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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받은 자의 신앙 (창세기 45:1-8)
도입 :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등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매우 주목할만한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모든 종교들은 예외 없이 모두들 그들이 믿는 신(神)을 가시화(可視化)하여 그 가시화(可視化)된 신(神)을 섬기고 경배하며 신앙하는 데 반하여, 유독 신.구약 성서의 종교만은 신(神)의 가시화(可視化) 내지는 형상화(形象化)를 철저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내산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나려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나의 모든 「선함」을 네 앞으로 신속하게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면서, <나는 야훼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다>라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 곁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뒤」는 볼 수 있으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출 33:19-23).
이 말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주제인 "보냄받은 자의 신앙"이라는 주제의 그 깊은 뜻과 또 이 신앙을 증언하고 있는 "요셉"이라는 신앙인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요지는 이러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하여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실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한다.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고 싶다"는 말을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을 모세 앞으로 신속하게 지나가게 하시면서 오직 그의 이름만을 선포하시면서, <나는 "야훼"인데, 은혜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자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시고 그의 <뒤>(우리말 번역은 "등"이라고 했는데, "등"과 "뒤"는 히브리 원어에서는 같은 말일 뿐이다)는 볼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 "선하심", "얼굴", "등" 등의 말들은, 물론, 모두 "은유적 표현들"(metaphors)이므로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들로만 설명된 이 말씀의 참 의미는 이러하다. 즉 "영광"(카보드) 또는 "선하심"(토우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본질(essential nature)은 "얼굴"(파님)과 "등"(앗홀)의 결합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고 그의 "등"만 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얼굴로 보아서는 안되고 등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逆)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얼굴"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등"으로는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도 또한 어디까지나 은유적 표현이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이 말하는 바의 그 의미는, 이미 출애굽기 주석가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혀진 바다. 그 의미는 이렇다 : 야훼 하나님은 그의 역사적 행위들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그의 행위들을 통하여 그의 속성들은 인지할 수 있으나, 그의 본체는 인간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지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얼굴"(현현의 본체 : 파님)이라는 은유(metaphor)는 하나님의 본질(선[善]과 영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결코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또 인간이 가시화(可視化), 형상화(形象化)해서도 결코 안되는 것인 반면에, "등"(앗홀)은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앞을 신속히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등뒤로 남겨놓는 것으로서, 인간이 신앙의 눈을 통하여서는 능히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또 설명할 수도 있는 것, 아니, 분명히 보고 느끼고 설명하며 증언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중요성은, 이 하나님의 "등"(앗홀),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의 본체는 볼 수 없도록 빠른 속도로 우리 앞을 지나가시면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성서주석가들은 거의 한 목소리로 설명하기를, 우리네 인간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그의 뒷 자취를 남겨 놓으시면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들"(magnalia Dei : 마그날리아·데이, the mighty acts of God)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본문, 저 유명한 출애굽기 33:19의 말씀의 문맥에서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들(屬性 : attributes)"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렇다. 이 말씀이 지니고 있는 그 신학적 중요성은 참으로 크다. 기독교 진리의 근본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보려고는 결코!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의 등 뒤로 남겨 놓으시는 그의 속성, 즉 그의 본질을 알려 주는 그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 이른 바, 그가 우리의 가시적 역사 속에 계시(啓示)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들"(the mighty acts of God)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또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들을 우리의 성서 출애굽기 33:19는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행위>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 본체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역사 속에 남겨 놓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들을 ― 그의 "등"을 ―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이 세속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그의 구원역사 행위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송아지 상으로 가시화 하듯이, 그렇게, 그 어떠한 것으로든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물질화하는 사람은 그 누구이든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 인간사들 속에 계시(啓示)되는 "하나님의 등" ― 비록 신속하게 지나쳐 간다고는 하여도 ― 그 "등"을 보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 어떠한 길로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증언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여서 결코 모호하지 않다.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모름직이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하나님을 얼굴로"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죽음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등"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적 시각으로 고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우리의 신앙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 세속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활동은 반드시 포착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렇다.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역사 사건들은 결단코 우리가 놓치지 말고 반드시 포착해야 할 하나님의 등>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속 역사 속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등"을 보아야 하고 그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등>이다. 요셉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심 이야기 : 요셉의 신앙="보냄받은 자"로서의 신앙
