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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 (에베소서 6:1-4)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Ninety-three"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불란서 혁명 이후에 불란서는 큰 혼란에 빠졌고 모든 백성이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어느 부대 하나가 이동하면서 군인들이 숲 속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다가 기아에 지친 아주머니가 세 아이를 데리고 길가에 쓰러져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상사 한사람이 빵 한 덩이를 던져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지체 없이 이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세 아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정신 없이 받아먹으며 그렇게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젊은 병사가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죠?" 상사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야. 어머니이기 때문이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자기는 굶으면서도 자식에게는 줍니다. 자기 입에 들어간 것은 없지마는 아이들이 빵 한 조각을 먹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더 크게 기뻐하며 만족해합니다. 그것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 교수는 아주 명쾌하게 우리의 사람된 모습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로스에 의해서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서 양육되고 필로스에 의하여 성숙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사랑'이라고 같은 말을 쓰고 있습니다마는 사실상 사랑은 차원적으로 다르고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을 헬라 사람들은 아주 다른 단어로 표현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이런 화끈한 사랑, 이것을 '에로스'라고 합니다. 남녀간에 사랑, 애정이라고 하는 사랑을 이렇게 에로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에로틱' 할 때는, '에로티시즘' 전부 그런 뜻을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스토르게' 라고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혈연적인 사랑입니다. 혈연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 대한, 이 부모의 사랑은 철저한 끈질긴 피로 연결된 그러한 사랑입니다. 이걸 스토르게라고 그러고요 그리고 친구간에 사랑, 이 수평적인 사랑, 심지어는 나라를 사랑하든 형제를 사랑하든 친구를 사랑하든 '필아델피아' 혹은, 필아델포스 이렇게 '필'자를 붙여서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친(親) 이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사랑, 그리스도께서 계시해주신 사랑, 절대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 그것을 아가페라고 말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에로스에서 태어나고 스토르게에서 자라고 필로스에서 성숙되고 아가페에서 완성된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이것이 인간입니다. 한평생 우리는 사랑 속에 살 뿐더러 사랑을 배우며 삽니다. 사랑 공부하며 삽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사랑을 배웁니다. 문제는 어디까지 배웠느냐 몇 학년이나 되었느냐 얼마까지 배웠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인간 됨이란 사랑 이해의 수준에 있는 겁니다. 아직도 에로스적인 데 매여 있습니까? 아니, 필로스든지 그런데 매여 그 정도입니까? 아니면 끈질기게 스토르게만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건 그 정도입니다. 사랑 이해가 높아져서 아가페를 이해해야 합니다. 희생적인 사랑, 하나님의 사랑,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아가페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 때, 그게 바로 예수 믿는다는 이야기죠.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응답해야 됩니다. 자, 이제 보세요. 한 남자의 사랑에 응답해서 여자가 응답하고 결혼을 합니다. 자, 부모님의 사랑에 응답해서 효자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친구의 사랑에 진실하게 응답해서 친구가 되고, 신의를 지키는 인간관계가 됩니다. 또 인격이 되어갑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에 응답해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응답하는 것은 곧 베푸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을 또 실천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아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아서 남편을 사랑합니다. 친구의 사랑 속에서 친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가파테알렐루스 카도스 헤가페사 휴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랑이 아가페다. "아가파테알렐루스" 아가페의 사랑을 하라. 베풀어라. 여러분, 여러분 생에 '이것은 아가페였다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을 한 것이다' 몇 번이나 있습니까? 몇 번이나 그런 사랑을 해보셨습니까? 여러분의 사랑의 수준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저는 북한에 갈 때마다 좀 듣기 거북한 인사를 받게 됩니다. 그들은 만찬을 할 때에 꼭 서서 정식으로 아주 엄숙하게 연설을 하듯이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그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꾸 바뀌니까 그들이 나에 대한 관계를 다시 수립을 해야 됩니다. "동무,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서 총살되었는데 그 때 동무가 옆에 있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하여 오셨으니 조국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럽니다. 가끔 묻습니다. "목사 동무는 분명히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왜 이 북조선을 그렇게 도우려고 애를 쓰느냐?" 그럴 때마다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당신들과 다른 것이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이유 없습니다. 