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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라 (요한복음 4:27-35)
사마리아 땅 수가라는 마을, 따가운 햇살로 인적 드문 낮 12시.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쉬고 있거나 집안에서 식사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 향해 걸어갑니다. 그 우물은 옛날부터 “야곱의 우물”이라 불려오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가는 마을 사람들이 매일 최소한의 사회적인 교제를 나누는 장소입니다. 서로의 일상사를 묻기도 하고 자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동네의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수집할 수도 있는 장소입니다. 때문에 마을 아낙네들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 시원한 시각이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물가에 모여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왕래가 없이 조용한 이 시각을 기다린 그녀에게는 깊은 사연이 있어 보입니다. 알고 보니 무려 다섯 남편과 헤어져야 하는 아픈 과거가 있는 여자입니다. 아무리 정식 결혼이라 해도 3번 이상은 수치스런 일입니다. 더욱이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정식으로 결혼한 남편도 아닙니다. 믿고 사랑하는 대상이 자꾸 달라졌습니다.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서로 의지하는 인생의 반려자가 바뀐 겁니다. 그 정서적 손상은 얼마나 컸겠으며 그 상처는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더욱이 수가 마을 사람들은 이 여인을 gossip 거리로 전락시켜버립니다. “한두 번까지는 동정하겠는데 사내를 다섯 번이나 갈아 치웠으니 저 여자에게 더 큰 문제가 있는 거야!”이 여인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눈을 흘기면서 상종을 꺼립니다. 교제의 단절! 남편의 버림을 받고 사회의 버림까지 받게 되니 이 여인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물가를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퍽이나 외로워 보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따돌림 받은 상처, 이웃과 벽을 쌓고 살아가야하는 아픔으로 그녀의 눈동자와 얼굴에는 이미 생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녀의 어깨는 고달픔의 무게로 축 쳐져 보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조차도 내리누르는 그녀의 무거운 짐을 결코 가볍게 해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물을 찾는 그녀가 목말라한 것은 사실 육신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아파하고 신음하는 그녀의 영혼입니다. 여러분 느낄 수 있으십니까? 이 기갈 들린 영혼의 고통을!
그렇게 도착한 우물가에는 한 낯선 청년이 앉아 있습니다. 오랜 여행 때문인지 지쳐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 낯선 청년이 “물 좀 주시오”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흠질 놀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의 행색과 말투를 미루어 보니 분명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마을에 들어 온 것도 흔한 일이 아니지만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 말을 건넨 것도 의외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유대인을 사마리아 사람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은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종교적, 사회적으로는 담을 쌓고 사는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벽을 뛰어넘고 있는 이 낯선 청년은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이상한 그의 태도는 계속됩니다. 분명히 조금 전에 물 좀 주시오 하던 사람이 이제는 도리어 자기가 생수를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가 묻습니다. “아니 당신에게는 물을 길을 그릇조차 없는데 무슨 수로 이 깊은 우물물을 나에게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이 낯선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 “이 우물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며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니 그런 물이 있다면 나도 좀 주세요. 다시는 물 길러 올 필요가 없겠네요.”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약간은 빈정거림이 섞여 있습니다.
