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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기쁘시게 하는 믿음 (딤후1장1-5절)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디모데에게 쓴 마지막 서신입니다. 마치 바울의 유언장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의 분위기는 비장합니다. 그는 죽기 전에 디모데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을 보면 디모데에 대한 애정이 구구절절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표현이 많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를 보면 기쁨이 가득 생긴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어떤 점이 사도 바울을 기쁘게 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표현된 바울과 디모데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1.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는 믿음
1-2절 모습을 보십시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진한 애정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서로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최선을 다해 이끌어주었고,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을 이해하고 철저히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마지막 편지를 보내는 대상으로 디모데를 선택한 것입니다.
목사와 성도는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구역장과 구역 식구는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성가대 지휘자와 성가대원은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리더는 양떼의 처지를 이해하고, 양떼는 리더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믿음은 반드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 것이고,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 때 하나님은 그 관계 속에 크신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만남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축복의 핵심 요소는 만남입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리더를 만나고, 좋은 제자를 만나고,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입니다. 지금 만남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이 만남을 허락하신 줄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좋은 관계를 만들기에 힘쓰고, 힘써 협력해야 합니다. 힘써 협력하는 관계 속에서 문제를 극복하는 엄청난 파워가 나오게 됩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백두산 호랑이를 생포했습니다. 그래서 풍신수길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일본에 도착할 때까지 잡아먹고 잘 지내라고 개 세 마리를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해 보니까 백두산 호랑이는 죽어 있었고 개 세 마리는 멀쩡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 개가 바로 진돗개였습니다.
서로 힘을 합하면 거기에서 놀라운 힘이 나옵니다. 주인에게 충성하고 서로 힘을 합할 줄 알 때 명견이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서로 힘을 합칠 때 명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협력할 수 있다면 우리 앞에 아무리 큰 문제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진돗개처럼 그 문제를 끈질기게 물어뜯으면 틀림없이 그 문제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좋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관계입니다. 사실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큼 위대한 협력이 없고, 위대한 격려가 없습니다. 어제 이 근처의 한 권사님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분 교회에서는 주일 아침 7시에는 연세 많으신 분들이 교회에 일찍 와서 기도실이 꽉 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실에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목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린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능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마귀의 공격도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마귀가 두려워 떨 것입니다. 왜 북한이 그토록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싫어합니까? 한반도 특성상 서해에 북한 비행기가 한 대 뜨면 남한 비행기도 즉시 떠야 합니다. 반대로 남한 비행기가 뜨면 북한 비행기도 즉시 떠야 합니다. 선제 공격을 당하면 피해가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훈련을 한다고 비행기, 탱크 등을 동원하면 북한도 똑같이 비행기, 탱크를 동원해야 하니까 연료가 부족한 북한은 우리가 훈련을 할 때마다 미칠 지경이라고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띄우면 마귀 세계에 비상이 걸릴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귀를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기도의 힘을 활용해서 서로를 지켜준다면 마귀의 어떤 공격도, 어떤 문제도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좋은 만남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고자 애쓰는 신앙을 기뻐하시고, 그 관계 속에서 크신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2.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은 밤낮 간절히 기도할 때마다 디모데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했습니다. 3절에서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오던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말은 가문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깊이 감사했다!"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문은 훌륭한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조상은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대대로 하나님의 잘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공로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문의 전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밤낮 기도하는 중에도 "달라!"고 하는 기도보다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가 더 많았습니다. 그는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헌신을 하면 "내가 이만큼 했지!" 하는 생각을 가집니다. 바로 그 순간 그 헌신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지라도 그 헌신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없을 것입니다. 헌신이 공로의식으로 발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헌신을 해도 "하나님! 이렇게 할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그 헌신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감사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다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환경입니다. 어려운 환경도 소중한 뜻이 있어서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때로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진짜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내 곁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모든 환경, 모든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3. 눈물의 헌신을 동반한 믿음
사도 바울이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가 그토록 생각나고, 디모데에게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쓰는 편지를 쓰고 싶었을까요? 그 이유가 4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디모데는 거룩한 울보였습니다. 그에게는 기도의 눈물이 있었고, 헌신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활달한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로서 헬라 지역에 살면서 마음이 많이 위축된 상태로 자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성적이고, 조용한 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을 보면 몸도 약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그러나 그는 나중에 큰 목자가 되어서 당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목사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겉으로 요란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뜨거운 열심이 있었습니다. 겉으로 요란을 떠는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얕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큽니다. 그처럼 요란을 떨지 않아도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면서 항상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디모데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힘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디모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디모데의 조용한 열정과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의 우울함이 사라지고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헌신을 동반한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기쁨을 줄 것입니다. 최선의 헌신을 보이면 사람들은 감동하고, 하나님도 감동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때 행복의 열매도 주어집니다. 호랑이는 배가 부르면 어떤 동물도 절대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냥을 할 때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힘없는 토끼라도 전력을 다해 도망가면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전심전력을 다해 헌신하지 않으면 결코 아름다운 열매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3일 전에 중학교 동기 부부를 만났습니다. 30년째 친구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넘치고 헌신적인 부부입니다. 특히 친구의 아내 집사님이 헌신적입니다. 우리 교회와 선교사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줍니다. 대화를 마친 후에 헤어지기 전에 그 집사님이 봉투 하나를 내밀고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벌었던 전부를 넣었습니다." 교회이전을 한다고 하니까 정성을 바친 것입니다. 액수를 많고 적음을 떠나서 그 헌신적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신앙이란 하나님의 비전에 마음을 다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19장 2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십자가로 가까이 가서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비전에 마음을 다할 때 그 영혼은 반드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눈물의 헌신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이런 음성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구나!"
