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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느웨로 열린 길 (요나서 3장 10절~4장 3절)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선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분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책망하셨다."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고 먹으면 양쪽 대 멸망하고 말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마태복음 5장 43~48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의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예언자 요나는 유대민족 출신인 예언자로서 그 유대민족이 지닌 이념과 사상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이 예언자의 이름을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진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아밋대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이 요나라는 인물이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이른바 진리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민족을 대변하는 한 상징적 인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요나는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라는 도시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분명히 여기서는 니느웨라는 이 도시 이름이 문제의 중심에 오고 있습니다. 이 니느웨라는 도시는 특별히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를 걸쳐서 이스라엘을 거듭 거듭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인민을 무차별 약탈하였던 그 잔인한 침략제국인 앗수르의 수도였다는 것과 특히 기원전 721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역사상에서 북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앗수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철천지한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아들 요나가 감히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동쪽의 니느웨로 가야 할 것을 정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갔다는 것은 앗수르에 대한 이런 뿌리깊은 악감정과 화해불가능의 반목감정을 문학적 과장법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자의 본질이란 본래 그를 부르신 신의 명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옥불속이라고 해도 뛰어드는 것이 본질인데 그런데도 예언자 요나는 적어도 니느웨 백성에게만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러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이러한 집요한 요구에 밀려서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는 거기서 예언자로서의 임무를 마지못해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요나의 마음은 고기 뱃속에서 삼일씩이나 지내고도 살아 남은 이른바 예수의 부활의 기적만큼이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니느웨에 대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적 증오심 때문에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그 속깊은 뜻을 아직도 여전히 거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사흘길을 다녀야하는 니느웨 선교의 길을 단 하루로 줄였으며, 더욱이 그는 이런 하루 동안의 선교 기간에도 하루 종일 니느웨 성읍을 돌아 다녔으면서도 단지 네마디의 말, 즉 히브리어 글자로 세어서 "40일이면 니느웨는 잿더미"라는 말만 던졌을 뿐 더 이상의 호소도 권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태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이토록 뿌리깊어서 만인 평등을 강조하는 야훼주의에 기본 이데올로기도 멸시하고 포기할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인간심리의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여전히 놀라운 기적을 탄생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토록 포악하고 악명 높은 니느웨 백성이 쏜살처럼 빠르게 스쳐 가는 저 네마디의 말을 빠르고 민첩하게 알아듣고 저 높은 왕으로부터 아래의 평민에 이르기까지 아니 왕으로부터 마굿간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회개하는 거국적 회개를 단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런 예언자가 감히 니느웨의 회개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용서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긍휼의 속성을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하나님을 탄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말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저항의 불평은 분명은 야훼 하나님의 본성, 즉 그의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과 그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긍휼의 속성이 우리의 인간사회에서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고 하는 비평지성들의 비난논리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긍휼속성은 본래 자식에 대하여 어머니가 갖는 무한한 연민의 정을 기반으로 한 모태속성에 뿌리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용서와 사랑이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듯이 회개하는 백성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용서 또한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자식을 미워하는 죄는 그 자손 삼사대까지 갚겠다고는 하셨지만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를 수천대까지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걸고넘어진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속성과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 속성 가운데 나타나는 불균형, 심판의 속성은 삼사대까지만 용서의 속성은 수천대까지 이른다고 하는 이 불균형이 도대체가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합리가 앗수르와 유대민족 사이에 있는 반목관계라고 하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리게 되면 이것은 더욱 곤란하다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고 요나의 확신이었습니다. 요나의 격정적인 분노도 즉 자살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요나의 반항도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무한히 관용하시는 하나님,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넘기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성애적 마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설령 화를 내시려고 하시다가도 곧 뉘우치고 화를 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런 속성이 도대체 못마땅하고 도대체가 참고 견디기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식물 한포기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가 하룻만에 벌레를 통해 그늘을 없애버리신 사건을 요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나는 이런 한 순간의 쾌락의 기쁨을 잃는 것이 니느웨성 전체의 운명보다 더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 하찮은 식물 한포기의 죽음에 대한 연민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의분에 찬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 야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하여 준비하셨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물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야, 진리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너의 신앙양심과 너의 예리한 비판지성으로 이 일을 스스로 판단하여 보아라. 