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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받으면 (삿2:1-5, 엡2:8-10)
사람이 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는 인간의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문제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는 은혜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늪에 빠진 황새가 빠져 나오기 위해 다리를 빼면 부리가 늪에 박히고, 부리를 빼면 다시 다리가 빠지고... 이를 반복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방법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잘 살려고 애쓰면 건강이 희생되고, 건강 문제를 해결하면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고, 내가 편하고자 하면 다른 사람의 희생이 따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귀함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은혜를 주실 때만이 우리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국가의 문제, 세계의 모든 복잡한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부작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느 한쪽만을 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잘 되게 합니다. 세상은 자격이 있는 사람, 잘난 사람을 찾고, 그를 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격이 없는 자들을 부르셔서 은혜를 부어 주시고, 자격이 있는 자로 만드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비밀이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 앞에 맡기면,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하나님은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듯이 내 잘못된 가정과 기업과 건강에 은혜를 주셔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못쓰는 자를 찾으셔서 귀한 자로 만드십니다. 마귀는 좋은 것도 나쁘게 만들고, 나쁜 자를 더욱 나쁘게 만들지만 주님은 좋은 자를 더 좋게 하시고, 나쁜 자도 좋게 만드시는 은혜의 주님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회는 누가 나옵니까? 은혜 받는 자가 날마다 더 은혜를 받으려고, 은혜 안에 살려고 교회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면 이 광야를 천국 같이 살아 갈 줄 믿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은혜를 빼앗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떠나 살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항상 푸르게 하시고, 메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이 은혜는 어디에서 옵니까?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옵니다. 예수 님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1. 은혜를 잃어버린 자들(삿2:1-5)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항상 축제와 같은 기쁨의 삶이 되기 원하시지만, 우리가 고통과 애통의 삶으로 전락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자기 멋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배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지나간 과거를 통해 배우고 깨닫지 못해서, 아픔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신앙인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됩니다. 고전10:11에서는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실패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멧돼지는 도토리를 참 좋아한다고 합니다. 도토리를 먹다가 도토리가 없어지면, 도토리가 땅에서 나는 줄 알고, 자꾸 땅을 파헤친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위에서 떨어져도, 위를 보지 못하고, 자꾸 아래의 땅만 팝니다. 그러니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우리는 멧돼지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영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사사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를 표면적인 이유를 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신앙의 타락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1).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1-2).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이방인)과 언약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를 즐기는 이방인들을 따라가면, 보고 배우게 되어, 결국 타락하기에 금하셨습니다. 죄는 우리를 저항하지 못하게 하면서, 끌고 가는 힘이 있기에, 죄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도, 유혹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삼손은 혼자서 블레셋 3천 명을 죽인 영웅이지만, 여인의 유혹 앞에서는 넘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 왕은, 모든 왕들의 귀감이요 모범이었지만, 한 여인의 목욕 장면에 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단호하게 없애버려야 합니다.
불에 데이지 않으려면, 불장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지을 수 있는 가능성조차 배제해 버리고, 기회조차 갖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편)
오늘날 왜 많은 성도들이 죄를 짓는가? 우리가 걸핏하면 죄 앞에서 넘어지는가? 죄 지을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도, 피하지 않기 때문에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젠가 설교준비를 하다가, 인터넷에서 안보면 절대 후회한다는 문구가 써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클릭했는데, 낯뜨거운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음란 사이트와 연결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껐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에 또 생겼습니다. 불사신처럼, 죽이면 또 다른 창으로 살아났습니다. 너무나 놀랬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컴퓨터를 그냥 껐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으로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한번 볼 걸 그랬나…, 그래서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딤 전6:11절을 보면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거민과 언약을 맺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가나안 거민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어떤 군사적 이유나 전략의 실수 때문이 아닙니다. 가나안의 철병거 때문도 아니고,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신앙의 타락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투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의 힘이 약하다거나, 환경이 어렵다거나, 넘기 힘든 장애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신앙의 타락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패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없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탄식하십니다.
2). 은혜를 잊으면,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3-5).
여호와의 사자는 이제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옆구리의 가시가 되기에, 그들은 안식을 누릴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순종했다면 축복이 임했을 텐데, 불순종했기에 저주가 되었습니다. 안식의 땅에 들어왔지만, 안식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축복의 약속이 저주로 변했습니다. 4-5을 보면, 갑자기 백성들이 울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기에, 그 곳을 보김(우는 사람들, 통곡하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1절 이하를 보면,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물은, 참 회개가 아니었고, 그들의 예배 역시 참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회개에는 눈물이 반드시 따르지만, 울었다고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은 아닙니다. 가짜 눈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악어의 눈물'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사람을 만난 악어가, 사람을 죽여놓고, 그 사람을 위해 울어 주고는, 잡아먹는다는 데서 유래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우는 악어의 눈물, 이 눈물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눈물입니다. 사극을 보면, 왕의 환심과 동정을 사기 위해, 가식적으로 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물만 흘린다고 회개가 아니라, 삶이 변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 님을 팔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에는 삶의 태도에서,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면서, 의식적으로 제사를 드렸던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삶의 변화 없이, 습관적으로 제물만 가져오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사1:11-13).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가?
