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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하는 교회의 7가지 법칙 (행2장 37-42절)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옛날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맛이 간 것 같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한 세미나가 홍수처럼 넘치지만 홍수 때 마실 물이 더 없는 것처럼 세미나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교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프로그램은 많아지는데 자기를 드릴 줄 아는 십자가의 군병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요새 정치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많은 교단들이 정치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목회자에게 '정치하는 목사'라는 말은 모욕에 가까운 말입니다. 자기 교회는 돌보지 않고 교단 정치에 마음을 쏟으면 교회는 '굶주린 들판'이 될 것입니다. 정치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주는 폐해가 커지면서 요즘은 '필요악'이라고 인식하는 목사님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정치'보다 '정직'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최근에 지난 5년 간 분당에서의 목회를 반성해보았습니다. 목회는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며, 교회의 시대적 지역적 사명이 무엇이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성경 말씀에 의거하여 담대하고 정직하게 제시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그 점에서 담대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요새 하도 교회가 돈 문제로 말이 많으니까 저는 물질적 헌신의 중요성에 대해 "괜히 오해하면 어떡하나?" 하고 일체 침묵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이전을 앞두고도 그저 조용할 뿐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런 경우에는 건축 헌금을 작정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기겁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돈 얘기하지 말라!" 그 말은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헌신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돈 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일까요? '돈 얘기 하는 품위 없는 교회'에서 '작정하고 헌금하는 못난 교인'보다 '돈 얘기 한번도 안 듣고 헌신을 모르는 교인'이 진정 훌륭하고 품위 있는 교인일까요?
사실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집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을 가진 만큼 영적인 집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집은 크기를 원하면서 교회는 "클 필요가 뭐 있냐?"고 하고, 자기 집은 산뜻하게 인테리어 되기를 원하면서 교회는 "인테리어 할 필요가 뭐 있냐?"고 하고, 자기 집 마련은 마땅한 일이면서 교회 마련은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누군가 그 일을 위해 옥합과 같은 통장을 깨뜨리고 헌신하면 "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는가?"고 힐책하는 모습이 진정 정의로운 모습일까요?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이 행동으로 보여주면 성도들은 자연히 따라서 헌신할 텐데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저도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재작년 12월에 교회 건축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마이너스 통장에서 쓸 수 있는 한도에서 보름치 생활비만 남겨 놓고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자연히 따라올 줄 믿습니다." 그런데 자연히 따라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직하게 목회를 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모습을 탈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결코 교양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이 교양 있는 모습이라면 우리는 믿음과 교양을 모두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고, 우리 교회를 건강한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래서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처럼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7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구원받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찔림'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중요한 표시는 이 찔림에 있습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들에게 이런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동안 교회를 너무 사랑하지 못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가책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어찌할꼬?"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 찾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고, 자신에게서 찾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이 진정 영생을 가진 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모습인지에 대한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성도도 세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하며 노래방에 갑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흔들고 유행가를 하면 찔리니까 노래방에 가서 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런 모습은 문화를 이해하는 교양이 아니라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분도 망치는 것입니다. 찔리면 차라리 가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는 그런 타협적인 모습이 없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한 헌신에 대한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2.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간단하게 말하면 "구원받으라!"는 말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예수님을 부르고 영접하면 구원받는다 말씀입니다. 영접이 그처럼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공로보다 우리의 영접하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잘나지는 못했지만 대화할 때 항상 상대방을 받아들이면서 대화를 합니다. "아! 예! 그렇죠!" 그렇게 상대방을 영접하는 분들은 사람 앞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오늘날 미국 시민권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호를 받습니다. 미국이 강력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때로 죄를 지어도 구원의 확신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부족해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부족해도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의 변화될 앞날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삶에 큰 영향력을 주고, 어떤 풍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줍니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얼마 전에 "CEO가 되는 길"이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었습니다. 50명의 CEO(최고 경영자)를 집중 연구한 책인데, 그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믿음입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내가 나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을 때 반드시 성공의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넘칠 때 그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3.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40절에서 베드로는 구원의 소식을 전합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우리에게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제일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천국 시민권자가 된 성도가 바로 천국에 가지 않고 이 땅에 존재하는 제일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역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어떤 분은 좋은 소식은 잘 전하지 않고 나쁜 소식을 즐겨 전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졸다가 나쁜 소식이 들리면 눈이 번쩍 뜨이는 성도들이 많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매번 강단에서 "한국 교회가 썩었다!"고 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돌아다니는 나쁜 소식만 퍼다 성도들에게 먹입니다. 그런 얘기를 가끔 들으면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지!"하고 각성을 하게 되지만 너무 자주 들으면 그 영혼이 배가 고파서 결국 성도들은 하나씩 떠나게 됩니다. 나쁜 소식도 '반면교사'의 역할을 위해 가끔 전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가 주로 전해야 할 소식은 바로 좋은 소식입니다.
