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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라고 주신 세 가지 (누가복음 24장 45~49절)
한 달이 넘도록 우리 모두는 '전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간접적으로 들어왔습니다. 너무 자주 듣다 보면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열 번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안 들은 사람과 같습니다. 1년 동안 배워 왔는데도 여전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다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겠다는 열정의 불꽃을 가슴에 안고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대각성전도집회를 하든지, 새생명축제를 하든지 그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다.'라며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주일이 되면 교회 와서 설교만 듣고 갑니다. 이것은 10번이 아니라 100번을 들어도 무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나의 생각과 삶, 행동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대각성전도집회를 1주일 앞두고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주셔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까요?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선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기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씀 전하는 데 모든 시간을 투자하셨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하늘 나라로 올리신 다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입을 열어 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하신 교회는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그리고 온 세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복음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요?" 어떤 면에서는 이것은 사치스러운 말입니다. 그 해답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가장 원하시는 것을 순종하면 됩니다. 나의 삶 전부를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반복하는 일상생활이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삶의 초점을 맞춰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행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입니다. 문제가 순종을 안 한다는 데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선택할 과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순종해야 될 필수 과목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심정을 항상 마음에 갖고 있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심정을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사도 바울도 부득불 복음을 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득불'이란 하기 싫은 데도 억지로 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화를 내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서 억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고 항상 복음을 전하는 일이 즐거웠겠습니까? 그도 인간이기에 어떤 때는 전하기 싫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무섭고 핍박 받는 것이 싫어서 도망이라고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육신이 약해 쉬었으면 할 때가 얼마든지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고 싶지 않을 때도 억지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기에 순종하기 위해서 전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런 사도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전하기 싫어도 억지로 전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제가 이름을 거론해서 본인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우리 교회에 전도 왕이 있습니다. 바로 안수 집사님으로 계신 이재명 집사님이십니다. 연세가 벌써 50대 후반 가까이 접어들었는데, 그분은 거의 모든 시간을 전도하는 데에 바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남편 전도가 잘 안 되거나, 전도가 어려운 친구가 있으면 으레 그분에게 전도를 부탁하곤 합니다. 그러면 이 집사님이 가서 전도폭발을 통해 전도합니다. 제가 볼 때 약 80%되는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그 무서운 살인범, 지존파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제일 앞장섰던 집사님이십니다. 그로 인해 소문도 많이 나 책도 여러 권 쓰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가셔서 전도집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건강하신 분이 최근에 폐암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초기가 아닌 3기 진단이 나왔습니다. 때를 같이 하여 우리 교회 어느 분이 와서 이 집사님께 전도를 부탁했습니다. "집사님, 우리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전도 좀 해주세요. 내 힘으로는 도무지 전도를 못하겠어요." 갑작스럽게 암 선고를 받으며 얼마 동안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의욕을 상실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재명 집사님은 그분의 요청을 마다하지 않고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그날 복음을 전한 후 교회 마당에서 계신 이재명 집사님을 제가 만났습니다. 그분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병원에 가서 전도하고 왔습니다. 어느 교인이 전도해달라고 해서 갔다 왔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쳐다봤습니다. 누군가 전도해달라고 해서 폐암 3기 환자가 병원에 가 전도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더 중요한 일이 없음을 이 집사님은 마음 속 깊이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쓰러질 때까지 전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왜 전도해야 되는지, 그리고 전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3가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신 후 하늘 나라로 승천해 올라가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여다 보면 제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중요한 3가지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46-47절) 이처럼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가 되셨다는 것은 복음입니다.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용서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나에게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래서 그것이 어떻다는 거냐고 반문해 버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나 그렇지 사람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죄 용서 받았다는 사실이 어떤 이익이나 손해를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닌 어리석은 소리로 들리기 일쑤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분들 가운데서도 이 기쁜 소식을 가슴에 담고 감격해 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그것이 왜 기쁜 소식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눈 앞에 있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한 눈에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보시고 아십니다. 죄인 된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저주 받을 신분인가를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대로 살다가 생명을 마치면 저 세상에서 죄 값을 치러야 되는데 그 영원한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앞에 있는 운명을 하나님께서는 다 읽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 받는다는 것만큼 기쁜 소식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노래한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이 말이 얼마나 강도가 높은 말인지 모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우리가 그분 때문에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나게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 교회 교역자가 쓴 책에서 제가 간단한 이야기 한편을 읽었습니다. 아내가 우리 교회에 다니시는 어느 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수 정도 되면 배운 것도 많고, 사회적으로도 존경 받는 위치에 있으므로 나름대로 자존심이란 게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사람이며, 마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싸여 계신 분이었습니다. 