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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사모하라! (창 35:1-5, 요엘 1:4-9)
보통 사람의 경우 "컴퓨터의 대가"하면 빌 게이츠(Bill Gates)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들은 빌 게이츠를 '탁월한 사업가'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는 자신이 개발한 것은 없고 다른 사람이 개발한 것을 사들여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MS-Dos'의 경우도 팀 팬더스(Tim Panthers)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는데,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에서 사들여 판매해서 수익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라는 사람이 있는데, 컴퓨터를 좀 아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 말로 컴퓨터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정말 자기만의 실력으로 승부해서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를 처음으로 책상에 올려놓은 것도 잡스였고, 키보드가 아닌 마우스로 명령을 내리게 만든 것도 잡스였습니다. 또한 컴퓨터의 세련미를 주장하고 이를 접목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시대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실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실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흥"이야말로 신앙인으로써 반드시 경험해야 할 실력중의 실력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것은 "부흥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때 비로써 깨닫게 됩니다.
1.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부흥'이 실력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말할 때,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인 수가 증가하고, 교회 재정이 늘어나며, 교회 건물이 커지는 것을 부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부흥의 결과일 뿐 부흥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선교 초창기에 영적 대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해서 1907년에 평양에서 절정에 이른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영적 대각성은 1903년 선교사였던 하디 목사(R. A. Hardie)의 회개를 시작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디 목사는 당시의 다른 선교사들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경회를 하는 도중 이러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고, 이후 성도들 역시 죄를 고백하게 됨으로써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단순히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남을 훼방하는 일에 대한 회개 이외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질이나, 살인, 강간과 같은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의 수가 무수히 많았는데, 일본 경찰은 이러한 것을 이용해서 범인을 잡으려고 교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단순히 놀음을 한다거나, 남을 미워한다거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이런 죄가 아니라, 살인, 강간과 같은 큰 죄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회개한다는 것-그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러한 회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글이 있는데, 이글은 1904년 3월에 서울 잣골 교회(오늘의 자교교회)의 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집회였다. 죄의식이 너무나 깊어 온갖 추악한 죄들을 고백했고 훔친 재물들을 돌려주었다. 우리 교인 대부분은 처음으로 죄가 어떤 것이고 죄사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 집회 결과로 참석했던 사람들은 새 삶을 살게 되었고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집회를 통하여 우리가 확신한 바는 성령께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현재의 구원을 확신하고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부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증거를 통해서 교인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그것은 부흥의 이차적인 결과에 불과합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임재하는 것을 경험하고 자신의 잘못된 삶을 자복하며 회개할 때 일어나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1903년부터 시작해서 1907년에 절정에 이르렀던 대각성 운동의 결과를 통해서도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묻습니다. 1907년 대각성 운동이후 교인의 수가 증가했을까요? 아니면, 줄어들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인의 수가 증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1896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인수가 4,356명에서 1907년에는 106,287명으로 증가하여 10년 사이에 25배나 증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07년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교인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당시 대각성 운동은 정치와는 무관한 신앙운동으로 이루어졌었는데, 그 당시 교회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각성 운동이 이미 믿는 자들의 회개와 신앙갱신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됨으로써 교회로부터 정치적인 힘을 얻으려고 했던 일련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교인수가 느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부흥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흥을 히브리어로 "하야흐"라고 하는데, "숨 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으로 호흡하기 힘든 상태 있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산소호흡을 시켜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시 산다, 부활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 에스겔이 마른 뼈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뼈가 소리를 내며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어지면서, "생기야 이 사망을 당한 사람에게 들어가라"고 외칠 때, 그제야 죽어 있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극히 큰 부대를 이루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로 '소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생명수가 흘렀는데 그 양쪽 언덕에 생명나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로 인하여 그 나무들이 살고, 또 생명수가 흐르는 곳에 고기들이 살아나고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에 바닷물이 소성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영적인 숨을 쉬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소생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러한 부흥의 역사가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 시대야말로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교회가 부흥을 양적인 성장으로만 이해하고는 개인의 영적각성, 교회의 영적 각성에는 힘을 쓰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양적인 성장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하며 쓰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부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2. 과연 이 시대는 부흥을 갈망해야 할 때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시대야 말로 부흥을 갈망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이 시대야 말로 죄로 물든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써의 온전한 삶을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죄악된 요소가 있고, 그러한 죄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죄악된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과연, 이 나라에 소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미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단언하는데, 만약, 지금 우리의 모습 이대로 살아간다면, 결단코 우리에게는 소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암울한 상황만이 놓여질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흥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부흥이야말로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도, 그것을 보수적인 신앙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부흥회라는 것을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효과는 일시적인 뿐입니다."
