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13-21절


우리 교회와 교단에서도 매년 정기적으로 여러 가지 수양회와 집회들을 가집니다.
  지난주와 금주만 해도 전국 SFC 동기수양회가 중등부와 고등부로 각각 모이고 있으며 바로 그 다음 주에는 전국 여전도회 수련회가 연이어지게 될 예정입니다.
  그 외에도 교역자 수련회, 교회설립 감사부흥회, 노회 및 총회 등등 여러 가지 특별 집회와 성회들이 각 교회별로, 혹은 교단 행사로 철마다 모이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모임들은 고려신학교에서 모이게 되는데, 그런 때가 되면 제일 바쁘고 힘들어지기 마련이신 고려신학교 서무과장 장로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우리 SFC 운동원들의 수양회 때가 가장 편하다고 칭찬하시는 말씀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준비부터 시작해서 끝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사의 진행을 가장 규모 있게 해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하시던 중에도 그런 특별집회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집회들은 오늘날의 경우처럼 미리 광고내고 등록 절차를 거쳐 모인 수양회가 아니라, 그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모여드는 무리들 때문에 언덕이고 빈들이고 바닷가이고 할 것 없이 곧바로 그 장소가 즉석 부흥회요 수양회가 되곤 했었습니다.
  본문 13절과 14절에 "13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고 기록한 내용도 바로 그 한 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순교했다는 소식과 아울러 헤롯이 당신을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런 거동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먼 길을 마다 않고 걸어서 예수님을 좇아옴으로써 또 한 번 큰 무리를 이루게 됩니다.
  세상에서 유명세와 극성팬들 때문에 시달리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도 많이 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처럼 당신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을 결코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강사가 되신 집회는 아무 광고가 없어도 이처럼 항상 차고 넘쳤기 때문에 오늘날의 수양회들처럼 인원 동원에 신경 쓸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또 그 베풀어 주시는 말씀과 신유만으로도 모인 사람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끼치고도 남았기 때문에 특별한 다른 프로그램 같은 것도 필요 없었던 집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야외 즉석 수양회에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식사 준비가 전혀 안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저 좀 준비성 있는 사람들만 가져온 개인 도시락을 먹어 버리고나면 그 다음은 아무 대책이 없는 참 기가 막히는 수양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우리 예수님의 집회가 영적으로만 충만하고 육신적으로는 탈진해서 돌아가는 모임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에 가서는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돌아가는, 실로 풍성한 유종지미의 수양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모이는 교회 역시 그 같은 천국의 잔치가 벌어지는 자리입니다.
  이 잔치 역시 모인 성도들이 결코 빈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잔치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되어야 우리가 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일 때마다 풍성한 영적 은혜의 잔칫상을 나누고 누구나 다 배불리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1. 교회에 천국의 은혜가 항상 넘치기 위해서는 모든 교인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부터 자각해야 합니다.

  본문 15절과 16절에 "15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16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기록했습니다.