나쁜 소식은 열심히 전파하면서 복음은 전혀 전하지 못하지 못하는 자폐증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축복 받으면 무엇합니까? 감사가 없고, 복음 전파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겸양은 중요하지만 부끄러움은 버려야 합니다. 부끄러움이 별로 나쁜 것 같지 않지만 마귀가 그것을 이용해서 자폐증 성도로 만든다면 큰 문제입니다. "네가 무슨 기도야! 네가 무슨 전도야! 네 모습을 봐라!" 그 부끄러움이 우리의 열정을 약화시킵니다. 여러분! 복음 전파할 수 있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4.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날에 삼천 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사람들이 다 진짜 제자였다면 몇 년 되지 않아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1절에 나오는 '제자'는 원어로 그냥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한 무리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예루살렘 교회는 힘이 약화되고 오히려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더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 이후의 삶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났다고 교회가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진리지만 성경은 다수를 부정적으로 볼 때가 훨씬 많습니다. 숫자 놀음의 환상에 빠지면 안됩니다. 엉터리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숫자 아닙니까? 다수 좋아하다가 망한 기록이 바로 성경의 기록입니다. 사기치는 사람, 돈 떼먹는 사람, 복음을 팔아 장사하는 사람, 선거철에 나타나는 사람, 바람 피는 사람, 편하게 믿으려는 사람 등 온갖 군상들이 숫자의 그늘 밑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다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용기 있는 소수가 되고, 소신이 있는 소수가 되십시오. 쉽게 살려면 남들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려면 소수의 서러움도 감내하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고, 자신의 꿈과 비전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는 용기 있는 소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보다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제자를 더 원하십니다.
진짜 축복이 무엇입니까? 무리에 속하지 않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2절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을 줄 아는 성도였습니다. 뜨거운 가슴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냉철한 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많이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공부도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항상 시험 점수가 엉망입니다. "공부 좀 하라!"고 했더니 "복음 전파하고 철야 기도하느라고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만한 학생을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시험문제를 받아보고 아는 것이 없으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노라!(고전 2:2)"고 썼습니다. 교수님은 "잘 알았노라!"고 하며 빵점을 주었습니다.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입니다. 가르침을 잘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인격도 되어 있고, 태도도 되어 있고, 바른 신앙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성경 지식이 많아야 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삶이 가르침을 받을 줄 아는 삶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패션으로 삼지 말고 교회생활을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것입니다.
5.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42절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며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왜 '모이기를 힘쓰는 삶'이 중요합니까? 모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나 중심적 세계관'이 깨지는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고독의 영성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영성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영성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성숙하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님의식을 가지기보다 주인의식을 가지십시오. 구경꾼이 되기보다 일꾼이 되십시오. 감독만 잘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배우와 모든 스텝들이 다 잘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깊이 빠지면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발만 걸치고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몸은 편하겠지만 그런 모습이 어찌 복된 모습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전 아랍을 상대로 이긴 제 3차 중동전쟁은 6일만에 끝났습니다. 얼마나 빨리 이집트 소유의 거대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해 버렸는지 점령 속도가 탱크를 타고 지나가는 속도보다 빨랐다고 합니다. 어떻게 6일만에 아랍 연합국을 항복시킬 수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6일 안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사가 위태한 일이 있어도 주일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힘써 지키는 성도를 힘써 지켜주실 것입니다.
6. 서로의 짐을 나누기를 힘써야 합니다.
