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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찾아온 친구 (누가복음 11:5~8)
반기문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확정이 되었습니다. 이는 개인의 명예이지만 국가적인 경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국가적인 경사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작가도 후보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노벨문학상은 터키인에게 돌아갔습니다.
문학속의 예수
1998년도에 노벨문학상을 탄 포르투갈의 호세 사마라구씨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기독교의 복음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나의 전설을 스토리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 앞에 설명했습니다. 그 줄거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전도를 하다가 발목에 피를 흘리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빈 집을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리니까 한 젊은 여인이 나옵니다. “우리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오셨습니까?” “어떤 집이요?” “저는 창녀입니다.” “상관없소. 나는 지금 치료를 받아야 되고, 쉬어야 되니까…” 하고 그 창녀집에 주님이 들어가셔서 치료를 받고 쉬시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그 집에 들렀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과 마주 앉아서 아주 의미 깊은 문안인사를 한 마디 지혜롭게 했습니다. “요즘도 손님이 많이 오시나요?” 그 때 이 여인은 이런 의미 깊은 말을 합니다. “선생님! 여자는 참으로 존경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선생님만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물론 소설의 스토리입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그의 소망이 없는 창녀생활 중에 예수님을 만나서 비상결단을 하고 인생의 길을 돌이키고 주님의 제자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여인이 보여주는 비상결단, 삶의 가치, 여기에 대한 교훈이 크리라고 믿습니다.
열정의 친구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이 아주 의미 깊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밤중에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떡을 빌리려고 왔습니다. 사연인즉, 자기 집에 여행 중인 한 친구가 찾아왔는데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먹을 것을 줘야 되겠는데 할 수 없어 다른 친구집에 가서 떡을 빌리기로 하고 밤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무례한 일입니다. 밤중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다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 가서 떡을 빌린다는 것은 아주 무례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당시의 집은 문이 하나입니다. 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문을 하나 내어놓고 저녁이 되면 닫아버리는, 다시 잘 열지 않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부는 원룸으로 식구들이 다 같이 자고, 한쪽에는 주방기구가 있고, 한쪽은 난로가 있고, 손님이 와도 편하게 모실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집에 온 손님들이 먹지 못하여 시장하기 때문에 빵을 구하여 먹이려고 한밤중에 다른 친구 집을 무례하게 찾아가서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환경은 밤중에 전화를 하는 것도 큰 실례입니다. 잠을 깨우는 일도 큰 실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무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빵을 구하러 간 친구에게 아주 의미 깊은 말씀을 합니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주지 않을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이 친구가 지금 무례하게 요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그 관계 때문에 가서 무례하게 했지만, 사실은 친구라는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기어코 자기 집에 온 이 손님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려고 친구 집에 찾아가서 강청을 해서 그 떡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강청을 했다는 여기에 예수님은 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런 교훈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십니다.
집념의 기도
첫째는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상식으로 보면 밤중에 친구 집에 가서 떡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낯으로 그 시간에 가서 떡을 달라고 합니까? 우리의 환경이나 여건으로 보면 도무지 할 수 없는 행동인대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기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할 만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할 수 있는 기분이 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할 만한 조건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할 만한 어떤 대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닙니다.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내가 도저히 기도할 기분도 아니고, 기도할 의욕도 없고, 기도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기도하는 일에 나는 건강도 안 되고, 나는 시간도 없고, 게으르기도 하고, 나는 기도할 줄도 모르고, 모든 여건을 볼 때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기도하라는 교훈이 여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동기로, 어떤 여건으로 기도합니까? 밤중에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려 온 식구의 잠을 깨우면서라도 떡을 얻는 이 사람처럼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그 본질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의 비상을 걸어야 합니다. 이 친구는 지금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 밤중에 이런 행동은 비상행동입니다. 이건 평상시에 일어나는 행동이 아닙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여기에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섬김의 자세를 가르칩니다. 지금 이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 비상이 걸렸습니다. 자기가 먹으려고 비상이 걸린 게 아닙니다. 자기 집에 찾아온 이 친구를 대접하려고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배고픈 친구를 위해서 비상이 걸린 이 사람, 이 사람의 자세가 섬김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비상
기독교는 섬김을 강조합니다. 봉사를 강조합니다. 나눔은 섬김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섬김, 나눔은 그 본질이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조용히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남을 위해서 비상이 걸려본 적이 있습니까? 남을 돕기 위해서, 남의 딱한 일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내가 비상이 걸려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친구는 남의 배고픔 때문에 자기가 비상이 걸렸습니다. 남 문제 때문에 그는 무례하게 다른 친구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상행동, 이 비상자세, 이것을 주님은 신앙의 본질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내가 비상이 걸린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도자세부터, 섬김의 자세부터 비상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비상 의미가 신앙생활에 살아나지 않는 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걸음을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대답이 옳습니다. “문이 잠겼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들어왔고,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그와 같은 상황만 본다면 도무지 그 집에 찾아갈 수가 없는 것이지만, 친구의 배고픔 때문에 비상이 걸린 이 친구의 마음은 남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용기와 동기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 목회 여담 중에 하나입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교역자 회의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한 낯선 여성도가 저를 찾습니다. “목사님! 