  15절에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당면하게 된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라 모여든 이 무리들이 말씀도 듣고 병 고침도 받았지만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운 때에 그들에게 아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곳은 빈들이요"라고 지적하고 있듯이 그 주변에는 어떻게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아무 인가도, 식당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처럼 그 제자들은 지금 그 야외집회에서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곤란한 문제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판단으로는 가장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방법을 예수님께 건의하기를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단체로 음식을 산다면 "이백 데나리온"(요 6:7) 즉 노동자의 7개월 치 봉급에 해당되는 거금으로도 모자랄 정도이니까, 그처럼 '더치페이'(dutch pay)시키는 것이 당연하고도 최선의 해결책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천만뜻밖에도 "사람들을 마을로 보낼 필요는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제자들에게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문제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자기네들 자신에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전혀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혹시 그럴 돈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렇게 해주어야 할 필요나 의무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어처구니없게 들릴 말씀이었지만 사실상 바로 그 예수님의 분부 속에 그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책임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고픈 것을 너희가 알고 있다면, 이 무리들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희들이 깨닫고 있다면,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너희들 자신이 그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이다."라고 일깨워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저 기적적인 오병이어의 큰 잔치가 벌어지게 되는 첫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의 교회생활에서도 꼭 체험되어져야 할 단계입니다.
  우리는 내 주위의 성도들에게, 내가 속한 봉사기관에, 내 섬기는 교회 안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무엇인지는 대부분 잘 찾아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런 문제점들은 잘 발견하면서도 아무도 '바로 나 자신이 그 일을 해야만 할 사람'인줄을 인식하지 못할 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더 많은 교인들이 모여야 할 텐데.'라고 어떤 문제점을 인식하면, 그 다음은 그저 '우리 목사님이 좀 더 영력이 세고 사람 모으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탈이야.'라고 종결짓고 맙니다.
  '우리 교회가 더 부흥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부터 좀 더 신앙생활 뜨겁게 열심히 하고 부지런히 전도해야 할 텐데.'라는 생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전도회가 더 확장되고 힘을 내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 곧 이어서 '우리 전도회 회장도 시원찮고 모이는 회원들도 다들 약하니 할 수 없지.'하는 식으로 가고 맙니다.
  '그러고 보니 나부터 우리 전도회 위해서 매일 기도도 하지 않고 회원들에게 안부전화라도 좀 자주 하지 않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은 참 잘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꼴들을 보시면 우리에게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저 문제점 찾아내는 것에만 숙달된(?) 교인들만 모여 있는 교회 - 그 얼마나 시끄럽고 피곤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이 교회에 더 큰 은혜가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도 있구나.'라는 책임의식을 아무도 느낄 줄 모르는 교회 - 모든 교인들이 다 배고픈 사람으로 남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교인으로서 자신의 책임부터 다할 줄 모르면 결코 제자신자는 될 수 없으며,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줄 청지기들이 없는 교회 안에서는 은혜의 상에 아무 것도 차려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서 꼭 있어야 할 것을 채우고 꼭 필요한 것을 해치워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각자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역장, 주일학교 교사, 찬양대원, 주차봉사위원 등등의 자원봉사직들이 바로 '때를 따라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먼저 남을 대접하고 섬기는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 교회를 찾아오는 성도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빈속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이 제단에 차려진 풍성한 은혜의 식탁을 서로 마음껏 나누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에 천국의 은혜가 풍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진 것을 일단 주님께 갖다 바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7절과 18절에 "17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18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분부가 떨어지니까 그제야 제자들은 무리들 중에 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는데, 이 '보리떡과 물고기'는 당시 서민들의 가장 간단하고 값싼 식단으로서 오늘날의 보리밥과 김치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나마 어떤 어린 아이가 자기의 도시락으로 준비해왔던 것을 제자들이 찾아낸 것이었습니다(요 6:5).