요셉은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늘 꿈을 꾸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서도 꿈을 꾸었고 밀밭과 보리밭 이랑 사이에서 곡식단들을 보고서도 꿈을 꾸었다. 심지어는 죄수들이 좌절의 탄식 속에서 생을 저주하는 감옥 속에서도!! 그는 꿈을 꾸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실의와 좌절의 어두운 그림자는 드리워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인생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등>을 늘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삶 속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인에게도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아니, 참 신앙인일 수록 시련은 더 크게 마련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점이다. 즉 참 신앙인에게는 시련이 많으나 그 모든 시련이 모두 다 하나님의 사건이요 또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한 다양한 형식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기이하게 여기고 또 놀랍게 여기는 것 하나는 요셉은 그 많은 시련들 속에서도 언제나 <침묵으로!!> 그 모든 시련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형들에 의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미움을 받고 또 노예로 애굽에 팔려가는, 이른 바, 인신매매의 고통 속에서라고 할 지라도 요셉은 입을 열어 그의 형들을 비난하거나 하늘을 원망하거나 하지를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성희롱 범죄자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전혀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하지를 않고 <침묵>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는 한 동료 죄수의 길(吉)한 꿈을 해석해 주면서 출옥을 하면 자기의 도움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그 동료 죄수가 막상 출옥을 하여 옛 관직을 회복한 후에는 까마득히 요셉의 은혜를 잊고 있었을 그 때도 또한 요셉은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하는 일없이 <침묵으로> 그가 당하는 수난을 감내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침묵"은 결코 자포자기의 비굴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그 모든 생의 굴곡이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진행과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의 신정론적(神正論的) 믿음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즉 그는 그의 고난의 생을 통해서 오히려 그의 앞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던 것이다. 그 모두는 모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활동으로만 이해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단지 인내로서, 그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기만을 끝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요셉의 신앙이 아주 분명하게 천명되고 설명된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창세기 45장 1절-8절의 말씀이다.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애굽의 전(全) 국고를 맡은 막강한 권력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고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은 오히려 먹을 양식이 없어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온 늙고 힘없는 가난한 유목민으로서 그리고 총리대신의 은잔을 훔친 죄인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죽을 목숨이 되어서 요셉의 처벌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오직 이것 뿐이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보복의 칼"을 드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세운다는 미명아래, 동생을 인신매매에 붙여서 애굽에 노예로 판 그 범죄를 열명이나 되는 형들 중에서 과연 누가 주도하였고 또 누가 협력하였는지를, 이를테면, 주범이 누구이고 또 공범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불의를 척결한다는 예언자적 용기로 형들을 형틀에 매어다는 비정(非情)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반응은 이러한 일반적 기대를 역행(逆行)한다. 즉 요셉은 우선 혈육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은 대립의 긴장관계를 깨뜨리고 화해의 새 관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열어 놓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본문은 요셉의 울음 소리가 애굽 사람들에게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다고 설명한다(창 45:2). 이러한 요셉의 행위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정한 거리를 둘 정도로 히브리 사람들을 천대시하여 왔기 때문이다(창 43:32).
말하자면, 요셉은 당시의 세계 총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사회적/정치적 권위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피를 나눈 형제에 대한 혈육의 정을 거침없이 토로한 셈이다. 즉 "저는 요셉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아직도 살아계시옵니까?"라고 요셉은 말한다. 이것은 일종 사회적 지위나 사회적 관습보다 혈육간의 애정관계가 더 중요하고 더 앞서는 것으로 보는 그의 휴머니즘의 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스라엘 지혜문학권이 말하는 소위 합리주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요셉은 또한 합리주의를 무시한 감성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이야기의 초점이 있다. 요셉은 이 요셉이야기의 대 서사시를 다음의 신앙적 진술을 말함으로서 그 절정으로 이끈다 :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너무 자책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말하자면, 형님들이 근심하지 말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하나님의 행위>를 내세우고 있다. 즉 요셉은 그의 형들로 하여금 눈을 들어 더 큰 안목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보게 한다. 이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등>을 보게 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행위>만이 형님들과 나 사이의 결코 풀 수 없는 매듭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피를 나눈 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이 사악한 세상의 일들까지도 감히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그는 감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역사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여기처럼 이렇게 분명하고도 극적으로 잘 설명된 곳을 성서 다른 곳에서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의 본문, 창세기 45:5이 증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역사의 "한" 기원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본문은, 그 무엇보다도, 모든 세상사들은 전적으로 "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사에는 그것이 그 어떠한 성격의 것이든, "한"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 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다(마태 10:29).
