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시편 51:7~12 누가복음 13:1~9)  


회개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 중의 하나가 ‘회개’란 말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인간이, 그 전존재를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있던 죄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서 전면적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돌린다는 의미인 ‘회심’과도 동의어입니다.

회개란 그리스어는 ‘metanoia’입니다. 이 말은 ‘다르다’(meta)와 ‘생각’(noia)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을 다르게 하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회개는 그 생각에서 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고 그에 따른 행동에서 완성됩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회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줍니다. 탕자의 비유는 생각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주는 멋진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이 자유의 속박이며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만 벗어나면 멋지고 만사형통한 삶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해서 먼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방탕한 삶을 살며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만끽했습니다. 참 멋진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이 떨어지자 그에게 남은 것은 돼지치기라는 비참함과 배고픔 뿐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눅15:18).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속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속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이론을 무찔러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을 쳐부수며 모든 생각을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고린도후서10:3-5).

베드로가 십자가로 가는 예수님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 16:23).

사람의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의 양면이 있습니다.

먼저 소극적인 면은 과거를 돌아보아 자기의 죄와 허물을 자각하고, 이것을 뉘우치는 일입니다(시 51:3, 요일 1:9). 다음으로 적극적인 면은 지금까지의 옛 마음이나 생활(걸음)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신앙의 길로 돌아서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이 아들은 회개의 적극적인 면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비로소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눅 15:20). 아들은 죽음에서 일어나 삶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생각이 바뀌자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이 아들은 실제로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옷을 입고, 새 신을 신고, 손에 가락지를 끼었습니다. 아버지의 잘 차려진 잔치를 통해서 환영을 받았습니다. 후회만 하고 돌아가지 않았다면 이런 감격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회개는 이것이다’ 하고 아는 것보다 실제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데서 완성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소망과 목표는 오직 고기를 많이 잡아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서 생각이 변했습니다. 그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호수의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더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에게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 최고의 부유함이 되었습니다.

세리장 삭게오는 오직 돈만을 위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탐욕을 부리는 수전노였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고, 법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을 속여서 자기 재산으로 만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삭게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삭게오의 눈에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새로운 삶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부당하게 모든 모든 재산을 되돌려 주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신념적으로 열렬히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서 새로운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생각이 변했습니까? 우리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어떤 소망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어떤 행동을 결단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회개의 영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7).

신앙은 회개를 통해서 시작합니다. 회개는 내 방식 대로의 삶에서 내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삶으로 유턴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상을 향해 있던 우리의 생각, 우리의 정신, 우리의 이해가 하나님 쪽을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을 닮은 완전한 인간의 품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선택하라

사람들 중에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면 사람을 어떻게 지옥에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옥을 선택하겠습니까? 하지만 스스로 지옥을 선택하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모세는 마지막 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선택하라고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 30:19).

예수님도 선택의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백성의 감정을 자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의 희생제물을 바치려고 했을 때 혹은 바쳤을 때 총독 빌라도가 그들 가운데 몇 명을 학살한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던 성벽의 망대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이 연못의 망대는 성벽 위에 경비를 위해 세웠으며, 또 사람들이 올라가 쉴 수 있는 일종의 정자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 망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18명이 죽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사람들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생각으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 값으로 그런 불행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때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가 아니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경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도 악한 권력자들에 의해 압제와 비극적인 살해를 당하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연재해가 생기고, 그로 인해서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나 우리나 다 같은 인간입니다. 다 같은 죄인입니다. 다같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재난을 당한다고 해서 특별히 큰 죄인인 것처럼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5).

그 사건 속에 우리를 향한 메시지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사건을 보면서도 나에게도 역시 같은 사건이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도 고 윤장호 하사와 같이 아프가티스탄의 테러 현장에 있었다면 똑같이 재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요, 테러에 희생 당하는 모든 인류의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회개의 초대가 이와 같습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고통도 이처럼 특정한 개인의 특정한 문제가 아니요, 모든 사람에게 주는 보편적인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모독죄

마가복음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8-29).

도대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성령모독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합리화하는 죄입니다. 죄를 지어놓고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중환자가 아프지 않다고 우기면 그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면 성령님께서 죄를 꾸짖어도 용서를 구하지 않아서 용서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져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도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지 않아서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마음 속의 영을 새롭게 하셔서 성령의 음성을 잘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신앙의 기쁨’은 ‘회개의 기쁨’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아 헤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외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함을 보시면서 슬피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완고함을 보시면서 한탄하셨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하나님의 자비는 이 세상을 즐겁게 즐기라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애 양심을 편하게 해주는 값싼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차라리 십자가를 지라는 회개로의 초대입니다. 회개할 때만 우리는 고침을 받고, 용서를 받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안동교회 98주년 창립 기념

오늘은 안동교회 98주년 창립 기념 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창립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창립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인간들끼리 모여서 만든 단체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셔서 만드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부르심은 단순히 교회라는 기관을 위해서 부르신 부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삶을 향해 초대하시는 부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그 인생을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회개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도 각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성전이고, 성도 각자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회개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 각자는 회개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고, 회개를 통해서만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창립 기념이란 교회의 출발을 기념하는 것이요, 우리 각자의 신앙의 출발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발의 목적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출발의 사건, 회개를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온 삶과 영이 진실되게 서는 날입니다. 회개의 영만이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인답게 만들며,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서 자신과 이웃과 역사와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하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역사적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올해는 안동교회 98주년일뿐만 아니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평양 부흥의 본질은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로부터 시작된 선교사들의 회개 운동이 드디어 장대현 교회의 신년남자부흥회와 신년여자부흥회를 통해서 한국인의 회개 운동이 점화된 것입니다.

1907년 1월 14일 장대현 교회 남자부흥회 마지막 전날 밤 저녁 신학생인 길선주 장로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1년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친구가 미망인에게 남긴 재산 중 100달러 상당의 돈을 가로챘던 일을 공개적으로 자백하고 통회했습니다. 길선주의 회개를 통해 마치 뇌관에 불을 붙인 것처럼 청중들 가운데 성령의 강한 임재와 통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 부흥회 마지막에는 성령의 역사가 더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역사가는 이날 설교하는 길선주의 얼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대단한 위엄과 능력의 얼굴, 순결과 거룩함으로 불타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

블레어 선교사는 이날의 회개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모든 죄들이 그날 밤, 공개적으로 고백되었다. 살인, 간음,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결한 일들, 도둑질과 거짓말이 토로되었다.”

회개 운동은 엄밀히 말하여서 부흥 운동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진정한 교회로서의 출발을 말합니다. 회개야 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각자와 교회가 자신의 본질에 충실할 때,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력은 진실한 회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량주의, 배금주의, 권력 다툼, 재산권 다툼, 도덕적 추락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자기 철학의 주장, 게으름의 합리화, 이념의 노예된 상태에서 성령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회개할 때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때입니다.

이. 엠. 바운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는 사람이다. 교회는 더 나은 방법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투구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설이나 새로운 조직 또는 새로운 방법들이 아니요, 성령께서 쓰실 수 있는 기도의 사람들이다”(이. 엠. 바운즈).

회개는 인생의 기초입니다. 회개는 교회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과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의 전 인격의 완전한 타락을 회개하고 용서함 받은 혁명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나는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새로와진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변화를 통해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회개를 해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죄 사함이 있고 은혜의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나를 회개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부르십니다. 나를 새롭게 합니다.

안동 교회의 창립 98주년을 맞아 신앙의 기초, 신앙의 출발을 새롭게 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홍문수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