그러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은 땀으로 더러워졌을 때 목욕을 하지요?
그러나, 목욕도 역시 일시적인 효과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기 때문에 자주 목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흥이 필요한데도 부흥을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흥은 오늘날과 같이 형제애가 메말라 갈 때 말해야 합니다. 불화가 싹틀 때 말해야 합니다.
시기와 다툼, 사악한 말들이 오갈 때, 부흥을 말해야 합니다. 불법이 성행할 때, 부흥을 말해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가 어느 때, 부흥을 말했습니까?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심판 받을 때 부흥을 말했습니다. 요엘서 1장을 보면, 메뚜기의 재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요엘서 1장 4절로 9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한 이족(異族)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같이 할찌어다. 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데까지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설명 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아무런 희망이 없던 시대가 바로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질의 있고 없음이 사람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비전보다는 돈을 더 중시합니다. 본질과 본질 아닌 것이 혼돈된 상태로 있는 상황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현주소입니다.
본질은 덮어두고 말꼬리나 잡고 시비나 걸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지 내면이 어떠한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 양육 문제를 놓고 보면, 좀더 명확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문제로 인해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왜 힘들어 합니까? 지나치게 경쟁의식이 팽배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경쟁이지 목숨을 건 전투와도 같습니다. 내가 이기지 못하면 죽습니다. 내 자녀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의 사랑하는 자녀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으니 아이들을 달달 볶는 것 아닙니까?
신앙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전의 시대보다 더 심각한 암흑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뉴 에이지적 사상에 지배를 받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식어질 때로 식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양육 받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의 몸과 영혼을 망치는 '자살 사이트'와 '음란 사이트'와 같은 불건전한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살아왔으니 가정이라고 해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통계에 따르면 금세기 들어 이혼율이 70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100%가 아닙니다. 700%입니다. 또한, 미국의 경우 18세 미만 청소년들 1,300만 명 이상이 편부모 슬하, 혹은 양부모가 다 없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으며, 교정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전체 소년 소녀의 70%가 아버지 없는 가정 출신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개인의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으며, 가정은 더 이상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고, 그뿐 아니라 문제 앞에서도 속수무책인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빠진 한 사람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만을 보면 야곱에게 있어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 말씀 이전의 야곱의 삶을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야곱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야곱을 생각하면서 그가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4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속에 물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세겜에 정착한 이후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형 에서와 화해케 함으로써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형 에서가 여전히 자신을 해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했던 것이 에서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오히려, 야곱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형의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여전히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에서의 진심을 받아드릴 만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일 많이 있지요? 인간관계속에서 트러블(trouble)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변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지 자신에게 없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방만 변하면 될 것 같습니까? 아니요! 내가 변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형 에서가 변화되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고향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하면서까지 세겜 땅에 머물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고향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딸 디나가 세겜에게 겁탈 당했습니다. 많은 성경 해석학자들은 딸 디나가 겁탈 당한 사건을 보고 해석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죄에 대한 심판일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했던 것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야곱의 영적 침체는 단지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 속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려고 했던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정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의 가정이 어떠해야 정상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축복된 삶을 살아온 사람의 가정으로써 하나님 중심,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드라빔을 훔쳐 나온 라헬을 보세요. 당시 드라빔은 가정을 지키는 일종의 우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드라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상속권이 주어졌는데, 라헬이 이것을 가지고 나온 것은 그만큼 우상의 능력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보다 더 큰 영향도 있습니다. 바로 시므온과 레위가 누이동생 디나의 원수를 갚아주는 방법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쓴 계책이 무엇입니까?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고 그들이 아파할 때, 공격하여 모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더라면, 야곱은 결코 주변에 있던 족속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변 족속을 두려워했고 두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결국, 야곱의 두 아들 역시 신앙으로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흥케 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침체기에 있을수록 버리지 않고 오히려 찾아와 위로해주시고 만져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영적 침체기에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을 수 없고, 찬양을 해도 무덤덤하며, 봉사를 해도 기쁘지 않은 성도가 있습니까? 이런 분들이 있다면, 깨달으세요. 바로 이런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침체기에 놓여져 있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만약, 우리가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해결책만을 찾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방법을 찾게 됩니다.