삶의 변화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형식과 의식만 남은 예배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처럼 삶을 돌이키는 울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보아야합니다. 신앙의 '실제성'을 잃어버리고 형식주의에 빠져들고, 교만하면 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교만함을 이기게 됩니다. 교만함을 버리는 비결이 감사입니다. 감사하면 교만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무시 조롱 당하고 멸시되어옴(초대교회-현재까지)
은혜와 정의의 차이. 빅톨 위고의 장발장 빵 훔친 죄 19년 옥중생활, 출소 신부가정 은잔 훔침, 형사 자베르(정의의 사람) 한번죄인 영원한 죄인으로 인정, 은잔 훔친 장발장과 신부에게 찾아감, 신부 잘 오셨습니다 은잔과 촛대를 선물로 주었는데 촛대를 놓고 가셨더군요, 쟝발장 은혜 받고 변화됨, 형사 자베르 쟝발장 도움 받지 않고 자살. 문학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표현.
2. 은혜를 받으면(엡2:8,9)
1),말씀중심, 예수중심의 삶을 삽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포도원 일꾼 이야기 마20:1-16이 비유 자체로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포도원을 가진 어떤 주인이 자기 밭에서 일할 일용직 근로자를 구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장터에 나갔습니다. 거기에 사람이 있어 하루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자기 밭에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화폐단위인데 한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 직업군인의 하루의 품삯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삼시, 곧 아침 아홉시 경에 나가보니 장터에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자기 밭에 가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육시인 열두시와 제 구시인 오후 세시, 제 십일시인 오후 다섯시에도 나가보니 여전히 장터에 일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자기 집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하루 열 두 시간씩 일한 것을 감안할 때 하루 일을 마치는 한 시간 전까지 사람을 불러 일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날이 저물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일한 품삯을 계산할 때 포도원 주인은 나중에 온 자들부터 품삯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특히 나중에 온 자들에게, 심지어 일과를 마치기 한시간 전에 온 사람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 때 아침 일찍 와서 열 두 시간을 다 채운 사람은 어떤 기대를 가지게될까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은 아침 아홉시부터 와서 일한 사람과는 구분되어야 하고 더 많이 받을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오후 다섯시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우리가 생각할 때 이 비유가 단순하지만 어렵다고 하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들도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주인에게 불평하면서 마태복음 20:12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이 때에 포도원 주인은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에게 그들이 불평할 근거가 없음을 밝혔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처음부터 그들과 약속한 품삯을 받았기 때문에 주인의 부당성을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은 처음부터 그들과 약속한 품삯을 그대로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 주인에게 항의하는 것은 원칙이 무시되고 불공평하게 일이 처리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네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고 질문으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포도원 주인이 똑같이 베푸는 은혜를 시샘하는 질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나 노력으로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은 현재 우리 가운데 임해 있으면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인 성격과 미래에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들어가게 될 미래 적인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현재적인 천국에 들어와 하나님과 교제하며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것과 미래에 완전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기다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베드로가 한 질문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감사가 들어설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백성이 되게 해 주신 일에 대한 감사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백성이 된 것이 우리의 지혜와 능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표현으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교회를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회개 중심의 삶, 용서의 삶을 삽니다(탕자 눅15장)
아버지의 사랑에는 입맞추는 용서함이 있었습니다. 20절에 보면 달려오신 아버지는 아들의 입을 맞추며 그를 끌어안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한번 입맞춘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계속해서 많이 입을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이 입맞춤은 아들의 과거에 대한 넉넉한 용서를 전달하는 아버지의 멧세지입니다. 아들은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죄송해서"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하는데 그러나 아들이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게 아버지는 다시 "그의 말을 가로막고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을 연거푸 맞추며" 말했을 것입니다. '괜찮아 내 아들아 내가 다 알아. 내가 다 알아' 아버지는 그가 돌아 왔기 때문에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이미 다 용서해 놓고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용서만 가지고 만족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그가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그의 신분을 완벽하게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22절에 보면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십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십니다""성경에 보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오자 마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범 죄 함 때문이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한가지 뿐 입니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께 돌아왔다"(He came to himself)고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최대의 장애물은 죄 문제와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장애물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중보자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3),헌신의 삶을 삽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요20:11-18)
예수 님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 님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 한 세 여인을 들라면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베다니의 마리아일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예수 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 님을 분명하게 증거한 사람입니다. 예수 님의 십자가 아래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 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전파한 사람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수 님께서 자기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세상에 전파하라고 제일 먼저 부탁한 사람이 열 한 제자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님의 신임과 사랑을 가장 깊이 받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장 먼저 증거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막달라 마리아 때문에 열 한 제자들도 의심의 자리에서 믿음의 자리로 돌아왔고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의 전도를 통해서 옳은 데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 들려서 미쳤던 사람이었습니다.