  여기서 '떡 다섯 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떡 다섯 덩어리'가 아니라, 납작하고 동그란 형태로 되어 있어서 손으로 찢어먹기 쉬운 모양의 떡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 자리에 있던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즉 최소한 만 수천 명은 되었을 사람들에게는 턱도 없이 모자라는 분량이었습니다.
  막대한 양의 필요에 비하여 지극히 적은 양의 자원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 아니라 그 누가 보아도 그처럼 적은 자원으로는 그들이 당면한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 너무나도 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또 한 번 의외의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속된 표현으로 '택도 안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일단 당신 앞으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께서는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없이도 오천 명 아니라 몇 만 명이라도 그냥 먹이실 수 있으셨습니다.
  구약의 광야교회에서 벌어졌었던 것처럼 하늘에서 그냥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오게 하는 것도 마음만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과정을 택하지 않으시고, 지금 그 제자들이 찾아낸 것들,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만큼이라도 일단 가져오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당신의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적은 자원, 바로 이것을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 자원이 사용되어 나타날 결과에 대해 미리 계산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 같은 얕은 계산, '이것 주님께 바친다 해도 교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나?'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나타날 길목을 미리 막아 버리는, 실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도무지 별 도움이 되어 보이지 않는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전부를 무조건 주님께로 가져올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필요에 비해서는 오히려 초라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까지도 일단 예수님 앞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가진 적은 것들을 그렇게 예수님께로 가져오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회에 내 한 사람이 더 참석한다고 무슨 큰 차이가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 바로 그때가 그 기도의 시간을 주님께 드려야 할 때입니다.
  '내 용돈, 내 아르바이트의 십일조란 액수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인데, 그게 교회 재정에 무슨 큰 보탬이 되겠나?'라는 핑계로 십일조를 떼어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집처럼 좁은 장소를 어떻게 새소식반을 위해서 제공할 수 있겠나? 오히려 모이기에 더 불편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 사실상 그 지역의 어린 영혼들 전도를 위하여서 바로 그 집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채울 수 있는 예배당의 한 자리, 내가 도울 수 있는 작은 봉사, 내가 베풀 수 있는 작은 사랑 - 이런 것들을 결코 작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작은 것들이 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져오라고 명하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두가 다 이 교회를 풍성한 은혜로써 때마다 가득 차게 만들기 위하여서 우리 주님께서 꼭 필요로 하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주님께서 몸소 내게 찾아오셔서 "지금 네가 가진 것 무엇 무엇이 내게 필요한데 좀 줄 수 없겠느냐?"하시면 그것 갖다 바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이구, 주님 무슨 말씀 하십니까? 제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야 무엇이든지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누구나 흥분해서 대답할 것입니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지금 네 목숨이 필요한데 순교 좀 해야겠다."라고 하신다 해도 우리가 그 목숨을 드리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것들, 적은 것들이겠습니까?
  이처럼 자기의 가진 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이 보여도 지금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일단 주님께 드림으로써 이 교회 안에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풍성한 천국잔치가 끊이지 않게 만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가 천국 은혜로 풍성히 넘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축복해주셔야만 합니다.

  일단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가진 것들을 갖다 바치면 그 결정적인 마무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본문 19절로 21절에서 "19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먹을 것을 주려고 나서고 아무리 그들이 오병이어를 찾아내어 가져오고 해도 결국 이 마지막 단계가 없으면 '오병이어'는 '오병이어'로 끝날 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로 하여금 그 두 예비 단계를 거치게 하신 주님께서는 이제 몸소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큰 기적의 잔치를 차려주셨습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게" 했다는 것은 배식을 질서 있게 하기 위하여 백 명, 혹은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했음을 가리킵니다(막 6:40). 특히 여기서 '앉히다'라고 번역된 말은 '기대어 비스듬히 않다'(recline)라는 뜻의 단어인데, 유대인들의 정식 식사 자세, 혹은 잔칫상에서의 식사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 오병이어의 잔치는 무슨 패스트푸드나 비상식량을 배급해주는 자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식식사요 대잔치가 될 것을 예고해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주님께서는 이제 친히 그 오병이어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축사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문자적으로는 '축복하다'이지만, 그 음식물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give thanks)는 뜻도 포함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 음식을 축복하셨던 것도 분명하고 또 그 이전에 감사가 먼저 드려졌을 것도 틀림없습니다.