너는 이 한그루의 박넝쿨이 자라나도록 하는 가운데 아무런 수고도 아니했고 아무런 배양도 하지 않았지 않았느냐,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죽는 이 식물조차도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꼈다면 이 큰 성읍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죄없는 생명이 무려 십이만명이나 살고 있고 육축도 또한 많이 있는데 그 생명들이 다 죽게 되었기에 내가 그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끼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하느냐? 모성적 사랑의 아픔을 갖고 자식을 사랑하듯 그렇게 인간을 사랑해 온 나 야훼의 그 모성적 사랑에서 본다면 저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잘못에 대한 용서는 자손 삼사대에까지만 내리고 잘한 것에 대해서는 수천대까지 축복을 내리시는 그 하나님의 계산법이 도무지 불합리한 것이라고 보는 그 요나의 예리한 비판지성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한그루의 하루살이 박넝쿨의 연민보다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이 십이만이나 살고 있는 저 큰 성읍의 운명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느냐하고 야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하여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요나에 대한, 아니 요나와 같은 그런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깔보고 비난하는 모든 종류의 인류의 지성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적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적인 교조를 전혀 깨뜨리지 못하는 지극히 희망이 없는 동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도 우리를 계몽하기 보다는 우리를 오히려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오히려 구속하고 우리를 멸망에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우리 크리스찬 지성을 염려하는데서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이러한 요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자기모순을 예리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는 불합리성이 우리 인간의 합리성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주의적인 이념이나 교조적인 신념 따위의 이데올로기와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 영원한 고유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박넝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한 방울의 이슬이나 한 줌의 흙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만 우리는 지금 말하고 있고 또 지금 호흡하고 있고, 또 여기서 지금 여기서 생명의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저 원수의 도성 니느웨로 향하여 열리어 있는 진리 그 길로 나아가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길이요, 이 길은 선택받은 자의 길입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선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분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주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책망하셨다."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고 먹으면 양쪽 대 멸망하고 말 것이니 조심하십시오."
마태복음 5장 43~48절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외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의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예언자 요나는 유대민족 출신인 예언자로서 그 유대민족이 지닌 이념과 사상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상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성서는 이 예언자의 이름을 '아밋대의 아들 요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밋대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진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아밋대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이 요나라는 인물이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이른바 진리의 아들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민족을 대변하는 한 상징적 인물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요나는 그가 믿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라는 도시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분명히 여기서는 니느웨라는 이 도시 이름이 문제의 중심에 오고 있습니다. 이 니느웨라는 도시는 특별히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와 7세기를 걸쳐서 이스라엘을 거듭 거듭 침공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인민을 무차별 약탈하였던 그 잔인한 침략제국인 앗수르의 수도였다는 것과 특히 기원전 721년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역사상에서 북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앗수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철천지한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진리의 아들 요나가 감히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동쪽의 니느웨로 가야 할 것을 정반대방향인 다시스로 갔다는 것은 앗수르에 대한 이런 뿌리깊은 악감정과 화해불가능의 반목감정을 문학적 과장법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언자의 본질이란 본래 그를 부르신 신의 명령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지옥불속이라고 해도 뛰어드는 것이 본질인데 그런데도 예언자 요나는 적어도 니느웨 백성에게만은 회개의 복음을 전하러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이러한 집요한 요구에 밀려서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는 거기서 예언자로서의 임무를 마지못해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요나의 마음은 고기 뱃속에서 삼일씩이나 지내고도 살아 남은 이른바 예수의 부활의 기적만큼이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서도 니느웨에 대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민족적 증오심 때문에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그 속깊은 뜻을 아직도 여전히 거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사흘길을 다녀야하는 니느웨 선교의 길을 단 하루로 줄였으며, 더욱이 그는 이런 하루 동안의 선교 기간에도 하루 종일 니느웨 성읍을 돌아 다녔으면서도 단지 네마디의 말, 즉 히브리어 글자로 세어서 "40일이면 니느웨는 잿더미"라는 말만 던졌을 뿐 더 이상의 호소도 권면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태인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이토록 뿌리깊어서 만인 평등을 강조하는 야훼주의에 기본 이데올로기도 멸시하고 포기할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인간심리의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는 여전히 놀라운 기적을 탄생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토록 포악하고 악명 높은 니느웨 백성이 쏜살처럼 빠르게 스쳐 가는 저 네마디의 말을 빠르고 민첩하게 알아듣고 저 높은 왕으로부터 아래의 평민에 이르기까지 아니 왕으로부터 마굿간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회개하는 거국적 회개를 단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런 예언자가 감히 니느웨의 회개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용서하시려는 야훼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긍휼의 속성을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하나님을 탄핵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말입니다.
