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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마음 (느헤미야 12장 1-43절)
마음을 잘 관리하십시오
어느 날, 프랑스의 한 젊은이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했습니다. 의사는 그의 얘기를 듣고 우울증 처방으로 많이 웃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유명한 희극배우의 쇼가 있어서 그 쇼를 관람하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청년이 말없이 돌아섰습니다. 왜냐하면 의사가 추천한 그 희극배우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풍족하게 사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이 공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존재보다 소유를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유가 없어도 고통이고, 소유가 많아도 그 소유가 존재까지 소유해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공허하게 됩니다. 많은 현대인은 지금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수많은 병의 원인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세포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면 암이 생깁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암세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마치 그 세포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암세포의 특징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기능을 하지도 않고, 무질서하고, 목적과 의미도 없이 자라서 주변세포와 장기를 파괴한다고 합니다.
암 전문의 원종수 박사에 의하면 암세포는 매일 6∼7개가 자라고, 경찰세포는 그 자라는 암세포를 제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아 마음에 평안이 없고, 원망과 분노가 마음에 있으면 부신피질호르몬과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경찰세포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암이 발병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종수 박사의 말에 의하면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암이 없다고 합니다. 미움과 근심과 스트레스가 있어도 새벽에 기도하면서 그 근심과 아픔을 주님께 내어놓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은 우리의 삶에 치유와 응답이 주어지는 가장 신비한 시간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우리 마음을 잘 관리하고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마음으로 만들 때 우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은총을 얻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이 받으시는 마음 >
오늘 본문에는 성벽 건축 후 성벽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봉헌식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이 성벽 봉헌식 장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받으시는지 몇 가지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마음을 받으실까요?
1. 감사하는 마음
느헤미야 11장에는 성벽 건축 후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안에 사람이 많이 거하도록 인구를 재정착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12장 1-26절에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계보가 적혀 있습니다. 왜 레위인들의 계보를 조사해 적었을까요? 종교적 제도를 재정비하고 신앙 갱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 계보에서 조상들의 이름을 자세히 열거한 것은 자신들의 현재의 신앙과 존재의 기반이 되어준 조상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신세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성세대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것은 자신의 다리를 자르는 것과 똑같은 태도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되자 성벽 봉헌식을 위해 제사 인도 및 십일조의 징수를 위해 각처로 흩어졌던 레위 사람들을 모이게 해서 여러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며 즐겁게 성전 봉헌식을 했습니다.
그때 성전 봉헌식의 대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감사였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가장 훌륭한 성도는 바로 감사가 많은 성도입니다. 가장 축복받고 가장 영성이 깊은 성도도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입니다. 성경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감사가 많으면 누구보다 훌륭한 성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훈련은 감사 훈련입니다. 요새 제자훈련을 보면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으로 계속 올라가는 체제로 제자훈련을 합니다. 그런 체제도 필요하지만 사실 그런 체제가 지닌 부작용도 많습니다. 무엇이 부작용입니까? 그것은 성경지식이 많은 것으로 성도의 영적 수준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범사에 감사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 감사하는 사람보다 평범한 삶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훨씬 영성이 깊은 사람입니다. 기가 막힌 간증거리가 있는 사람보다 간증거리가 없어도 기가 막힐 정도로 감사를 잘하는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암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나았다고 여기저기 간증을 하러 다닙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일은 암에 걸리지 않고 잘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든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도 잘해야 하지만 그런 힘든 상황을 미리 막아주시고 평탄하게 지금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나도 감사하고, 문제가 없어도 감사할 줄 아는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고난을 당해도 우리의 죄보다는 훨씬 고난이 적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여자 성도가 R. A. 토레이 목사님에게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예수님을 바로 믿을 수 있을까요? 요새 마음이 냉랭하고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토레이 목사님께서 말했습니다. “자매님! 이제 기도할 때 자기 자신을 보다 많이 알게 해달라고 한 가지만 중점적으로 기도해보세요.”
그분이 목사님 말대로 기도하자 점차 자신의 부끄럽고 추한 모습이 깨달아졌습니다. 정말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 욕하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졌고, 아이들 앞에서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대해 새롭게 깨달으면서 아무리 시련이 있어도 “내 죄와 허물에 비해 이 시련은 작은 시련이지!”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구를 판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자기처럼 추한 사람이 없는 누굴 판단합니까? 그렇게 자신의 추하고 부족한 모습을 발견하면 섭섭한 것도 사라지고, 억울한 생각도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과 판단도 사라지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 정결한 마음
본문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당시 제사장들은 성벽 봉헌식을 하면서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고 하고, 백성과 성문과 성까지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이 스스로 정결케 하는 방법으로는 금식, 성적인 절제,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백성을 정결케 하는 방법으로는 옷을 빨고, 목욕재개하고, 제사장들이 물을 뿌리는 의식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할 때는 우슬초로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방법으로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원할 때 반드시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더러운 그릇에는 축복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낫는다고 했습니다. 죄의 뿌리를 찾다보면 바로 그 죄의 근원에 욕심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며칠 전에 교회 대청소를 했습니다. 대청소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교회 입구의 높은 천정에 있는 거미줄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또 다시 거미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거미줄을 치우는 것보다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죽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결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욕심이라는 거미를 죽여야 합니다.