  만 수천 명이 모인 그 자리에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밥상에 올랐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두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오병이어가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후에 감사드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직 오병이어에 불과한 상태에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오병이어'가 일단 주님의 교회에 바쳐지면,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드려진 것을 인하여 오늘도 성부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병이어 위에 축복하신 후에 그것을 나누어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도록 거두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오병이어에 분명히 기적적인 양적 증가가 일어났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그 잔치는 무슨 '콩 한 알이라도 반으로 쪼개어 서로 나누어먹는' 정신을 실천하는 따위의 자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먹고 남은 것만 해도 처음의 오병이어보다 훨씬 더 많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로 처음의 오병이어만 가지고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나게 풍성한 잔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끝까지 내 손에만 쥐고 있으면 그것은 나 혼자 먹고 살기에만 빠듯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내 입에 풀칠하고 내 가족 먹이고 입히면서 근근이 한 세상 사는 데에만 딱 맞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그저 우리 혼자 스스로만 사용하려 들면 그것은 항상 모자랄 뿐 넘치는 풍성함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얼마나 작은 인생이겠습니까?
  그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끝나는 인생인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진 것을 주님께 갖다 바쳐서 주님께서 그 위에 축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매주일 참석하는 예배시간을 하나 더 늘여서 그 한 시간을 주님께서 축복해주시도록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로 가져오는 감사의 종목을 더 자주 기억함으로써 그 예물 위에 주님께서 축복하실 때 어떤 기적이 벌어지는지를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땀방울 하나라도 더 주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해 바쳐지고 주님께서 그것을 축복할 때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구속사 성취를 위하여 얼마나 크게 쓰이게 되는지를 꼭 체험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엄청난 은혜와 축복이 뒤따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시간과 그 힘과 그 물질이 우리 주님이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것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있던 것이 일단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사용하시는 자본이 되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폭발적인 오병이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먼저 주님께 드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주님께 다 바칠 때 주님께서 그 제물을 축복하심으로써 '큰 무리'가 함께 천국잔칫상에서 다 배불리 먹게 되는 '30배, 60배, 100배의 은혜'를 이 교회 안에서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디베랴 언덕의 집회와는 달리 오늘날 교회의 모임들에는 오히려 육신을 배불리는 떡은 항상 풍성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영혼은 아무 것도 받아먹지 못하고 그냥 쫄쫄 굶고 돌아가는, 진짜 '허기진' 교인들이요 '빈들'의 교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썰렁하기 짝이 없는 '잔치'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만 있으면 풍성하기 짝이 없었던 그곳과는 달리 오늘날 현대교회의 예배에는 온갖 흥미진진한 '쇼'들이 계속 가미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 '배고픈' 인생들에게 진짜 소중한 생명의 양식은 전혀 먹여주지 못하고, 도리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교회 밖에서 찾도록 '각자 마을로 보내어 사먹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잔칫집'이겠습니까?

  자기 먹을 것은 본인이 알아서 찾아먹도록 하는 것이 상수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먼저 남을 대접하려고 하지 않는 교회는 영원히 '빈들'로 남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일단 나 자신부터가 '때를 따라 종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청지기임을 다시 한 번 자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잔치'를 차리는 데에 드는 비용은 '오병이어'만이라도 다 갖다 바치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손에 있는 것 가지고 자기 혼자 겨우 먹는 '가난한 욕심쟁이'를 청산하고 그것을 주님의 손에 온전히 바쳐드림으로써 그 '오병이어'가 결국에는 바로 그 본인에게도 훨씬 더 풍성한 몫으로 돌아오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는 '선한 일에 후한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의 머리시요 천국잔치의 주인이신 주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은혜를 줄 수 있습니까?
  무엇이, 누가 성도들을 이렇게 주일에 모이게 만들고, 이렇게 감격하여 울게 만들고, 이렇게 감사하며 찬양하게 만들고, 이렇게 기뻐하며 충성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습니까?
  교회 건물이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오고 교회 식당의 음식이 맛있어서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목사의 인격이 감동적이어서 사람들이 변화를 받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이유로 모이는 무리는 유원지에, 고급 레스토랑에, 텔레비전 앞에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교회를 통하여 천국잔치가 주일마다 연이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잔치의 주인(host)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택자를 초청해주시는 잔치주인이 없으면 아예 이 천국잔치라는 것이 열릴 수가 없고, 그 잔치주인이 잔칫상을 풍성하게 차려주실 능력이 없으면 비록 명색은 잔치라 해도 아무 먹을 것도 없는 배고픈 모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은혜로 넘치고 성도들이 그 은혜를 사모하여 교회에 모이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바로 그 교회의 주인이시오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분명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겨우 한 사람 먹기에도 빠듯했던 '오병이어'가 오늘도 바로 이 살아 계신 주님께 드려지고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까닭에, '많은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남게 되는 기적적인 천국잔치가 이 지상교회 안에서 지금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 '오병이어를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큰 은혜를 이 2007년에도 이 교회에 모이는 주일마다 풍성하게 함께 나누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