42절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떡을 뗐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지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서로 어려운 자들을 도왔습니다. 그처럼 선교하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솔직히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특별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사나?" 하고 걱정하며 미래를 대비해서 저축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 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 참 교회가 되고, 교인도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 참 교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을 피해 도망쳐 아둘람 굴에 숨었을 때 그에게 4백 명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22:2).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다윗 혁명 정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방위'를 우습게 압니다. 우리 교회 현수막 달아주는 한솔 애드컴 사장은 자기는 현역 출신이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높고 위험한 데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위' 출신이라고 합니다. 저도 80년대 중반 천호동 유흥가를 주름잡는 사람들이 대부분 방위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몸에 심하게 문신이 그려져 있어 방위로 간 것입니다. 여러분! 약하게 보이는 사람을 깔보지 마십시오. 약해 보이는 것이 더 강할 수 있고, 더 미래가 있을 수 있고, 거기에 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는 카리스마(칼 있스마!)가 있다! 누구는 카리스마가 없다!"고 합니다. 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칼이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칠까봐 사용을 조심하는 것일 뿐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칼을 가지고 누군가를 줄 세우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 본능에 생각 없이 편승해 "오! 우리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있어!"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왜소화시키는 모습은 부끄러운 무리의 모습입니다.
목회에서 성도들을 줄 세우고 목회하면 편합니다. 헌신의 자리를 항상 무리하게 마련해 놓고 헌신하는 사람과 헌신하지 않는 사람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헌신하는 사람을 앞세우면 카리스마는 저절로 형성됩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만 측근에 포진시키면 카리스마는 저절로 형성됩니다. 그런 술수가 없어도 순수하게 교회를 사랑하고 지도자를 존중해주면 얼마나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입니까?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기대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지도자를 존중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도 고등학교 때에는 칼을 품고 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격투기로 몸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다른 친구들이 알아서 기었습니다. 가끔 책상 윗판이 떨어져나간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이마로 두 조각 내고, 가로와 세로 6센티미터 되는 각목도 이마로 쳐서 부러뜨리고, 학교 대걸레 자루를 어깨에 쳐서 부러뜨리고, 두꺼운 콜라병 마개를 주먹으로 쳐서 따고 다시 주먹으로 쳐서 그 밑창을 박살내니까 "칼 있스마"가 자연히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심OO라는 친구가 자기는 중학교에서 날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와 붙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깡이 있고, 주먹을 날렸다고 해도 복싱으로 단련된 사람을 어떻게 당합니까? 투닥투닥 몇 초 되지 않아서 싸움이 끝났습니다. 다른 친구들 보는 데서 엄청나게 자존심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 시간 후에 그 친구가 전열을 정비해서 교련 시간에 M1 소총 개머리판을 들고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친구들의 외마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드는 순간 M1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개머리판을 막고 다시 투닥투닥 몇 초만에 싸움을 끝냈습니다. 아주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깡은 대단하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들 줄 세우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저는 잘 대우해 주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친구가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너무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돌아서서 얘기하고 자기는 앉아서 앞을 보고 내 말에 입만 움직였는데 선생님은 "최OO! 이리 나와!" 하면서 자기만 두들겨 팼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조폭을 은근히 대우해주면 그 조폭이 동네 양아치는 알아서 다 처리해주는 그런 현상이 고등학교 교실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삶을 생각해 보면 너무 비참할 뿐입니다. 강한 것을 자처하는 삶은 남는 것이 없는 삶입니다. 성격만 버립니다. 버려진 성격으로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이 전혀 없습니다. 강함을 추구해서 얻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싸움을 통해서 얻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얻어도 결코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상처뿐인 영광'이란 말이 맞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제가 1979년 교회를 나가고, 81년 주님을 알고, 84년 주님께 헌신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때 비로소 온유함의 축복을 찾았습니다. 인상도 놀랍도록 변했습니다.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카리스마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강한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다가 괜히 상처만 입지 마시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살펴주는 것이 진정 행복의 조건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7.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보이지 않는 부흥의 원천이었습니다. 기도는 어떤 프로젝트보다 중요하고 어떤 프로그램보다 중요합니다. 큰 교회에 비하면 우리 교회는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이 보잘것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더욱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길이 열리기를 바라겠습니까?
