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자  (시편 1편 1-6절)
  

'복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누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 첫인사부터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하고, 그 언제라도 "당신은 참 복도 많습니다."라는 찬사를 듣게 될 때마다 그 뿌듯한 기분에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 좋은 '복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로부터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복(福)이라는 한자를 풀이해서 '그저 입에 풀칠할 밭 한 뙤기 있으면 그게 복이라는 소박한 정의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양 속담에는 'Happiness consists in contentment.' 즉 '행복은 만족에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상당히 음미해 볼만한 정의인데, 무엇을 어느 정도 만족하느냐 하는 문제가 곧 따라오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재물이나 명예나 아름다운 여인이나 혹은 출세한 자식들을 그 만족의 조건으로 삼고 행복의 이유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일반적인 복의 개념과는 전혀 동떨어지게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는 새로운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어떤 재미있는 것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 흔하디흔한 책들 중에 한 권 같지만, 바로 이 성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생활이 푹 빠져 있는 사람이 진짜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실로 범상치 않은 선언입니다.

  왜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처럼 남들이 들으면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할 이런 복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읽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다.라고 믿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오늘 성경주일을 맞이하여 왜 이 성경이 우리 기독신자들에게는 최고의 복덩어리 그 자체가 되는지 그 이유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줍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세 개의 동사 '좇다, '서다, '앉다라는 단어들은 점층적인 순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선 '좇다라는 말은 그저 '따라서 걸어가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길로 빠져 들어가는 첫 단계가 바로 악인의 꾀를 그처럼 "좇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들의 유혹하는 일들을 호기심에서 흉내 내듯이 슬슬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히 도달하게 되는 단계가 '서는 단계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삼아서 가끔 흉내 내어 보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꽤 익숙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죄인의 길에 함께 "서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범죄의 생활에 아주 '상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의 길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 단계는 자동적입니다.
  바고 오만한 자리에 아예 "앉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죄악의 현장에 완전히 주저앉아서 다시는 헤어날 길이 없도록 '동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 동사들과 연결된 명사들에도 역시 그런 점층법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그저 "꾀" 즉 악인들의 '생각하는 바를 좇아가다가, 조금만 지나면 그들의 "길" 즉 그 행위에 동참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들과 "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아예 삶 전체가 완전히 같아져 버리게 됩니다.
  실로 한 사람이 죄악의 인생으로 점차 휩쓸려 들어가는 과정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악인, 죄인, 오만한 자 역시 점점 더 타락해 가는 과정을 나타내는 점층법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악인" 즉 도덕적인 의미에서 '나쁜 사람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다음에는 "죄인" 곧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은 인간이 되고, 결국에는 "오만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오만한 자"의 원문은 '비난자라는 단어인데, 바로 자신이 악인이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럽게 여기거나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 의인들을 욕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나쁜 짓 가끔 하던 사람이 끝에 가서는 오히려 신자와 하나님을 조소하는 '오만한 자가 되고 마는 것은, 실로 두려운 중독증세요 악화일로의 과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 생각과 행동 속에 없는 인생은 마치 비탈길에 놓인 공과 같이 자연히 죄의 유혹에 더욱더 깊이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저 친구 따라 배운 술 한 잔이 나중에는 말술이 모자라는 주정뱅이 인생이 되고, 처음에는 장난으로 시작한 내기가 나중에는 엉덩이를 뗄 줄 모르는 도박꾼으로 아예 상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주일 오후에만 살짝 상점 문 열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주일예배와 아예 담을 쌓게 되면서 오히려 심방 오는 교역자를 귀찮게 여기고 등을 돌립니다.
  처음에는 십일조 조금씩 속여서 내던 것이 나중에는 교회헌금을 훔치다가 들켜서 교회를 떠나게 되고, 그러면서도 오히려 교회를 향하여 주객전도격의 비방까지 서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떠난 인생은 그 죄악의 인생길에 점점 더 중독되고 끝내는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최저 밑바닥에까지 떨어지게 되고 아예 거기에 달라붙게 됩니다.