아내는 예수를 믿는데 아무리 믿자고 해도 남편이 말을 안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한번은 그 교역자에게 와서 남편을 전도해달라고 부탁했던가 봅니다. 이제 그 교역자가 남편을 찾아가 전도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예수를 안 믿으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그 교수가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뭔가 자기가 부족하고 모자라니까 그것을 채우려고 예수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니까 매달리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구차하게 그렇게 매달리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얼마 지나서 그 교수가 감기에 걸렸는데, 금방 낫지 않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바이러스 감기 정도로 진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는 이 교역자가 병상에 가서 그 분을 만났습니다. "교수님, 이렇게 병상에 누워있어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못 느끼세요?" "무슨 말씀하세요? 감기는 누구나 걸리는 건데, 그걸 가지고 제가 약하다고 느끼다니요?" 그래서 그 시간에도 전도를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갑자기 부인으로부터 아주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정밀검사를 한 결과 폐암이라는 것입니다. 교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아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교역자가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교수님, 지금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못 느끼세요? 그러자 꺼져가는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나는 참 바보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온 낙오자 같아요." 드디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결국 그 교역자가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고 그도 복음을 받아들여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어요
이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요? 암 선고를 받고 소망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요? 자식이 일류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일까요? 큰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일까? 학위 논문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일까요? 주식에 투자한 것이 갑자기 뛰어서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이야기일까요? 이 사람은 이제 조금 있으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의인으로 서느냐, 죄인으로 서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자기의 죄를 해결 받고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쁜 소식,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나도 구원 받고 또 다른 사람 구원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러워 아직도 입을 열지 않고 미루기만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마음을 고치시길 바랍니다. 이것만큼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소명을 주셨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키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증인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증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대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처음 목격한 사도들이 써 놓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죽음과 부활을 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 것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증인이므로 본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증인이라는 말은 '말튀스'(martus), 복수로는 '말튀레스'(martures) 라는 말인데, 이 '말튀레스'라는 말은 다른 말로 번역하면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불렀습니다. 부르되 죽도록 생명을 걸고 전하는 자리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증인과 순교자라는 말은 같습니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 당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을 기록하기 이전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고 할 때 '너희'는 누구를 말합니까? 지금까지 잘못 배웠으면 다시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들, 또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나 목사 지망생으로 신학교에 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간혹 일반 평신도는 '너희'에 해당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여기에서 '너희'는 12사도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지상에 나타날 모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입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신 일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건전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사느냐를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복음 전하는 증인으로 부르셨는데, 내가 이 일을 위해서 제대로 살고 있으면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 일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집니까? 복음을 전하여 이 세상이 구원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는 이상은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창조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 일에 부름을 받은 소명자입니다.
비록 내가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힘들게 장사하는 생활을 하더라도, 그 장사하는 삶 자체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소명자의 삶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무의미한 것도 없고, 사소한 것도 없고, 몹쓸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거룩한 제사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소명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모든 직업이 다 거룩합니다. 평범하게 날마다 반복되는 가정생활도 거룩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직업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길 소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번 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것입니다. 그 헌금을 가지고 이 땅에 복음 전하는 일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열심히 저축한 돈 중 목돈을 찾아 선교헌금으로 드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직업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재산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재능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한 말입니다. "작은 일은 작은 일이다. 하지만 작은 일에 신실한 것은 큰 일이다." 우리가 날마다 반복하는 모든 일상생활은 작은 일입니다. 위대한 선교사들이 하는 일에 비해서는 굉장히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일에 소명자로서 정성을 쏟으면 그것은 큰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큰 일을 하지 않는다. 나는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한다." 작은 일도 큰 사랑을 가지고 하면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레사 수녀가 세계적으로 추앙 받는 성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소한 일을 하면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큰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Os Guiness)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책이 한국에 여러 권 번역되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의 유명한 부루킹스 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객원 연구원을 지내 정도로 탁월한 학자입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변증가요, 연설가로서 활동하면서 평신도임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자기가 왜 목사가 되지 않았는가에 대해 간증하는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대학원 학생으로서 공부할 때입니다. 한 9개월 동안 교회에 가서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지원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정신 없이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자동차 기름을 넣기 위해서 주유소를 찾아 갔습니다. 