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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땅을 향하여 (히 3:15-19)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브리서 3:15-19)"
본문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믿고 순종하므로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들어갈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지도자는 모세와 여호수아였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향해 가는 길도 멀고 험합니다. 유혹도 있고, 시험도 있고, 고통과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이기고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과거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사람에겐 귀소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연어도 귀소본능이 있어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경우 돌아가야 할 곳 다시 말하면 귀소의 목적지가 어디냐하는 것입니다. 흙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무(無)에서 나왔다고 믿으면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無)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흙에서 솟아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생명호흡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귀소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가 돌아갈 고향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해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든지 죄악의 세계로 귀소하려 한다면 그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거친 광야를 횡단할 때 악조건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일교차가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먹거리도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마실 물도 광야엔 없었습니다. 거기다 광야를 주름잡던 부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행군을 방해하는가 하면 기습공격을 해오곤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한 것은 애굽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엔 나일강이 흐르고 있다. 끓는 고기 가마솥이 있고 빵이 넘쳐나고 있다. 그곳엔 맛있는 과일이 있고, 잠자고 쉴 수 있는 집이 있다. 그 곳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귀소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애굽으로 가지말라, 애굽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중학교 때부터 피워오던 담배를 끊은 분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기 위해 자신과 벌여야 했던 싸움을 그는 "아편전쟁보다 더 무섭고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담배갑을 찾는가하면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떨리는 고된 싸움 끝에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단 한 개비의 담배만 입에 댄다면 담배 끊은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회귀나 귀소는 사는 쪽, 생명이 있는 쪽으로라야 합니다. 죽는 쪽, 망하는 쪽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과거지향적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노인들이 모이면 옛날이야기로 밤을 지새고 장년들이 모이면 현실이야기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모이면 장래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젊은사람, 젊어지고 싶은 사람, 젊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앞을 보고 앞으로 될 일을 말해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지 맙시다.
2. 현재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광야생활에 만족한다든지 광야생활이 전부인양 생각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명기 34장을 보면 모세의 임종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낸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를 횡단하면서 겪었던 풍상은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신명기 34:1-4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 땅을 바라보며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삶을 감사하며 자족한다는 것과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가 됩니다. 물론 오늘 현재의 삶을 만족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머무르면 발전이나 더 큰 성공이 안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중학교 졸업장을 고생 끝에 받아든 졸업생이 졸업을 감사하는 것과 중학교 졸업으로 만족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중학교 졸업장으로 만족하면 더 이상 발전도 성공도 안됩니다.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퇴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느 날 신문 구인난에 사설동물원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습니다. 주인의 요구는 매일 출근하여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고 월급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다음날 출근해 보니 그가 하는 일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탈을 쓰고 원숭이처럼 뛰고, 기어오르며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싶어 몇 번씩 그만둘까 했지만 월급도 많고 원숭이탈을 쓰고 하는 짓이어서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터라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일도 익숙해졌고 적응력도 생겨 진짜 원숭이처럼 뛰고 기어 오르내리며 원숭이짓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그네를 타고 힘껏 올라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바로 옆에 있는 호랑이 우리로 떨어졌습니다. 겁에 질린 그가 소리쳤습니다. "아이구 사람살려"라고.
그때 호랑이가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원숭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벌벌 떨고있는데 호랑이가 원숭이 귀에다 대고 "이봐 나도 탈쓴 호랑이야"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웃기는 이야기인것 같기도 하고, 울리는 이야기인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탈을 뒤집어 쓰고 우리에 갇힌 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경상도 하회마을은 탈 공예가 발달된 곳입니다. 탈은 여러 가지입니다. 웃는 탈, 우는 탈, 성난 탈, 조소하는 탈이 있습니다. 그 탈을 쓰면 그 탈에 맞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탈이 바로 그 사람은 아닙니다. 탈을 벗어야 진짜 그 사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탈을 벗어야 합니다.