이렇게 하여,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이 둘 또는 셋 혹은 그 이상의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는 주장, 역사의 다원주의, 특히 역사의 이원론적 주장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를테면, 흔히들 생각하는 바, 이 세상의 선·악의 질서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라는 두 신(神)으로부터 기원(起源)되었다는 그런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와 같은 것이 여기서는 철저히 철폐되고 있다.
말하자면, 선한 일은 선신(善神)으로부터 오고 악한 일은 악신(惡神)으로부터 온다. 행복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불행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건강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질병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부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가난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평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전쟁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빛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는 따위의 이원론적 사고가 여기서는 전면 철폐되고 있는 것이다. 즉 선과 악, 빛과 어둠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근원을 갖고 있다는, 이른바, 역사의 두 기원에 관한 믿음이 여기서는 전면 폐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창 45:5, 8)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기는 비극이란 결단코 형님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선도 악도, 빛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하나님이 만드신 일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이라는 것이다(사 45:7). 주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욥 1:21).
매우 파격적인 이러한 증언은, 그러나,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증언하고 있는 말씀일까? 그것은,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뜻에 달렸으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될 대로 되어라"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두자는 뜻의 말일까?
그러나, 성서의 근본 입장은 아주 분명하다. 즉 세상만사의 모든 문제로부터 신앙인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도를 물으라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창조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결코 그 손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요지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즉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우리는 두 번째의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 즉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할 때, 그 때의 이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요 신학적 물음이다. 성서는,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대답을 갖고 있다.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레미크야) 요셉을 그의 형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다"(창 45:5 하반)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 우리네 신앙인은 ― 언제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2.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한" 뜻
문제의 핵심은 여기 있다. 즉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신 오직 한 분 뿐이신 그 창조주이시라면, 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들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의 본문, 창세기 45장 5절 하반절은 「생명을 구하시려고」!!(레미크야 : for the emergence of new life)라는 말로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여기에 근본적인 대답이 있다. 즉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사건들) 속에는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God's will to preserve life / to revive)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성서적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신앙인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부조리하게 보일지라도, 이 세속 세상사들 속에는 그것이 어떠한 모양을 띠고 있든 간에 거기에는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어도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의 형들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그 악행속에도 <하나님의 생명구원 의지>가 들어 있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모두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자포자기 형식의 부당한 숙명론적 사고로부터 온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즉 우리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것이 고난과 죽음과 같은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생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생명구원 / 보존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속성(屬性)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강연의 서론인 <도입부>에서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등"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의 본질인 하나님의 얼굴은 인간이 볼 수 없으므로 결코 그것을 보려고는 하지 말되,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啓示)하여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등"은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 이 세계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것이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스러운 것일찌라도 거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구원 / 생명보존의 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시내산의 모세를 향하여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자다"(출 33:19)라고 말씀하시므로서, 단지 그렇게만 말씀하시므로서, 자신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생을 노예로 파는 형들의 그 악한 일 속에도!!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의지가 들어 있었다는 그런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롬 12:21). 이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기독교신앙은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마치 십자가의 진리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듯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계시를 보지도 읽지도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즉 모든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의지, 그의 자비의지와 그의 긍휼의지란 불신자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거리낌" 또는 하나의 "미련한 것"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요나 이야기는 그것을 증언한 대표적 성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의 선지자 "요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는 그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용서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니느웨"는 회개를 한다고 해도 어쨋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요나"의 하나님을 향한 저항은 참으로 집요하였다. 그래서, "요나"는 만일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를 하신다면 차라리 자기는 "자살"로서 항거를 하겠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욘 4:3, 8).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상(!!), 본질상!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도(!) 회개할 때는 뜻을 돌이키시며 재앙을 내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셨다는 것(욘 4:2), 이것이 요나서 교훈의 핵심이었다.
인간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직 한 가지의 뜻은 <생명구원의 의지>라는 것이었다. 인간 역사는 악이 난무하는 세계다. 정말 살 맛 안나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역사를 악하다 하여 단념하시거나 포기하시는 분은 더 더욱 아니시다.