당신들의 아무 대가성도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 사랑의 수준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정말 아가페적 사랑을 해 본 일이 있습니까? 거기서 내 인간의 인간됨의 수준은 결정이 됩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사랑에 대한 배신입니다. 높은 사랑, 하도 귀한 사랑을 받고 그것을 배신한다면 이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미움받고 미워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그러나 사랑 받고 미워하고 특별히 고상한 사랑을 받고 배신한다면 죽어 마땅한 것이죠. 아주 어렸을 때 제 어머니가 제게 일러준 이야기입니다. 홀로 된 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정성을 다해서 그 힘든 일을 해가면서 돈을 벌어서 이 아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답니다. 이 아들이 보고싶어 못 견디겠어요. 편지도 쓸 줄 모르고 요새처럼 전화도 안됩니다. 그저 아들이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아들을 보러 서울로 왔는데, 아들이 다니는 학교 교문에 서서 하루종일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자기 애인하고 같이 손을 잡고 나오고 있더랍니다. 반가워서 "얘 아무개야!"하였더니 그 애인이 남자에게 묻기를 "저 여자 누구야?" 이 남자, 이 아들 하는 말이 "어, 그 우리 집에 오래 전에 있던 식모야" 이 말을 듣고 어머니는 그대로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말씀하시더만요. "사랑을 배신하지 마라." 사랑에 대한 배신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그 아들이 살아서 뭘 하겠어요. 성경은 이런 죄를 무섭게 책망합니다.
한 200년 전에 중국에 선교를 할 때, 아시는 대로 중국은 그 당시 유교, 유교 문화에 꽉 젖어 가지고 있는데 이제 기독교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는데 그게 마음이 열리기가 어렵죠. 그럴 때에 그 때에 만들어진 전도지를 보니까 그 전도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가장 높은 효도의 종교입니다" 그랬어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21장17절을 인용합니다. 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출애굽기 21장15절, 레위기 20장9절에는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무조건 쳐죽여라. 신명기 21장 18절로 21절에 보면 패역한 자식,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고 징계도 듣지 않는 자가 있거든 공회에 끌고 가서 증거를 내고 끌어내서 돌로 쳐죽여라 그랬어요. 패역한 자식은 죽여라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악을 제하라. 이 무서운 성경구절을 전도지에 써 놓았어요. 그리고 다시 긍정적으로 예를 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아버지가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그 때에 나이, 이삭이 스물 일곱살이에요. 아버지 나이 127세. "너를 재물로 바치란다" 할 때에 "100세가 넘더니 노망했구려" 충분히 그럴 수가 있죠. 그러나 이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고 공경하고 제단에 올랐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절대 순종한 것이요. 이것이 기독교다 그것이에요. 그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기독교는 철저한 효도의 종교다 이렇게 전도를 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문이 열린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순종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두 가지입니다. 순종이란, 굴종이 아닙니다. 복종이 아닙니다. 굴종이나 복종이 아니고, 순종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겁니다. 공경이라는 것은 티마라고 하는 말은 특별한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쓰여지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요새는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자식들이 많아요. 안되었다 싶다나요. 이런 망언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하나의 친하는 친분정도의 그런 사랑을 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높이 섬기라. 낮춰 사랑하는 게 아니고, 수평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높이 사랑하는 거예요. 공경하라. 높이 섬기라 이거예요. 이것은 존경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옳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국교회에서도 어머니 주일을 지킵니다. 이 어머니 주일을 지킬 때에 늘 학생, 어린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중요한 Illustration이 있습니다. 중요한 예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미국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이것은 중요한 실제적 교훈이기 때문이죠. 미국 사람들이 존경하고 잘 아는 조지 워싱턴, 1대 대통령 워싱턴이 어렸을 때 그의 꿈이 뱃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원이 되고 마침내 선장이 되고 바다를 헤쳐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 바다의 사람이 되겠다 생각을 하고 우선 선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짐을 다 꾸려가지고 하인들과 같이 이제 배를 타러 나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을 때, 큰 뜻을 품고 집을 나가는 아들을 말릴 수는 없습니다. 아들의 손을 잡고 그대로 울기만 합니다. 줄줄 우는 겁니다. 워싱턴은 그 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내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어머니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내 꿈을 좇을 수는 없다.' 꿈을 포기하고 "짐을 내려라." 다시 짐을 풀어놓고 어머니에게 순종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미국에 유명한 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되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떠났더라면 그저 잘해서 선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큰 뜻을 품고 다 준비했던 것도 버리고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왜요? 어머니가 나보다 지혜로우니까. 나보다 어머니에겐 경륜이 있으니까. 어머니의 명예를 높이고 어머니의 인격을 높이고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어요. 그를 높이고 높여 순종한 것이에요.