위선의 탈도 벗어야 하고, 거짓의 탈도 벗어야 하고, 자신을 속이는 탈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으로 바꾸고 예수님의 얼굴로 바꿔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3을 보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갈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 곳에 가려면 누추한 옷, 죄에 물든 옷, 악에 눌린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로 지으심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3. 경계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본 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못들어갈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첫째, 강팍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강퍅하다는 말의 뜻은 "말라서 단단해지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마르고, 사랑이 마르고, 믿음이 메마르게 되면 심령이 단단해 집니다. 그것이 강퍅한 심령인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면 대들고, 따지고, 공격하고, 난폭해 집니다. 이스라엘은 그짓 하다가 망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아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험하다는 것은 페이라조라는 말인데 "확인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사관처럼 조사하고 확인한 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조건없이 용서하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지지 맙시다. 확인하고 조사하려 들지 맙시다.
10∼11절을 보면 하나님을 시험한 그들을 향하여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시험하고 확인하고 조사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여 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악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믿지 않는 악심을 품으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품는 악심 가운데 가장 무서운 악한 마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두 손을 움켜쥐고 이를 갈면서 나는 절대로 예수를 안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예수를 부인하거나 배신하면 안됩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살아도 죽어도 예수 믿어야 합니다.
넷째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불순종하는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고, 19절을 보면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행실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고 교회다닌다면서 동네나 직장이나 시장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든지 욕을 먹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랄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 아무리 행실을 바르게 한다해도 행실로 구원받을순 없습니다. 그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난 후론 하루하루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도중하차나 도중탈락은 비극입니다. 그 나라 이를때까지 믿고 순종합시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전진합시다. 아멘.
출처/박종순 목사 설교 중에서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브리서 3:15-19)"
본문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과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믿고 순종하므로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들어갈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까지 인도한 지도자는 모세와 여호수아였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을 향해 가는 길도 멀고 험합니다. 유혹도 있고, 시험도 있고, 고통과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다 이기고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과거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사람에겐 귀소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연어도 귀소본능이 있어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경우 돌아가야 할 곳 다시 말하면 귀소의 목적지가 어디냐하는 것입니다. 흙에서 왔다고 생각하면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무(無)에서 나왔다고 믿으면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無)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흙에서 솟아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생명호흡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귀소의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가 돌아갈 고향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해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든지 죄악의 세계로 귀소하려 한다면 그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거친 광야를 횡단할 때 악조건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일교차가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먹거리도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마실 물도 광야엔 없었습니다. 거기다 광야를 주름잡던 부족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행군을 방해하는가 하면 기습공격을 해오곤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생각한 것은 애굽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엔 나일강이 흐르고 있다. 끓는 고기 가마솥이 있고 빵이 넘쳐나고 있다. 그곳엔 맛있는 과일이 있고, 잠자고 쉴 수 있는 집이 있다. 그 곳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귀소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애굽으로 가지말라, 애굽으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중학교 때부터 피워오던 담배를 끊은 분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기 위해 자신과 벌여야 했던 싸움을 그는 "아편전쟁보다 더 무섭고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담배갑을 찾는가하면 식은땀이 흐르고 입술이 떨리는 고된 싸움 끝에 담배를 끊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단 한 개비의 담배만 입에 댄다면 담배 끊은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회귀나 귀소는 사는 쪽, 생명이 있는 쪽으로라야 합니다. 죽는 쪽, 망하는 쪽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과거지향적 신앙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노인들이 모이면 옛날이야기로 밤을 지새고 장년들이 모이면 현실이야기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모이면 장래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젊은사람, 젊어지고 싶은 사람, 젊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앞을 보고 앞으로 될 일을 말해야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지 맙시다.
