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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종이 된 자유인 (신15:12-17)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제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신15:12-17)
들어가는 말
이제는 교회에서 ‘종’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권층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 말 자체에 권위적인 느낌까지 깃들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속에도 노예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 민족의 사회는 매우 특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노예라고 하는 신분은 있는데 노예제도는 없었을까요?
한 사회에서 신분 제도가 정착되려면 이 신분이 계속해서 세습되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야만 그것이 하나의 제도가 되고 그 제도 속에서 노예라고 하는 계층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지배계급이 생기면서 사회 전체가 계급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가 이방 나라 사람들처럼 노예 제도라는 것을 통해 계급사회가 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노동력을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소수의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체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노예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있지만 노예제도가 자리 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년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그 해에는 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빚을 너무 많이 져서 팔려가도 7년째에는 해방이 주어져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공정하게 시행되고 있는 때에는 팔려가더라도 6년만 고생하면 7년째에는 놓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식어지고 믿음이 떨어졌을 때는 7년째가 되어 노예들을 놓아주어야 하는데도 놓아주지 않음으로 율법을 어기는 일들이 있었고 이런 이유들로 선지자들이 그들을 책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케 된 종
신명기에서 모세가 율법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들려줄 때 노예제도에 관해서는 동족이 팔려서 6년을 섬겼으면 7년째에는 그를 놓아주어 자유하게 하고 그가 나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셨으니 너도 아끼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넘치는 마음으로 네 양 무리 중에서, 타작마당에서, 포도주 틀에서, 진귀하고 풍성한 물건들을 주어 돌아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신분만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해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보상들을 받아서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세상에서 종의 신분으로서 한 주인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하며 그들만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을 위하기보다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특별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율법을 따라 종으로 살며 한 인간을 충실하게 섬길 때에도 풍성한 보상을 약속해 주셨거든, 하물며 구속의 은혜를 힘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종처럼 살아갈 때는 얼마나 더 후히 갚아주시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생을 주님을 위해 다 드리고 나실인으로 살다 끝내 순교하셨지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얻는 전토나 부귀영화와는 비교되지 않는 영적인 축복들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면 더디 성공하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축복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 된 자유인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한 종이 나옵니다. 6년을 노예로 살고 7년이 되는 해에 주인이 그를 불러 이제 노예의 때가 끝났으니 이 재산들을 가지고 떠나서 독립된 생활을 하라고했는데 이 종이 눈물을 흘리며 그 집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고 주인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그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본인의 의사로 종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고 있습니다.
모든 종들이 해방의 날을 기다렸지만 이 종은 떠나기 전날 밤에 누워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는구나. 이제는 내가 낳는 자식도 노예가 아니겠지. 참 좋구나.
그렇지만 이렇게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의 집을 떠나는 것은 너무 싫다.’ 고민을 하다가 결심합니다. ‘그래, 율법이 나에게 자유케 되도록 명하였으나 나는 그 자유를 버리고 이 주인의 종이 되리라’
그리고 그 이튿날 주인과 모든 식구들이 나와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환송하기 위해서 나와 있는데 울면서 무릎을 꿇고 주인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주인님, 제가 이곳을 떠나 어디서 이렇게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볼 수 있겠으며 어디서 주인님과 같이 은혜로운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보다, 이 곳에서 구속을 받으며 주인님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저에겐 행복입니다.
제가 비록 종이었으나 이 집안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껏 주인님은 한 번도 저를 노예로 취급하지 아니하시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저희와 함께 나누시며 자식처럼 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인님, 호적에야 종이라고 되어있거나 자식이라고 되어 있거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를 받아주십시오.”
그 집에서 떠나지만 말게 해 주면 마당도 예전보다 잘 쓸고, 장작도 옛날보다 더 많이 패고, 짐승도 더 성실하게 먹일테니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이제껏 내 집에서 종살이로 일생을 보냈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또 종의 자리에 두겠느냐? 가라. 자유하거라. 이 돈이면 네가 가서 얼마든지 독립을 하고 자립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가서 너도 언젠가는 종을 거느린 좋은 상전이 되거라.” - “주인님 전 그런 것 싫습니다. 저는 이 집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자꾸 가라고하시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주인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 종을 끌어 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를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그 종의 귀를 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뚫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그 집의 종이 되는 율법의 규례이며 이것을 볼 적마다 자신은 자유인이었으나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이 노예가 최고의 자산으로 생각했던 것은 해방될 때 받는 몇 푼의 퇴직금이 아니라 그 은혜로운 상전과 함께 누렸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주인과의 ‘관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셔서,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한순간에 빛으로 이끌어 내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았을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며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이제 네 죄가 사하여졌으니 평안히 돌아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주여 우리가 어디로 가겠사옵니까? 주께서 우리를 자유하라 하시나 주님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사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귀 뚫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음적인 나실인입니다.