요한복음서는 이러한 끈질긴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즉 그의 아들을 보내신 그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한 3:17)라고 증언하였다. 아마도,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 속성은 인간생명의 구원이고 인간에 대한 심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신이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그러한 극한적인 악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결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노라고 증언한 것이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좌절하지 마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그렇다! 진실로 그렇다!! 인간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그것은 인간 생명을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려는 의지이다. 이것을 믿는 신앙이 바로 다름아닌 성서적 의미의 하나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는 자는 항상 승리감을 갖고 산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구원의지를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는 그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믿는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If God is for us, who is against us?)라고 말할 수 있었다(롬 8:31)[죽음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구원활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활동의 도구로서 자신을 이용/사용하신다"는 확신도 갖는다는 것이 오늘 읽은 우리 본문(창 45:1-8)의 결론이다. 요셉의 말, "하나님은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형님들 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라는 요셉의 말은, 바로, 요셉의 그러한 소명 신앙을 증언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3.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
인생은 누구나 "보냄을 받은 자"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은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셨고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일을 할 뿐이라고 하셨다(요한 8:42 ; 20:21). 자기 의지로 세상에 온 자는 아무도 없다. 가인이 하와와 동침하여 하와가 가인을 낳자 하와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다고 창세기 4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가인과 같은 살인자도 다 뜻이 있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셔서 비로소 세상에 온 자들이다. 오고 싶다는 나의 의지 때문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모두!! <보냄을 받은 자>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이 가질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세상에 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나는 우연히 세상에 오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무지한 자기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다"는 성서적 신앙을 확고히 갖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가리켜서 "애굽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고 증언하였다. 말하자면, 형들이 자신을 애굽으로 인신매매한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전적으로 <보내신 자(sender)와 보냄을 받은 자(One who is sent)>의 관계로 설정한다면, 만일 이 설정이 옳다면(!), 우리가 보냄을 받은 데에는 보내신 자의 목적이 들어 있다는 판단은 논의의 여지 없이 옳다고 하겠다.
요셉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형님들 앞서 보내신 그 목적을 증언하기를,
<큰 구원으로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형님들의 후손을 세상에 남겨두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창 45:7)
라고 증언하였다. 이 증언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 3:17의 증언과 정확히 상응(相應)한다고 하겠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를 세상에, 그리고 또 요셉을 에굽에 <보내신 자>의 그 보내시는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고 동일하며 유일하다(!). 즉 그것은 "세상의 구원"이다(요한 3:17). 세상의 심판이 아니다. 세상의 멸망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비가 필요한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일을 하는 것(출 33:19)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의 기본 속성(God's back=God's attribute)이다.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다.
이 사실을 시적(詩的) 은유(隱喩 : metaphor)로서 가장 설득력있게 증언한 자는 시편 121편 시인으로 보인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올까? 나의 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야훼로부터 온다. 야훼 하나님은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너를 지키시는 분은 결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너를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그의 세상에 보내신 분의 "뒷 모습"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등"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자의 기본 태도는, 그리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자의 그 기본 태도는 전적으로 그것은 "보내신 자"를 모방하는 것(Imitatio Dei)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이 사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앙적 응답이다 :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요한 8:42)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 즉 나를 "보내신 분"이신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보냄을 받은 자"인 나도 일한다는 것이다. 즉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요셉의 경우와 예수님의 경우 사이에 이와 같은 유형론적 연결이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러한 유형론적 연결이 있다는 것이 성서의 결론이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이 내린 결론도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준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
이 말씀에 대한 1세기 랍비들의 고전적 해석(Talmud Babli, shabbath 133b)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
아버지께서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시듯이 "너희들도" 그를 닮아 자비롭고 긍휼이 많아라.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은, 이와 같이, "보내신 이를 본받는 것"이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도입 :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등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분"이시다. 이 사실은 매우 주목할만한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모든 종교들은 예외 없이 모두들 그들이 믿는 신(神)을 가시화(可視化)하여 그 가시화(可視化)된 신(神)을 섬기고 경배하며 신앙하는 데 반하여, 유독 신.구약 성서의 종교만은 신(神)의 가시화(可視化) 내지는 형상화(形象化)를 철저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내산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떠나려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야훼 하나님을 향하여, "저에게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나의 모든 「선함」을 네 앞으로 신속하게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면서, <나는 야훼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다>라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 곁에 있는 한 곳, 그 바위 위에 서 있어라.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바위틈에 집어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주겠다. 그 뒤에 내가 나의 손바닥을 거두리니 네가 나의 「뒤」는 볼 수 있으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출 33:19-23).