지금 병원 응급실에 가 주실 수 있습니까?” 사연인즉 자기 형부가 지금 운명직전에 있는데, 아직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니와 형부의 구원문제 때문에 지금까지 특별기도를 하고 있는데, 아직도 그 형부가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금 임종 직전에 있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니는 남편 곁에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고, 자기는 하도 마음이 괴로워서 교회 새벽기도를 나왔는데, 가다가 자기 마음에 목사님과 함께 가서 기도를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압박을 하기 때문에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보니까 그 남편은 평소에 부인과 처제를 통해 전도를 많이 받았지만 마음을 열지 않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여 혼수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두 자매는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만 제가 가보니까 인사불성 상태입니다. 말을 해도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이목구비의 기능이 다 마비가 되어버렸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자매와 함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본인이 듣는 지, 안 듣는지 모르지만 성령께서 그 영혼에 말씀해 주실 줄 믿으면서 복음을 제시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성령께서 이 불쌍한 남자의 이 생명의 눈을 열어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주님의 보혈의 피로 이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데려가시도록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한 15분 동안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반응은 그 두 자매가 저와 함께 기도한 후에 그렇게 압박을 받고, 긴장을 하고, 그렇게 두려웠던 마음이 다 물러가고, 마음의 평안이 왔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는지는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지만, 남편의 영혼구원 문제 때문에 비상이 걸린 부인의 믿음, 형부의 구원 문제 때문에 비상이 걸린 그 처제의 믿음은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되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남의 영혼을 위해서, 남의 구원을 위해서, 남의 유익을 위해서 비상이 걸리는 이것이 신앙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비상 걸린 현실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비상이 걸려 있습니까? 무슨 일에 우리가 비상이 걸려 있습니까? 모두가 자기 문제입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의 영역입니다. 대부분이 자기 자신 때문에, 자기 욕심 때문에 모두가 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남의 문제 때문에 비상을 걸으라고 합니다. 이 친구가 진정 자기 집에 찾아온 그 친구를 위해서 비상이 걸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밤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어코 빵을 얻어 와서 친구를 먹입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 비상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아브라함의 비상기도를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를 멸하기로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의 구원을 위하여 비상기도를 합니다. 남의 영혼을 위해서, 남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아브라함의 이 기도는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기도입니다. 전도는 비상기도가 따라야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전도를 위해서 우리가 비상을 걸어야 됩니다. 비상을 거는 기도, 비상을 걸고 찾아가는 것, 비상을 걸고 얻어내는 것, 이 친구의 행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살아나야 합니다.
삼성의 전략기획실장 되는 분이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삼성은 앞으로 200년 후에도 건재할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제는 글로벌 경영이라는 용어를 넘어서서 창조경영이다, 이제는 흉내만 내고 남의 뒤를 따라가는 그런 것으로는 삼성의 미래를 보장할 수가 없다, 항상 앞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래 전에 CEO 되는 분은 삼성맨들에게 이런 비상선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헤라클레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처자식만 두고 다 변하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변해가야 된다는 비상선포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기업은 비상경영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도전이, 그만큼 변화가, 그만큼 개혁의 요구가 우리 앞에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남대문시장의 어느 한 골목을 지나는데, 한 점원이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미소를 띠며 애교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신상품이 나왔는데, 꼭 한번 보고 가세요!” 제가 그 점원의 인사를 받으면서 ‘아하! 이 골목이 단순히 장사하는 게 아니고 전쟁을 하고 있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모두가 비상입니다. 노점상에서 장사하시는 그 분들도 그저 장사가 아닙니다. 다 비상사태입니다.
회의할 때 이런 말을 절대 하지 말라는 싫은 말 유형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회의할 때든지, 보고할 때든지, 절대 이런 말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체로 잘 돼 갑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 보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거의 되어 갑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하고 오라는 거지,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한 걸 보고하라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되고 있습니다.’ 그런 보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한 걸 보고하라는 거지, 열심히 하겠다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만간 될 겁니다.’ 국회 청문회나 국회 질의응답하는 것을 보면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확인 중에 있습니다.’ ‘관계부처와 협의해 보겠습니다.’ 한 가지도 분명한 게 없습니다. 한 가지도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그런 국회 질의응답을 듣고 있으니까 너무나 지루한 것입니다. 한 시간 시청을 하려 해도 정말 인내가 필요합니다.
맺는 말
여러분, 오늘 우리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애매한 말들, 이렇게 분명하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은 이런 말을 쓰지 말라고 하는 그 싫은 말들 유형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에 어울리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 합니까? 분명합니까? 확실합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구나!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라!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여기에는 애매한 게 없습니다. 어중간한 게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확실합니다. 정직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요구합니다. ‘신앙생활 앞으로 잘 해보겠습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저 뭐 되갑니다.’ 오늘 우리 신앙생활이 그런 용어에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자세를 벗어나는 비상을 걸어야 합니다. 분명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한 가지를 하더라도 분명하기 바랍니다. 확실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비상 걸린 신앙생활입니다. 밤중에 친구 집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이 비상 걸린 친구, 이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가 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인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거기에 교회의 미래가 있고, 교회의 부흥이 있고, 복음의 역사가 있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창조 역사가 성취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