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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1:37~22:6
오늘 본문의 앞부분인 21:37-38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하여 붙잡히시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백성을 가르치시려고 애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이른 아침부터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에 몰려오는 백성을 하루 종일 가르치신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뒷부분인 22:1-6은 이에 반해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던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이들에게 주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 가룟 유다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가 만난 것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을 때였다고 본문 22:1이 밝히고 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이후로 유대인의 연력에서 첫 번째 달이 되었고 우리 달력으로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에 해당하는 니산월(가나안 말로는 아빕월이라고 하고 그 뜻을 따라서는 이삭월이라고도 하며 훗날 바벨론 식으로 니산월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14일 오후에 양을 잡는 일에서부터 그 준비가 이루어져서 그날 해가 진 후에, 그러니까 (해 질 때부터 그 다음 날 해 질 때까지를 하루로 치는) 유대식으로는 니산월 15일에 가족이나 친지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며 지내는 명절입니다. 무교절은 역시 니산월 14일부터 집안에서 누룩을 치우는 일로부터 그 준비가 시작되어 그 날 저녁인 15일부터 21일까지 한 주간 동안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을 먹으며 지키는 명절입니다. 그러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은 사실상 니산월 14일에 같이 시작되어서 유월절은 하루, 무교절은 일주일간 계속되는 명절인 것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이 무교절의 첫 하루와 겹치기 때문에 엄격하게는 구별되는 두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한 명절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본문22:1에서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허긴 본래 이 두 명절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둘 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고 신음하며 살다가 모세에 이끌려 이집트로부터 해방되어 나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지켜지기 시작한 명절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남겨두고 계실 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12:1-2),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출12:6-8),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출12:12-14). 이렇게 유월절과 무교절은 둘 다 그 기원이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있는 명절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신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기쁜 명절에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을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로부터 해방시키시려는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벌써부터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그 의도를 실천에 옮길 좋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눅19:47-48). 그 이유는 온 백성이 그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기에 그를 잡아 죽였다가는 백성이 들고 일어날 것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였습니다. 본문 22:3은 그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신 것은 단순히 유다라는 한 개인의 배신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맞서고 방해하려는 사탄의 역사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간 금식하시며 메시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대담하게 세 차례나 유혹하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고 뒤로 물러난 후로는 드러나지 않게 암약하던 사탄이 제 깐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예수님께 가하는 거사를 단행한 것입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힌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했습니다.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아넘기려 했습니까? 돈이 그 이유였음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돈을 좋아해서 예수님 일행의 재정을 맡고 있으면서 돈을 도둑질하곤 했으며(요12:6) 스스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26:15) 하며 거래를 해서 은 삼십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이 유다의 배신의 일차적 동기라고 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이 임금이 되시면 그 때는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신의 일차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실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당신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실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그 말씀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도 않았지만 머리 잘 돌아가고 상황판단이 뛰어난 유다는 그 말씀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속으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메시야이시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실 이로 여기지 않게 된 순간부터 유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무익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조차 한 처신이었을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예수님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떠나기에는 잃어버린 3년의 세월이 너무나 아깝게 여겨졌을 것이고 그래서 한 푼이라도 챙기며 떠나는 것이 그다운 처사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본전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자연스럽게 주어진 답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를 원하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흥정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26:15에 보면 대제사장들을 찾아간 유다가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제 입으로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내며 흥정을 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26:16) 했습니다.
그런데 은 삼십이란 대단한 돈도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기를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말미암아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여 남녀를 막론하고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21:29)이라 했으며,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다시 말해서 받친 사람이 죽지는 않을 경우에는)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 삼십이라는 것은 종으로 일하는 사람이 소에 받쳐서 다치거나 타박상이라도 입을 때 그 보상 또는 위로의 표시로 받는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예수님 당시의 시세로는 은 삼십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돈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그다지 많은 돈은 아니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한 여인은 네 식구 기준의 한 가정이 일 년 동안 먹고 살만한 돈에 해당하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는데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스승에게 행한 일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의 방문을 받고 뜻밖의 흥정에 성공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기뻐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그들의 기쁨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쉽지 않은 딜레마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잡아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이번 유월절 기간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습니다. 이 유월절에 예수님을 못 잡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중들이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보내서 앞뒤좌우로 함정이 있는 질문을 던지며 예수님을 시험해보았지만 다 실패한 터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의 질문에도 다 대답하시고 예수님의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군중들은 더 열광하며 그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에게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붙잡았다가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최측근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제 발로 걸어와서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안전하게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는 방도를 알려주겠다니 그들이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체포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도 예수님의 측근 내부의 자중지란 때문이었던 것으로 그 이유를 돌려대면 군중들로부터의 거센 비난과 반발을 피할 수도 있으니 그보다 더 잘 된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다가 돈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선뜻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이되 민란이 날까 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막14:1-2)고 하던 애초의 계획을 바꾸어 이번 유월절 기간에 그를 잡아 죽이는 일을 단행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합의하고 돈을 받은 유다는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체포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피하시려면 얼마든지 피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것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는 피해서는 안 될 일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신 것은 또 다른 의도를 갖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신 말씀의 의미는 이 유월절을 넘기지 말자는 뜻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굳이 유월절에 잡혀 죽으시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유월절이 갖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오기 전 온 이집트 땅에서 처음 태어난 생명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양의 피가 뿌려짐으로써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구원받을 백성을 위해 피를 뿌려야 할 유월절 양이셨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한 대로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는 것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월절 명절 기간에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가장 많은 백성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건을 선포하시고 증언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사람의 눈에는 실패와도 같았던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벽한 성공이었고, 따라서 기가 막히게 절묘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여겨지던 대제사장들과 유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이용한 사탄의 계략은 스스로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면서도 그 자신의 탐욕과 기회주의의 희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보다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앞서있던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더 좋을 뻔했던”(마26:24)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층은 백성 위에서 권위를 행사할 자리를 유지하려는 권력욕에 사로잡히고 예수님에 대한 시기심으로 가득 차서 예수님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를 제거하려다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나라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사탄의 노리개감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와 유대교 지도층의 모습이 다름 아닌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좇는다 하면서 사실은 다른 욕심이 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 충성한다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바로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저 몸으로 주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영적 성공을 보증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물욕이나 권력욕이나 온갖 세상적 욕심을 우리의 마음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마귀에게 이용되고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며 파멸의 길을 갈 뿐임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보고 바로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행복을 소유하고 향유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