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관한 신앙에서 예수신앙으로   (고전 2:2)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이제 13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130여 년 동안 우리의 신앙이 많이 발전했고 성숙해졌습니다. 연륜 깊어지고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습니다. 양이나 전통이 오래되면 동시에 참신했던 신앙이 굳어지기도 하고 오류도 발생하여 바로잡아야 할 부분도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9번에 걸쳐서 그동안 우리 신앙을 바로잡아야 할 내용들을 설교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에 관한 신앙에서 예수신앙으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신앙풍토는 참 뜨겁고 열심이었습니다. 한국은의 심성은 부드럽고 강렬하고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열심 있고 뜨겁고 기도도 많이 하는 신앙풍토를 일구었습니다. 그래서 양적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역사가 오래되고 연륜 쌓이다 보니까 예수에게서 신앙의 초점이 멀어지고 흐려져서 마침내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하는 풍토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생활과 신앙사이에 갭이 생겼고 삶이 이원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신학적으로 문제를 야기했고 신앙이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는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부분입니다.
                                    I

어떤 목사님이 새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부임하자 가정심방부터 시작했습니다. 첫 가정을 심방 가서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예수를 믿어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아버지도 장로였고 저는 권사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교회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고요, 모두 잘 믿고 있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권사님,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게 묻자 이 권사님이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면서 “나는 권사인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권사님, 권사님의 가정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게 재삼 물으니까 그 권사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집에,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예수께서 계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들이 가끔 나를 향해서 물어보아야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이 “예수신앙에서 예수에 관한 신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II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믿었고 교리를 믿었고 전통을 믿었고 그것들을 중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건듯하면 교회에서 전통 때문에 논쟁을 벌였고 교리 때문에 다투고 갈라지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교회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는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장과 기장이 서로 싸웠습니다. 기성과 예성이 싸웠습니다. 외국인들이 비아냥댈만합니다. 한국교회는 한때 교리 때문에 많이 싸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그것이 성경의 진리인데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데 사람들은 교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예수는 옆에 두고 교리 때문에 머리 터지게 싸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 동안 자신은 열심 있는 신앙인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예수에 관한 신앙”입니다. 거기 어디에 예수가 있습니까. 마치 바울이 예수를 모를 때 열심히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이 가장 의롭고 열심 있는 신앙인줄 알았던 것과 똑같은 경우입니다.

또 교회마다 제도니 규정이니 하는 규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규약에는 새신자가 들어오면 3년 안에는 교사도 찬양대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직분도 가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새신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약을 시켰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법을 만들어놓고 나중에는 그 법 때문에 예수를 죽인 꼴과 같습니다. 그 법이 누굴 위한 무엇을 위한 법입니까. 모든 법은 예수를 더 잘 믿도록 도와주는 법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만든 법이 나중에는 예수를 믿는데 방해되는 법으로 작용했습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에 관한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예수 주변만 연구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예민하게 한번 이 부분을 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는 뒤로 밀쳐놓고 예수의 주변을 중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랐다더라,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더라, 기적을 행했다더라, 부활했다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꼭 남의 말 하듯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주변이야기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부모 이름은 누구냐, 태어난 고향은 어디냐, 선물을 들고 온 사람들은 누구냐, 예수와 요한과는 무슨 사이냐, 예수님 아버지 직업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들을 암기시켰습니다. 모두 예수의 주변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기적이 없고 감동이 없고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더라, 예수가 승천했다더라, 병자들을 고쳤다더라 하는 것들은 이미 있었던 일이고 지식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예수의 주변이야기들을 암기하는 신앙으로는 내가 구체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힘도 없고 감격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나 신앙이 주는 힘과 감격은 예수께서 내게 임하시고 내안에 내주하시고 내 주님이 되시고 내 하나님이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동안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그 예수에 관한 것들을 중시하는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나 체험이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학교에서는 그렇게 신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시고 목자시고 생명의 주로 가르치기 이전에 예수는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3일 만에 부활하고 지금은 하늘나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 내안에 계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을 지켜보시는 생명의 주로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변화나 감동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직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말할 때 신앙의 뼈대를 자랑합니다. 나는 모태신앙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몇 년 동안 교사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교회에서 이런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에 관한 신앙입니다. 그 직분들은 신앙생활에서 아주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모두 조건들입니다. 모든 직분은 먼저 들어온 신앙인들이 늦게 들어온 새신자들을 돌보고 안내하고 양육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직분들일 뿐입니다. 결코 자랑할 갓도 명예도 아닌 봉사직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분들은 대부분 그런 직분들에 지대한 관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샘이 있습니다. 샘의 생명은 물입니다. 그런데 그 샘의 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고 샘 주위를 어떻게 꾸미느냐, 무슨 돌로 주위를 만드느냐, 샘의 넓이와 깊이와 크기가 얼마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샘을 누가 팠으며 돌은 누가 깔았으며 그 샘을 관리하는데 누가 열심이냐를 따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샘의 물이 말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구원 얻는 방법을 성경이 제시해 주었는데도 거기에 또 다른 방법을 가미해 놓고 자꾸만 엉뚱한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그냥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했는데도 사람들은 더 고행의 과정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얼음을 깨고 찬물에 들어가 목욕 재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또 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더 철저하게 믿어야 한다고 율법을 만들어 놓고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하루 3시 기도하고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법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너무 쉬우니까 스스로 법을 만들어 힘들게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겠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신앙의 부수적인 것들을 지키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믿었는지 그 신앙과 믿음의 허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는 그 좋던 믿음은 간데없고 절망과 허탈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무엇을 믿었고 누구를 믿었단 말인가 하는 자조에 빠지게 됩니다.

