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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선물 (엡 2:8-10)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선물은 마지 못해 주는 뇌물과 달라서, 받는 이만 아니라 주는 이도 즐겁다.
요즘 한국 국회에서는 재벌의 부인들이 비싼 옷을 선물로 주었다느니 받지 않았다느니
하는 문제로 청문회가 열리고, 시급한 민생을 뒤로 하고 정계가 시끄럽다.
사정은 다 알 수 없지만, 이런 문제에는 대개 순수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으로서의 선물이
아니라 다른 속셈이 곁들어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어릴 적에는 생일과 설날을 일년 내내 기다렸다.
그 날이 되어야 새 양말이나 새 옷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물자가 흔해져서 아까운 줄 모르지만,
그래도 생일과 성탄절같은 날에 선물이 없으면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선물은 받을 때에만 좋고, 후에는 별로 쓸모가 없어서
설합이나 장롱 속에 쳐박아 두거나, 집의 한 쪽 구석에 팽개쳐 있기도 한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별로 쓸모도 없으면 이사할 때 짐만 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실용 가치는 없어도, 그저 가끔 보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있다.
한편 어떤 선물은 받을 때에 좋을 뿐 아니라, 늘 사용하는 실용적인 것도 있다.
항상 품에 가지고 다니거나 자주 좋은 일에 사용하는 것은 좋은 선물이다.
그것은 금액의 많고 적음보다 얼마나 자주 귀하게 쓸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성경은 선물은 그의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한다고 말씀하니,
선물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름다운 습관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고 받는 선물은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 잊거나 퇴색하게 된다.
아무리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우스운 말이 있지만,
먹는 대접을 받으면 얼마 후에 곧 잊어 버리고,
잠시 사용하는 소모품은 일정 기간이 소용가치가 없어져서 버린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이 나오면 뒤로 물러 나게 되고, 고장이 나거나 망가지면 버린다.
여기 받을 때 황홀하고, 매일 귀하고, 날이 갈 수록 더 좋은 선물이 있다.
결코 빛이 바래거나 기능이 망가지거나 다시 수리할 필요가 전혀 없고,
오히려 세월이 지나면 지날 수록 더 귀하며 영원한 선물이 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끼리만 주고 받는 재벌들의 선물이 아니고,
또 그것을 받았다고 해서 채무자처럼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는 특별한 선물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이 구원의 선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 보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2:8-9).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죄와 죄의식과 영원한 죄의 형벌에서 구조받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세상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이것은 지옥으로 향하던 진노의 자식을 천국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운명이 바뀌며, 인생에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도 잘 살지 않는가?
구원이라는 개념도 모르고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미 성경은 그런 사람이 세상 풍속을 좇으며, 공중에 권세잡은 마귀를 따르고,
자기 육체와 욕심을 따라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자라고 무섭게 선포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말하기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히 2:3). 즉 구원이 결코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받아도 좋고 받지 않아도 그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 인생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런데 이 구원은 값을 주고 사거나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값이 크고 고귀하여 돈이나 다른 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마치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공기와 물과 햇빛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것과 같다.
물론 요즘에는 생수라고 하여 특별히 소독하고 정수한 물을 따로 팔기도 하지만
원래 우리 몸의 약 70%가 물이어서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깊은 땅에서 물이 나도록 하여 넉넉하게 선물로 주신다.
만일 그런 것을 돈주고 사야 한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것이다.
물 뿐 아니라 산소같은 공기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돈주고 사야 한다면 어떨까?
가난한 사람은 공기 중의 산소를 조금만 마시고, 부자는 맘껏 마신다면
이 세상에 과연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도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의 선물이다.
그래서 아기를 갖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노령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삭을 낳고,
이와같이 가장 귀한 물이나 공기는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첫째로, 죄로부터의 구원은 누가 주는 선물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다.
나의 최선을 다해서 얻는다거나, 무슨 대가를 치루고 받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여럿 있다.
건강을 돈으로 사는가? 부모를 돈으로 사는가? 사랑과 우정을 돈으로 사는가?
무엇보다도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북한의 김일성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백두산의 사향 노루를 다 잡아 그 피를 먹었고,
심지어 자기의 늙은 피를 빼고, 젊은이의 피로 갈아 넣기도 했지만,
어느 날 그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이 죽고 말았다.
죽은 시체를 산 것처럼 유리 상자 안에 넣고 전 국민과 외국인들이 절하게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옛날 늙지 않게 한다는 불로초를 찾아 내라고 백성을 괴롭혔던 진시황제나
늙도록 수영으로 몸을 관리하던 중국의 모택동도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만일 돈으로 생명을 잠시라도 연장할 수 있었다면
세계의 그 거대한 재벌들이 왜 그렇게 죽어가야 했겠는가?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 2:22).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인생이 풀과 같고 그 자랑도 풀꽃같아서
잠시 화려하게 피었다가 어느 새 마르고 시들어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돈으로 어느 정도의 건강을 얻을 수 있다.
보약을 먹고, 좋은 환경과 좋은 음식과 운동으로 상당한 건강을 누리기도 한다.
실제로 현대인들의 수명이 점차 길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60세 환갑 잔치는 잊은 지 오래 되었고,
칠순 잔치를 한다면 이제 노인 대우를 받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돈으로 친구의 환심을 사서 우정을 얻기도 하고,
심지어 돈이 있어야 사랑도 하는 세상이 되었다.
결혼 상대자를 선택할 때에 돈이 무시되었던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온 세상은 잘 알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절대로 못 산다.
그래서 오직 선물로 받는 길을 선택해 놓으신 것이다.
