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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현대인이 안고 있는 병의 원인은 대부분이 육체의 피곤함과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스트레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의 담대함과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남다른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옛날 소년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맞아 싸울 때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이 마음의 담대함과 평온함으로 나아갔고 결국 그를 이겼습니다. 사울 왕을 위시하여 그 많은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사십일 동안 숨을 죽이고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나이 어린 홍안 소년 다윗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과 평안함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습니다(삼상 17:45).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전쟁에 나가는 군인으로 묘사하였습니다(딤후 2:4). 본문 말씀 11절에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성도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대적하면서 매일 같이 숨 막히는 격전을 치러야 되는 긴장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께서 함께 하시며 안위해 주시는 은총 속에 살게 됩니다(시 23:4-5).
재난과 질병과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임마누엘의 특권으로 담대함과 평안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비결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담대하게 사는 사람
마음에 담력이 큰 사람은 외부적 환경이나 급격한 상황변화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이러한 담력이 선천적인 경우도 있고 더러는 오랜 훈련과 경륜으로 오는 후천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그것이 육체적인 완력에 의한 것도 있고 다르게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신앙적인 담력도 있습니다.
(1) 육체적인 담력
사도 바울의 경우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도 남다른 담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59애 보면 열심 있는 유대교 청년들이 전도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바울이 현장에서 그들을 진두지휘 하였습니다. 이 때만해도 산헤드린 공회가 인정해 주는 젊은 랍비요 패기 있는 청년으로서 내친김에 모든 기독교도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행 9:1-2). 어디까지나 자기의 완력을 의지하고 겁 없이 덤벼드는 담력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체격이 좋거나 주먹이 세거나 뱃장이 있어서 두려움을 모르고 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령 무인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이거나 폭력조직의 두목일 수도 있고 그와는 다르지만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과 장수들도 남다른 담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육체의 담력은 한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5).
(2) 영적인 담대함
은혜 받은 사람의 변화된 심령에 자리 잡은 담대함을 뜻합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게 만듭니다.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육신의 법이 저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는다고 말한 바울은 그 사실을 두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비명을 지르듯 절규하였습니다(롬 7:23-24). 그러나 잠시 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고 환희에 넘치는 개가를 불렀습니다(롬 8:1-2).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불안의 요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평안하고 담대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
(3) 성령으로 공급되는 능력
스가랴 4:6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는 사람은 태산 같은 무거운 것을 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며 이겨나갑니다. 스가랴 4:7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삼손은 블레셋으로 가다가 딤나의 포도원 사이 길에서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손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삿 14:6).
그 이후에도 수없이 블레셋 원수들이 몰려왔지만 아무런 두려움 없이 태연하게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저와 함께 하시며 순간순간 필요로 하는 힘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의 서약을 저버리고 성령이 떠나갔을 때 무력하게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혀 두 눈을 뽑힌 채 맷돌을 돌리는 등 놀림감이 되고 말았습니다(삿 16:21).
Ⅱ. 담대함의 성격
본문 말씀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싸움에 임할 때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적수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 대응하는 자세나 전략도 적절하여야 됩니다. 곧 육체적인 완력이나 외부적인 담력을 가지고는 곤란합니다.
(1) 내적인 담대함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천하를 주름잡던 장수나 영웅들이 우상처럼 떠받들어 졌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당당한 체구와 풍채를 갖추고 위엄이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 당시 로마의 원형극장에서는 건강한 투사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하였고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들은 열광하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싸움이란 이런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대상 곧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대적과 마주설 때의 담대함도 겉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숨겨진 내적인 담대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울 왕 같이 겉으로 볼 때 대단한 위용을 갖추고 힘이 있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허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다윗과 같이 나타난 외모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도 내적으로 단단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실속 있는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6).
(2) 결단하는 용기입니다.
여기 “담대히”라는 말(παρρησία)의 어원을 살펴보면 첫째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를 뜻합니다. 곧 어떤 억압이 있어도 당당하게 말하는 자유입니다. 둘째는 ‘심적 용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확고한 자기의 철학이나 주관에 따라 흔들리지 않은 마음의 담대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중 앞에 선 엄연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경우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신앙과 변화된 인격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의 교통으로 심적인 담대함과 평안함에서 나타나는 행동인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다음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억압을 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자기가 소경이었던 것과 예수로 말미암아 그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증언하였습니다(요 9:25). 오순절 이후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무서운 핍박이 몰아쳤을 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고 당당하게 대처하였습니다(행 4:19-20).