녹7:2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이었고 일곱 귀신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몸도 정신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파괴되어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었던 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남편의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고 친구나 사회의 학대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음식도 잠도 일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슬피 울기도 하고 무덤가를 거닐기도 하고 물에 빠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파괴된 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폐인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생각도 제대로 하고 말도 제대로 하고 음식도 제대로 먹고 잠도 제대로 자고 일도 제대로 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님이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2)막달라 마리아가 부도덕한 길거리의 여자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눅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자와 동일시합니다. 죄인인 한 여자에 대한 기사 바로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눅8장 초두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눅7장에 나오는 시몬에게 멸시를 당하던 길거리의 부도덕한 여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도 그 여자를 가리켜 "그 동네에 살던 죄인인 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고레기오라는 화가가 그린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은 욕망의 색갈로 가득한 길거리 여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런 윤락의 늪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몸과 영혼을 저주하고 멸시하던 죽음의 자리에서 자기의 몸과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는 생명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말해서 막달라 마리아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 님이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3) 항상 예수 님 곁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예수 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 님을 섬기고 봉사하고 받들며 사랑했습니다. 346장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즉시 예수 님에게로 달려가서 사람들의 멸시를 개의치 않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 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예수 님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3백데나리온(천오백만원) 보통 사람이 하기 힘든 지극한 사랑의 행동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가롯유다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믿음은 후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리라고 칭찬했습니다.
눅8:2,3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죄악에서 건짐을 받은 즉시 몇몇 여인들과 함께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 님과 예수 님의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에서부터 온 많은 여인들과 함께 울면서 십자가 행렬을 따라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셋째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세상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광을 위해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주님의 분부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뛰어가서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열 한 제자에게 전했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8).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마리아는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도 달려갔고 부도덕한 사람들에게도 달려갔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 님을 뜨겁게 증거 하는 충성된 증인이 되었습니까? 예수 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님을 너무 사랑해서 항상 예수 님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뜨겁게 증거 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니 마리아의 10분의 일만 주님을 사랑하고 마리아의 10분의 일만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려면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주님을 만났고 새벽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새벽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새벽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고 주님을 뜨겁게 증거 하시기를 바랍니다.
'토레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가,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부흥 집회를 하다가 예화를 하나 들었습니다. 미국과 카나다 접경 지대에 가면, 미시간호라는 큰 호수가 있는데, 바다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입니다. 그 호수를 왕래하던 연락선이, 하루는 사람을 많이 태우고 가다가,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배에 탔던 사람들은, 꼼짝없이 다 죽게 되었는데, 23명이 살아 남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때마침 노스웨스트 대학에 다니는 수영 선수가 그 부근에 있다가, 배가 침몰하는 현장을 보고 뛰어들어 한 사람, 두 사람 건져내다 보니 23사람을 건져냈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사람을 구한, 이 사람의 갸륵한 정신을 본받자고 예화를 들었습니다. 그 예화가 끝나자마자, 설교를 듣고 있던 교인 중의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목사님!'하고 외쳤습니다. "목사님! 바로 그때 그 수영 선수가 접니다." 그러자 토레이 목사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23명을 구하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느낀 점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20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사람도 고맙다며 찾아와 인사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릅니다. 목숨걸고 살려주었건만, 한 명도 감사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의 노력은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다만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보좌 위에서 선언되는 위대한 선포입니다. 우리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구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로 죽은 관계로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할 구주가 필요한데 흠 없으신 예수 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내 대신 죽어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은혜"라고 하는 말과 "믿음"으로 라고 하는 말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이 맞는지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 맡는 것인지 어떻습니까! 둘 다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은혜로 구원 얻은 것이요,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믿음으로 구원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예수병원원장과 할머니의 봉동 이야기 무거운 짐 마11;28)
한국의 성자라고 일컫는 손 양원 목사님은 여수 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을 공산당에게 학살당했는데 그때 그는 애향원에서 부흥회 인도함 부흥회 마치고 그 아들의 영결식에서 다음과 같이 열 가지를 감사했습니다.
1.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감사합니다.
3.삼남 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 차남을 하나님께 바치게 된 축복을 감사합니다.
4.한 아들의 순교도 감사한데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니 감사합니다.
5.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 축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가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6.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으로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9.이 같은 역경 중에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의 신애를 기쁜 마음과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10.오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복을 주신 하나님 감사하오며 영광 돌려 드리나이다.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36년간 눈물로 된 기도요 결정입니다. 나의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기도해 주셔서 열매를 거두게 하니 감사합니다
내게 은혜 주신 것도 하나님 아버지요! 내가 믿게 된 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요! 내가 교회에 나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만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출처/원영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