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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하는 삶이 아름답다. (히 12:1-2)
1992년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 미국에서 목회하시던 선배 목사님이 한국에 나오셔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셨는데 그 때 한국의 청소년 아이들이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를 신고 다녀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보도를 보신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놀라셔서 물으셨습니다. ‘김 목사. 정말 한국의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운동화들을 신고 다녀?’
저는 그때 아이들이 그런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운동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우리 집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비싼 운동화가 다 있냐?’ 아이들은 무슨 표 농구화가 그렇게 비싸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 학교에도 그런 신발 신고 다니는 놈들이 있냐?’ ‘우리만 빼놓고는 다 신어요.’ ‘너희들은 왜 사달라고 하지 않았냐?’ ‘사달라고 해보았자 안 주실 터인데요 뭐.’ 그런 대화를 하며 웃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신발 사 달라고 조르지 않아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쓰면서 왜 그런 신발을 신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설명은 간단했습니다. ‘쓸 데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때가 마침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였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기 전 황 선수의 소속사인 회사에서 약 일억 원 정도를 들여 황선수의 발에 맞는 운동화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황영조 선수가 일억 원짜리 운동화를 신는 것은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쓸 데 있다.’ 필요하면 일억 원 짜리 운동화도 괜찮고, 쓸 데 없으면 10만 원짜리 운동화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들이 10 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이냐 아니면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냐? 그냥 단순히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거라.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란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으면 신발을 자랑하겠니? 내가 10만 원짜리가 안 되니까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니? 너희들은 신발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의 사람됨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거라. !!!...’
큰 아이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친구 집을 다녀오더니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아빠, 친구집에 다녀왔는데요. 되게 잘 살아요.’ 자가용이 두 대나 있고, 텔레비전 카메라로 경비를 하는 집을 보고 와서 제게 한 말이었습니다. 저는 말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쓰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말이 정확해야 생각이 정확해 지고, 생각이 정확해야만 삶이 정확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아이가 가장 중요한 말을 잘못 쓰고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친구 집을 다녀와서 아이가 해야 할 정확한 표현은 ‘되게 부자에요.’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것을 ‘되게 잘 살아요.’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그냥 잘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못 사는 사람이라도 표현합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그냥 돈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잘 사는 사람과 부자는 동의어가 아니고 못 사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도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철학의 빈곤입니다. 아니 부재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문제는 소유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치의 문제입니다. 소유가치가 높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청년 때 감동적으로 본 영화중에 마이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마라톤 선수입니다. 올림픽이었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정도의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력이 있으리만큼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아들 셋이 있는데 그 중 한 아들이라도 자기 뒤를 이어 마라톤 선수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들들은 그와 같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꽤 나이가 들어 주인공이 다시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많은 연습을 한 후 경기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경기 중 몇 번이나 쓰러집니다. 쓰러질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화면 가득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주인공은 다시 일어나 달립니다.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겠다는 집념이 클로우즈엎 되어 나타납니다.
그때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그 영화의 주제가가 흘러나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그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저럴때 아름답다.” 제가 제일 먼저 쓴 책 중에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은 그와 같은 감동 속에 만들어 진 것이었습니다.
청소년 때 저희들은 참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크리스마스때 친구에게 보낼 카드 몇 장 사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카드는 인쇄된 카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그린 카드였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친구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카드를 만들었었습니다. 그 때 우리와 같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레인코트의 깃을 세우고 혼자 주머니에 손을 푹 질러 넣고 낙엽이 떨어진 길을 홀로 걸어가는 그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림 옆에는 반드시 ‘나그네’ 혹은 ‘방랑자’와 같은 멋있는 글이 적혀져 있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었습니다. 그러나 마이웨이라는 영화를 본 후 제 생각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앞에서 잘 사는 것은 소유가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건강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는 정직히 말씀드려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도 부자와 건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소유가치는 얼마든지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는 절대로 존재가치를 높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존재목적에서 나옵니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목적대로 존재할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크의 가치는 마이크의 목적대로 존재해야만 발생되고 유지됩니다. 고장이 나서 모양을 멀쩡한데 소리가 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목적대로 존재하지 못하게 되면 그날로 가치는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가치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연봉이 얼마냐? 무슨 자동차를 타느냐?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강남에 사느냐?’가 문제가 되지만 존재가치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와 같은 것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목적대로 존재하고 있느냐 없느냐만 문제가 될 것입니다.