이 율법이 통용되고 있던 시대는 구약시대였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도 6년 동안 주인이 자신에게 베푼 호의와 은총에 감화를 받고, 주인을 위하여 일평생 애쓰다 수의 한 벌 얻어 입고 주인의 땅에 묻히는 인생을 기뻐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허물 많은 인간의 유한한 호의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호의, 그리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되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더 감사하며 그 위대하신 사랑을 자랑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일평생 주인을 섬기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같이 가치 없고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정과 욕심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과 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위해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뒷전으로 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바쁘게 돌아다니는 인생의 비참함과 가련함을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어서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자유케 되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인은 귀 안 뚫은 종을 보면서 ‘6년 후에 저 놈 뭘 좀 해서 보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귀 뚫은 종을 볼 때는 언제나 마음이 뭉클하고 기가 막힐 것입니다.
‘우리 집에 노예로 팔려 와서 그렇게 혹독한 고생을 하면서도 결국은 6년이 지나서 가라고 하였더니, 네가 모든 보따리를 내려놓고 앞마당에서 울며 내 집에서 거하기만 하면 아무것 없이 살다 죽어도 좋다 그랬지?’
그 주인이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가 아니라면 그 귀 뚫은 종을 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친구로 볼 것이며 그와의 ‘관계’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주님이 좋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의 집에서 수종들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다 일평생을 살다보면 주님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금방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스스로 종이된 이 사람이 주인의 집에서 평생을 주인을 위해 수고하고 인생을 마치게 될 때, 제가 주인이라면 그 종을 품에 안고 그의 임종을 지켜볼 것 같습니다.
맺음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유케 되었으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속을 덜미로 우리의 발목을 잡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으나 우리가 어떻게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일평생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간직하고 종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 유한한 인생을 원없이 후회 없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다가 그분 앞에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남준목사 설교 중에서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육년을 너를 섬겼거든 제 칠년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제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신15:12-17)
들어가는 말
이제는 교회에서 ‘종’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특권층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 말 자체에 권위적인 느낌까지 깃들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 속에도 노예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히브리 민족의 사회는 매우 특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노예라고 하는 신분은 있는데 노예제도는 없었을까요?
한 사회에서 신분 제도가 정착되려면 이 신분이 계속해서 세습되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어야만 그것이 하나의 제도가 되고 그 제도 속에서 노예라고 하는 계층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지배계급이 생기면서 사회 전체가 계급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회가 이방 나라 사람들처럼 노예 제도라는 것을 통해 계급사회가 되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노동력을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소수의 사람들을 잘 살게 하는 체제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노예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있지만 노예제도가 자리 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안식년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그 해에는 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빚을 너무 많이 져서 팔려가도 7년째에는 해방이 주어져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공정하게 시행되고 있는 때에는 팔려가더라도 6년만 고생하면 7년째에는 놓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식어지고 믿음이 떨어졌을 때는 7년째가 되어 노예들을 놓아주어야 하는데도 놓아주지 않음으로 율법을 어기는 일들이 있었고 이런 이유들로 선지자들이 그들을 책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케 된 종
신명기에서 모세가 율법을 다시 한번 반복해서 들려줄 때 노예제도에 관해서는 동족이 팔려서 6년을 섬겼으면 7년째에는 그를 놓아주어 자유하게 하고 그가 나갈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셨으니 너도 아끼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넘치는 마음으로 네 양 무리 중에서, 타작마당에서, 포도주 틀에서, 진귀하고 풍성한 물건들을 주어 돌아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신분만 해방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해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보상들을 받아서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 세상에서 종의 신분으로서 한 주인에게 충성과 헌신을 다하며 그들만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자신을 위하기보다 주인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특별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율법을 따라 종으로 살며 한 인간을 충실하게 섬길 때에도 풍성한 보상을 약속해 주셨거든, 하물며 구속의 은혜를 힘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종처럼 살아갈 때는 얼마나 더 후히 갚아주시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일생을 주님을 위해 다 드리고 나실인으로 살다 끝내 순교하셨지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얻는 전토나 부귀영화와는 비교되지 않는 영적인 축복들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면 더디 성공하는 것 같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축복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 된 자유인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한 종이 나옵니다. 6년을 노예로 살고 7년이 되는 해에 주인이 그를 불러 이제 노예의 때가 끝났으니 이 재산들을 가지고 떠나서 독립된 생활을 하라고했는데 이 종이 눈물을 흘리며 그 집을 떠나지 말게 해달라고 주인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해 그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본인의 의사로 종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고 있습니다.