프랭크 다마지오(Frank Damazi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어떤 방법이든지 다 사용하려고 하는 것 같다. 초자연적 사고 구조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낯선 것으로 회피되어 왔다. 이 세대는 기독교 신앙을 '어마어마한 거짓말' 혹은 '고상한 사기' 정도로 여긴다. 우리 문화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경을 전설쯤으로 평가절하하고, 천국과 지옥을 하나의 신화 정도로 생각하면서 영원에 관한 일들을 거부한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에 얽매어 있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문제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해결 방법을 해보고 난 후, 안 되면 그제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옵니다. 하기야, 오늘의 현실 속에서는 이정도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습관이 우리 몸에 베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세상의 방법으로 내 삶을 계획해 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하바국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반드시 부흥은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흥은 양적인 성장이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내 삶 속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내 뜻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려내고자 결단하는 것-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은 한낱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혼이 영적 암흑기에 놓여져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삶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암흑기에 놓여졌던 야곱을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영혼에게, 부흥을 사모하는 심령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메말라 있던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넘쳐나, 부흥을 실력으로 만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성서교회 설교 자료 중에서
보통 사람의 경우 "컴퓨터의 대가"하면 빌 게이츠(Bill Gates)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들은 빌 게이츠를 '탁월한 사업가'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빌 게이츠는 자신이 개발한 것은 없고 다른 사람이 개발한 것을 사들여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MS-Dos'의 경우도 팀 팬더스(Tim Panthers)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었는데,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에서 사들여 판매해서 수익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스티브 잡스(Steve Jobs)라는 사람이 있는데, 컴퓨터를 좀 아는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 말로 컴퓨터 전문가라고 말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정말 자기만의 실력으로 승부해서 성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를 처음으로 책상에 올려놓은 것도 잡스였고, 키보드가 아닌 마우스로 명령을 내리게 만든 것도 잡스였습니다. 또한 컴퓨터의 세련미를 주장하고 이를 접목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시대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실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실력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부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흥"이야말로 신앙인으로써 반드시 경험해야 할 실력중의 실력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이것은 "부흥이란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때 비로써 깨닫게 됩니다.
1.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아마도 "'부흥'이 실력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말할 때,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인 수가 증가하고, 교회 재정이 늘어나며, 교회 건물이 커지는 것을 부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부흥의 결과일 뿐 부흥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선교 초창기에 영적 대각성을 경험하게 됩니다.
1903년에 원산에서 시작해서 1907년에 평양에서 절정에 이른 부흥운동이었습니다.
