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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평안 (시119:161-168)
세계의 뉴스의 초점은 선진국, 강대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업자의 증가, 경제적인 위기, 국가 질서의 붕괴 등 우리를 불안케하는 뉴스들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부와 힘의 절대적인 상징처럼 보였던 나라들의 허와 실이 드러나면서 모든 삶들은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이 마약과 범죄에 몸살을 앓고 있으며 제2의 사도행전적 복음의 나라라고 일컫는 우리 사회도 흉악 범죄의 증가와 메말라 가는 인정 속에서 어두운 그들이 드리워지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며 작은 구름이 해를 가리워 온 세상을 어둡게 하듯 집단적 이기주의자들이나 소수의 기득권의 횡포에서 오는 사회적 병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 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을 행하였나이다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산업 재해로 죽는 우리 나라 근로자 4명 중 3명이 뇌와 심장 혈관 질환으로 쓰러져 간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서구화된 식생활, 흡연, 음주, 과로,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예방법 제1조로 느긋한 성격에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하더라도 웃으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육체의 질병을 다스리는 데는 마음의 안정과 평안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운동의 경우 승부를 건 운동은 운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강제 노동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고역인 것입니다.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는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에 출전할 예선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2년 전인 1998년 월드컵 진출을 놓고 한국과 태국이 한판 축구 경기를 벌렸습니다. 태국이 한국 골 네트에 한 골을 차 넣는 순간, 차범근 감독의 말을 빌리면 '하늘이 노랗고 식은땀이 흐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는 국민들의 모습이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피가 마르는 긴박한 순간들이 공을 따라 교차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곳을 가도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정치권도 평안한 곳이 못 됩니다. 경제 사정도 평안하지 못합니다. 우리 나라는 온 국민이 힘을 합해서 I. M. F를 극복했지만 아직도 사회 전반에 걸쳐 확실한 개혁을 해야 하는 아픔을 안고 있습니다. 도산하는 중소기업, 국제 경쟁력의 약화, 용기의 상실, 개인주의, 이기주의,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생각을 기울이다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대중 목욕탕에 목욕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탕 입구에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필요한 물은 마음껏 쓰십시오. 필요 없는 물은 한 방울도 아껴 주십시오.' 주인 백. 그렇습니다. 아무리 나라가 어렵고 경제가 어려워도 할 일은 하고, 쓸 것은 쓰고, 먹을 것은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필요 없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 가도 될 곳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방울의 물도, 한 등의 전기도 아껴 써야 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위기 불감증'입니다.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네 나라가 망하지 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생각,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너나 살기가 어렵지 나는 끄떡없다는 생각들, 바로 거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악을 쓰고 소리지르며 우는 아기 곁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코를 골며 잠을 자는 여인은 아기 엄마가 아닙니다. 우는 아기를 보살피고 달래고 품에 안아 주는 여인이 엄마인 것입니다.
미국 델하우지 대학의 소아과 교수인 리처드 B. 골드볼륨 박사는 신생아가 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신생아가 우는 것은 비어 있던 허파 속으로 산소를 한껏 들이마시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아기의 울음은 유일한 대화 수단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생후 3개월경까지 5명의 아기 중 한 명 꼴로 배앓이를 하는데 그 이유로 운다'고 했습니다. 마치 무중력 상태와도 같은 모태 속에 있다가 전혀 다른 세상에 태어난 신생아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적응으로 불안해하고 울고 보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요하고 평안했던 모태의 리듬이 깨졌기 때문에 운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큰 평안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마음보다 큰그릇은 없습니다. 마음은 세계를 담고, 우주를 담고, 영원한 세계를 담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큰그릇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몸도, 가정도, 회사도, 교회도, 세계도 평안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14:1)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요14:27을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시인은 그 평안을 큰 평안이라고 한 것입니다. 눅1:78- 79을 보면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을 내쫓고 우리의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의 갈등과 싸움은 구약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유엔과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에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나서부터 중동의 평화가 안정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평화가 아닙니다. 언제 어떤 이유로 다시 분쟁과 갈등으로 번질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람끼리 만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평안, 참 평안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평화를 피스(Peace)라고 부릅니다. 피스는 라틴어 팍스(Pax)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팍스는 죽이고, 빼앗고, 점령해서 얻는 평화를 말합니다. 즉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얻어내는 평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팍스라는 말 대신 샬롬(Shalom)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샬롬은 안전하다, 정답다, 행복하다, 평화롭다는 뜻입니다. 안전하고, 정겹고, 행복한 평화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사9:6을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 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사람들은 전쟁 광들입니다. 그들은 평화를 깨고 전쟁을 만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전쟁과 반목과 갈등을 깨고 인류에게 샬롬을 주신 분입니다.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만 참 평안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 평안, 큰 평안, 마음의 평안입니다. 이 평화가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⑴,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163절을 보면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57:21을 보면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겐 평강이 없습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악 가운데 가장 큰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나고, 마음이 떠나고, 삶이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일을 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돈을 벌면서, 여행을 하면서 마음이 불안한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고생스럽고 힘들어도 마음만은 편한 것이 좋은 것입니다. 죄와 접선이 되어 있고 악과 연계가 되어 있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죄짓고 악을 행함으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보다 하나님 바라보고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행복입니다. 죄는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⑵,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166절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라고 했고, 167절에서는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68절에서는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점이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느냐 없느냐 인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이야기를 잘 압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하실 때에 솔로몬은 치리 자로서 필요한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3:10)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 자체가 상당한 것이요, 믿음을 구하는 믿음 자체도 상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한 가지만 구하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도 역시, 돈 명예, 출세 등 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예수 님과 동행하다 보니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역시 믿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 님의 믿음이 대단하하시더란 말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사건 적인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계절적으로 봐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정말로 좋은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성도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운동을 펼칩시다. 왜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하는 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⑶,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165절을 보면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45:7을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빛도, 어두움도, 평안도, 환난도 하나님이 만드시고 주관하십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도,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 큰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법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45:11을 보면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내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어떤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을지 예견도 예측도 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게 물으라, 내게 부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참 평안, 큰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죄를 멀리합시다. 악을 버립시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은혜를 받읍시다.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그리하면 큰 은혜, 큰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또한 장애물도 없어질 것입니다.
롬8:28로 결론을 삼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출처/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