요새 교회 이전 후에 교회 부흥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쪽 머리는 아닙니다. 저는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이라는 말이 나오면 위축이 됩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기도하면서 하나씩 전략과 전술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순종하며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고 부흥하는 교회를 보셨습니까? 역사상 기도의 밑거름이 없이 교회부흥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의 밑거름이 주입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은 고민하며 밤을 새웁니다. 믿는 사람이 잠이 안 오는 것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할 기회를 주실 때 기도하면 그 기도는 더욱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번 교회 이전도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밤 12시 30분에 기도하러 교회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새벽 1시 15분쯤에 컴퓨터를 켰다가 지금 교회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해서 마음이 떨릴 때에는 기도하십시오. 다급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더욱 들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곧 잔금을 치러야 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합시다. 눈물 뿌려 기도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우리 교회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합시다.
갈등이 생길 때에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다 저 사람 문제로 보이면서 더 마음이 아프지만, 기도하면 내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신비한 평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고, 회개할 마음을 주고, 평안을 줍니다. 큰 문제가 있어도 우리에게 기도만 살아 있다면 그 문제는 반드시 축복의 산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초대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부흥하는 교회의 7가지 법칙을 살펴보았습니다. 항상 회개를 앞세우고,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며,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극 참여하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기도해줌으로 교회 부흥의 초석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 한국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옛날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맛이 간 것 같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한 세미나가 홍수처럼 넘치지만 홍수 때 마실 물이 더 없는 것처럼 세미나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교인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프로그램은 많아지는데 자기를 드릴 줄 아는 십자가의 군병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첫 사랑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요새 정치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도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많은 교단들이 정치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목회자에게 '정치하는 목사'라는 말은 모욕에 가까운 말입니다. 자기 교회는 돌보지 않고 교단 정치에 마음을 쏟으면 교회는 '굶주린 들판'이 될 것입니다. 정치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주는 폐해가 커지면서 요즘은 '필요악'이라고 인식하는 목사님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정치'보다 '정직'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최근에 지난 5년 간 분당에서의 목회를 반성해보았습니다. 목회는 교회가 무엇이고,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며, 교회의 시대적 지역적 사명이 무엇이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성경 말씀에 의거하여 담대하고 정직하게 제시해야 하는 것인데, 저는 그 점에서 담대하지 못했고,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요새 하도 교회가 돈 문제로 말이 많으니까 저는 물질적 헌신의 중요성에 대해 "괜히 오해하면 어떡하나?" 하고 일체 침묵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이전을 앞두고도 그저 조용할 뿐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런 경우에는 건축 헌금을 작정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기겁을 합니다. "교회에서는 돈 얘기하지 말라!" 그 말은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헌신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냥 "돈 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일까요? '돈 얘기 하는 품위 없는 교회'에서 '작정하고 헌금하는 못난 교인'보다 '돈 얘기 한번도 안 듣고 헌신을 모르는 교인'이 진정 훌륭하고 품위 있는 교인일까요?
사실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집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을 가진 만큼 영적인 집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집은 크기를 원하면서 교회는 "클 필요가 뭐 있냐?"고 하고, 자기 집은 산뜻하게 인테리어 되기를 원하면서 교회는 "인테리어 할 필요가 뭐 있냐?"고 하고, 자기 집 마련은 마땅한 일이면서 교회 마련은 마땅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누군가 그 일을 위해 옥합과 같은 통장을 깨뜨리고 헌신하면 "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는가?"고 힐책하는 모습이 진정 정의로운 모습일까요?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이 행동으로 보여주면 성도들은 자연히 따라서 헌신할 텐데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저도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재작년 12월에 교회 건축위원회를 구성했을 때 마이너스 통장에서 쓸 수 있는 한도에서 보름치 생활비만 남겨 놓고 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자연히 따라올 줄 믿습니다." 그런데 자연히 따라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직하게 목회를 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모습을 탈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결코 교양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이 교양 있는 모습이라면 우리는 믿음과 교양을 모두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성찰하고, 우리 교회를 건강한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래서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초대 교회처럼 영향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7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구원받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찔림'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중요한 표시는 이 찔림에 있습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들에게 이런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동안 교회를 너무 사랑하지 못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가책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어찌할꼬?"
