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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교수 (총신대학교 교수) 2004.12.30 조회 : 774
믿음의 장은 세상이다
루터는 주로 좁은 의미에서 신학적 구원론에 초점을 두고 개인구원과 윤리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인간의 전적타락과 하나님의 은혜, 이신칭의를 강조한 나머지 중세적 이원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교회 밖의 문화 영역은 덜 중요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단순한 구원론에 제한하지 않고 일반은총을 통한 삶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였다. 즉 하나님의 주권은 전 우주적인 것으로서 그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문화론에 있어서 루터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인간이 타락하였고, 타락한 인간의 문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릴 축복이 있고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칼빈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문화활동은 선택적 명령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적극적 명령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믿는 자는 비록 죄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금해야할 명령들을 따라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현실문화에 참여해야 한다. 세상 만물이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아래 있는 시간과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영적 힘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는 자신을 교회 안에 가두고 세상은 제멋대로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이 세상을 믿음의 장으로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소명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독교신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소명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따라서 노동관, 경제관, 정치관 등을 하나님의 주권과 결부시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성취될 수 있도록 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단순한 고백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문화의 장에서 의지적이고 능동적 행함으로 나타나야하기 때문이다.
문화명령은 그 안에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문화를 통해서 주어지는 축복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활동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다. 우리는 문화명령 때문에 자연을 이용해서 유익하고 아름답고 편리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후 문화는 왜곡되어 창조 본연의 목적을 상실하고 인간자신을 위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래서 오늘날 현대문화는 하나님을 떠난 문화가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그 결과 수많은 문화의 오물을 생산해 내었다. 대표적인 것이 도덕적 타락과 생태학적 위기이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이 문화의 산물을 통해서 올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인간문화는 가치기준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윤리규범도 상대적이 되고, 따라서 인간 중심적 문화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도덕적 오물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더러운 문화의 오물을 걷어내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먹고 자라나는 세대는 심각한 병으로 고통을 겪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 가져온 환경문제 또한 심각하다. 칼빈은 악이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남용하고 파괴하는데 있다고 본다. 손봉호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과학기술의 문화가 기독교 때문에 가능했다면 거기서 파생된 문제들에 대한 간접적 책임이 기독교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를 변혁해야할 사명도 있지만, 특히 이 문화의 역기능적 요소를 제거하는 일도 우리의 몫이요, 책임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이룩된 문화가 가져온 자연의 파괴로부터 자연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문화활동을 말한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오늘날과 같은 역사적 변혁기에서 기독교신앙은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고 제시한 바 있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시대적 사명을 알고 문화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하며, 문화의 부작용을 최소화해야하고 책임적 문화활동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의 삶이란 이 세대와는 차별되고 변화된 존재로서 이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문화적 윤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롬12:1-3). 오늘도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세상문화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세상이 설사 타락하여 하나님을 외면하고 악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실 만큼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을 갖고 계신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의존하고 순종하겠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창조된 '세상 전체'를 선교의 장으로 삼고 그의 명령을 따라 사랑을 베풀며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설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주의 나라가 온전히 이 땅에 성취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이 온 세계에 선포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며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영향을 끼치는 권세 있는 믿음의 공동체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믿는다. 과거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자신의 일을 성취해 오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보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문화 속에 동화되어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와 타락과 심판 너머에 계시된 긍휼과 사랑의 섭리적 역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눈물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1-22)라고 고백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저 앞에 다가올 메시아의 왕국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낙심하지 않고 주어진 부르심에 성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젼(Vision)이란 흑암 가운데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다. 오늘도 믿음의 사람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현실자체만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 너머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서 현실을 바라본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세속적 낙관론이나 혹은 비관론에 빠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은 그분이 통치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보고 오직 그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하여 현재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삶의 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순례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