모든 종들이 해방의 날을 기다렸지만 이 종은 떠나기 전날 밤에 누워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는구나. 이제는 내가 낳는 자식도 노예가 아니겠지. 참 좋구나.
그렇지만 이렇게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의 집을 떠나는 것은 너무 싫다.’ 고민을 하다가 결심합니다. ‘그래, 율법이 나에게 자유케 되도록 명하였으나 나는 그 자유를 버리고 이 주인의 종이 되리라’
그리고 그 이튿날 주인과 모든 식구들이 나와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환송하기 위해서 나와 있는데 울면서 무릎을 꿇고 주인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주인님, 제가 이곳을 떠나 어디서 이렇게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볼 수 있겠으며 어디서 주인님과 같이 은혜로운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 보다, 이 곳에서 구속을 받으며 주인님 곁에 있는 것이 오히려 저에겐 행복입니다.
제가 비록 종이었으나 이 집안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껏 주인님은 한 번도 저를 노예로 취급하지 아니하시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저희와 함께 나누시며 자식처럼 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인님, 호적에야 종이라고 되어있거나 자식이라고 되어 있거나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를 받아주십시오.”
그 집에서 떠나지만 말게 해 주면 마당도 예전보다 잘 쓸고, 장작도 옛날보다 더 많이 패고, 짐승도 더 성실하게 먹일테니 이 집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이제껏 내 집에서 종살이로 일생을 보냈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또 종의 자리에 두겠느냐? 가라. 자유하거라. 이 돈이면 네가 가서 얼마든지 독립을 하고 자립하여 살 수 있을 것이다.
가서 너도 언젠가는 종을 거느린 좋은 상전이 되거라.” - “주인님 전 그런 것 싫습니다. 저는 이 집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자꾸 가라고하시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주인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 종을 끌어 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를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그 종의 귀를 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뚫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그 집의 종이 되는 율법의 규례이며 이것을 볼 적마다 자신은 자유인이었으나 스스로 종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종이 된 이 노예가 최고의 자산으로 생각했던 것은 해방될 때 받는 몇 푼의 퇴직금이 아니라 그 은혜로운 상전과 함께 누렸던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주인과의 ‘관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셔서,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한순간에 빛으로 이끌어 내시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원받았을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시며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이제 네 죄가 사하여졌으니 평안히 돌아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주여 우리가 어디로 가겠사옵니까? 주께서 우리를 자유하라 하시나 주님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사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귀 뚫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복음적인 나실인입니다.
이 율법이 통용되고 있던 시대는 구약시대였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도 6년 동안 주인이 자신에게 베푼 호의와 은총에 감화를 받고, 주인을 위하여 일평생 애쓰다 수의 한 벌 얻어 입고 주인의 땅에 묻히는 인생을 기뻐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허물 많은 인간의 유한한 호의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무한한 호의, 그리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되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더 감사하며 그 위대하신 사랑을 자랑하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일평생 주인을 섬기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같이 가치 없고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정과 욕심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과 마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위해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어 보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뒷전으로 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바쁘게 돌아다니는 인생의 비참함과 가련함을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어서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자유케 되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자유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인은 귀 안 뚫은 종을 보면서 ‘6년 후에 저 놈 뭘 좀 해서 보내야 하는데...’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귀 뚫은 종을 볼 때는 언제나 마음이 뭉클하고 기가 막힐 것입니다.
‘우리 집에 노예로 팔려 와서 그렇게 혹독한 고생을 하면서도 결국은 6년이 지나서 가라고 하였더니, 네가 모든 보따리를 내려놓고 앞마당에서 울며 내 집에서 거하기만 하면 아무것 없이 살다 죽어도 좋다 그랬지?’
그 주인이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가 아니라면 그 귀 뚫은 종을 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친구로 볼 것이며 그와의 ‘관계’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주님이 좋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나님의 집에서 수종들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다 일평생을 살다보면 주님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금방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스스로 종이된 이 사람이 주인의 집에서 평생을 주인을 위해 수고하고 인생을 마치게 될 때, 제가 주인이라면 그 종을 품에 안고 그의 임종을 지켜볼 것 같습니다.
맺음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유케 되었으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속을 덜미로 우리의 발목을 잡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하나님,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으나 우리가 어떻게 자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일평생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간직하고 종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 유한한 인생을 원없이 후회 없이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다가 그분 앞에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남준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