그때입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닙니까? 대화의 내용은 이제 도덕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인은 당황했습니다. 수치스런 과거가 들춰지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 사람은 남의 아픈 곳을 건드릴까? 참 싫다. 그녀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제게는 남편이 없어요.” 말합니다. 그 때 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는 더 기막힌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다.” “아니, 나를 다 알고 있는 이 낯선 유대 청년!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나하나 짚어 오시는 이분은 하나님의 선지자임에 틀림없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된 이 여인은 이제 신앙적이고 영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종교를 비교합니다. 두 종교가 주장하는 하나님 만나는 장소가 다르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자 이 유대 청년은 놀라운 말씀을 들려줍니다. 21-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임했다. 새 시대가 도래했다. 아버지가 그러한 자들을 찾아다니고 계신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인은 그 같은 일은 메시아가 오셔야만 벌어질 수 있다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이 선지자는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드러냅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절)”
여러분! 그녀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을 찾아오신 겁니다! 주위 모든 사람이 이 여인을 피하고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여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목마른 인생을 살 필요 없도록 생수까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꺼이 받아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평생 처음 자신의 전 인격이 받아들여지고 용납되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우리를 꺼려하고, 배척하며 심지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끄럽고 자격 없는 우리들을 귀하게 받아주십니다. 지워 버리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우리의 수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괜찮다 하시며 찾아오십니다. 벗으려야 벗을 수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님은 맡아 주마하시며 다가오십니다. 지금까지 목말라하던 그녀의 영혼이 일시에 해갈됩니다. 얼굴에는 생기가 돕니다.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감사 찬양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수가성의 회심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만나 회심한 경험이 있습니다. 혹시 갑작스런 질병으로 자신의 생명이 꺼질지도 몰라 불안해하다가 기적같이 고쳐주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잘 자라던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한테 반항하고 신앙마저 버린 것 같아 속을 푹푹 썩였는데 언젠가부터 다시 건전하게 생활하도록 역사하신 주님의 손길을 경험한 분도 계십니다. 사업에 완전히 실패하여 캄캄한 낙오자가 된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 재기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을 만난 분도 계십니다. 이 수가성 여인처럼 사회와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는 것 같은 괴로운 삶을 살다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신 분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평소 좋아하던 친구의 권유로 교회생활을 시작했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참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된 분도 계십니다. 어떤 설명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했는데 성경을 읽다가 그 모든 고민이 일순간에 풀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분도 계십니다. 또한 나름대로 성경도 읽고 성실하게 교회 봉사를 하다가 어느 날 기도 중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헌신하는 분도 이 자리에는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소위 남들이 말하는 특별한 체험은 없어도 말씀 공부하다 보니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깨닫고 잔잔하면서도 꾸준히 주님을 섬기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참 다양하게 우리는 주님을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외로운 인생길에 우리는 결코 고아와 같이 내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도 없이, 주변에 함께 하는 이도 없이 아이 혼자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 속에 남게 되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하지만 부모님과 같이 함께 관광지 동굴에 들어갔다 오면 평생 가장 재미난 추억거리가 될 겁니다. 여러분, 밀폐되고 갇힌 것 같은 인생길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사실 두렵지 않습니다. 저 시 23의 다윗의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걷는 인생길은 아무리 캄캄할지라도 흥미진진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무슨 일을 보여주실 지 기대마저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실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털까지도 헤아린바 되셔서 나의 약점과 단점도 잘 알고 계시고 나를 진심으로 위하며 나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돕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기도해야 좋을지 잘 모를 그 때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대신 기도해 주고 계시는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경험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과 상관없이 참 외로운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책임져야할 짐들로 인해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꼼짝없이 갇혀 낭패를 당하는 순간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누구도 돌봐주지 않습니다. 꼭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이런 분들도 우리가 누리는 복을 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가만히 있질 않았습니다. 28절을 보니 여인은 이고 온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아예 달려갑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달되어 온 생수로 인해 마음의 항아리가 차고 넘치니 머리에 이고 간 항아리가 더 이상 의미 없어졌는지 모릅니다. 그 동안 마음 텅 빈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녔습니다. 이제는 도리어 먼저 사람들을 만나 담대하게 말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절).”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다닙니다. 사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만나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할 수는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아, 내 인생을 바꾸어 놓으신 예수님을 와서 보시오! Come and See!” 그녀를 일찍부터 알아 온 수가성 사람들은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이 여인의 얼굴에 생기를 가져다주었는가?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인생이 살맛나는 것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했을까? 사람들은 궁금하기도 했을 겁니다. 30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예수님께로 몰려오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 이 장면은 장엄하기조차 합니다. 수가성 한 한 여인의 회심이 곧장 수가성 다른 사람들의 회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조직신학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영혼을 품고 언젠가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도 이 여인처럼 사람들을 찾아가 오는 5월 27일에 열리게 되는 높은뜻 축제에 한번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서울 경기 강원 충청 경상 전라도 일원에서도 몰려 온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 회심하게 된다면! 오! 이런 대 회심의 역사가 오는 5월 27일 생명축제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천국잔치일 겁니다. 눅 15:10에 의하면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저 영혼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힘듭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때는 우리가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나아오는 수가성 사람들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35절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자연법칙에 의하면 예수님 주변의 밭은 적어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모양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밭은 지금이 추수할 때입니다. 빨리 거두어들이라고 제자들에게 촉구하십니다.
한반도에는 순교의 피를 통해 복음의 씨가 뿌려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 손으로 거둘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 영혼이 누구입니까? 우리와 함께 높은뜻 가족이 되어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함께 감당해갈 우리의 예비 가족은 누구이겠습니까? 주위에 한 영혼 한 영혼 살피는 한 주간되시길 축원합니다.
출처/이장호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