요나의 이러한 저항의 불평은 분명은 야훼 하나님의 본성, 즉 그의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과 그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긍휼의 속성이 우리의 인간사회에서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고 하는 비평지성들의 비난논리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긍휼속성은 본래 자식에 대하여 어머니가 갖는 무한한 연민의 정을 기반으로 한 모태속성에 뿌리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용서와 사랑이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듯이 회개하는 백성에 대한 야훼 하나님의 용서 또한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자식을 미워하는 죄는 그 자손 삼사대까지 갚겠다고는 하셨지만 그러나 자식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은혜를 수천대까지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걸고넘어진 부분이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속성과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 속성 가운데 나타나는 불균형, 심판의 속성은 삼사대까지만 용서의 속성은 수천대까지 이른다고 하는 이 불균형이 도대체가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합리가 앗수르와 유대민족 사이에 있는 반목관계라고 하는 역사적 상황과 맞물리게 되면 이것은 더욱 곤란하다는 것이 요나의 생각이고 요나의 확신이었습니다. 요나의 격정적인 분노도 즉 자살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요나의 반항도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무한히 관용하시는 하나님,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넘기시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그 모성애적 마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설령 화를 내시려고 하시다가도 곧 뉘우치고 화를 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이런 속성이 도대체 못마땅하고 도대체가 참고 견디기 힘들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야훼 하나님은 식물 한포기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가 하룻만에 벌레를 통해 그늘을 없애버리신 사건을 요나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나는 이런 한 순간의 쾌락의 기쁨을 잃는 것이 니느웨성 전체의 운명보다 더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 하찮은 식물 한포기의 죽음에 대한 연민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의분에 찬 분노를 터뜨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 야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하여 준비하셨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물음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밋대의 아들 요나야, 진리의 아들이라고 자처하는 너의 신앙양심과 너의 예리한 비판지성으로 이 일을 스스로 판단하여 보아라. 너는 이 한그루의 박넝쿨이 자라나도록 하는 가운데 아무런 수고도 아니했고 아무런 배양도 하지 않았지 않았느냐,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죽는 이 식물조차도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아꼈다면 이 큰 성읍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죄없는 생명이 무려 십이만명이나 살고 있고 육축도 또한 많이 있는데 그 생명들이 다 죽게 되었기에 내가 그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고 아끼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옳지 않다고 하느냐? 모성적 사랑의 아픔을 갖고 자식을 사랑하듯 그렇게 인간을 사랑해 온 나 야훼의 그 모성적 사랑에서 본다면 저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잘못에 대한 용서는 자손 삼사대에까지만 내리고 잘한 것에 대해서는 수천대까지 축복을 내리시는 그 하나님의 계산법이 도무지 불합리한 것이라고 보는 그 요나의 예리한 비판지성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한그루의 하루살이 박넝쿨의 연민보다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천진난만한 사람이 십이만이나 살고 있는 저 큰 성읍의 운명에 연민을 느끼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느냐하고 야훼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향하여 반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것은 요나에 대한, 아니 요나와 같은 그런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깔보고 비난하는 모든 종류의 인류의 지성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적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적인 교조를 전혀 깨뜨리지 못하는 지극히 희망이 없는 동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도 우리를 계몽하기 보다는 우리를 오히려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오히려 구속하고 우리를 멸망에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고 하신 말씀도 우리 크리스찬 지성을 염려하는데서 나온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이러한 요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인간의 자기모순을 예리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는 불합리성이 우리 인간의 합리성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사랑은 민족주의적인 이념이나 교조적인 신념 따위의 이데올로기와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 영원한 고유의 속성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박넝쿨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한 방울의 이슬이나 한 줌의 흙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만 우리는 지금 말하고 있고 또 지금 호흡하고 있고, 또 여기서 지금 여기서 생명의 복음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그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저 원수의 도성 니느웨로 향하여 열리어 있는 진리 그 길로 나아가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길은 우리의 길이요, 이 길은 선택받은 자의 길입니다.
처/김이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