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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의 신앙 (창 12:4-5)
위인들은 보통 범인들과는 다른데가 있습니다. 우선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용기가 다릅니다. 위인은 실꾸리 얽히듯이 얽힌 역사를 지혜롭게 결단 내리면서 잘 풀어 나갑니다. 보통 사람들이 머뭇 거리고, 우물쭈물 하고, 주저 할 때 위인들은 빨리 결단 내리고, 한발 앞서 가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나가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위인이 되려고 하면 우선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결단의 사람의 입니다. 성경에 보면 몇 번씩 그런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향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아브라함은 주저함 없이 단호하게 고향을 떠납니다. 성경을 보면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 였다고 했습니다. 사람 나이 75세가 되면 심리적으로 보아서 안정을 추구할 때 입니다. 더 좋은 일이 있다고 해도 새삼스럽게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때 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같은 약점을 극복하고 과감하게 일어나서 고향을 떠납니다. 거기다 다 늙은 아내와 어린 조카를 데리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고난의 길인 나그네의 길을 떠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위인됨을 말해 주는 모습 입니다.
이와 같은 용기와 결단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보다 언제나 한발 앞서 나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세계의 역사와 그 시대를 보면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이 만들어 지고, 주도되고, 진행되어 갑니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언제나 그 뒤를 좇아 가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장차 우주정복의 최후 승리자는 미국이 아니고, 소련도 아니고, 앵글로 색슨족일 것이라고 말 합니다. 그것은 앵글로 색슨족의 의식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습니다. 세계에 퍼져 있는 영연방을 어린 아이들이 여행을 합니다. 여행을 하는데는 부모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들 끼리 여행을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들이 공항 까지 나가서 아이들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아이들과 헤어지면 그만 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여행을 합니다. 그같은 정복의지와 모험적인 용기, 그리고 과감하게 맡겨 버리는 독립성,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미래세계의 주인이 되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눈물이 많고, 정이 많고, 노파심도 많습니다. 너무 지나칩니다. 공항에 가 보십시요.헤어질 때 보면 모두 우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이민을 가는 가족이 있으면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너무 울어서 눈이 모두 부어 있습니다. 딸을 시집 보낼 때는 어머니도 울고 딸도 웁니다. 딸이 친정에 왔다 갈 때는 가는 딸도 울고 보내는 어머니도 웁니다.
그러기에 그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다음에 커서도 독립심이 약합니다. 부모들이 집도 다 장만해 줍니다. 자녀들이 혼자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찌기 어려서 부터 독립심과 스스로 살아 가면서 결단력을 키운 서구의 사람들은 언제나 앞서 가면서 살고 우리들은 또 언제나 뒤를 따라 가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터전 위에 이민이나 가서 사는 것이 고작입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을 살아 가는 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 형제에게 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집에 가서 이야기 하고, 상의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영영 재자들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다 싶으니까 그 시간으로 따라 나서는 그 결단력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제자가 되게 했고, 사도가 되게 했던 것 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가서 삽니다. 외롭고 고달픕니다. 그런데 여주인이 그를 유혹 합니다. 아마 요셉은 외로운 마음에서 누구 보다도 쉽게 그 유혹을 받아 들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고생도 덜 하고, 주인으로 부터 사랑도 받고. 좀 편안히 살아 갈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것을 단호하게 뿌리 칩니다. 우물쭈물 할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을 단호하게 결단을 내려서 뿌리치고는 나가 버립니다. 그것이 마침내 요셉을 위인으로 만든 요인이 됩니다. 그때 요셉이 않되는데 하고 넘어졌더라면 요셉은 그것으로 끝장 입니다. 이것은 참 무서운 이야기 입니다. 지금 이것을 못해서 불행해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엘리사가 밭을 갈고 있는데 엘리야가 찾아 오더니 "나를 따르라" 고 합니다. 지금 한창 밭을 갈며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을 보고서 "지금 당장 따라 나서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난 엘리사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를 따르는 길이 아무리 고달파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 오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입니다. 두번째는 공적인 선포 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간다" 하고 공적으로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 놓으면 그 길을 가다가 고달프다고 해서집으로 돌아 오게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선지자의 길에 들어 서서 끝가지 그 길을 견지해서 스승 엘리야 보다 갑절의 일을 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위인들이나 한발 앞서 살아간 사람들을 보면 모두 이같은 결단력이 있습니다. 난국시에는 앞서 나가는 용기가 있고, 희생이 필요할 때는 기꺼이 그 희생에 동참을 하고, 손해를 보게 될 때는 과감하게 투자를 할줄 알고, 유사시에는 목숨 까지도 내 놓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공직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결단이 있어야 할 때 한결같이 우물쭈물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서서 적극적으로 챙긴 사람들도 다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불을 밝게 켜 보니까 모두 드러난 것 입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그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 입니다. 부정한 사람들을 추려 내서 들추어 내 보니까 그중 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드는 일 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모두 유능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이끌어 갈만한 위인들이 되지 못하고 도중 하차한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다 들추어 보니까 뽑혀 올라 오는 사람들은 모두 "불신자였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이 너무 추해서 털고 또 털어 보았더니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현실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시대를 실수하지 않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요즘 문제 중의 하나가 흡연 문제 입니다. 이것은 좀 처럼 끊기가 어려운 모양 입니다. 그래서 담배를 끊는데도 이 결단력이 있어야 끊습니다. 몸에도 좋지 않다는데,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끊고 있는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끊지 못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끊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 후회를 하면서, 할 수 없이 끊어야 할 때가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미련이고, 그것이 불행이고, 그것이 우물쭈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입니다.
