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의 공동체  (요 13:21-25, 31-35)

  오직 예수!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주님의 은혜를 흡족히 받고 있는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저의 마음은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리고 그 말씀 속에 있는 주님의 의도를 깨닫는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새삼 알게 된 감사로 충만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새 계명’은 그 깊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주님의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로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단결시키시는 일에 많은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고난주간 화요일에 있었던 감람산 강화(마 24:1~25:46) 시에는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의 경우 예수님 생애에 마지막 강화가 되는 다락방 강화인데, 여기서는 가룟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주님은 ‘새 계명의 공동체’를 언급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신약교회가 어떤 성격을 가진 공동체인지 명확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과연 교회를 세우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던 교회의 모습은 어떤 그림입니까?
  우리 서현교회가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교회가 되려면, 어떤 공동체여야 합니까?  

1.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새로이 이루어질 공동체의 성격이 ‘서로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부터 자신의 사역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이를 확장하시며,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여기 집중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특징, 그 나라의 일군에 대하여 비유로 설명하시고 이를 능력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을 뽑으셔서 함께 기거하며 친히 삶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열두 제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에게 공동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스스로 체득케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루어야 할 모임의 특징은 한마디로 ‘사랑의 공동체’ 이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3년 동안 함께 나눈 많은 시간과 대화, 그리고 공동체 삶의 경험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남자들은 2, 3년 동안 젊은 시절 군대 내무반 생활에서 겪은 희로애락의 체험을 일생 잊지 못하고 추억거리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한국 여자들이 가장 듣기 지루해하는 것이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라고 하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아마도 굉장한 응집력으로 소그룹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아직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남기는 자리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앞선 3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떠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4, 35절에서는 비록 예수께서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이들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카이노스) 계명’은  ’써 보지 않은 계명’, 혹은 ‘알려지지 않은 계명’ 이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계명은 과거에 사용해보지 않은 새로운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것입니까?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율법의 계명은 어찌된 것입니까?  예수님은 왜 ‘새 계명’이라고 했을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음을 생각해야 합니다(마 5:17, 18). 주님께서 새롭다고 하신 것은 ‘새 계명’이 구약의 계명보다 완성되고 승화된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옛 계명은 인간의 자기 사랑에 사랑의 기준을 둔 것입니다. 이것은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원수들을 사랑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 등은 완전히 낯선 개념이었습니다(마 5:43)

  실로 옛 계명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선택된 백성으로서 다른 민족들과는 구별되어 서로 사랑하라는 제한적인 범주의 사랑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데 반하여, 새 계명은 민족적 한계를 뛰어넘어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에 근거한 신적 사랑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척도’를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질과 분량과 방법이 우리의 ‘서로 사랑’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포함됩니다(마 5:44; 눅 23:34). 끝까지 사랑하는 것(요 13:1)과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요 15:13) 등이 포함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이론이 아니며 개념도 아닙니다. 사랑은 실행입니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사랑이라면 허무한 말장난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제자들의 모임은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새 계명의 공동체를 기뻐하시고, 이들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하고 계십니다.

  주위 사람들이 느끼는 우리 서현교회의 특징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사랑의 공동체, 아가페 공동체가 되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달려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애제자(愛弟子)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신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들로 이루어집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주님의 애제자(愛弟子)들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3년씩이나 함께 했던 제자들이었지만, 본문의 새 계명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마지막 날까지 그들이 듣지 못했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새 계명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진심으로 사역하는 공동체의 멤버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가룟유다가 나간 후에 남아 있던 열한 제자에게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가룟유다가 끼어 있는 곳에는 새 계명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새 계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새 계명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자’(His beloved disciple)에게 주어집니다.

  본문 23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자’란 말은 요한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당시에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기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던 제자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계속하여 익명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에서 ‘두 제자’는 안드레와 요한을 가리킵니다.
  18: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에서 ‘또 다른 제자’는 요한을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두려워 멀찍이 따를 때에 요한은 주님 곁에서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19: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에서 ‘사랑하시는 제자’ 또한 요한입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친 십자가 형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의 임종을 지켜본 제자입니다.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에서 ‘그 다른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부활의 아침에 의심하는 다른 제자들을 뒤로 하고 무덤을 향하여 제일 먼저 달려갔던 사람입니다.
  21: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 요한은 계속하여 익명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새 계명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전적으로 예수님 안에 거했던 제자입니다. 그가 쓴 복음서에서 ‘새 계명의 공동체’를 접하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위에 부어지고 이 사랑이 계속 채워지면,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으로 거룩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 이 표현은 사도 요한에게 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성도 모두에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예수님의 애제자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언젠가 기자들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적어도 프랑스의 중산층이라면 소득은 논외로 치더라도 우선 하루에 적정량의 운동을 할 것, 한 달에 서너권의 전문분야나 교양 서적을 읽을 것, 여기에 더하여 한 가지 이상의 악기, 그리고 한 가지 이상의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그래서 최소한 이 정도의 지적 수준과 건강, 교양을 갖추어야 명색이 프랑스의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단순히 소득이나 직업, 학력과 같은 평면적이고 양적인 측면에서 중산층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도 질적인 측면을 기준으로 중산층을 규정한 것입니다.