왜 사람이 시험에 듭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믿음에 회의가 생깁니까? 역시 욕심 때문입니다. 왜 성도가 불평과 원망에 빠집니까? 역시 욕심 때문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지는 것도 욕심 때문이고, 매사에 부정적인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살려면 욕심이라는 거미를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옛날에 한 수도사가 산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큰 깨달음을 얻은 줄 알고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수도사님! 이번에 산에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얻은 것은 없고 다 잃었습니다. 욕망과 절망도 잃었고, 분노와 비난도 잃었고, 탐욕과 정욕도 잃었고, 시기와 질투도 잃었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많이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가지려고 합니다. 은혜와 축복도 더 생기고, 더 가지고, 더 얻어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축복은 잃어버려도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난 후 자기가 가진 화려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은 버릴수록 시원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얻는 것은 성공이고 잃는 것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성공은 욕심을 버릴 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승천하실 때까지 이 땅에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에 비하면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달라고 하니까 영적인 거지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과 계산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톰 미니피(Tom Minifie)란 한 성공회 신부님이 예배를 인도하는데 제일 뒷좌석에 한 젊은 부부가 어린 아이를 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려고 하는데 신부님이 쫓아가서 그 부부를 붙들었습니다. 아이를 자세히 보자 아이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미니피 신부님은 곧 아이를 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성도님! 이 아이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 줄 아세요? 저도 2년 전 세 살 난 저의 아이를 다운증후군으로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살아 있을 때 저는 그 아이의 얼굴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곤 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선물이고 축복이었습니다. 이 아이를 소중히 여기세요. 그러면 이 순수한 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거예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다운증후군 아이들을 신성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의 순수함을 통해 신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순수함을 어느 것보다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약삭빠른 사람들이 되지 말고 순수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항상 남에게 당하며 사는 것 같아도 하나님 안에서는 누구보다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3. 예배하는 마음
본문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이 구절에서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는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 자손들 중에서도 특별히 찬송을 담당한 아삽 자손들을 지칭합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아삽 자손을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했는데, 그 상세한 묘사가 본문 31-42절까지 비교적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처음 성벽을 건축할 때 대적 산발랏과 도비야가 뭐라고 조롱했었습니까? 느헤미야 4장 3절 말씀을 보면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고 조롱했었습니다. 그런데 성벽 봉헌식을 할 때는 보란 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성벽 위를 행진한 것입니다. 그 행렬을 제일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은 36절 하반부에 나와 있는 대로 학사 에스라였고, 행렬 선두 부분에는 찬송을 담당한 아삽 자손들이 행진했습니다.
본문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 위로 행하여 풀무 망대 윗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이 구절을 보면 학사 에스라가 인도하는 행렬과 반대로 움직이는 행렬이 있었는데 그 행렬의 인도자는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제일 앞서지 않고 노래하는 아삽 자손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왜 느헤미야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아삽 자손을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행렬을 지어 가게 했습니까? 그것은 성벽이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에 따라 기적적으로 건축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또한 행렬을 하면서 느헤미야가 행렬 앞에 서지 않은 것은 느헤미야의 겸손한 성품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성벽 건축의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그런데 헌신할 때는 가장 앞서서 헌신했지만 영광 받을 때는 뒷부분에 섰습니다. 평신도였던 느헤미야가 행렬의 뒤에 있고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 자손들을 앞세웠던 것은 예배가 성도의 삶에서 가장 앞서야 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또한 두 행렬이 행진하는 최종 목적지가 본문 40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그 성전에서 반대편으로 진행하던 두 행렬이 만난 후에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성벽 봉헌식을 마치는 모습도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참된 예배가 드려질 때 우리의 내면세계는 풍성해지고 강건해질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성공하면 의욕이 없고 소망이 없는 인생이 꿈과 희망이 넘치는 인생으로 바뀌고, 변두리 인생이 영향력을 주는 중심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4. 기뻐하는 마음
본문 4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즐거워했다”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현의 강도도 강합니다. “심히 즐거워했다! 크게 즐거워했다! 부녀와 어린아이도 즐거워했다!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 얼마나 기쁨이 넘쳤으면 그렇게 강하게 표현했을까요? 하나님께서도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어떤 때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저도 항상 기뻐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어떤 때는 도저히 불편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마음이 신비하게 사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새벽기도를 할 때입니다. 새벽기도 시간이 되면 신기하게 기뻐하는 마음이 불편한 마음을 이겨냅니다. 우리는 부단한 영성 훈련으로 기뻐하는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14세기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존 타울러(John Tauler)는 8년 동안 가졌던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깊은 영성을 가르쳐줄 선생님 한 분을 보내주소서!” 8년이 지난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타울러야! 지금 밖에 나가봐라.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선생이 왔다.”