                                    III

신앙은 내가 지금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날마다 그분과 상의하고 있는가, 나는 날마다 그분에게 묻고 의논하고 상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분 때문에 살고 그 예수님과 지금 동행하고 함께 하고 내가 그에게 날마다 의지하고 그 때문에 새 인생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예수를 그렇게 믿고 그분이 지금 내안에 와 계시고 나는 지금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건전하고 건강하고 신선하고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또 정신도 건전하고 긍정적이고 전향적일 것이고 신앙도 뜨거워질 것이며 이웃과의 관계도 따뜻해지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지금 예수를 믿고 알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것을 믿고 살아가니까 온갖 문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왜 갈등이 발생합니까. 왜 탐욕, 욕망, 사치, 싸움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왜 신앙 연조가 오래되었음에도 내가 변화가 안 되고 신앙이 더 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왜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수년이나 되었는데 세상의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조그만 문제 앞에서 넘어지고 조그만 이익 앞에서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신앙이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직장에서 나를 자신 있게 들어내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보건복지부를 방문했었습니다. 어느 간부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인데 부내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좀처럼 자신을 공개하고 나타내지를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사람들 앞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고 나설만한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마음속에 진정 주께서 살아계셔서 지금도 내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다면 그렇게 숨어 있겠습니까.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신앙이 열심 있고 오히려 요란할 정도로 큰소리치며 기도도 잘하는데 유사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순간 조용해지고 침묵하고 후퇴하고 눈감고 핑계하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신앙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신앙이 정말 “예수를 믿는 신앙인인가” 아니면 나는 지금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평소에는 요란합니다. 너무 열심입니다. 아주 뜨겁습니다. 그런데 예수에 관해서 신앙생활했던 분들은 유사시가 되면 곧바로 침묵합니다. 후퇴합니다. 숨습니다. 도마가 그랬고 유다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도마, 유다, 베드로 모두 예수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모두 넘어졌습니다. 유사시에 일어날만한 내적 힘과 동기와 이유와 근거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와 있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 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평소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침묵하고 숨어있었고 구지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인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유사시가 되니까 모두 도망하고 숨어있는데 그들은 사람들 앞에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타나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들은 평소 숨어있었지만 유사시가 되니까 자신을 들어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의 숨은 제자로서의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마음속에 진정 예수가 있었고 그 예수는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그 예수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신앙 아닙니까.  

                                     IV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예수를 믿는 일에는 예수 이외의 것은 조건에 불과합니다.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며칠 만에 부활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직분자인가, 몇 년 믿었는가, 내 아버지가 장로요 내 어머니는 권사다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조건이고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문제는 예수는 누구인가, 내가 과연 그를 만났는가, 나는 지금 그분과 함께 하고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순간마다 그분과 상의하고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분에게 순종하고 헌신하고 나를 복종시키고 나를 부정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삶이 예수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 때 비로소 신앙다운 신앙의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준비해 놓은 조건들을 얼마나 자랑했습니까.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서 깊이 알고 난 후에는 그것들을 미련 없이 버려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믿음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나의 신앙을 한번 깊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예수는 지금 나의 마음속에서 나를 지배하시고 나는 그분에게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으면 이제라도 신앙의 궤도를 수정하면 내 마음속에서 신앙의 샘물이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