릭 워렌이라는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쓰셨습니다. 목적대로 존재하는 삶을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목적에 이끌려 살 때만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만 합니다. 목적에 이끌려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로 부터 말미암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케 한 이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시계의 존재 목적은 시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시계를 만든 사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의 존재목적은 제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존재목적은 저를 존재케 한 분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창조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창조주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잘 사는 것이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청년 여러분들보다는 제법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경험적으로 이야기하면,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와 같은 생각은 옳았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언제나 실상과 증거로 나타납니다. 저는 제 삶의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사는 삶이 옳았다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있다는 것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과론은 과학의 기본공리입니다. 우리는 신 즉 하나님을 제일 원인이라고 부릅니다. 제일 원인이 창조주입니다.
장로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일 첫 장 첫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은 다 알아도 절대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없으니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이 없어짐으로 경주할 수 없습니다.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렇게 노래하며 삽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다른 것을 몰라도 자기가 누구인가는 분명히 압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어디고 가야하는지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왔는지도 압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위하여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인 소명을 향하여 넘어져도 일어서고 넘어져도 일어서서 끝까지 달리는 경주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삶의 경주가 우리의 삶과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훌륭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자주 타는 편입니다. 비행기를 많이 탔지만 비행기를 타고 한번도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비행기를 조정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행기는 조정사가 조정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비행기를 조정 하려고 조정 간을 잡는 순간 비행기는 추락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나는 비행기를 조정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행기는 조정사가 조정하는 것이 옳고,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비행기는 조정사에게 조정하도록 맡기는 것이 옳고,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한 가지 더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셔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세상과 자신의 조정 간을 잡으려고 하면 세상과 인생은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비행기 조정은 그래도 훈련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의 조정은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텔레비전에서 슈퍼 맨 혹은 아톰과 같은 만화 영화가 상영되면 그 다음 날 골목에 모가지에 보자기를 맨 아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훗날 여러분들의 아이가 목에 보자기를 묶고 날아다니면 아파트 배란다 문을 잠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나는 아톰이다.’라는 말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아톰이라는 놈이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분이나 그 놈이 그 분입니다.
나폴레옹이 살던 궁전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마다 나폴레옹의 커다란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때 자세히 보니 그 어른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있더군요.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유능하고 천재적인 사람이 어떻게 자기 인생에서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생과 사의 선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네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네 마음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서구에는 사탄교라는 교가 있답니다. 토론토에서 신학을 한 전도사님 한 분이 전에 저에게 사탄교의 바이블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사탄경 일장 일절은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고 우리를 유혹하던 그 사탄이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희를 안내하던 안내원이 조금 친해지자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김일성 수령님의 주체사상이나 기독교사상이 비슷하지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다.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참 매력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말과 같아 보이지 않으십니까?
불교는 인간적으로 볼 때 참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보다 훨씬 폭이 넓고 관대한 것 같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사찰 입구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프랑카드를 내 걸고 축하해 줄 줄 아는 너그러움을 가진 종교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석가탄일에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프랑카드를 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네가 곧 부처다’라는 사상 때문입니다. 제가 사탄의 사상이라고 생각하여 가장 경계하는 것은 주체사상과 네가 곧 부처다라는 사상입니다. 아주 근사하고 매력적인 사상 같아 보이나 사실은 우리를 실패로 사망으로 인도하는 사탄의 사상입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고 섬기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저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들의 사상과 신앙을 인정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옹졸하고 편협한 사람이라고 매도해도 그것은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저의 마지노선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달려있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여러분을 초청해 놓고 드리는 이 예배의 설교를 맡으면서 무슨 설교를 할까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평생 설교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니 여러분 마음에 드는 삼빡한 설교 한 편 하는 것 그다지 제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정직한 일이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좀 고리타분해 보인다고 하여도, 답답해 보인다고 하여도, 매력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여 진다고 하여도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올해 57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57살의 나이는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비상하려고 용쓰는 나이가 아니라 젊은이들과 후배의 길을 열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며 서서히 무대에서 내려오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뛰어난 사람도, 탁월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 뛰어나지 못함과 탁월하지 못함 때문에 아직도 약간의 컴플랙스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실력으로 살 수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능력 밖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제 삶에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그것은 참 쉽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쉽지 않은 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청년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청년이 되는 것은 싫어합니다. 다시 젊어졌다가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정말 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물어주지 않겠지만,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치 않고 ‘하나님’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그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과 인도를 따라 넘어져도 일어서고 넘어져도 일어서서 인생을 경주하듯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가지고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청년 여러분들을 보면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좋은 것만 주고 싶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가장 좋고 귀한 선물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를 젊어지고 싶어 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평생을 나그네처럼 방랑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인생을 경주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청년 때부터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삶의 푯대를 삼아 경주하듯 살아가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1992년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 미국에서 목회하시던 선배 목사님이 한국에 나오셔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셨는데 그 때 한국의 청소년 아이들이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를 신고 다녀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보도를 보신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놀라셔서 물으셨습니다. ‘김 목사. 정말 한국의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운동화들을 신고 다녀?’