  말씀을 배우지 않고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자연히 세상의 나쁜 생각과 악한 사상의 꼬임에 넘어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정죄 받을 짓들조차 자연스럽게 행하게 되고, 결국에는 오히려 신자와 교회를 욕하는 자리에 아예 뿌리가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타고난 원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행의 규범으로써 엄격히 제어되지 아니하면 그 생각과 행동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와 진배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인생으로 전락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온갖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쁜 놈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살다가 끝내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리는 이런 비참한 인생이 되지 않도록 우리를 바로 인도해 주시는 성경 말씀을 따라서 살게 된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이 시편 기자는 감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 하나님을 망령되이 욕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게 된 것이 실로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지를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인생에 최고 성취를 이루게 해 줍니다.

  3절 말씀에 "3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나무가 살고 자라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바로 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나무가 마침 시냇가에 심기어 있으면,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 직결되어 있으며 무한공급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나무에 잎이 무성하고 열매 맺히는 것은 그저 "시절을 좇아" 즉 계절마다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될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람이 성경중심으로 살아갈 때 나무가 수분을 흡수하듯이 그 말씀의 진리와 교훈을 자신의 생활에 늘 적용하면서 살게 됨을 가리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면 자연히 그 나무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가장 싱싱한 잎과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그처럼 말씀을 생활 현장에서 체험하면서 사는 성도는 자연히 그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자기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를 이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비유의 핵심은 그 어떤 나무가 '물가에 심기어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를 맺거나 못 맺게 되는 결과는 그 나무가 어떤 종류에 속한 것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디에 심어졌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꼭 같은 묘목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막 한 가운데 심기어졌을 때와 물가에 심기어졌을 때의 차이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 사람들 역시 이 땅에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자신이라는 묘목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즉 그 얼굴 생김새, 골격, 재능, 혈연관계 - 이런 것들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런 자신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아무리 본인으로서는 불만스럽다 할지라도 다시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내가 어떤 묘목으로 태어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만큼 성취해 낼 수 있느냐?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바꿀 수 없는 불변이지만, 내 인생의 '성취도라는 것은 가변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저 '내가 왜 이런 종류의 묘목으로밖에 태어나지 못했을까?라는 불만에만 가득 찬 인생을 한평생 내내 살기 쉽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무척이나 자주 했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약골로 태어나서 나보다 훨씬 더 힘센 급우들에게 맞고만 살아야 할까?, '저 여학생은 나 같은 남자의 마음을 이렇게 설레게 만들도록 예쁘게 태어났는데 왜 나는 좀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내 친구들 중에는 매일 도시락 반찬에 소시지를 싸오는 부잣집 애도 있는데 나는 하구한날 멸치볶음과 다꾸앙(단무지)만 싸 주시는 가난한 부모를 만났을까?라는 등, '왜 나는 남보다 못하게 태어났을까?라는 불만이 어린 저의 가슴에 수없이 지나쳐갔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저 사람은 저만큼씩이나 많이 받고 태어났는데, 왜 나는 애당초 태어날 때부터 조금밖에 받지 못했을까?라는 불만에만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저 친구는 태어날 때부터 아이큐가 좋아서 별로 공부 안 해도 쉽게 90점, 100점만 받는데 내 머리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저 여자는 천부의 미모를 지니고 태어난 바람에 수퍼모델이나 탤런트다 하면서 쉽게 출세하는데 나는 왜 별 재주도 없으면서 얼굴이라도 좀 예쁘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왜 누구는 재벌 아버지를 만나 한평생을 놀고먹을 팔자로 태어났는데 나는 이렇게 평생 월급쟁이 하면서 사노라고 먹노라고 고생할 팔자일까? - 혹 이런 불만들이 매일같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원래 인생 종자가 나빠서 싹수가 노란 사람이다.라는 불만에만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늘 타인과 사회를 원망하게 되며 다른 편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게 됩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자기 나름대로는 변명이 있고, 감옥에 들어온 사람마다 다 자기는 억울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생관이 더 악화되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 됩니다.
  '나는 원래 가진 것 없이 태어났으니 이 사회를 뒤엎어버리고 있는 놈들의 것을 빼앗자.라는 사고방식이 제 딴에는 아주 정당한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각 사람의 인생은 누가 어떤 종자로 태어났느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이 어디에 심기어졌느냐에 따라 나누어지게 됩니다.