영적 대각성은 1903년 선교사였던 하디 목사(R. A. Hardie)의 회개를 시작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디 목사는 당시의 다른 선교사들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사경회를 하는 도중 이러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고, 이후 성도들 역시 죄를 고백하게 됨으로써 영적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단순히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남을 훼방하는 일에 대한 회개 이외에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질이나, 살인, 강간과 같은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사람들의 수가 무수히 많았는데, 일본 경찰은 이러한 것을 이용해서 범인을 잡으려고 교회로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단순히 놀음을 한다거나, 남을 미워한다거나, 거짓말을 했다거나 이런 죄가 아니라, 살인, 강간과 같은 큰 죄를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회개한다는 것-그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러한 회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글이 있는데, 이글은 1904년 3월에 서울 잣골 교회(오늘의 자교교회)의 부흥회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집회였다. 죄의식이 너무나 깊어 온갖 추악한 죄들을 고백했고 훔친 재물들을 돌려주었다. 우리 교인 대부분은 처음으로 죄가 어떤 것이고 죄사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 집회 결과로 참석했던 사람들은 새 삶을 살게 되었고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집회를 통하여 우리가 확신한 바는 성령께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현재의 구원을 확신하고 증거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부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증거를 통해서 교인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그것은 부흥의 이차적인 결과에 불과합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임재하는 것을 경험하고 자신의 잘못된 삶을 자복하며 회개할 때 일어나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1903년부터 시작해서 1907년에 절정에 이르렀던 대각성 운동의 결과를 통해서도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한 가지 묻습니다. 1907년 대각성 운동이후 교인의 수가 증가했을까요? 아니면, 줄어들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교인의 수가 증가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1896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인수가 4,356명에서 1907년에는 106,287명으로 증가하여 10년 사이에 25배나 증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907년 대각성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교인의 수가 감소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당시 대각성 운동은 정치와는 무관한 신앙운동으로 이루어졌었는데, 그 당시 교회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각성 운동이 이미 믿는 자들의 회개와 신앙갱신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됨으로써 교회로부터 정치적인 힘을 얻으려고 했던 일련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교인수가 느는 것이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부흥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부흥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흥을 히브리어로 "하야흐"라고 하는데, "숨 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으로 호흡하기 힘든 상태 있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산소호흡을 시켜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시 산다, 부활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에 에스겔이 마른 뼈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 뼈가 소리를 내며 연결되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어지면서, "생기야 이 사망을 당한 사람에게 들어가라"고 외칠 때, 그제야 죽어 있던 시체가 벌떡 일어나 극히 큰 부대를 이루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로 '소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생명수가 흘렀는데 그 양쪽 언덕에 생명나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수로 인하여 그 나무들이 살고, 또 생명수가 흐르는 곳에 고기들이 살아나고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에 바닷물이 소성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영적인 숨을 쉬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소생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러한 부흥의 역사가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오늘 우리 시대야말로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교회가 부흥을 양적인 성장으로만 이해하고는 개인의 영적각성, 교회의 영적 각성에는 힘을 쓰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양적인 성장으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고 절망하며 쓰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고는 부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2. 과연 이 시대는 부흥을 갈망해야 할 때입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시대야 말로 부흥을 갈망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이 시대야 말로 죄로 물든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써의 온전한 삶을 살지 않고서는 도저히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죄악된 요소가 있고, 그러한 죄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죄악된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됩니까?
과연, 이 나라에 소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미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단언하는데, 만약, 지금 우리의 모습 이대로 살아간다면, 결단코 우리에게는 소망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암울한 상황만이 놓여질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흥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부흥이야말로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도, 그것을 보수적인 신앙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부흥회라는 것을 그리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효과는 일시적인 뿐입니다."
그러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은 땀으로 더러워졌을 때 목욕을 하지요?
그러나, 목욕도 역시 일시적인 효과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기 때문에 자주 목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흥이 필요한데도 부흥을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흥은 오늘날과 같이 형제애가 메말라 갈 때 말해야 합니다. 불화가 싹틀 때 말해야 합니다.
시기와 다툼, 사악한 말들이 오갈 때, 부흥을 말해야 합니다. 불법이 성행할 때, 부흥을 말해야 합니다.
요엘 선지자가 어느 때, 부흥을 말했습니까? 그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심판 받을 때 부흥을 말했습니다. 요엘서 1장을 보면, 메뚜기의 재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요엘서 1장 4절로 9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지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한 이족(異族)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같이 할찌어다. 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데까지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설명 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아무런 희망이 없던 시대가 바로 오늘날의 시대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질의 있고 없음이 사람의 판단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비전보다는 돈을 더 중시합니다. 본질과 본질 아닌 것이 혼돈된 상태로 있는 상황이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현주소입니다.
본질은 덮어두고 말꼬리나 잡고 시비나 걸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중시하지 내면이 어떠한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녀 양육 문제를 놓고 보면, 좀더 명확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녀문제로 인해 너무나 힘들어합니다. 왜 힘들어 합니까? 지나치게 경쟁의식이 팽배된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이 경쟁이지 목숨을 건 전투와도 같습니다. 내가 이기지 못하면 죽습니다. 내 자녀가 성공하지 못하면, 나의 사랑하는 자녀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으니 아이들을 달달 볶는 것 아닙니까?