그리고 공경이란 것은 그를 높이는 것이요 그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 어머니는 이런 분입니다. 내 아버지는 이런 분입니다. 그는 이렇게 훌륭했습니다. 항상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긍지와 자랑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런가 하면 공경이란 대가성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공경해서 무얼 받아내자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질투 없는 사랑은 오로지 효(孝) 하나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응답이올시다. 또한 이 사랑에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소원에 응답해야 됩니다. 어머니의 소원 아버지의 기도, 그것을 알고 그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경입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많더라도 아니요, 그의 소원을 우선해야 됩니다. 어머니의 소원은 선합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의로운 것입니다. 때로 부모님이 "공부하라 공부하라" 입버릇처럼 하지만은 알고 보면 거기에는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제 때에 공부를 못해서 이렇게 늘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런고로 너는 공부하라' 이것입니다. 그래, 이 말이 이렇게 듣기 싫었습니다. 그 속에 소원이 있단 말입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어요. 또한 부모님의 소원 중에 가장 큰 것은 건강입니다. 여러분, 병들지 마세요. 병들면 불효자입니다. 건강을 잘 지켜서 건강해야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이지, 앓아 누워있는 자녀는 불효자입니다. 그것도 내 잘못으로 인하여 내가 병들었다면, 천하의 불효자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부모님 앞에서 한숨쉬는 것 아니에요. 죽기 전에는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부모님 앞에 탄식하고 괴로워해서는 안됩니다. 그의 마음에 기쁨을 드려야겠으니까요. 그의 소원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특별히 정직하게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죠.
효는 가정 교육의 기초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 할아버지가 제게 해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려장 이야기를 하면서 어떤 아버지가 나이 많은 어머니를 내다 버리려고 지게에다 태우고 지게 지고 산으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어요 꼬마 아이를. 깊은 산에다가 놓고 음식을 좀 내려놓고 요거 다 잡수시고 돌아가세요. 아 그리고 지게를 놓고 돌아오려고 했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아빠 그 지게 가지고 가지." 지게를 거기 놔두고 가려고 했더니 "지게를 가지고 갑시다" 그래요. "왜냐?" 그러니까 "아버지 늙은 다음에 또 지어다 놔야지. "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쿠 안되겠다' 생각하고 그 어머니를 다시 업고 돌아왔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요새는 아이들이 효도를 하려해도 효도하는 방법을 몰라요. 효도하는 것을 못 보았거든. 언제 효도를 보았나? 못 본 효도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못 배운 효도를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자녀가 말을 안 듣거든 내가 부모님에게 어떻게 했나 생각해 보세요.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바보 같은 생각이 없어요. 잊어버려요.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는 거예요.
오늘 성경말씀에는 장수하게 되고 형통하리라. 이건 통계학적 진리예요. 효도하는 사람이 오래 살아요. 효도하는 가문이 장수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형통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혜로 가정으로 세계적으로 형통합니다. 이스라엘의 강한 점은 그 전승을 지키는 데에 있습니다. 전승의 뿌리는 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경, 그것이 바로 인격의 뿌리입니다. 공경을 모르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가 없어요. 공경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 공경과 순종을 익히지 못한 사람은 영영 구제 불능이에요. 마틴 루터는 그의 대요리문답에서 부모란 네가지를 말합니다. 낳아준 부모, 나를 가르쳐준 선생부모, 나를 지켜주시는 왕부모, 그리고 내 영적인 생활을 지도하는 목사부모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란 스토르게만이 아니에요. 이런 네가지 부모 속에 있어요. 부모에게 순종하라 순종의 덕을 익히고 비로소 인격이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도자가 됩니다. 이것이 가풍이 되고 가문의 전통이 될 때 자자손손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복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고 건강하며 형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진리를 항상 새롭게 일깨워 주심에 감사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면서 순종의 덕을 몸에 익히면서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가정들이 효의 가정이 되고 주의 약속된 복을 다같이 받고 또 이어가는 거룩한 가정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곽선희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