막간을 이용하여 그 주유소 직원과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마 전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주유를 끝내고 시동을 거는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내가 만나서 대화를 나눈 사람 중 불신자로는 이 주유소 직원이 처음이구나'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자원봉사자로서 교회 안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온통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1주일을 보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만날 기회란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만약에 목사가 된다면, 불신자들을 상대로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히 없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 될 마음을 완전히 접고 일평생 평신도로서 뛰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평신도로서 세계적인 학자, 세계적인 연설가가 되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 있는 목사보다 평신도가 증인으로서의 소명을 훨씬 더 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지난 한 주간 동안 저는 불신자 한 사람 만났습니다. 아파트에서 드나들면서 보는 경비 아저씨 외에는 불신자를 만날 기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 태신자에게 카드를 써서 보낸 것 외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침에 문 열고 나가면 불신자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음의 소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음만 있으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평신도가 갖는 굉장한 특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에 가면 목사보다 여러분들이 주님으로부터 더 큰 상급과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고유한 위치와 아름다운 소명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소명자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49절)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령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을 보면서 많은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기도하는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하자 그들이 금방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고 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큰 소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여 그들을 보려고 달려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셨다고 외쳤습니다.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외침에 사람들이 몰려오자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했습니다.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그리고 이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 죄가 용서 받을 것이다."
사실 그 앞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말을 듣자마자 가책을 받아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남자만 3천명이므로 여자까지 합하면 6천명이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예수 믿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 앞에 예루살렘이 삽시간에 함락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집사 빌립 앞에 사마리아가 굴복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하자 안디옥이 예수 믿는 도성이 되었고, 온 유다 전역에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곧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믿고 돌아온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진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집회하는 것을 TV를 통해 보셨겠지만,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자주 보았습니다. Crusade전도집회를 TV로 방영했는데 제가 여러 번 그 집회를 지켜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20~30분 하는 메시지인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아, 저 설교를 듣고 몇 사람이나 예수 믿고 돌아올까?' 하는 의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설교를 끝낸 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항상 하듯이 손으로 턱을 괴고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뒤에는 성가대가 조용히 초청 찬양을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는 협박도 없습니다. 과연 그 설교를 듣고 믿겠다고 일어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고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스타디움에 있는 수만 명 가운데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복도로 나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지켜 보고는 말을 잃었습니다. 누군가 사람을 설득시킨다 하더라고 저렇게 설득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무슨 말로 사람들을 저렇게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66년도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하버드대학교에 초청을 받아 강의를 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내가 전도를 할 때는 정성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고자 노력했는데, 그 후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의 힘을 완전히 빼버리고 전도에 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나는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 일은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하시도록 나는 내 힘을 완전히 빼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아주 기분 좋게 전도합니다. 그 다음 문제는 성령에게 맡기고 나는 전도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의 전도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메시지는 신통치 않는 것 같은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대각성전도집회를 20년 가까이 해오면서 저도 여러 번 이 사실을 체험하고 보았습니다. 옥 목사가 복음 전하는 것이 신통치 않을 때도 많습니다. 어떤 때는 강사님들을 모시고 이 시간에는 예수 믿지 않는 분들을 위해 복음을 전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는 강단에 세웁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복음은 전하지 않고 일반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알아 듣지 못하는 어려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교역자들, 안 믿는 사람을 데리고 순장들, 순원들도 안절부절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가 끝나고 나면 제가 올라가서 그 복음 메시지를 간단히 요약해서 보충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청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히려 그런 시간에 일어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수십 명, 수백 명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손수건을 눈에 대고 막 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복음은 성령이 전하는 것이고, 나는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주신 3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전도자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되기 때문에 얻게 된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는 소명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성령은 이미 교회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완악한 심령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주님은 일하실 것입니다. 이 서초동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강남을 복음으로 바로 잡을 것입니다. 병들고 썩은 이 나라를 복음으로 새롭게 세워 주실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증인으로서의 소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소중한 것을 받았사오니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이번 대각성전도집회 때에도 수많은 영혼이 구원 받는 생명의 잔치가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광을 세세토록 하나님 앞에 돌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