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획   (호세아 1:10-11)

1:1에 밝히고 있는 대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입니다. 이 때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였습니다. 이 때가 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7명의 왕들이 등장을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스가랴가 등장을 하지만 6개월만에 살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도 한 달만에 므나헴에게 살해되어버립니다. 므나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의 신하 베가에 의해 2년만에 살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 베가 역시 호세아에게 살해되고 호세아의 통치 시절 그만 앗수르의 속국이 되어 포로로 잡혀 가버리고 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바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흔히 왕이 바뀌면 역사가 바뀐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는 7번이나 역사가 뒤바뀌는 그런 시대였던 것입니다. 즉, 나라가 7번이나 뒤집어졌던 것입니다. 한 번 나라가 뒤집히고 역사가 바뀌어도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묻어두게 되는데 7번씩이나 나라가 뒤집혔다면 그 시대가 어떠했겠습니까? 당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아픔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대에 호세아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처음 호세아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을 때 얼마나 가슴을 설레며 기대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호세아의 기대를 산산이 무너뜨리셨습니다. 호세아가 처음 부름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맨 먼저 하신 말씀은 전혀 뜻밖의 말씀이었습니다. 요나에게 처럼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하신 것이 아니고 모세에게 처럼 “내 백성에게 가라”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에게 하신 명령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주어질 수 있으며 하나님은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명령

성경을 살펴보면 그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갈대아우르에서 잘 살고 있던 아브람에게 “너는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셨고,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에게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예언하라(사 20:3,4) 하셨으며 예레미야에게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얹고 다니며 예언하라(렘 27:2) 하셨습니다.

선지자로 부름받은 호세아에게 맨 처음 내리신 명령은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음란한 아내라 마음뿐 아니라 행동까지 음란한 여자 음란을 직업으로 삼는 여인을 말하는 것이며 음란한 자식이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음란한 여자의 자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가끔 우리에게 전혀 엉뚱한(?) 명령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했다가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명령을 듣고 나면 고개를 흔들면서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왕국 말기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왕이 시드기야를 잡아가고 그 대신 총독으로 그달랴를 세우자 이스마엘과 친구 십여명이 암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렘41장).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한 유다 사람들은 요하난을 앞세워 예레미야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렘 42:5). 그러나 열흘동안 기도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애굽에 내려가지 말고 그냥 머물러 있으라 하였을 때 그들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요하난과 함께 온 사람들은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렘 43:2,3) 하고 그의말을 청종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복이 있으리라”(렘 42:6) 함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2. 호세아의 순종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요셉과 청혼하고 결혼할 날만 기다리던 마리아에게 하나님은 처녀의 신분으로 아이를 낳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마리아가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눅 1:38) 하고 순종할 때 천사는 떠나갔고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인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라는 명령은 대단히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을 매우 불쾌한 일일뿐만 아니라 율법에도 금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각종 곤충과 벌레를 잡아먹으라는 명령에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행 10:14) 하고 거부했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에야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이런 불쾌한 명령을 받았지만 순종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에게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에 드는 명령만 골라서 순종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더니 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1:3). ‘이에’란 말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순종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하셔서 제사보다 순종을 더 기뻐하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순종의 결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순종한 보람과 기쁨 그리고 복은 큰 것이었습니다. 호세아처럼 힘들지만 순종할 때 무슨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또 음행하는 여인 고멜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이스라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이스르엘’이라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이는 ‘로루하마’라고 부르게 하셨는데 그 뜻은 ‘사랑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아이는 ‘로암미’라고 부르라 하셨는데, 그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이름들은 모두 이스라엘 심판에 대한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순종한 나아만은 문둥병을 치료받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야를 탄생시켰으며,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는 주님의 이상한 명령에 순종했던 하인들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이해되는 것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판단력에 순종하는 것이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 하고 순종했을 때 두 배에 잠길 만큼 고기를 잡은 것처럼 어려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순종할 때 영과 육, 두 배에 가득 차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계획

호세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다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범죄하여 “내 백성이 아니라”하고 포기하신 하나님께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사랑으로 안아주시겠다는 약속말입니다.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한 길에서 돌이키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백성의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설령 해로울지라도 변치 않으시는 분(시 15:4하) 이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1:10) 당시 이스라엘 왕국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열왕기하 15:19에 보면 앗수르왕이 침략했을 때 이스라엘왕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주어 돌려보냈는데 그 은을 국민들로부터 50세겔씩 내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1달란트는 약 3천세겔이니 6만명 밖에 세금을 낼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도움도 받지 못하던 그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대로(창 12:3)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통해 주신 이 성장의 약속은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롬 4:16)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주어진 것입니다. 불과 12명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는 이제 전 세계의 1/4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고 불과 1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나라는 1/5이상이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성장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교회의 지금 모습은 작고 초라합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은 내세울 것 없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쓰실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 나무를 이루듯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장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보여 한 두목을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라”(1:11). 본래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어 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스스로 통치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적 야욕이 국가를 분단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두 나라를 하나로 묶어 한 지도자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민족에게 주신 신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도 본래 하나이던 민족이 사람들의 야욕에 의해 나뉘어진지 50년이 지났습니다. 햇볕 정책을 쓰고, 쌀, 기름, 전기…… 열심히 퍼다 주지만 우리 나라가 하나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민족이 하나되기 전에 먼저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처럼(고전 1:11,12) 나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모두 주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할 것입니다.

“그 땅에서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1:11하). 포로된 땅, 원수된 땅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잡으려 해도 바로왕의 고집과 추격을 물리치시고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듯 하나님은 언제나 승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 사망의 포로가 되었던 우리를 살리시어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게 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이끌고 인도하셔서 말씀 안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봅시다.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시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종들이 되어 그분의 뜻에 순종하고 따를 때 이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출처/황의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