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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양식 (요한복음 6:25-30)
망해가던 클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를 다시 일으킨 아이아코카(Lee Iacocca)의 자서전에 보면, 한 할머니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자유의 여신상 보수위원회를 맡아 일할 때 자유의 여신상을 보수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한 노인이 5만 달러(한화 6,000만원)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아이아코카가 감사의 편지를 보냈더니, 이번에는 7만 5천 달러(약 8,000만원)를 더 보내오고, 얼마 후에는 20만 달러(약 2억 4천만원)를 보내왔습니다. 큰 사업가인 아이아코카도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그 노인이 어떤 분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그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려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얼마후 그 노인에게서 이런 회답이 왔습니다.
"나는 조그마한 세탁소를 하고 있는데, 70이 가깝도록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할까 고민하다가 자유의 여신상 보수 공사가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의미있다고 생각되어 돈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식사 값은 아껴서 좋은 일에 쓰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거니와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주위 사람을 감동시키고도 남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소유가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감사(thank)라는 단어는 12세기 경부터 고맙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영어의 "생각하다"(think)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진실된 감사르 드릴 수 있습니다.
말세의 풍조 가운데 하나는 "감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2). '감사는 최소의 미덕이요,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최대의 악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이 악해지면 사람들은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감사하는 마음 대신에 불평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갈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불평하는 마음으로 변해갑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리고 있는지, 어떻게 감사드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장기적인 불황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이태백'이니 '사오정'이니, '오륙도'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실업 문제가 심각합니다. 2,30대 사망원인 중 자살이 1위이고, 또한 전체 자살자 중 40대 미만의 자살율이 반절이나 되는 것도 경기침체의 여파라고 합니다. 정말 요즘은 "감사하다"는 말대신 "못살겠다"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당리당략을 위해 이념 논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도무지 감사할만한 일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우리 나라의 악법 가운데 대표적인 악법인 국가 보안법은 유엔이나 엠네스티, 그리고 미국에서조차도 폐지를 권고할 정도로 큰 문제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야 모두 이보다는 우리의 경제 문제에 온 힘을 기울여 이 난국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경제문제는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아들, 딸들이 직장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귀중한 생명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노동자, 서민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기는 하루빨리 이 나라의 경제가 회복되어 우리 젊은이들이 직장에서 활발하게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가 땀흘린 만큼 댓가를 받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좋은 것들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기보다는 남들과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쉽게 불평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큰 죄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는다면 그것은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막고 하나님의 복 또한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고백하는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불구의 몸으로 영화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헤럴드 러셀에 관한 이야기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는 제 2차 대전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포탄을 맞아 두 팔을 잃고 신체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좌절 속에서 그는 "나는 이제 쓸모 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츰 마음을 회복하여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구의 몸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기 시작했고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게 된 그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가 그렇게 된 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의 장애는 나에게 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잃은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을 찾아서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보다는, 이미 주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 그 이상 감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시 100:4)라는 다윗의 찬양처럼 감사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영생의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물론 감사하다는 말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드리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계속해서 '떡'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떡'은 보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때 유대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벳데다 뜰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 시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 되면 경제문제만큼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사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복음'이었습니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문제는 사람들에게 가장 다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허기를 채우는 양식보다,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영생의 양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례로, 1960년대까지 북한은 경제적으로 남한 보다 더 나았다고 합니다. 또한 잘 살기 위해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의 최빈국 가운데 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물질 만능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물질만능주의가 아닌 '복음만능주의'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사회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물론 사회정의를 세우고 구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복음 전파를 위한 교회 사역이 더 우선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 복음을 위한 일, 교회를 위한 일은 영원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 가정과 나라와 세계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니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29절) 유대인들은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쌓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노력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와 유사한 장면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어떤 젊은 관원이 예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그 동안 그가 쌓아 놓은 것이 영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동안 자기가 이룩해놓은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근심에 가득 차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유대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뭔가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해낸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이루어 놓은 일이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음 가운데 방치하시는 무정(無情)하신 분으로 오해하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따로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일'을 해 나가게 됩니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지만,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그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영국의 청교도 120명이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프리머스에 상륙한 지 2년째 되는 해에 거둔 수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 데서 비롯된 절기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받음을 감사하며 더 큰 믿음을 간구하고 주의 일, 거룩한 일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망해가던 클라이슬러 자동차 회사를 다시 일으킨 아이아코카(Lee Iacocca)의 자서전에 보면, 한 할머니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자유의 여신상 보수위원회를 맡아 일할 때 자유의 여신상을 보수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한 노인이 5만 달러(한화 6,000만원)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아이아코카가 감사의 편지를 보냈더니, 이번에는 7만 5천 달러(약 8,000만원)를 더 보내오고, 얼마 후에는 20만 달러(약 2억 4천만원)를 보내왔습니다. 큰 사업가인 아이아코카도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아이아코카는 그 노인이 어떤 분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그 노인에게 식사를 대접하려고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얼마후 그 노인에게서 이런 회답이 왔습니다.