  만일 이런 기준으로 볼 때 한국 사람 가운데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준을 제시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아마 많은 교인들은 우선 교회에 잘 출석하고, 술 담배 안하고, 등등의 기준부터 제시할 것입니다.
  물론 이같은 기준도 필요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 주님은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에게 이와는 비교되지 않는 구체적이고 차원 높은 기준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참 제자는 ‘서로 사랑하는 자’, 그것도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교회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제자들로 구성되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제자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함께 모여 예수 사랑을 실천하는 아가페 공동체입니다.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우리 교회를 아가페 공동체로 세워나갈 주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
  
  예수님은 사랑이 없는 이 땅에 주님의 사랑으로 무장한 제자들이 서로 나누고 돌보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전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훌륭하게 전수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공동체의 원리를 따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세웠습니다.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는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켜 나갈 자원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훌륭한 건물이 없었습니다. 신학교 교육도 없었습니다. 주일학교도 없었고, 찬양대도 없었습니다. 오직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모이는 작은 그룹과 작은 교제만이 있었습니다.

  처음 거기에는 신약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오직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 뿐이었고, 그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주님의 의도였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교회가 필요한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말씀을 섭취하였고, 성도들의 각 집으로 모여 교제하며 애찬을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나눔과 돌봄의 아가페 공동체를 실제로 구현해냈습니다. 그들은 집에서 집으로 소그룹으로 모여 서로 나누며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고 어려운 이웃에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들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라고 한 말씀의 수준이었습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이들의 모임 가운데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더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사랑의 온기에 마음이 녹아 속속 그리스도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 하는 동안 이런 모임을 얼마나 경험하고 있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작은 방 안에 소수의 성도들이 둘러 앉아 있습니다. 그들 한분 한분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그들의 표정, 대화, 그리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진하게 묻어 있습니다.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강하게 체험합니다.
  내가 나누는 기도의 제목을 맞은 편 형제가 받아 적고 가슴에 간직합니다. 옆의 자매가 나누는 잔잔한 삶의 애환 속에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느끼면서 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한 형제는 지난 주에 내어놓았던 기도의 제목을 응답받았다고 기뻐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열리는 여러 모임들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그 모임들에서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느껴본 적 있습니까?  모임 중에 하나님의 능력(power)을 체험해본 적은 있습니까?  그 모임 속에서 하나님의 뜻(purpose)이 이루어지는 영광스런 경험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의 관심은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공동체 위에 있습니다.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은 소수의 성도들이 모여 서로 나누고 돌보는 공동체를 이루는 곳에 함께 하셔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공동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입니까?  바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제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우리에게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동체가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제자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까지 우리들은 마치 당시의 제자들처럼 행동해 온 것 같습니다.
  깨닫는데 빠르지 못했고, 믿는데도 신속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길로 들어서는 데는 변명들을 찾아내기 바빴고,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는 데에는 모든 교인들의 뒤에 서기에 급급했습니다.

  우리 주님, 이런 부족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 이처럼 모자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셨고, 하늘의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채워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과연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고난 받으시는 주님과 함께 가야바의 뜰 안으로 함께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피흘리시며 고통가운데 부르짖는 주님의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부활의 아침에 의심하는 제자들을 뒤로 하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모습 속에 여러분 자신을 떠올릴 수 있습니까?
  주님 재림의 날에 준비된 마음으로 할렐루야를 위치며 주님께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 -- 이것은 참 교회의 비유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집중되는 대상이 되십시다.  진정한 나눔과 돌봄의 공동체를 이루어봅시다.

  안으로는 언약의 말씀으로 하나되는 언약 공동체, 밖으로는 주님 주신 사명으로 하나되는 선교 공동체 --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나누며 주님의 새 계명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