  성경중심으로 사는 신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도 사시사철 푸르고 때가 되면 절로 풍성한 열매 맺히는 만사형통의 인생을 자동적으로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물가에 심기지 못한 사람은 조금만 가물어도 금세 마르는, 집안에 작은 병마 하나만 생겨도 하나님 원망하고 자식 대학교 떨어지면 재수할 동안에 예배참석 금지령을 내리고 조금만 불경기가 되어도 못살겠다, 죽겠다 하고 아우성을 치는, 인생의 열매는커녕 있던 잎사귀마저 점점 더 떨어지면서 마르는 나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달란트가 한 개이든, 다섯 개이든 그것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받았든지 적게 받았든지 간에 일단 말씀이라는 이 생명 근원에 완전히 뿌리박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 속에 포함시켜 두신 달란트 인자들이 최대한으로 발휘되는 완벽한 성공인생을 반드시 누릴 수 있습니다.
  태어날 때 받은 복을 평생토록 까먹기만 하는 불행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오직 성경중심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미 주신 인생 가능성의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때가 될 때마다 인생 성취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야 마는, 진짜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의인의 공동체에 들어가게 해 줍니다.

  4절 이하 6절에 기록하기를 "4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6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라고, 성경중심으로 사는 신자와 그렇지 못한 불신자를 극단적으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 차이점은 오직 말씀을 따라 사는 신자만이 죄악의 유혹에서 벗어나며 인생 최고의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반면에, 불신자는 끝까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낭비 인생으로 시작해서 헛수고 인생으로 끝나고 마는 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될 때가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악인이 마지막 심판날에 당할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람에 나는 겨"라는 말은, 옛날에 곡식을 타작할 때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을 분리하기 위해서 키질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추수하는 농부가 키를 들고 아래위로 흔들면 무거운 알곡은 떨어져서 키에 도로 담기게 되는 반면 가벼운 쭉정이 즉 '겨는 바람에 날려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묘사하면서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고 예언한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즉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때에 '겨 즉 악인은 '알곡 즉 구원받을 신자와는 완전하게 분리수거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사회의 단체들 안에는 항상 나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학교에 가면 반마다 불량서클 따위에 가담해 있고 걸핏하면 급우들을 괴롭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어디에 배치를 받아도 지독하게도 악질적인, 거의 병적이라 할 만큼 악랄한 고참이 꼭 내무반마다 한 명씩은 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우리 반이 저런 애 하나도 없는 완벽한 모범생들의 반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든지, '우리 내무반이 저렇게 성질 고약한 고참이 하나도 없는 화기애애한 전우들만의 내무반이 될 수 있다면 군생활도 정말 보람되게 할 수 있겠는데.라는 꿈들을 꾸게 됩니다.
  어린이 유괴 살인범, 우리 아들딸들을 물고문하고 성고문하는 악질 형사, 이천만 명의 내 동포를 공포와 기아로 죽이고 있는 독재자 - 이런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단체나 사회나 국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꿈은 이 세상에서는 어디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곳, 그런 꿈같은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고 있는 복입니다.
  그것은 곧 말씀중심으로 살았던 신자들이 예수님 재림하실 때 들어가게 될 '의인의 회중, 악인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순수한 공동체입니다.

  의인과 악인은 세상에서 살 때야, 사회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혹은 한 집안에서도 섞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오셔서 심판하실 때에는 전혀 상황이 다른 것입니다.