문제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 찾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고, 자신에게서 찾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 우리의 모습이 진정 영생을 가진 자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의 모습인지에 대한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성도도 세상을 알 필요가 있다"고 하며 노래방에 갑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흔들고 유행가를 하면 찔리니까 노래방에 가서 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런 모습은 문화를 이해하는 교양이 아니라 분위기를 망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분도 망치는 것입니다. 찔리면 차라리 가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는 그런 타협적인 모습이 없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한 헌신에 대한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2.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간단하게 말하면 "구원받으라!"는 말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예수님을 부르고 영접하면 구원받는다 말씀입니다. 영접이 그처럼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공로보다 우리의 영접하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잘나지는 못했지만 대화할 때 항상 상대방을 받아들이면서 대화를 합니다. "아! 예! 그렇죠!" 그렇게 상대방을 영접하는 분들은 사람 앞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구원의 축복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천국의 시민권자입니다. 오늘날 미국 시민권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호를 받습니다. 미국이 강력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은 미국 시민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 가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때로 죄를 지어도 구원의 확신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부족해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부족해도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신의 변화될 앞날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이 삶에 큰 영향력을 주고, 어떤 풍파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을 줍니다.
믿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얼마 전에 "CEO가 되는 길"이라는 베스트 셀러가 있었습니다. 50명의 CEO(최고 경영자)를 집중 연구한 책인데, 그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믿음입니다.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내가 나에 대한 믿음을 배반하지 않을 때 반드시 성공의 길은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넘칠 때 그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3. 열심히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40절에서 베드로는 구원의 소식을 전합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우리에게 베드로처럼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제일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아 천국 시민권자가 된 성도가 바로 천국에 가지 않고 이 땅에 존재하는 제일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역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입니다. 어떤 분은 좋은 소식은 잘 전하지 않고 나쁜 소식을 즐겨 전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졸다가 나쁜 소식이 들리면 눈이 번쩍 뜨이는 성도들이 많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매번 강단에서 "한국 교회가 썩었다!"고 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돌아다니는 나쁜 소식만 퍼다 성도들에게 먹입니다. 그런 얘기를 가끔 들으면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지!"하고 각성을 하게 되지만 너무 자주 들으면 그 영혼이 배가 고파서 결국 성도들은 하나씩 떠나게 됩니다. 나쁜 소식도 '반면교사'의 역할을 위해 가끔 전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가 주로 전해야 할 소식은 바로 좋은 소식입니다.
나쁜 소식은 열심히 전파하면서 복음은 전혀 전하지 못하지 못하는 자폐증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축복 받으면 무엇합니까? 감사가 없고, 복음 전파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겸양은 중요하지만 부끄러움은 버려야 합니다. 부끄러움이 별로 나쁜 것 같지 않지만 마귀가 그것을 이용해서 자폐증 성도로 만든다면 큰 문제입니다. "네가 무슨 기도야! 네가 무슨 전도야! 네 모습을 봐라!" 그 부끄러움이 우리의 열정을 약화시킵니다. 여러분! 복음 전파할 수 있는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4.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4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복음을 전파했을 때 그날에 삼천 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엄청난 사람들이 다 진짜 제자였다면 몇 년 되지 않아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1절에 나오는 '제자'는 원어로 그냥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한 무리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예루살렘 교회는 힘이 약화되고 오히려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더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 이후의 삶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났다고 교회가 성장한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진리지만 성경은 다수를 부정적으로 볼 때가 훨씬 많습니다. 숫자 놀음의 환상에 빠지면 안됩니다. 엉터리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숫자 아닙니까? 다수 좋아하다가 망한 기록이 바로 성경의 기록입니다. 사기치는 사람, 돈 떼먹는 사람, 복음을 팔아 장사하는 사람, 선거철에 나타나는 사람, 바람 피는 사람, 편하게 믿으려는 사람 등 온갖 군상들이 숫자의 그늘 밑에 숨어 있지 않습니까?