저는 그때 아이들이 그런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운동화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우리 집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비싼 운동화가 다 있냐?’ 아이들은 무슨 표 농구화가 그렇게 비싸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 학교에도 그런 신발 신고 다니는 놈들이 있냐?’ ‘우리만 빼놓고는 다 신어요.’ ‘너희들은 왜 사달라고 하지 않았냐?’ ‘사달라고 해보았자 안 주실 터인데요 뭐.’ 그런 대화를 하며 웃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신발 사 달라고 조르지 않아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 편지를 쓰면서 왜 그런 신발을 신으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설명은 간단했습니다. ‘쓸 데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때가 마침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였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기 전 황 선수의 소속사인 회사에서 약 일억 원 정도를 들여 황선수의 발에 맞는 운동화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황영조 선수가 일억 원짜리 운동화를 신는 것은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쓸 데 있다.’ 필요하면 일억 원 짜리 운동화도 괜찮고, 쓸 데 없으면 10만 원짜리 운동화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너희들이 10 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이냐 아니면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냐? 그냥 단순히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거라.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수치란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으면 신발을 자랑하겠니? 내가 10만 원짜리가 안 되니까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니? 너희들은 신발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의 사람됨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거라. !!!...’
큰 아이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 친구 집을 다녀오더니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아빠, 친구집에 다녀왔는데요. 되게 잘 살아요.’ 자가용이 두 대나 있고, 텔레비전 카메라로 경비를 하는 집을 보고 와서 제게 한 말이었습니다. 저는 말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쓰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말이 정확해야 생각이 정확해 지고, 생각이 정확해야만 삶이 정확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아이가 가장 중요한 말을 잘못 쓰고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친구 집을 다녀와서 아이가 해야 할 정확한 표현은 ‘되게 부자에요.’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것을 ‘되게 잘 살아요.’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자를 그냥 잘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못 사는 사람이라도 표현합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그냥 돈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잘 사는 사람과 부자는 동의어가 아니고 못 사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도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치명적인 철학의 빈곤입니다. 아니 부재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문제는 소유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치의 문제입니다. 소유가치가 높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치가 높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청년 때 감동적으로 본 영화중에 마이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마라톤 선수입니다. 올림픽이었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정도의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경력이 있으리만큼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아들 셋이 있는데 그 중 한 아들이라도 자기 뒤를 이어 마라톤 선수가 되기를 바랐지만 아들들은 그와 같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꽤 나이가 들어 주인공이 다시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많은 연습을 한 후 경기에 도전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경기 중 몇 번이나 쓰러집니다. 쓰러질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화면 가득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주인공은 다시 일어나 달립니다.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겠다는 집념이 클로우즈엎 되어 나타납니다.
그때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른 그 영화의 주제가가 흘러나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그때 나는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저럴때 아름답다.” 제가 제일 먼저 쓴 책 중에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다’라는 책이 있는데 그 제목은 그와 같은 감동 속에 만들어 진 것이었습니다.
청소년 때 저희들은 참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크리스마스때 친구에게 보낼 카드 몇 장 사는 것도 참 부담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카드는 인쇄된 카드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그린 카드였습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친구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카드를 만들었었습니다. 그 때 우리와 같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레인코트의 깃을 세우고 혼자 주머니에 손을 푹 질러 넣고 낙엽이 떨어진 길을 홀로 걸어가는 그림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림 옆에는 반드시 ‘나그네’ 혹은 ‘방랑자’와 같은 멋있는 글이 적혀져 있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었습니다. 그러나 마이웨이라는 영화를 본 후 제 생각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앞에서 잘 사는 것은 소유가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건강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는 정직히 말씀드려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중에도 부자와 건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안 믿어도 소유가치는 얼마든지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는 절대로 존재가치를 높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존재목적에서 나옵니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목적대로 존재할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크의 가치는 마이크의 목적대로 존재해야만 발생되고 유지됩니다. 고장이 나서 모양을 멀쩡한데 소리가 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목적대로 존재하지 못하게 되면 그날로 가치는 없어지게 되고 맙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가치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연봉이 얼마냐? 무슨 자동차를 타느냐? 몇 평 아파트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강남에 사느냐?’가 문제가 되지만 존재가치로 사람을 판단할 때 그와 같은 것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목적대로 존재하고 있느냐 없느냐만 문제가 될 것입니다.
릭 워렌이라는 목사님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쓰셨습니다. 목적대로 존재하는 삶을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목적에 이끌려 살 때만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그는 반드시 자신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야만 합니다. 목적에 이끌려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로 부터 말미암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케 한 이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시계의 존재 목적은 시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시계를 만든 사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의 존재목적은 제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존재목적은 저를 존재케 한 분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창조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 창조주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잘 사는 것이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청년 여러분들보다는 제법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경험적으로 이야기하면,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와 같은 생각은 옳았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언제나 실상과 증거로 나타납니다. 저는 제 삶의 실상과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사는 삶이 옳았다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그렇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결과가 있다는 것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과론은 과학의 기본공리입니다. 우리는 신 즉 하나님을 제일 원인이라고 부릅니다. 제일 원인이 창조주입니다.