이 말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주제인 "보냄받은 자의 신앙"이라는 주제의 그 깊은 뜻과 또 이 신앙을 증언하고 있는 "요셉"이라는 신앙인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요지는 이러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산을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향하여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을 인도해 주실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한 번 보고 싶다고 말한다.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고 싶다"는 말을 "주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을 모세 앞으로 신속하게 지나가게 하시면서 오직 그의 이름만을 선포하시면서, <나는 "야훼"인데, 은혜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자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시고 그의 <뒤>(우리말 번역은 "등"이라고 했는데, "등"과 "뒤"는 히브리 원어에서는 같은 말일 뿐이다)는 볼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 "선하심", "얼굴", "등" 등의 말들은, 물론, 모두 "은유적 표현들"(metaphors)이므로 "문자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들로만 설명된 이 말씀의 참 의미는 이러하다. 즉 "영광"(카보드) 또는 "선하심"(토우브)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본질(essential nature)은 "얼굴"(파님)과 "등"(앗홀)의 결합인데, 그런데 인간은 그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고 그의 "등"만 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얼굴로 보아서는 안되고 등으로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逆)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얼굴"로 보아서는 안되지만 "등"으로는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도 또한 어디까지나 은유적 표현이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이 말하는 바의 그 의미는, 이미 출애굽기 주석가들을 통하여 분명하게 밝혀진 바다. 그 의미는 이렇다 : 야훼 하나님은 그의 역사적 행위들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그의 행위들을 통하여 그의 속성들은 인지할 수 있으나, 그의 본체는 인간으로서는 인지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지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얼굴"(현현의 본체 : 파님)이라는 은유(metaphor)는 하나님의 본질(선[善]과 영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결코 인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며, 또 인간이 가시화(可視化), 형상화(形象化)해서도 결코 안되는 것인 반면에, "등"(앗홀)은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앞을 신속히 지나가면서 하나님의 등뒤로 남겨놓는 것으로서, 인간이 신앙의 눈을 통하여서는 능히 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고 또 설명할 수도 있는 것, 아니, 분명히 보고 느끼고 설명하며 증언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의 중요성은, 이 하나님의 "등"(앗홀),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의 본체는 볼 수 없도록 빠른 속도로 우리 앞을 지나가시면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성서주석가들은 거의 한 목소리로 설명하기를, 우리네 인간 역사속에 하나님께서 그의 뒷 자취를 남겨 놓으시면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들"(magnalia Dei : 마그날리아·데이, the mighty acts of God)이라고 말하고, 우리의 본문, 저 유명한 출애굽기 33:19의 말씀의 문맥에서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들(屬性 : attributes)"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렇다. 이 말씀이 지니고 있는 그 신학적 중요성은 참으로 크다. 기독교 진리의 근본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보려고는 결코!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의 등 뒤로 남겨 놓으시는 그의 속성, 즉 그의 본질을 알려 주는 그의 본질에 속하는 성질, 이른 바, 그가 우리의 가시적 역사 속에 계시(啓示)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들"(the mighty acts of God)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또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들을 우리의 성서 출애굽기 33:19는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구원행위>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 본체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역사 속에 남겨 놓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행위들을 ― 그의 "등"을 ―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이 세속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그의 구원역사 행위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송아지 상으로 가시화 하듯이, 그렇게, 그 어떠한 것으로든 하나님을 형상화하거나 물질화하는 사람은 그 누구이든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 인간사들 속에 계시(啓示)되는 "하나님의 등" ― 비록 신속하게 지나쳐 간다고는 하여도 ― 그 "등"을 보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 어떠한 길로든!!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서적 증언의 의미는 매우 분명하여서 결코 모호하지 않다. 즉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모름직이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하나님을 얼굴로" 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죽음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등"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적 시각으로 고찰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우리의 신앙의 눈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 세속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활동은 반드시 포착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경우,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렇다. 우리가 이 세계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역사 사건들은 결단코 우리가 놓치지 말고 반드시 포착해야 할 하나님의 등>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속 역사 속에서 살아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 분의 "등"을 보아야 하고 그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 사건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등>이다. 요셉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신학적 문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중심 이야기 : 요셉의 신앙="보냄받은 자"로서의 신앙
요셉은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는 늘 꿈을 꾸었다.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서도 꿈을 꾸었고 밀밭과 보리밭 이랑 사이에서 곡식단들을 보고서도 꿈을 꾸었다. 심지어는 죄수들이 좌절의 탄식 속에서 생을 저주하는 감옥 속에서도!! 그는 꿈을 꾸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실의와 좌절의 어두운 그림자는 드리워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인생역사 속에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등>을 늘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삶 속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인에게도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아니, 참 신앙인일 수록 시련은 더 크게 마련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모든 사건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는 점이다. 즉 참 신앙인에게는 시련이 많으나 그 모든 시련이 모두 다 하나님의 사건이요 또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한 다양한 형식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요셉이 바로 그러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기이하게 여기고 또 놀랍게 여기는 것 하나는 요셉은 그 많은 시련들 속에서도 언제나 <침묵으로!!> 그 모든 시련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형들에 의하여,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미움을 받고 또 노예로 애굽에 팔려가는, 이른 바, 인신매매의 고통 속에서라고 할 지라도 요셉은 입을 열어 그의 형들을 비난하거나 하늘을 원망하거나 하지를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빠져, 억울하게 성희롱 범죄자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전혀 누구를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하지를 않고 <침묵>하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는 한 동료 죄수의 길(吉)한 꿈을 해석해 주면서 출옥을 하면 자기의 도움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그 동료 죄수가 막상 출옥을 하여 옛 관직을 회복한 후에는 까마득히 요셉의 은혜를 잊고 있었을 그 때도 또한 요셉은 그를 원망하는 말을 하는 일없이 <침묵으로> 그가 당하는 수난을 감내하였던 것이다.