  논에서 추수할 때에야 아무리 탈곡을 잘해도 쭉정이 몇 개는 섞여 남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 의인과 죄인을 갈라놓으실 때, 어떻게 요령을 피워서, 눈속임을 해서 슬쩍 의인의 회중에 새치기해 들어올 수 있는 악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키질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악인도 "견디지 못하고" 저 지옥으로 날려가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에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삶을 살았던 의인들, 즉 성경 말씀대로 믿고 살았던 알곡 신자들만 차곡차곡 그 키질 밑에서 악인들과 완전분리되어 천당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인은 단 한 명도 없는 그런 완벽한 '의인의 회중에서 살게 된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는 주일날 교회 간다고 박해하던 회사 사장들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고, 십일조 낸다고 눈총 주던 불신남편들도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를 핍박하기는커녕 조금이라도 귀찮게 할 사람조차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쭉정이는 단 한 명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이미 철저하게 분리해서 지옥에 떨어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화가 완성된, 영화로운 성도들만으로 구성된 100퍼센트 완벽한 의인만 모여 있는 가운데 살게 될 것 생각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반면에 그날이 올 때 악인들은 그 회중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평소에는 목사와 전도사들이 그토록 찾아다니면서 제발 교회 나오시라고 간곡히 전도해도 그렇게 오기 귀찮아하던 그 '의인의 회중, 심방장 구역장들이 살살 빌다시피 권하면 무슨 큰 선심이나 쓰듯이 몇 달에 한번 쯤 왕림(?)해 주던 그 '예배의 회중, 믿는 아내가 그렇게 달래고 사정해도 늘 하찮게만 여겨지고 오히려 온갖 비방을 퍼붓던 그 '교회가 그 마지막 심판날에는 자기도 얼마나 들어오고 싶겠습니까?
  예수님의 추상 같은 키질 앞에 자기네들은 견딜 재간 없이 지옥으로 훌훌 날려가 버리는데, 오직 성경 말씀대로 믿고 산 신자들만 천당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보면서 그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아이구, 그때 그 목사의 전도, 내 아내의 말을 들을껄, 진작 교회에 열심히 다닐껄."하고 그야말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어떻게 저쪽 회중에 끼일 수는 없을까?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섞이고 싶어도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이미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그야말로 쫙 갈라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신자만이 바로 그날에 그 상상만 해도 멋진 회중,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 그 완벽한 '의인의 회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영원한 복을 사모하고 있는 까닭에 아무리 악인들이 괴롭히고 아무리 불신자들이 못살게 굴어도 우리 기독신자들은 오직 성경말씀이 명하시는 대로 거룩한 생활, 의롭고 선한 삶을 오늘도 기쁘게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직 성경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는 모범생 성도들만 들어갈 수 있는 그 순수한 의인의 회중, 오직 예수님과 꼭 같이 완벽하게 선하고도 의롭게 영화된 성도들만 모이게 될 그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다시 만나 영원히 사는 이 엄청난 복을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흔히 노다지를 발견하거나 복권에 당첨되는 따위를 두고 복이 터졌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일확천금을 했다고 해서 진정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행복이 저 산 너머에 있다고 하기에 가 보았더니 거기서도 또 다른 산 너머에 있다고 하더라.는 시를 쓰기도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정의하기도, 찾기도 어렵다는, 솔직한 고백이 반영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이 누리는 복은 그런 돌발적인, 한번 반짝하는 식의 복이 아니며, 평소의 일상생활에서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중에도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꾸준히 누리는 복입니다.
  그것은 평생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녀도 결국 손에 붙잡지 못할 공허한 꿈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주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붙들고 평생토록 누릴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복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그런 복을 누리게 됩니다.

  '복 있는 자는 자기 정욕대로 마음껏 방탕하게 향락을 즐기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교훈과 경계로 삼아서 세상의 온갖 악하고 더러운 것들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내는 데서 행복감을 맛볼 줄 아는 '경건한 성도입니다.
  '복 있는 자는 타고난 천재나 미인이나 재사나 부자가 아니라, 그 말씀을 생활에서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그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게 되는 '신행일치의 신자입니다.
  또한 진짜 '복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상류사회의 클럽에, 고위층의 명단에, 역사적인 위인의 명단에 들게 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성경의 약속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함으로써 마지막 날에 저 완전무결한 천국의 회중에 들어가게 될 '구원 받은 택자인 것입니다.
  실로 이 성경중심으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이미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사람들일 뿐 아니라 앞으로 이보다 더 큰 복까지 남아 있는 '복덩어리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성경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함으로써, 온갖 죄악의 유혹을 이겨내고 거룩한 길을 지키며, 적게 받은 것을 불평하는 대신에 자기 달란트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악인들로부터 당하는 상처와 핍박 중에도 낙심치 아니하고 끝내 저 영원한 행복자들의 자리에까지 함께 가게 되는, 실로 '복 있는 경향의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