2. 현재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광야생활에 만족한다든지 광야생활이 전부인양 생각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신명기 34장을 보면 모세의 임종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낸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를 횡단하면서 겪었던 풍상은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신명기 34:1-4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 땅을 바라보며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삶을 감사하며 자족한다는 것과 현실에 안주한다는 것은 다른 얘기가 됩니다. 물론 오늘 현재의 삶을 만족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 머무르면 발전이나 더 큰 성공이 안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중학교 졸업장을 고생 끝에 받아든 졸업생이 졸업을 감사하는 것과 중학교 졸업으로 만족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중학교 졸업장으로 만족하면 더 이상 발전도 성공도 안됩니다.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퇴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어느 날 신문 구인난에 사설동물원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습니다. 주인의 요구는 매일 출근하여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고 월급도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다음날 출근해 보니 그가 하는 일은 원숭이 우리에서 원숭이탈을 쓰고 원숭이처럼 뛰고, 기어오르며 원숭이 흉내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싶어 몇 번씩 그만둘까 했지만 월급도 많고 원숭이탈을 쓰고 하는 짓이어서 알아보는 사람도 없는터라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일도 익숙해졌고 적응력도 생겨 진짜 원숭이처럼 뛰고 기어 오르내리며 원숭이짓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떤 날 그네를 타고 힘껏 올라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바로 옆에 있는 호랑이 우리로 떨어졌습니다. 겁에 질린 그가 소리쳤습니다. "아이구 사람살려"라고.
그때 호랑이가 일어나 어슬렁거리며 원숭이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어 벌벌 떨고있는데 호랑이가 원숭이 귀에다 대고 "이봐 나도 탈쓴 호랑이야"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웃기는 이야기인것 같기도 하고, 울리는 이야기인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탈을 뒤집어 쓰고 우리에 갇힌 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경상도 하회마을은 탈 공예가 발달된 곳입니다. 탈은 여러 가지입니다. 웃는 탈, 우는 탈, 성난 탈, 조소하는 탈이 있습니다. 그 탈을 쓰면 그 탈에 맞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탈이 바로 그 사람은 아닙니다. 탈을 벗어야 진짜 그 사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탈을 벗어야 합니다.
위선의 탈도 벗어야 하고, 거짓의 탈도 벗어야 하고, 자신을 속이는 탈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마음으로 바꾸고 예수님의 얼굴로 바꿔야 합니다.
에베소서 4:22-23을 보면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갈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 곳에 가려면 누추한 옷, 죄에 물든 옷, 악에 눌린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로 지으심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3. 경계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본 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못들어갈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첫째, 강팍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말라"고 했습니다. 강퍅하다는 말의 뜻은 "말라서 단단해지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마르고, 사랑이 마르고, 믿음이 메마르게 되면 심령이 단단해 집니다. 그것이 강퍅한 심령인 것입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면 대들고, 따지고, 공격하고, 난폭해 집니다. 이스라엘은 그짓 하다가 망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아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였다"고 했습니다. 시험하다는 것은 페이라조라는 말인데 "확인하다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사관처럼 조사하고 확인한 후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믿으면 조건없이 용서하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따지지 맙시다. 확인하고 조사하려 들지 맙시다.
10∼11절을 보면 하나님을 시험한 그들을 향하여 노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시험하고 확인하고 조사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여 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악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믿지 않는 악심을 품으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품는 악심 가운데 가장 무서운 악한 마음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두 손을 움켜쥐고 이를 갈면서 나는 절대로 예수를 안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예수를 부인하거나 배신하면 안됩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살아도 죽어도 예수 믿어야 합니다.
넷째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18절을 보면 "불순종하는 자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고, 19절을 보면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불교나 천주교는 행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행실이 중요합니다. 예수 믿고 교회다닌다면서 동네나 직장이나 시장에서 손가락질을 받는다든지 욕을 먹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랄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 아무리 행실을 바르게 한다해도 행실로 구원받을순 없습니다. 그것이 율법과 복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고난 후론 하루하루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 문은 늘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도중하차나 도중탈락은 비극입니다. 그 나라 이를때까지 믿고 순종합시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전진합시다. 아멘.
출처/박종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