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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마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2, 13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예수님께서 성전에 도착해 보니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은 매매하고, 돈 바꾸고, 소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파는 장사치들의 호객 행위로 소란스러웠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출애굽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축제를 벌이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에 드려질 제물은 흠 없이 정결한 것이어야 합니다. 1년 내내 소나 양을 돌보면서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타국에 있는 유대인 순례자들이나 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은 산 제물을 끌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오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성전 가까이 와서 제물로 드릴 소나 양을 샀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하던 것이 어느새 폭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준비된 제물과 구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 타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이 생겼습니다. 성전 제사장들은 더욱이 이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이 더럽혀진 모습을 보았을 때 견딜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관계 맺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떤 목적에 의하여 이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정치적인 수단, 경제적인 수단, 사회적인 수단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1. 기도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바위 밑에서 고목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을 비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7:23에 보니 아덴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경배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 속에 신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없이 그냥 생각하는 대로 신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내게 경배하라”(마 4:9)고 했습니다. 귀신들린 정신 이상자들을 보면 두 손을 잡고 아무 곳에나 절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홀려서 마귀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사단에게 명령했습니다.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경배를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8:7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큰 구렁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받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느냐에 대하여는 에베소서 2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 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 의 자녀이었더니”(엡 2:2, 3),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1:12-14)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고 죄사함 받고 영생얻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2. 기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물론 사람마다 기도의 목적이 다릅니다. 그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다르지만 기도의 첫째 되는 근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거의 대부분 무엇인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요구가 이루어질 때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에 나온 후 생활이 윤택해졌습니다. 자녀들도 지혜로워졌습니다. 남편도 어그러진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왔고 행복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동기나 목적보다도 내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다 헛것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되는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먼저 하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눅 11:2).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17).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거하는 것’이것이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찬송가에도 “오 할렐루야 주 예수 지난 죄는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출석하면 형편이 나아지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나빠지는 수도 있습니다. 환경이 변화되기 전에 재 속이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환경이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너무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좋아졌다고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속이 새로워져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머님이 부엌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밥을 하시다 말고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있었습니다. 솥이 깨져서 구멍이 났습니다. 솜을 져가지고 틀어막고 다시 밥을 했어요. 여기에 비하면 오늘날은 천국 같은 생활입니다. 그런데 왜 짜증이 나고 원망이 생기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엇 해주십시오’가 우리의 기도 목적이 되기보다는 먼저 그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질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죽어 천국만 생각하지 말고 현재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로마서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영으로 오십니다. 우리 속에 찾아오십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어떤 환상이나 계시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는 평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재 뜻이 이루어지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그 다음에 나와 이웃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고, 내가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나도 남의 죄를 사하여 주고, 세상에 나가서 악에 넘어지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우리 속에 성령으로 와 계십니다. 성령을 모신 자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기도의 목적이 이루어 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 몇 년 동안 열심히 나왔습니다. 새벽 기도도 열심히 나왔습니다. 철야 기도회도 안 빠집니다. 금식 기도도 했어요 . 십일조도 꼬박꼬박 했습니다. 그러다가 절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분의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갑니다.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려고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아들 하나밖에 없어요. 아들만 믿고 살았습니다. 좋은 고등학교에 추첨되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서울대학이 목표였습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 시험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드린 것은 믿음으로 바친 것이 아니라 와이로로 바쳤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 목적이 내 뜻, 내 원하는 것만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 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도 안 이루어졌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2:41, 42의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저희를 떠나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면 내가 원하는 것도 이루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만 이루어 달라 하면 내 것도 안 되고 아버지 것도 안 됩니다. 지금 막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말합니다. “당신 기도하라. 내 사업이 지금 왔다 갔다 하니 빨리 빨리 기도하라”그러다가 사업이 무너졌습니다. 그럴 때 남편은 ‘교회 가지마’라고 합니다. 기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기도의 목적인 줄로 믿습니다.
3. 기도의 역사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회개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하지 않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기도는 창조의 역사입니다.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히면 패륜아가 사랑스런 아들로 재창조됩니다. 화인맞은 양심도 새로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 되시기 때문에 역사를 섭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창조는 우리의 생활에 기쁨을 가져다주십니다. 슬픔과 고독에 처해 있을 때 주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오냐!’하시는 무언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실망의 자리에 앉히기조차 싫어하십니다.
기도는 진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거짓말 잘하고 다니는 사람도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진실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자체가 진실한 것입니다.
기도는 의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불의한 자라도 기도하는 순간 자신을 하나님께 비춰봅니다. ‘하나님 나는 불의한 자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보기 싫을 정도로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기도 자체는 모든 불의를 이기게 하는 사랑입니다.
기도는 감사입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넘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부족해지자 그들은 애굽의 생활을 잊어 버렸고 홍해의 기적을 생각하지 못했고 광야의 노정을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기도는 승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험이 오고 실패와 고통이 와도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도와주십니다. 이 사람은 결코 낭패 당하지 아니하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기도자가 많은 교회는 승리합니다. 마태복음 26:41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부닥쳐도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기도합니까? 믿지 못하고 아무리 ‘주여’하고 외쳐본 들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하는 한 마이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싣게 된다면 수백 수천의 말보다 더 깊은 기도가 될 줄 믿습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입니다. 기도는 내가 믿느냐는 것이지 말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밤 혹한에 부친님, 기체 일양 만강하셨나이까? 불초소생이 일금 오천 팔백 원을 청구하오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윤허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이때 아버지는 무어라고 할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볼 때 이 아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자기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아버지께서는 이미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시자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자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왜 강도의 굴혈로 만들로 돈 바꾸고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 속이 하나님의 집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배당에 와서 곗돈 갖고 올 집사의 뒤통수만 찾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 있는 척, 은혜 있는 척하고 신자들을 이용하는 그런 사람은 교회에 없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나 때문에 누가 시험받을까?’하고 무릎을 꿇는 자입니다. 기도는 모든 미움과 원망까지라도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 없는 염려는 동정입니다. 결국 원망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염려는 협조입니다. 뜻이 이루어집니다. 기도 없는 모임은 잡음이 일게 마련입니다. 기도 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모르는 자입니다. 만약 기도 없는 책임자 목사라면 인간적인 방법이 나옵니다. 기도 없는 교사는 성경 펼쳐 놓고 제 생각만 지껄이고 맙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 모두가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나와 여러분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인정된다면 우리 주위의 모든 원망과 잡음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엎드려 기도만 한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삶을 포기하고 날마다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은 허망한 환상만 따르는 사람입니다. 돈 십만원 가지고 10억짜리 사업을 주시옵소서, 공부도 하지 않으면서 학력 고사 300점 맞게 해주시옵소서, 평소에 노력도 없이 시험지 받아들고 성령께서 알려 주시옵소서 하게 됩니다. 기도하면서 직장 생활, 가정 생활 충실히 하고,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늘 기도하고 세상에 나가서 실천하고, 안 되면 또 무릎 꿇고…. 이런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평탄케 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도를 게을리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 12:23).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염려하기 이전에 말없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곳입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