여러분, 폼페이시의 최후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한참 연회가 무르 익어 가는 시간에 도시의 뒷산에서 화산이 터져서 용암이 흘러 도시를 덮어 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여 도시를 탈출하려고 야단 입니다. 그때 어느 여인은 용케도 잘 피신하여 도시를 잘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나오다 생각해 보니까 금고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나오던 길을 되 돌아서 다시 사람들을 비집고 집으로 달려 갑니다. 가서는 금고를 열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보물들을 끌어 안고 황급히 달려 나오지만 이 여인은 그만 무너져 내리는 건물의 벽에 깔려서 한줌 보물들을 가슴에 안고 죽고 맙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마당에서 땅 뺏기 놀이를 해 보셨지 않습니까. 그 때는 한 뼘이라도 더 뺏으려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그래서 많이 뺏으면 좋아 하고 뺏기는 날이면 골이 나고 화가 나고 그럽니다. 그러면 뭘 합니까. 날이 어두워지면서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르시면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많이 뺏은 아이나 많이 뺏긴 아이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놓아 두고는 손을 털고 집으로 각자 돌아가 버리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같은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때로 실수를 하게 되고, 세상에 너무 지나치게 미련을 갖다가 실패를 하기도 하고, 너무 과하게 욕심을 갖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 처럼 다 놔두고, 털고, 일어나야 할 때는 다 놔두고 일어나는 용기도 있어야 하고, 결단도 있어야 하는데 이같은 결단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시험에 들어서 때로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부모 없는 조카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가 재산 때문에 싸움을 하게 됩니다. 조카 롯이 삼촌의 재산에 미련을 너무나 많이 갖습니다. 그러다가는 재산 때문에 숙질 간에 분쟁이 일어 나게 생겼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그 위대한 결단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땅 중에서 가장 좋은 곳을 네가 먼저 택하라, 네가 우편으로 가면 나는 좌편으로 갈 것이고, 네가 좌편으로 가면 나는 우편으로 갈 것이니 네가 먼저 좋은 땅을 가지고 가라" 아브라함은 여기서 어른 답지 않게 조카와 재산 때문에 다투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재산과 비옥한 땅을 조카에게 모두 넘겨 주고는 자기는 쓸모 없는 황무지 땅을 차지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모습 입니다. 아마 그는 조카가 버린 황무지 벌판을 바라 보면서 조카에 대해서 배반감을 느끼면서 인생무상을 느꼈을 것이고 인생의 비애 까지도 느꼈을 것입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데려다 길러서 키워 놓았더니 이렇게 배반하고 그를 떠나 버렸습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때로 이렇게 사람들을 삭막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 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위로 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저 동서남북을 바라 보라, 보이는 땅은 모두 내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니 네 자손이 저 땅에 널려 있는 모래와 같게 하리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때로 버려야 할 때는 과감하게 버리고, 미련 없이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상을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용단을 내리고, 결단을 하고, 그렇게 믿는 생활이 신앙의 생활 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이웃간에, 친구간에, 이 물질 때문에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불행을 당하는 사람, 불행을 당한 가정, 불행을 당한 이웃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 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신앙적인 요소는 바로 이 결단력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 나셔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장 내일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라고 하시면 훌훌 털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 어려운 일 입니다. 아브라함이 정작 고향을 나서려고 할 때 그를 붙잡는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우선 안정된 생활이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나이 75세 입니다. 이제 뭘 더 먹겠다고, 무슨 낙을 더 누리겠다고, 다시 고생을 시작하겠습니까. 또 고향이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노년에 이르면 떠났던 고향도 다시 찾는 법인데, 다 늙어서, 새삼스럽게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용이한 일 입니까.
친구들과 친척들도 나서서 극구 만류를 했을 것 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길이고, 그것이 옳다고 판단한 이상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고향을 떠나 버립니다. 솔직히 말하면 왜 고향에 대한 미련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과감한 결단력이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던 것 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같은 결단 있는 행동이 마침내 아브라함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시대를 살아 가는데는 이같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오죽이나 유혹이 많은 시대 입니까. 이런 시대에 이같은 결단력이 없이 그것 다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헤쳐 나가며 살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는 우유부단해 가지고는 살아 가는데도 어려움이 많고, 더구나 신앙생활 하는데에도 모양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과감하고도 분명한 자세로 살아 가야 모양있고 내실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롯의 부인을 보십시요. 불붙는 소돔성을 잊지 못하고 뒤를 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는 불행을 당했지 않습니까. 뒤를 돌아다 보면 않된다는 경고를 수차 받고서도 그 미련을 끊지 못해서 뒤를 보다가 비극적인 여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보면 이 롯의 부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옛날을 잊지를 못합니다. 옛날을 과감하게 청산하는 결단이 부족합니다. 그러다가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도 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 무슨 신앙의 열매가 열리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위대했던 것은 바로 이 끊고 맺음이 분명했던 점 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일 때, 그것이 틀림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되었을 때, 그때 그는 무서울 만큼 냉정하게 결단 내리고 나아 가는 그 행동, 그것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브라함을 만든 요소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분명한 신앙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면 이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상 하시고, 그런 사람이 나아 가는 길을 인도 하시는 것 입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