신앙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전의 시대보다 더 심각한 암흑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뉴 에이지적 사상에 지배를 받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식어질 때로 식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양육 받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의 몸과 영혼을 망치는 '자살 사이트'와 '음란 사이트'와 같은 불건전한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살아왔으니 가정이라고 해서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통계에 따르면 금세기 들어 이혼율이 70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100%가 아닙니다. 700%입니다. 또한, 미국의 경우 18세 미만 청소년들 1,300만 명 이상이 편부모 슬하, 혹은 양부모가 다 없는 가정에서 자라고 있으며, 교정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전체 소년 소녀의 70%가 아버지 없는 가정 출신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개인의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으며, 가정은 더 이상 신앙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고, 그뿐 아니라 문제 앞에서도 속수무책인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 빠진 한 사람을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만을 보면 야곱에게 있어서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 말씀 이전의 야곱의 삶을 조금만 살펴보더라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야곱을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한 야곱을 생각하면서 그가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4장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세속에 물들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세겜에 정착한 이후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잘 살펴보면 야곱이 세겜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형 에서와 화해케 함으로써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세겜 머물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형 에서가 여전히 자신을 해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했던 것이 에서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까?
오히려, 야곱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을 향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형의 모습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여전히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에서의 진심을 받아드릴 만한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일 많이 있지요? 인간관계속에서 트러블(trouble)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변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문제가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지 자신에게 없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대방만 변하면 될 것 같습니까? 아니요! 내가 변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형 에서가 변화되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고향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하면서까지 세겜 땅에 머물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고향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딸 디나가 세겜에게 겁탈 당했습니다. 많은 성경 해석학자들은 딸 디나가 겁탈 당한 사건을 보고 해석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죄에 대한 심판일까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했던 것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야곱의 영적 침체는 단지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 속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려고 했던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정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의 가정이 어떠해야 정상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축복된 삶을 살아온 사람의 가정으로써 하나님 중심, 오직 하나님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며 살아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드라빔을 훔쳐 나온 라헬을 보세요. 당시 드라빔은 가정을 지키는 일종의 우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드라빔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상속권이 주어졌는데, 라헬이 이것을 가지고 나온 것은 그만큼 우상의 능력을 믿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보다 더 큰 영향도 있습니다. 바로 시므온과 레위가 누이동생 디나의 원수를 갚아주는 방법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쓴 계책이 무엇입니까?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고 그들이 아파할 때, 공격하여 모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더라면, 야곱은 결코 주변에 있던 족속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님을 알았기에 주변 족속을 두려워했고 두 아이를 나무랐습니다. 결국, 야곱의 두 아들 역시 신앙으로 자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부흥케 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침체기에 있을수록 버리지 않고 오히려 찾아와 위로해주시고 만져주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영적 침체기에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기도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깨달을 수 없고, 찬양을 해도 무덤덤하며, 봉사를 해도 기쁘지 않은 성도가 있습니까? 이런 분들이 있다면, 깨달으세요. 바로 이런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침체기에 놓여져 있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만약, 우리가 영적인 침체를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해결책만을 찾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방법을 찾게 됩니다.
프랭크 다마지오(Frank Damazio)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만 제외하고는 어떤 방법이든지 다 사용하려고 하는 것 같다. 초자연적 사고 구조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낯선 것으로 회피되어 왔다. 이 세대는 기독교 신앙을 '어마어마한 거짓말' 혹은 '고상한 사기' 정도로 여긴다. 우리 문화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성경을 전설쯤으로 평가절하하고, 천국과 지옥을 하나의 신화 정도로 생각하면서 영원에 관한 일들을 거부한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현실에 얽매어 있습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문제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해결 방법을 해보고 난 후, 안 되면 그제야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나옵니다. 하기야, 오늘의 현실 속에서는 이정도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습관이 우리 몸에 베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세상의 방법으로 내 삶을 계획해 나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부흥입니다. 하바국 선지자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반드시 부흥은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부흥은 양적인 성장이 아닙니다. 부흥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내 삶 속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내 뜻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드려내고자 결단하는 것-그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은 한낱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혼이 영적 암흑기에 놓여져 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삶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암흑기에 놓여졌던 야곱을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영혼에게, 부흥을 사모하는 심령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흥을 맞이할 준비를 하시길 바랍니다.
메말라 있던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가 넘쳐나, 부흥을 실력으로 만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성서교회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