요셉의 "침묵"은 결코 자포자기의 비굴함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그 모든 생의 굴곡이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의 진행과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그의 신정론적(神正論的) 믿음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즉 그는 그의 고난의 생을 통해서 오히려 그의 앞을 지나가시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던 것이다. 그 모두는 모두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실 목적으로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활동으로만 이해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단지 인내로서, 그의 생애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기만을 끝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요셉의 신앙이 아주 분명하게 천명되고 설명된 곳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창세기 45장 1절-8절의 말씀이다.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애굽의 전(全) 국고를 맡은 막강한 권력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고 동생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은 오히려 먹을 양식이 없어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온 늙고 힘없는 가난한 유목민으로서 그리고 총리대신의 은잔을 훔친 죄인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죽을 목숨이 되어서 요셉의 처벌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그런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오직 이것 뿐이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보복의 칼"을 드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세운다는 미명아래, 동생을 인신매매에 붙여서 애굽에 노예로 판 그 범죄를 열명이나 되는 형들 중에서 과연 누가 주도하였고 또 누가 협력하였는지를, 이를테면, 주범이 누구이고 또 공범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불의를 척결한다는 예언자적 용기로 형들을 형틀에 매어다는 비정(非情)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의 반응은 이러한 일반적 기대를 역행(逆行)한다. 즉 요셉은 우선 혈육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울음을 터뜨린다. "울음"은 대립의 긴장관계를 깨뜨리고 화해의 새 관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열어 놓는 역할을 한다. 우리의 본문은 요셉의 울음 소리가 애굽 사람들에게 들렸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렸다고 설명한다(창 45:2). 이러한 요셉의 행위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 사람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정한 거리를 둘 정도로 히브리 사람들을 천대시하여 왔기 때문이다(창 43:32).
말하자면, 요셉은 당시의 세계 총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사회적/정치적 권위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피를 나눈 형제에 대한 혈육의 정을 거침없이 토로한 셈이다. 즉 "저는 요셉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아직도 살아계시옵니까?"라고 요셉은 말한다. 이것은 일종 사회적 지위나 사회적 관습보다 혈육간의 애정관계가 더 중요하고 더 앞서는 것으로 보는 그의 휴머니즘의 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스라엘 지혜문학권이 말하는 소위 합리주의 신봉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요셉은 또한 합리주의를 무시한 감성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이야기의 초점이 있다. 요셉은 이 요셉이야기의 대 서사시를 다음의 신앙적 진술을 말함으로서 그 절정으로 이끈다 :
「형님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너무 자책하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형님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창 45:8)
말하자면, 형님들이 근심하지 말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하나님의 행위>를 내세우고 있다. 즉 요셉은 그의 형들로 하여금 눈을 들어 더 큰 안목으로 <하나님의 행위>를 보게 한다. 이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등>을 보게 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행위>만이 형님들과 나 사이의 결코 풀 수 없는 매듭을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피를 나눈 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이 사악한 세상의 일들까지도 감히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그는 감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역사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가 여기처럼 이렇게 분명하고도 극적으로 잘 설명된 곳을 성서 다른 곳에서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우리의 본문, 창세기 45:5이 증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역사의 "한" 기원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본문은, 그 무엇보다도, 모든 세상사들은 전적으로 "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사에는 그것이 그 어떠한 성격의 것이든, "한"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 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는 것이다(마태 10:29).