다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용기 있는 소수가 되고, 소신이 있는 소수가 되십시오. 쉽게 살려면 남들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 살면 됩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려면 소수의 서러움도 감내하려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고, 자신의 꿈과 비전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을 변화시키는 용기 있는 소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보다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제자를 더 원하십니다.
진짜 축복이 무엇입니까? 무리에 속하지 않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42절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을 줄 아는 성도였습니다. 뜨거운 가슴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냉철한 머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많이 알려고 힘써야 합니다. 공부도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항상 시험 점수가 엉망입니다. "공부 좀 하라!"고 했더니 "복음 전파하고 철야 기도하느라고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만한 학생을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어떤 학생이 시험문제를 받아보고 아는 것이 없으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노라!(고전 2:2)"고 썼습니다. 교수님은 "잘 알았노라!"고 하며 빵점을 주었습니다.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입니다. 가르침을 잘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인격도 되어 있고, 태도도 되어 있고, 바른 신앙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받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성경 지식이 많아야 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삶이 가르침을 받을 줄 아는 삶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패션으로 삼지 말고 교회생활을 하나의 이벤트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앙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통해서 교회는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확대해나갈 것입니다.
5.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42절 말씀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하며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왜 '모이기를 힘쓰는 삶'이 중요합니까? 모임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나 중심적 세계관'이 깨지는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고독의 영성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영성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영성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성숙하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님의식을 가지기보다 주인의식을 가지십시오. 구경꾼이 되기보다 일꾼이 되십시오. 감독만 잘해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배우와 모든 스텝들이 다 잘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깊이 빠지면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 발만 걸치고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몸은 편하겠지만 그런 모습이 어찌 복된 모습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전 아랍을 상대로 이긴 제 3차 중동전쟁은 6일만에 끝났습니다. 얼마나 빨리 이집트 소유의 거대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해 버렸는지 점령 속도가 탱크를 타고 지나가는 속도보다 빨랐다고 합니다. 어떻게 6일만에 아랍 연합국을 항복시킬 수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6일 안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사가 위태한 일이 있어도 주일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일을 힘써 지키는 성도를 힘써 지켜주실 것입니다.
6. 서로의 짐을 나누기를 힘써야 합니다.
42절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떡을 뗐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지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서로 어려운 자들을 도왔습니다. 그처럼 선교하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솔직히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특별히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사나?" 하고 걱정하며 미래를 대비해서 저축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 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해주실 것입니다. 교회는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 참 교회가 되고, 교인도 남을 위해서 존재할 때 참 교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를 소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손을 피해 도망쳐 아둘람 굴에 숨었을 때 그에게 4백 명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환난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22:2).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그러나 나중에 그들이 다윗 혁명 정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방위'를 우습게 압니다. 우리 교회 현수막 달아주는 한솔 애드컴 사장은 자기는 현역 출신이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높고 위험한 데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위' 출신이라고 합니다. 저도 80년대 중반 천호동 유흥가를 주름잡는 사람들이 대부분 방위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몸에 심하게 문신이 그려져 있어 방위로 간 것입니다. 여러분! 약하게 보이는 사람을 깔보지 마십시오. 약해 보이는 것이 더 강할 수 있고, 더 미래가 있을 수 있고, 거기에 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카리스마를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는 카리스마(칼 있스마!)가 있다! 누구는 카리스마가 없다!"고 합니다. 칼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칼이 있습니다. 다만 사람이 다칠까봐 사용을 조심하는 것일 뿐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칼을 가지고 누군가를 줄 세우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 본능에 생각 없이 편승해 "오! 우리 목사님은 카리스마가 있어!"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왜소화시키는 모습은 부끄러운 무리의 모습입니다.