"나는 조그마한 세탁소를 하고 있는데, 70이 가깝도록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할까 고민하다가 자유의 여신상 보수 공사가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의미있다고 생각되어 돈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식사 값은 아껴서 좋은 일에 쓰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거니와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주위 사람을 감동시키고도 남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소유가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감사(thank)라는 단어는 12세기 경부터 고맙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영어의 "생각하다"(think)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게 되면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진실된 감사르 드릴 수 있습니다.
말세의 풍조 가운데 하나는 "감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2). '감사는 최소의 미덕이요,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최대의 악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이 악해지면 사람들은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감사하는 마음 대신에 불평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갈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불평하는 마음으로 변해갑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감사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드리고 있는지, 어떻게 감사드려야 하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지금 장기적인 불황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이태백'이니 '사오정'이니, '오륙도'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실업 문제가 심각합니다. 2,30대 사망원인 중 자살이 1위이고, 또한 전체 자살자 중 40대 미만의 자살율이 반절이나 되는 것도 경기침체의 여파라고 합니다. 정말 요즘은 "감사하다"는 말대신 "못살겠다"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은 경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안하고, 당리당략을 위해 이념 논쟁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도무지 감사할만한 일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우리 나라의 악법 가운데 대표적인 악법인 국가 보안법은 유엔이나 엠네스티, 그리고 미국에서조차도 폐지를 권고할 정도로 큰 문제가 있는 법이기 때문에 폐지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야 모두 이보다는 우리의 경제 문제에 온 힘을 기울여 이 난국을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경제문제는 시급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우리의 아들, 딸들이 직장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귀중한 생명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노동자, 서민들이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고통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기는 하루빨리 이 나라의 경제가 회복되어 우리 젊은이들이 직장에서 활발하게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두가 땀흘린 만큼 댓가를 받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좋은 것들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하기보다는 남들과 비교하면서 우리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쉽게 불평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큰 죄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는다면 그것은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막고 하나님의 복 또한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고백하는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불구의 몸으로 영화에 출연하여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은 헤럴드 러셀에 관한 이야기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는 제 2차 대전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포탄을 맞아 두 팔을 잃고 신체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좌절 속에서 그는 "나는 이제 쓸모 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츰 마음을 회복하여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구의 몸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기 시작했고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게 된 그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가 그렇게 된 것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의 장애는 나에게 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잃은 것보다 남아 있는 것을 찾아서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보다는, 이미 주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 그 이상 감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시 100:4)라는 다윗의 찬양처럼 감사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영생의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물론 감사하다는 말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드리는 것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계속해서 '떡'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떡'은 보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때 유대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벳데다 뜰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 시대의 경제 문제를 해결해 주실 메시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이 되면 경제문제만큼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사는 썩을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복음'이었습니다. 문제는 물질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문제는 사람들에게 가장 다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의 육신의 허기를 채우는 양식보다,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영생의 양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례로, 1960년대까지 북한은 경제적으로 남한 보다 더 나았다고 합니다. 또한 잘 살기 위해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세계의 최빈국 가운데 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비롯된 물질 만능주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물질만능주의가 아닌 '복음만능주의'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사회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말입니다. 물론 사회정의를 세우고 구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복음 전파를 위한 교회 사역이 더 우선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 복음을 위한 일, 교회를 위한 일은 영원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 가정과 나라와 세계를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니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29절) 유대인들은 영생의 대가(代價)로 많은 인간적 업적을 쌓아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더러 일 하라고 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씀하신 "일"이라는 것은 신앙을 의미하였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어떤 노력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믿음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와 유사한 장면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옵니다. 어떤 젊은 관원이 예수께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것'이 있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그 동안 그가 쌓아 놓은 것이 영생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동안 자기가 이룩해놓은 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근심에 가득 차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유대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뭔가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 어떤 위대한 일을 해낸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없이 이루어 놓은 일이란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신임하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임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육신(成肉身)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과 깊은 교제를 가지시기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음 가운데 방치하시는 무정(無情)하신 분으로 오해하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 자신을 받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따로 하늘의 하나님을 보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일'을 해 나가게 됩니다. 어떤 성도는 말하기를, "만일 전적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일어난다면, 세상의 역사는 변화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스펄죤(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지만,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그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영국의 청교도 120명이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프리머스에 상륙한 지 2년째 되는 해에 거둔 수확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 데서 비롯된 절기입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구원받음을 감사하며 더 큰 믿음을 간구하고 주의 일, 거룩한 일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