이렇게 하여,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이 둘 또는 셋 혹은 그 이상의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는 주장, 역사의 다원주의, 특히 역사의 이원론적 주장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를테면, 흔히들 생각하는 바, 이 세상의 선·악의 질서는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라는 두 신(神)으로부터 기원(起源)되었다는 그런 이원론적(二元論的) 사고와 같은 것이 여기서는 철저히 철폐되고 있다.
말하자면, 선한 일은 선신(善神)으로부터 오고 악한 일은 악신(惡神)으로부터 온다. 행복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불행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건강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질병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부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가난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평화는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전쟁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 빛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어둠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는 따위의 이원론적 사고가 여기서는 전면 철폐되고 있는 것이다. 즉 선과 악, 빛과 어둠이 두 개의 서로 다른 근원을 갖고 있다는, 이른바, 역사의 두 기원에 관한 믿음이 여기서는 전면 폐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창 45:5, 8)은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넘기는 비극이란 결단코 형님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선도 악도, 빛도 어둠도, 평안도 환난도 하나님이 만드신 일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이라는 것이다(사 45:7). 주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야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욥 1:21).
매우 파격적인 이러한 증언은, 그러나,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증언하고 있는 말씀일까? 그것은,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뜻에 달렸으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놓고 "될 대로 되어라"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운명에 맡겨 두자는 뜻의 말일까?
그러나, 성서의 근본 입장은 아주 분명하다. 즉 세상만사의 모든 문제로부터 신앙인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의도를 물으라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므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창조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고 결코 그 손에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요지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즉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우리는 두 번째의 중요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 즉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고 할 때, 그 때의 이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물음이요 신학적 물음이다. 성서는,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대답을 갖고 있다. 오늘 읽은 우리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레미크야) 요셉을 그의 형들보다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다"(창 45:5 하반)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 우리네 신앙인은 ― 언제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2.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한" 뜻
문제의 핵심은 여기 있다. 즉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신 오직 한 분 뿐이신 그 창조주이시라면, 이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 들어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의 본문, 창세기 45장 5절 하반절은 「생명을 구하시려고」!!(레미크야 : for the emergence of new life)라는 말로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여기에 근본적인 대답이 있다. 즉 세계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사건들) 속에는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God's will to preserve life / to revive)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성서적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신앙인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부조리하게 보일지라도, 이 세속 세상사들 속에는 그것이 어떠한 모양을 띠고 있든 간에 거기에는 "생명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어도 <하나님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그의 형들이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그 악행속에도 <하나님의 생명구원 의지>가 들어 있었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모두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자포자기 형식의 부당한 숙명론적 사고로부터 온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즉 우리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것이 고난과 죽음과 같은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생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생명구원 / 보존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속성(屬性)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강연의 서론인 <도입부>에서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등"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의 본질인 하나님의 얼굴은 인간이 볼 수 없으므로 결코 그것을 보려고는 하지 말되,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啓示)하여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등"은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의 계시, 이 세계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그의 "등"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그것이 고난이나 죽음과 같은 불행스러운 것일찌라도 거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구원 / 생명보존의 의지>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시내산의 모세를 향하여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자다"(출 33:19)라고 말씀하시므로서, 단지 그렇게만 말씀하시므로서, 자신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생을 노예로 파는 형들의 그 악한 일 속에도!!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의지가 들어 있었다는 그런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롬 12:21). 이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기독교신앙은 오히려 신앙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마치 십자가의 진리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듯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계시를 보지도 읽지도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속성"이란, 즉 모든 사건들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구원의 의지, 그의 자비의지와 그의 긍휼의지란 불신자들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거리낌" 또는 하나의 "미련한 것"이 될 뿐이라는 말이다.
요나 이야기는 그것을 증언한 대표적 성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의 선지자 "요나"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는 그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용서 받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즉 "니느웨"는 회개를 한다고 해도 어쨋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멸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로, "요나"의 하나님을 향한 저항은 참으로 집요하였다. 그래서, "요나"는 만일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를 하신다면 차라리 자기는 "자살"로서 항거를 하겠다고까지 하였던 것이다(욘 4:3, 8).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상(!!), 본질상!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도(!) 회개할 때는 뜻을 돌이키시며 재앙을 내리지 않고 구원하시는 분이셨다는 것(욘 4:2), 이것이 요나서 교훈의 핵심이었다.
인간역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직 한 가지의 뜻은 <생명구원의 의지>라는 것이었다. 인간 역사는 악이 난무하는 세계다. 정말 살 맛 안나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역사를 악하다 하여 단념하시거나 포기하시는 분은 더 더욱 아니시다.