(3) 자기를 이기는 담력입니다.
빅트로 위고(V. Hugo)는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사회악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32). 옛날 중국의 시인 왕양명(王楊明)은 ‘산 중에서 만난 적은 싸워 이길 수 있어도 자기 안에 있는 적은 이기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고 하였습니다(롬 7:23). 그러므로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속에 있는 죄성과 육체적 소욕들을 제압하고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성을 알고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에 확실히 거기에 대처하는 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되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육체의 정욕을 딛고 이긴 사람은 자기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제어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안심하게 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담대함의 목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남다른 특권과 은총을 베푸실 때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선용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5:1). 그 이유에 대하여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8:19). 여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제게 담대함의 은총을 주셔서 그가 하여야 할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19-20절).
(1) 힘써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바울처럼 감옥살이를 하거나 법관에게 불려나가 심문을 받게 되는 경우 어떻게든지 자기를 변명하고 석방되기 위해서 기를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경우는 로마 감옥에서 미결수의 몸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유리하게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나가는 것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복음 증거자에게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어 보내실 때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채찍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겠지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0:17-20).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담대하게 사는 은총을 받아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승리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24시간 근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매우 답답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오히려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품위를 지켜 나갔습니다.
본문 말씀 20절에 보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있어도 하나님의 사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적인 수도요 정치의 중심지로써 여러 나라에서 외교적 임무를 띠고 나온 사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교관으로서의 신분을 보장 받고 치외 법권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거기 비하여 바울은 영어의 몸이 되어 비참한 지경에 있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신이라는 엄청난 자부심과 담대한 은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신뢰를 받았으며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능력이 행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4:8-9).
그는 이와 같은 승리적 삶의 비결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빌 4:13).
출처 : 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
현대인이 안고 있는 병의 원인은 대부분이 육체의 피곤함과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스트레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의 담대함과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남다른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옛날 소년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맞아 싸울 때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이 마음의 담대함과 평온함으로 나아갔고 결국 그를 이겼습니다. 사울 왕을 위시하여 그 많은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사십일 동안 숨을 죽이고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나이 어린 홍안 소년 다윗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과 평안함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습니다(삼상 17:45).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전쟁에 나가는 군인으로 묘사하였습니다(딤후 2:4). 본문 말씀 11절에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성도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대적하면서 매일 같이 숨 막히는 격전을 치러야 되는 긴장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께서 함께 하시며 안위해 주시는 은총 속에 살게 됩니다(시 23:4-5).
재난과 질병과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임마누엘의 특권으로 담대함과 평안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비결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담대하게 사는 사람
마음에 담력이 큰 사람은 외부적 환경이나 급격한 상황변화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이러한 담력이 선천적인 경우도 있고 더러는 오랜 훈련과 경륜으로 오는 후천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그것이 육체적인 완력에 의한 것도 있고 다르게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신앙적인 담력도 있습니다.
(1) 육체적인 담력
사도 바울의 경우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도 남다른 담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59애 보면 열심 있는 유대교 청년들이 전도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바울이 현장에서 그들을 진두지휘 하였습니다. 이 때만해도 산헤드린 공회가 인정해 주는 젊은 랍비요 패기 있는 청년으로서 내친김에 모든 기독교도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행 9:1-2). 어디까지나 자기의 완력을 의지하고 겁 없이 덤벼드는 담력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체격이 좋거나 주먹이 세거나 뱃장이 있어서 두려움을 모르고 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령 무인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이거나 폭력조직의 두목일 수도 있고 그와는 다르지만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과 장수들도 남다른 담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육체의 담력은 한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5).