존 타울러가 나가 보니까 옷은 다 낡아 헤어졌고 상처로 인해 피가 여기저기서 흐르는 거지같은 사람 한 명이 있었습니다. 곧 타울러가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오늘도 하나님께서 성도님에게 행복한 삶을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거지가 말했습니다. “수도사님! 저는 이제까지 한번도 불행한 하루를 보낸 적이 없어요.” 타울러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가끔 힘들 때가 전혀 없었나요?”
그때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배고파도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멸시를 받아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불행한 날’이 없었습니다. 때로 힘든 일도 있었지만 저의 경험으로는 그 일도 꼭 저에게 필요한 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들이었습니다. 그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기쁘게 받아들이며 사니까 항상 행복해요.” 그 말을 듣고 타울러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산다면 내 현실이 어떠하든지 그 현실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처럼 믿음으로 자기 현실을 수용하면 신기하게도 자기 현실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수용성과 수동성은 다릅니다. 수동성은 자기 현실을 한탄하며 마지못해 삽니다. 반면에 수용성은 자기 현실을 인정하며 그 현실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합니다.
우리는 힘든 현실에서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나는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고 포기하면 더 희망이 없게 되지만, 그 현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자기를 믿음으로 독려하면 위기는 기회가 되고, 고난은 축복으로 나가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내면을 튼튼하게 잘 가꾸어야 합니다. 진짜 힘은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인 힘입니다.
< 내면을 튼튼하게 가꾸십시오 >
어느 겨울 날, 한 신흥파 조폭 두목이 원조파 조폭 두목을 찾아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때 원조파 두목이 난로 불을 쬐다 담배를 물자 신흥파 두목이 맨 손으로 난로에서 벌건 조개탄을 꺼내어 담뱃불을 붙여줬습니다. 그러자 원조파 두목이 부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술 두 잔만 가져와라.” 술잔이 오자 원조파 두목은 바지를 걷고 자기 허벅지 살을 떼어낸 후 반을 잘라 신흥파 두목 술잔에 넣어주었습니다. 결국 그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 모습을 영화에서 보면 어떤 사람은 멋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멋있는지 몰라도 그처럼 어리석인 인생은 없습니다. 사람의 진짜 능력은 그런 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진짜 용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 같이 인생 후반부가 순탄하지 못합니다.
옛날 고등학교 때, 속칭 논다는 날라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교복의 훅크와 단추를 풀고, 모자도 칼로 난도질한 다음 미싱으로 누벼서 삐딱하게 쓰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치 독립투쟁을 하듯이 선생님에게 대들었고, 숙제는 늘 안 해오고, 수업시간에는 공부도 안하고, 선생님이 때리면 용기 있게 맞으면서 으스댔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여겨주는 줄 착각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모범생들을 부모와 선생의 위협에 굴복한 못난 애들로 우습게 여겼습니다. 모범생들이 차이나 칼라에 훅크를 단정하게 걸고 머리도 단정하게 깎고 다니면 샌님이라고 놀리며 우습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진짜 조폭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놀던 애들이 우습게 여겼던 모범생들은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조폭 잡는 검사들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힘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못난 행동과 잘난 행동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분별의 키포인트가 무엇입니까? 외적인 것으로 잘난 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외적인 힘과 외적인 모습으로 폼을 잡으면 그 인생이 점차 하강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세계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급선무는 믿음을 키우고,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와 말씀과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고, 어떤 사정이 있어도 예배 시간은 빼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양보해도 그것만은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욕심은 버려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성도가 되겠다는 욕심은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려고 애쓰고,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사소한 일들 때문에 믿음의 행진이 후퇴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한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이 기도원으로 금식기도를 갔습니다. 3일 금식을 마치고 귀가하는데 우연히 아는 집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잠깐 방문하게 되었는데, 집사님이 금식한 줄 알고 주스와 소화가 잘 되는 크래커 3개를 내어놓았습니다.
그때 장로님이 생각했습니다. “얼른 먹고 하나 더 먹어야지. 설마 목사님이 체면이 있지 두 개를 드시지는 않겠지.” 그렇게 안심하고 있는데 목사님이 장로님보다 순발력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거의 동시에 크래커 두개를 드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장로님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야! 정말 치사하다! 목사가 어떻게 그렇게 치사하게 행동하나?” 결국 크래커 하나로 금식을 통해서 받은 은혜를 다 털어버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크래커 하나 때문에 믿음생활에서 회의에 빠지고, 시험에 들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하늘이 주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믿음으로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감사하는 마음, 정결한 마음, 예배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으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