사람들은 모두 천국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사는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 멀리 있는 것은 아닌지요? 왜 그렇게 쓸쓸한 모습과 쓸쓸한 신앙이 있게 되었습니까? 마음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신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도 보물을 찾아 선실로 내려가고 있는 삶 때문입니다. 우리는 욕망에 시달려 살지 말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신앙을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4.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
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그를 못 견디게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5절 말씀 전반부를 보십시오. "아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디모데에게는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거짓 믿음'도 있다는 말입니다. 디모데는 말만 그럴듯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 겉과 속이 일치하고,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누구에게나 보증수표로 인정받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어떤 분은 한다면 합니다. 어떤 분은 약속하면 꼭 지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비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은 기본기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때로는 "네! 하겠습니다!"고 했는데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감정적으로 하고 싶은 일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과 기분과 컨디션을 극복하고 꼭 해야 할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반드시 좋은 인격을 낳고, 좋은 인격은 반드시 좋은 생활을 낳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저분은 신앙은 좋은데 인격이 영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아마 그것은 참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이 좋으면 인격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격이 좋은 사람이 신앙생활 하면 지혜롭게 잘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처럼 신앙과 인격이 분리되지 않는 신앙이 바로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무엇보다 겸손한 언행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겸손한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겸손하고자 하면 더 이상 자기를 높이려고 위장하고 가식을 부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을 통해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겸손하면 때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도 이해해 줄 사람을 많이 얻습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완벽하게 행동해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고 교만하면 깎일 일만 있고 인간관계에서는 후퇴만 있지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면 높아질 일만 있고 인간관계에서 전진만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십자가를 지는 믿음을 말합니다. 어떤 분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신앙'을 버리고 '절대 손해를 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순간을 닥쳤을 때, 어려운 기도제목이 있을 때 믿음의 자리를 버리지 않고 십자가를 기쁘게 지는 믿음이 바로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5. 가정 생활에서 나타나는 믿음
무엇이 거짓 믿음이고, 무엇이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까? 한 사람이 가진 믿음을 거짓 믿음인지 진실한 믿음인지를 구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헌신이 있는 것은 진짜 믿음이고 헌신이 없는 것은 가짜 믿음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헌신하는 것도 사람 앞에서 보이기 위해, 아니면 정치적 목적 때문에 헌신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헌신하는 것을 통해서도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구분할 수 있는 아주 실제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정생활을 살펴보면 됩니다. 가정생활에서 믿음이 온전히 나타나고, 가족들 앞에서 그 믿음을 인정받는다면 그 믿음은 진짜 믿음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믿음이 좋게 보이고, 사회에서 아무리 믿는 사람답게 보일지라도 배우자가 인정하지 않고 자녀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 믿음생활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내 믿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배우자와 내 자녀가 내 믿음을 인정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 가정 식구들의 인정은 사장님이 인정해주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고, 목사님이 인정해주는 것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그처럼 가정생활에서 믿음의 인정을 받고 자기 가정을 믿음의 가정으로 만들어 다음 세대에 믿음의 유산과 믿음의 환경을 계승시킨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디모데는 그런 믿음의 유산을 받고 자랐습니다. 5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는 헬라 지역에 살면서 헬라인 남편과 살았지만 어머니 로이스의 신앙을 받아 신앙을 잃지 않고 그 신앙을 그 아들 디모데에게 잘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전통' 하면 딱딱하게 생각하는데 사실 전통이 있는 신앙은 확실히 다른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비뚤어진 삶을 살아도 부모의 신앙을 보고 자란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와 충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유산은 어떤 유산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성공해야 할 분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녀 교육'입니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자녀 교육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 교육'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부모는 자기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부모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그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성공한 것은 그가 거부가 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아들 이삭을 남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녀를 신앙적으로 잘 교육시킬 수 있습니까? 신앙 교육을 잘 시키는 교회로 보내야 합니까? 좋은 신앙 프로그램에 참석시켜야 됩니까? 그런 것들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는 부모가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가정에서는 믿음의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저절로 믿음의 사람으로 잘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요새 이런 말이 많습니다. "문제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 부모가 있는 것이다."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아이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먼저 부모인 우리가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녀는 가정 내에서 우리의 신앙을 살피고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인정받을 때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이 축복의 원천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축복이 비례한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크면 축복도 커질 것이고, 믿음이 작으면 축복도 작을 것입니다.
이 세상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소원대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한 줄 알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줄 알고, 나는 하나님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줄 알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 줄 알고, 내 인격이 밑바닥인 줄 알고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요새 은혜를 못 받는 것 같습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탓을 하고 싶습니다. 목사 탓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습니다. 저 집사 탓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는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거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거리가 멀어질 때 은혜는 떨어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큰 문제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으면 내 믿음을 진단해보아야 합니다. 꼭 내 믿음이 나빠져서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생길 때 내 믿음을 진단하는 기회로 삼고 회개하는 자세는 대단히 복된 자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통해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