼬투리를 잡고 고소하려 한 것입니다. 만약에 돌로 치라고 하면 그 때 당시는 유대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까닭에 로마법에 유대인의 총독이 아니면 사형 집행을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라고 하시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므로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유대인들이 그렇게 죽기를 한사코 지키는 모세 율법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게 된 것입니다. 참 고약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한들 그들의 귀에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아우성을 치면서 재촉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 글에 대해서 이런 해석 저런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썼다는 등 그 외에 별별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조용히 하겠습니까? 예수께서 글씨를 쓰실 때 그 무리가 왜 조용히 했겠습니까? 추측해 봅니다. 제일 앞장 서서 못되게 구는 사람의 죄를 썼을 것입니다. 아무 아무개 언제 어디서 무슨 죄, 그 다음에 두번째 사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죄, 세 번째.... 이런 식으로 써 내려갔을 것이라는 나의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다 주님이 알고 계셔서 모두 들통이 나고 있는 형편인데 누가 돌을 들어 치겠습니까? 안치고 있자니 너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취급을 받게 되었고 돌로 치자니 양심이 괴로웠습니다. 결국 돌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여인은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서 끌려왔을 것입니다. 정신이 있었겠는지 상상을 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그 여인은 죽고 사는 것입니다. 여인의 운명은 예수님께 달린 것입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너를 고소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문밖을 나가면 세살난 아이가 고소를 해도 고소 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너를 정죄하는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여인이 "나를 정죄하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끌려나왔을지라도 예수 앞에 선 사람을 누구가 감히 정죄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죄라 할지라도 너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깨끗이 사죄함을 받는 순간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이제 나는 살았다" 싶은 순간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죄사함을 받은 것이 그 여자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여자보다 낫습니까? 영원히 지옥에 멸망을 당할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천국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죄함이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렇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6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두루마리 책을 취하여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열방에 대하여 나의 네게 이른 모든 말을 그것에 기록하라 유다 족속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한 모든 재앙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듯 하니라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은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기 바로 직전의 사건입니다. 레갑 자손의 그 모습을 보여 주면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이래도 회개치 않겠느냐'고 교훈하신 사건입니다. 죽은 조상의 유훈도 지키는데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살아 남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길이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레갑 자손의 모습을 보고 이 백성들이 '이것이 아니었구나'하고 잘 못을 뉘우치고 돌이키면 이 백성들의 악과 죄를 없었던 것처럼 사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돌이키는 사람 즉 자기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과거는 묻지 않고 어떤 죄든지 악이든지를 막론하고 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살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살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돌이켰을 때 살았고 구원을 얻었고 천국의 후사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깨끗이 십자가로 도말하시고 용서해 주셨다는 사죄함은 신앙인의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항상 기뻐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죄함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인의 영광은 첫째로 인정의 영광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들처럼, 레갑 자손들처럼 하나님께 여러분들이 신앙이 인정받을 때 지극히 큰 영광입니다. 둘째로 약속의 영광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들은 주인의 칭찬 받을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는 주인의 약속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시는 영광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사죄의 영광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죄는 '이제는 살았구나'라는 감격을 선물하였습니다.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 여인만 못하지 않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사죄함을 받고 천국의 후사가 된 우리 모두 이 영광을 기뻐하시고, 이 영광을 만천하 모든 사람에게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