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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전 3:1-15 (허무한 삶을 극복하는 비결)
이 세상에는 수많은 난제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 스스로는 풀 수 없는 많은 난제들이 있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기 위해 싸워야 하고, 많은 고생을 겪어야 하고, 많은 질고도 당하고, 자식을 키우느라 많은 수고를 하다가 이제 좀 쉬어야지 하면 어느새 늙어있고, 그러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후세 사람들은 그런 나를 기억도 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산다는 것인가?
왜 어떤 이는 100세까지 사는데, 나는 이 젊은 나이에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남은 다 손쉽게, 아니면 고생한 대가로 다 성공하여 잘 사는데 나는 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늘도 이렇게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가? 남은 다 어려운 일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토록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이러한 인생의 난제들에 대해 묻기를 계속한다면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이런 난제들을 우리가 이미 알고 풀 수 있는 문제라면 참으로 속 시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찌 이런 난제들을 다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산다는 것이 참 묘할 때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인간사를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크게 두 가지 있다.
①운명론(運命論, fatalism)이다. 다른 말로 숙명론(宿命論)이라고도 한다. 운명론을 잘 말해주는 시를 하나 소개하겠다. 존 드라이언(John Dryden)의 시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태어났다 죽으니,
아무도 정말 놀라운 행복이란 알 수 없어라
어떤 일에도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참고 나가세
우리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일 가지고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마세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순례자처럼 나갈 뿐일세
세상은 여인숙
죽음은 그 여정의 끝이어라 』
무슨 어려운 일이 찾아온다 해도 한결같은 마음 곧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참고 나가세. 우리가 염려해도 되지 않는 일 가지고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마세.
이 싯귀 속에 나타난 사상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이 있고 모든 일은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데 그것을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슬퍼한다고 되는가? 어쩔 수 없네.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슬퍼도 참게나.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야!"
이것이 운명론이요 숙명론이다. 그러나 이 자세는 매우 소극적이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저 견디어 내려고 기를 쓸 뿐이다.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그저 잊어버리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노래방으로 가서 목이 터져라 한 많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옥중에서의 사도 바울과 같이 끝까지 견뎌내면서 기뻐하고 찬송을 부르고 감사한다는 그런 삶의 자세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가는 순례자처럼 나갈 뿐일세. 죽음은 그 여정의 끝이어라. 무슨 말인가?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정해진 운명을 향해 계속 참고 나아가지만 그 끝은 죽음이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모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참고 살아가는데, 그렇다고 무슨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 저 너머에는 아무 소망도 없이 죽음으로서 우리의 모든 여정은 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삶의 가치가 있고 기쁨이 있고 허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겠는가? 운명론은 인간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사상인 것이다. 모든 일이 원인자 없이, 섭리자 없이 그냥 운명적으로 다가온다면, 그래서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면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태어나고 죽는 일이 섭리자의 뜻도, 목적도 없이 그냥 운명적으로 일어난다면, 그래서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인생이 되겠는가?
②인간사의 난제를 바라보는 또 다른 자세가 있다. 그것은 섭리론(攝理論)이다. 이것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있고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만사에는 지배자가 있다는 것이다. 원인자가 있고 성취자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의 조그마한 일도 결코 그 지배자의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도 우연하게 일어날 수 없고 모든 것이 지배자의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지배자란 바로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것이 섭리론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한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바로 섭리론을 말씀하고 있다. 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하신다. 2절부터 8절까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할 때"라는 어구를 28회나 반복한다. 이것은 인간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포함하는 의미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기한이 있고 그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우연이나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이 모든 일이 원인자 없이, 섭리자 없이 그냥 운명적으로 임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없이 그냥 딱 정해진 운명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진다면 이거 얼마나 비참하고 의미 없는 인생이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분명 믿고 확신하고 또 경험한다. 이 모든 일을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1966년 10월 21일 아침 9시 15분, 이제 막 1교시 수업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 사우드 웨일즈 탄광으로부터 석탄 폐기물 더미가 고요에 잠긴 탄광촌 아버팬으로 내리 덮쳤다. 그 날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참사는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새까만 진흙으로 변한 석탄 찌꺼기가 구릉을 타고 흘러 내려 교실을 덮쳤다. 피할 사이도 없이 5명의 교사와 109명의 아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때 한 BBC 방송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한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수하신 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이런 일들까지도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떠난 어떤 일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1. 하나님을 떠난 삶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솔로몬은 앞에서 네 가지 허무의 실례를 말했었다. 1:12-18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인간사의 여러 불합리한 일을 결코 해결하지 못하니 그 지혜와 지식은 헛되다고 했다. 2:1-11에서는 육체적 쾌락을 채우기 위해 갖은 일을 다 해보았으나 지속적 쾌락은 누릴 수 없으니 헛되다고 했다. 2:12-17에서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공평하니 살아있는 동안에 지혜자니 부자니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했다. 2:18-23에서는 사람이 수없이 수고하여 재물이나 명예나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 놓지만 결국 얼마가지 못해 죽어야 하고, 죽는 순간 그 모든 것을 뒤에 누가 취할지 모르지만 그냥 다 놔두고 빈손으로 가야 하니 허무하다고 했었다.