목회에서 성도들을 줄 세우고 목회하면 편합니다. 헌신의 자리를 항상 무리하게 마련해 놓고 헌신하는 사람과 헌신하지 않는 사람을 뚜렷하게 구분하여 헌신하는 사람을 앞세우면 카리스마는 저절로 형성됩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만 측근에 포진시키면 카리스마는 저절로 형성됩니다. 그런 술수가 없어도 순수하게 교회를 사랑하고 지도자를 존중해주면 얼마나 아름답고 성숙한 모습입니까?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기대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지도자를 존중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저도 고등학교 때에는 칼을 품고 살았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격투기로 몸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다른 친구들이 알아서 기었습니다. 가끔 책상 윗판이 떨어져나간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이마로 두 조각 내고, 가로와 세로 6센티미터 되는 각목도 이마로 쳐서 부러뜨리고, 학교 대걸레 자루를 어깨에 쳐서 부러뜨리고, 두꺼운 콜라병 마개를 주먹으로 쳐서 따고 다시 주먹으로 쳐서 그 밑창을 박살내니까 "칼 있스마"가 자연히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심OO라는 친구가 자기는 중학교에서 날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와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와 붙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깡이 있고, 주먹을 날렸다고 해도 복싱으로 단련된 사람을 어떻게 당합니까? 투닥투닥 몇 초 되지 않아서 싸움이 끝났습니다. 다른 친구들 보는 데서 엄청나게 자존심 상했던 모양입니다.
한 시간 후에 그 친구가 전열을 정비해서 교련 시간에 M1 소총 개머리판을 들고 저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친구들의 외마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드는 순간 M1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머리를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개머리판을 막고 다시 투닥투닥 몇 초만에 싸움을 끝냈습니다. 아주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깡은 대단하구나!"하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들 줄 세우기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저는 잘 대우해 주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한 친구가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당시 선생님이 너무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돌아서서 얘기하고 자기는 앉아서 앞을 보고 내 말에 입만 움직였는데 선생님은 "최OO! 이리 나와!" 하면서 자기만 두들겨 팼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조폭을 은근히 대우해주면 그 조폭이 동네 양아치는 알아서 다 처리해주는 그런 현상이 고등학교 교실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삶을 생각해 보면 너무 비참할 뿐입니다. 강한 것을 자처하는 삶은 남는 것이 없는 삶입니다. 성격만 버립니다. 버려진 성격으로 행복이 있겠습니까? 아름답고 평화로운 삶이 전혀 없습니다. 강함을 추구해서 얻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싸움을 통해서 얻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얻어도 결코 행복의 조건은 아닙니다. '상처뿐인 영광'이란 말이 맞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은 쥐고 있었지만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제가 1979년 교회를 나가고, 81년 주님을 알고, 84년 주님께 헌신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때 비로소 온유함의 축복을 찾았습니다. 인상도 놀랍도록 변했습니다.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카리스마를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강한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다가 괜히 상처만 입지 마시고, 약해 보이는 사람을 살펴주는 것이 진정 행복의 조건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7.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보이지 않는 부흥의 원천이었습니다. 기도는 어떤 프로젝트보다 중요하고 어떤 프로그램보다 중요합니다. 큰 교회에 비하면 우리 교회는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이 보잘것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가 더욱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길이 열리기를 바라겠습니까?
요새 교회 이전 후에 교회 부흥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쪽 머리는 아닙니다. 저는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이라는 말이 나오면 위축이 됩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기도하면서 하나씩 전략과 전술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순종하며 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고 부흥하는 교회를 보셨습니까? 역사상 기도의 밑거름이 없이 교회부흥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의 밑거름이 주입된 교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은 고민하며 밤을 새웁니다. 믿는 사람이 잠이 안 오는 것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도할 기회를 주실 때 기도하면 그 기도는 더욱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번 교회 이전도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밤 12시 30분에 기도하러 교회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새벽 1시 15분쯤에 컴퓨터를 켰다가 지금 교회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해서 마음이 떨릴 때에는 기도하십시오. 다급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더욱 들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곧 잔금을 치러야 합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간절히 기도합시다. 눈물 뿌려 기도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께 우리 교회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합시다.
갈등이 생길 때에도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지 않으면 다 저 사람 문제로 보이면서 더 마음이 아프지만, 기도하면 내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신비한 평화가 깃들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고, 회개할 마음을 주고, 평안을 줍니다. 큰 문제가 있어도 우리에게 기도만 살아 있다면 그 문제는 반드시 축복의 산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초대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부흥하는 교회의 7가지 법칙을 살펴보았습니다. 항상 회개를 앞세우고,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며,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극 참여하고, 서로 위해주고, 서로 기도해줌으로 교회 부흥의 초석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