장로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일 첫 장 첫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로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것은 다 알아도 절대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없으니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이 없어짐으로 경주할 수 없습니다.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이렇게 노래하며 삽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다른 것을 몰라도 자기가 누구인가는 분명히 압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어디고 가야하는지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왔는지도 압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위하여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인 소명을 향하여 넘어져도 일어서고 넘어져도 일어서서 끝까지 달리는 경주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삶의 경주가 우리의 삶과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훌륭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자주 타는 편입니다. 비행기를 많이 탔지만 비행기를 타고 한번도 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비행기를 조정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비행기는 조정사가 조정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비행기를 조정 하려고 조정 간을 잡는 순간 비행기는 추락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나는 비행기를 조정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비행기는 조정사가 조정하는 것이 옳고,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비행기는 조정사에게 조정하도록 맡기는 것이 옳고,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한 가지 더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정하셔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세상과 자신의 조정 간을 잡으려고 하면 세상과 인생은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비행기 조정은 그래도 훈련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와 세상의 조정은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텔레비전에서 슈퍼 맨 혹은 아톰과 같은 만화 영화가 상영되면 그 다음 날 골목에 모가지에 보자기를 맨 아이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훗날 여러분들의 아이가 목에 보자기를 묶고 날아다니면 아파트 배란다 문을 잠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나는 아톰이다.’라는 말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아톰이라는 놈이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분이나 그 놈이 그 분입니다.
나폴레옹이 살던 궁전을 구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방마다 나폴레옹의 커다란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때 자세히 보니 그 어른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있더군요.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유능하고 천재적인 사람이 어떻게 자기 인생에서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속에는 생과 사의 선택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네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네 마음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서구에는 사탄교라는 교가 있답니다. 토론토에서 신학을 한 전도사님 한 분이 전에 저에게 사탄교의 바이블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사탄경 일장 일절은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다.’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고 우리를 유혹하던 그 사탄이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희를 안내하던 안내원이 조금 친해지자 어느 날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김일성 수령님의 주체사상이나 기독교사상이 비슷하지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다.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참 매력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이 되라는 말과 같아 보이지 않으십니까?
불교는 인간적으로 볼 때 참 매력적인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보다 훨씬 폭이 넓고 관대한 것 같습니다. 성탄절이 되면 사찰 입구에 ‘기쁘다 구주 오셨네’ 프랑카드를 내 걸고 축하해 줄 줄 아는 너그러움을 가진 종교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석가탄일에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프랑카드를 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네가 곧 부처다’라는 사상 때문입니다. 제가 사탄의 사상이라고 생각하여 가장 경계하는 것은 주체사상과 네가 곧 부처다라는 사상입니다. 아주 근사하고 매력적인 사상 같아 보이나 사실은 우리를 실패로 사망으로 인도하는 사탄의 사상입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고 섬기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나 저들과 함께 손을 잡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들의 사상과 신앙을 인정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옹졸하고 편협한 사람이라고 매도해도 그것은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저의 마지노선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달려있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생 여러분을 초청해 놓고 드리는 이 예배의 설교를 맡으면서 무슨 설교를 할까 많이 고민하였습니다. 평생 설교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니 여러분 마음에 드는 삼빡한 설교 한 편 하는 것 그다지 제게 힘든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를 하는 목사로서 정직한 일이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좀 고리타분해 보인다고 하여도, 답답해 보인다고 하여도, 매력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여 진다고 하여도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올해 57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57살의 나이는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비상하려고 용쓰는 나이가 아니라 젊은이들과 후배의 길을 열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며 서서히 무대에서 내려오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뛰어난 사람도, 탁월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 뛰어나지 못함과 탁월하지 못함 때문에 아직도 약간의 컴플랙스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제 실력으로 살 수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능력 밖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제 삶에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지만 그것은 참 쉽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 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쉽지 않은 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청년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가 청년이 되는 것은 싫어합니다. 다시 젊어졌다가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올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저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저는 정말 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물어주지 않겠지만,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치 않고 ‘하나님’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그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 분의 말씀과 인도를 따라 넘어져도 일어서고 넘어져도 일어서서 인생을 경주하듯 달려왔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가지고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청년 여러분들을 보면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좋은 것만 주고 싶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가장 좋고 귀한 선물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저를 젊어지고 싶어 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평생을 나그네처럼 방랑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인생을 경주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경주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청년 때부터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삶의 푯대를 삼아 경주하듯 살아가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