솔로몬은 그렇게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본문 9-10절에서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때를 주장하시고, 모든 기회를 섭리하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스스로 무슨 행복을 얻을 수 있겠으며, 무슨 유익을 얻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나서 인간 스스로 수고하고 애쓴 그 열매는 결국 허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만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섭리를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태어나고 죽는 문제, 우리 인간이 결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다. 심고 거두는 문제, 결코 우리 인간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문제다. 웃고 슬퍼하는 문제, 우리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모든 문제가 다 인간으로서는 명백히 좌지우지 할 수 없는 문제, 인간 뜻대로 이룰 수 없는 문제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 봐야 하나님의 섭리에는 조금도 영향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만사를 절대적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인간사의 불합리한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니 그것이 해결되겠느냐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는 분이 있고 그것을 주시는 때, 시기가 있는데 그분을 떠나서 어떻게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그분이 주시지 않는데 내가 원하는 때에 그런 행복을 내 스스로 만들어 누리려 했으니 그것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어느 시기에 내 영혼을 도로 거두어 가실 분이 계시는데 그 섭리자의 뜻과 계획을 벗어나서 수고해 본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하시는 분 앞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무엇인가 이루고 행복을 찾겠다는 것은 마치 내일 죽어 없어질 하루살이가 천년을 계획해 놓고 오늘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것과 흡사한 어리석음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마음껏 살아보겠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모든 때와 기회를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고서는 결코 허무한 삶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고 솔로몬은 오늘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2. 허무한 삶을 극복하는 비결 -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제 11-15절에서 솔로몬은 이 모든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인 비결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그 비결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라는 것이다. 허무가 없는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인간은 이제 "해 아래"를 바라보고 살던 그 눈을 들어 "해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된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골 3:2). 해 위, 곧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참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초조해 보았자 소용없다. 축복주시는 대로, 응답해 주시는 대로, 은혜주시는 대로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한 섭리를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고 발버둥쳐 봐야 나의 무능함과 연약함만을 깨달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어느 때 무슨 결과를 주시든지 본문 12-13절과 같이 그 섭리에 기뻐하며 순응해야 한다. 고난을 주시든지, 잃게 하시든지, 전쟁하게 하시든지, 울게 하시든지, 슬프게 하시든지, 내가 심은 것을 뽑으시든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든지 간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맡기고 살아가야 그게 참된 신앙인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될 때 인간은 허무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삶을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어떤 은총을 주시는가? 11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신다. 만사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아름답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내가 순응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은 나를 섭섭히 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가 되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나를 만족케 하시는 분이시다.
이런 시가 있다.
『나는 주님께 아름다운 꽃을 구했으나
주님은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주셨네.
나는 주님께 나비 떼를 구했으나
주님은 무서운 벌레 떼 내게 주셨다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네. 무서워 떨었네.
절망 속에 홀로 눈물 흘렸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보았네.
그 황홀한 꽃 선인장에서
무서운 벌레 나비 되어 날으네.
오 놀라워라 주의 인도』
시인이 말한다. 나는 주님께 아름다운 꽃을 구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응답으로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주셨다. 나는 주님께 나비 떼를 구했으나 주님은 무서운 벌레 떼를 주셨다. 우리가 이런 일을 맞이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주님께 구하기를 아름다운 인생,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을 구했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가시가 돋친 선인장을 주신다. 고통스러운 인생, 참기 어려운 일들을 허락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님의 그 섭리를 금방 잘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혼란스러워진다. 절망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원망도 불평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지요? 그때는 이해 못했었는데, 언젠가 보니 그 선인장 가시에서 황홀한 꽃이 피는 것이다. 그렇게 쓰디쓴 고난을 통해 황홀한 인생의 기쁨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무서운 벌레 떼를 주실 때 원망도 불평도 했는데, 웬걸요. 지나고 나서 보니 그게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그 무서운 사건들, 나를 절망케 하던 그 일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나비와 같은 좋은 일들로 변하여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인 것이다.
오늘 볼 때는 날카로운 가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꽃으로 변한다. 오늘 볼 때는 번데기로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내일이 되면 이 번데기 속에서 아름다운 나비가 나올 것이다. 오늘은 더럽게 보이지만 내일은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린다. 처음엔 연필로 선만 긋고 그 다음에는 스케치를 조금하고, 그 다음에는 윤곽을 좀더 잡고, 그 다음에는 여기저기 색칠하고, 이러는 동안엔 그 그림이 결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화가가 모든 작업을 끝냈을 때 보면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 슬픔, 어려움, 실패,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일들, 이것들은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허락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눈으로 볼 때는 결코 아름다운 어떤 일들로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불미스러운 일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니 그 고난, 그 실패, 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는지 그때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만사를 하나님의 때에 아름답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비로소 만사를 아름답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그와 같은 섭리에 우리는 모든 것을 맡기고 결국에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인생 전체를 맡기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 인간은 진정 오묘한 섭리를 펼쳐 나가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가야 마땅한 것이다(14절). 이게 인간의 본분이요, 이를 떠나서는 허무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11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으셨기에 오늘도 사람들은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서 아무리 발버둥친다 하더라도 결코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가득히 채울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살아가면 오직 남는 것은 허무뿐인 것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세상 그 어떤 것으로 채울 수 있으랴! 오직 하나님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채우지 아니하면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울 수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으면 영생을 얻고, 뻥 뚫린 것 같은 나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된다. 예수님 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영원을 사모하는 그 마음을,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채우고도 남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섭리에 역행하는 삶을 살지 말자. 내가 교역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라면 내가 그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 가장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다. 모든 것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여기에 진정한 삶의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계획을 먼저 깨닫고 그것에 내가 순응하여 살아가심으로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바란다.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허무한 삶을 극복하시고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출처/조달용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