(2) 영적인 담대함
은혜 받은 사람의 변화된 심령에 자리 잡은 담대함을 뜻합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게 만듭니다.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육신의 법이 저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는다고 말한 바울은 그 사실을 두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비명을 지르듯 절규하였습니다(롬 7:23-24). 그러나 잠시 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고 환희에 넘치는 개가를 불렀습니다(롬 8:1-2).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불안의 요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평안하고 담대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
(3) 성령으로 공급되는 능력
스가랴 4:6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는 사람은 태산 같은 무거운 것을 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며 이겨나갑니다. 스가랴 4:7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삼손은 블레셋으로 가다가 딤나의 포도원 사이 길에서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손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삿 14:6).
그 이후에도 수없이 블레셋 원수들이 몰려왔지만 아무런 두려움 없이 태연하게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저와 함께 하시며 순간순간 필요로 하는 힘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의 서약을 저버리고 성령이 떠나갔을 때 무력하게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혀 두 눈을 뽑힌 채 맷돌을 돌리는 등 놀림감이 되고 말았습니다(삿 16:21).
Ⅱ. 담대함의 성격
본문 말씀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싸움에 임할 때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적수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 대응하는 자세나 전략도 적절하여야 됩니다. 곧 육체적인 완력이나 외부적인 담력을 가지고는 곤란합니다.
(1) 내적인 담대함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천하를 주름잡던 장수나 영웅들이 우상처럼 떠받들어 졌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당당한 체구와 풍채를 갖추고 위엄이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 당시 로마의 원형극장에서는 건강한 투사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하였고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들은 열광하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싸움이란 이런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대상 곧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대적과 마주설 때의 담대함도 겉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숨겨진 내적인 담대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울 왕 같이 겉으로 볼 때 대단한 위용을 갖추고 힘이 있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허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다윗과 같이 나타난 외모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도 내적으로 단단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실속 있는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6).
(2) 결단하는 용기입니다.
여기 “담대히”라는 말(παρρησία)의 어원을 살펴보면 첫째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를 뜻합니다. 곧 어떤 억압이 있어도 당당하게 말하는 자유입니다. 둘째는 ‘심적 용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확고한 자기의 철학이나 주관에 따라 흔들리지 않은 마음의 담대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중 앞에 선 엄연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경우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신앙과 변화된 인격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의 교통으로 심적인 담대함과 평안함에서 나타나는 행동인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다음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억압을 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자기가 소경이었던 것과 예수로 말미암아 그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증언하였습니다(요 9:25). 오순절 이후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무서운 핍박이 몰아쳤을 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고 당당하게 대처하였습니다(행 4:19-20).
(3) 자기를 이기는 담력입니다.
빅트로 위고(V. Hugo)는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사회악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32). 옛날 중국의 시인 왕양명(王楊明)은 ‘산 중에서 만난 적은 싸워 이길 수 있어도 자기 안에 있는 적은 이기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고 하였습니다(롬 7:23). 그러므로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속에 있는 죄성과 육체적 소욕들을 제압하고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성을 알고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에 확실히 거기에 대처하는 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되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육체의 정욕을 딛고 이긴 사람은 자기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제어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안심하게 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담대함의 목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남다른 특권과 은총을 베푸실 때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선용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5:1). 그 이유에 대하여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8:19). 여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제게 담대함의 은총을 주셔서 그가 하여야 할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19-20절).
(1) 힘써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바울처럼 감옥살이를 하거나 법관에게 불려나가 심문을 받게 되는 경우 어떻게든지 자기를 변명하고 석방되기 위해서 기를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경우는 로마 감옥에서 미결수의 몸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유리하게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나가는 것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복음 증거자에게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어 보내실 때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채찍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겠지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0:17-20).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담대하게 사는 은총을 받아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승리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24시간 근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매우 답답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오히려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품위를 지켜 나갔습니다.
본문 말씀 20절에 보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있어도 하나님의 사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적인 수도요 정치의 중심지로써 여러 나라에서 외교적 임무를 띠고 나온 사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교관으로서의 신분을 보장 받고 치외 법권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거기 비하여 바울은 영어의 몸이 되어 비참한 지경에 있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신이라는 엄청난 자부심과 담대한 은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신뢰를 받았으며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능력이 행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4:8-9).
그는 이와 같은 승리적 삶의 비결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빌 4:13).
출처 : 손상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