요한복음서는 이러한 끈질긴 하나님을 가리켜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즉 그의 아들을 보내신 그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한 3:17)라고 증언하였다. 아마도,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 속성은 인간생명의 구원이고 인간에 대한 심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자신이 억울하게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그러한 극한적인 악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결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노라고 증언한 것이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좌절하지 마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구하시기 위하여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창 45:5).
그렇다! 진실로 그렇다!! 인간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그것은 인간 생명을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려는 의지이다. 이것을 믿는 신앙이 바로 다름아닌 성서적 의미의 하나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을 갖고 있는 자는 항상 승리감을 갖고 산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구원의지를 포기하거나 단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는 그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워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믿는다. 그리하여 사도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If God is for us, who is against us?)라고 말할 수 있었다(롬 8:31)[죽음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지와 구원활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활동의 도구로서 자신을 이용/사용하신다"는 확신도 갖는다는 것이 오늘 읽은 우리 본문(창 45:1-8)의 결론이다. 요셉의 말, "하나님은 인간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나를 형님들 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라는 요셉의 말은, 바로, 요셉의 그러한 소명 신앙을 증언한 말씀이라고 하겠다.
3.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
인생은 누구나 "보냄을 받은 자"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은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하셨고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일을 할 뿐이라고 하셨다(요한 8:42 ; 20:21). 자기 의지로 세상에 온 자는 아무도 없다. 가인이 하와와 동침하여 하와가 가인을 낳자 하와는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다고 창세기 4장 1절에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가인과 같은 살인자도 다 뜻이 있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셔서 비로소 세상에 온 자들이다. 오고 싶다는 나의 의지 때문에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모두!! <보냄을 받은 자>이다. 이러한 인식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이 가질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그러므로, 자기 의지에 따라 스스로 세상에 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나는 우연히 세상에 오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무지한 자기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주이시다"는 성서적 신앙을 확고히 갖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가리켜서 "애굽으로 보냄을 받은 자"라고 증언하였다. 말하자면, 형들이 자신을 애굽으로 인신매매한 것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자신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전적으로 <보내신 자(sender)와 보냄을 받은 자(One who is sent)>의 관계로 설정한다면, 만일 이 설정이 옳다면(!), 우리가 보냄을 받은 데에는 보내신 자의 목적이 들어 있다는 판단은 논의의 여지 없이 옳다고 하겠다.
요셉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으로 형님들 앞서 보내신 그 목적을 증언하기를,
<큰 구원으로 형님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형님들의 후손을 세상에 남겨두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창 45:7)
라고 증언하였다. 이 증언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요한복음 3:17의 증언과 정확히 상응(相應)한다고 하겠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그를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를 세상에, 그리고 또 요셉을 에굽에 <보내신 자>의 그 보내시는 의도와 목적은 분명하고 동일하며 유일하다(!). 즉 그것은 "세상의 구원"이다(요한 3:17). 세상의 심판이 아니다. 세상의 멸망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자비가 필요한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긍휼이 필요한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는 일을 하는 것(출 33:19)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의 기본 속성(God's back=God's attribute)이다.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다.
이 사실을 시적(詩的) 은유(隱喩 : metaphor)로서 가장 설득력있게 증언한 자는 시편 121편 시인으로 보인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올까? 나의 구원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야훼로부터 온다. 야훼 하나님은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너를 지키시는 분은 결코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너를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이것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그의 세상에 보내신 분의 "뒷 모습"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등"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기본 속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자의 기본 태도는, 그리고 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자의 그 기본 태도는 전적으로 그것은 "보내신 자"를 모방하는 것(Imitatio Dei)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이 사실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신앙적 응답이다 :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라(요한 8:42)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 5:17). 즉 나를 "보내신 분"이신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보냄을 받은 자"인 나도 일한다는 것이다. 즉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요셉의 경우와 예수님의 경우 사이에 이와 같은 유형론적 연결이 있듯이,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이러한 유형론적 연결이 있다는 것이 성서의 결론이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이 내린 결론도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준다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
이 말씀에 대한 1세기 랍비들의 고전적 해석(Talmud Babli, shabbath 133b)은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
아버지께서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시듯이 "너희들도" 그를 닮아 자비롭고 긍휼이 많아라.
보냄을 받은 자의 신앙은, 이와 같이, "보내신 이를 본받는 것"이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