무슨 종교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가?
선한 행위를 많이 해도 구원과 바꾸지는 못한다.
남보다 희생을 많이 하고, 정성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진정한 구원은 얻지 못한다.
영원한 형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피에 생명이 있으니 피가 죄를 속한다"(레 17:11)는 말을 기억하라.
즉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피가 드려지기 전에는 아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하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렇게 피흘리고 죽게 하신 것이다.
둘째로, 이 구원의 선물은 어떻게 받는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우리가 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무슨 은혜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주신 것이 가장 큰 은혜이다.
이 은혜는 유대인이나 일부 정해진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그렇지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는 사람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래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많으나 택함을 입은 사람이 적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많은데 진정으로 거듭난 이들이 많지 않다.
마치 공기가 시원해도, 자기 코를 막고 있으면 답답하여 죽을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바다같이 풍성하고 넓어도, 마음을 막으면 받지 못한다.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마음을 다하여 주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마음에 믿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교회를 믿거나, 단순한 종교인 또는 종교난에 기독교인이라고 쓰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사고를 냈는데, 엄청난 벌금을 부모가 대신 납부하여, 그 영수증을 믿고
경찰에서 풀려 나오는 것과 같이, 죄를 회개하는 자마다 이미 용서하신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이 놀라운 구원이 나의 것이 된다.
사실 구원받는 것이 너무 쉬워 보여서 망설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요 진리이다.
사실 우리의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 우리의 믿음이 커서 그 큰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 만 해도 산을 옮긴다는데 과연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는가?
믿는다고 늘 입으로는 말하지만, 정말 마음으로 조금도 의심없이 믿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만큼 큰 믿음을 가진 누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이 큰 것을 보시고 구원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무서운 교만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믿음을 자랑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크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주님께로부터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받은 사람들도 있지만
온전한 구원의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수도해서 얻을 수 없다.
남보다 비교적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성경은 지적한다.
선행을 해도, 또한 죄도 짓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죄로 얼룩진 인생인 것이다.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산다고 해도
그것은 죄인이 죄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상의 것이 못된다.
마치 진흙탕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 그럴 수록 더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밖에서 그를 건져 내야 한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구원을 어느 날 죽은 후에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은 자의 삶을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어느 날 주님을 만날 때에 그 구원은 완성된다.
마치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신 대로
영생이 어느 먼 훗날에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믿는 우리는 이미 죄로부터 구원을 이미 받았다.
셋째로, 구원받은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이 새롭게 빚으신 피조물인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니 그 가치가 엄청나다. 하나님이 소유하신 인생이니 얼마나 귀한가?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것이며,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님은 이미 강조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선한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 순서가 헛갈리면 자칫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하고 평생 방황하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는 선행을 해야 구원을 받고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고 가르치는데,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치다 보니,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행위가 바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내가 비록 행동은 좋지 않지만, 예수를 믿으니 천국은 이미 따놓은 단상"이라고
안심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물론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구주로 시인하면 구원받는다고 성경이 말하지만,
그 믿음을 행위로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가 구원받은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 이단 집단인 구원파를 들 수 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죄를 좀 범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비록 그렇게 공개적으로 가르치지는 않아도
성도들이 죄를 범하는 것에 대한 무서운 결과에 대해서 너무 소홀히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말로만 믿고, 마음으로만 믿으면서 행실이 바르지 못한 교인들을 향하여
사도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교인 중에 범죄하고도 별로 가책을 받지 않거나
악행을 저지르고도 회개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선한 일을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8-19).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이다(약 2:22).
이것은 구약의 아브라함에 관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은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그저 행동으로 순종했다.
그는 하나님이 100세에 얻은 외아들을 제물로 죽게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을 제단 위에 묶어 놓고 칼로 찌르려고 했던 것이다. 흉내만 낸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그렇게 실제로 행위로 보였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구원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받을 수가 없고, 다만 감사한 마음으로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히 아름다운 선행을 보이며 산다는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듯이 구원은 그의 삶으로 알 수 있다.
만일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여전히 사업에 사기치고 서류를 조작한다면
그가 정말 구원받지 않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무섭게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근래에 북한에서 탈북한 후 평남에 있는 "개천교화소"에서 신앙을 지키며 비참하게 순교하는
북한 기독교인들의 현장을 목격한 것을 증언한 탈북자 이순옥이라는 이가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수령님을 믿으라는 말을 거부하는 신자에게 펄펄 끓는 쇳물을 퍼부어
죽이는 장면도 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아무도 저주하지 않고 조용히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 교회소에 전에는 50-60대 연령층이 많았는데, 이즘에는 10-20대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제는 사회주의 사상의 허구를 알았고, 살 길은 그곳을 빠져 나오는 길 밖에 없다.
최근에 탈북하다가 중국에서 체포되어 처절한 고문을 받고 나온 한 젊은이의 몸서리쳐지는
고발 기사가 월간 잡지에 실려서 읽는 이로 하여금 복받치는 울분을 참지 못하게 했다.
이순옥이라는 여자는 남한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와서 나중에 알고 보니 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였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은 기도가 그를 살게 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서 "식량보다 더 처절하게 필요한 것이 복음"이라고 말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이 놀라운 구원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 구원은 삶의 여정 가운데 당하는 숱한 고난을 능히 이기게 하고,
결국 꿇는 쇳물에 타 죽어도 견딜 만큼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고난과 고통과 고문이 진실한 믿음을 빼앗지 못한다는 사실을 듣지 않았는가?
그리고 성경은 누구든지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오늘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날이며 오늘이 구원의 날이다.
예배실에 들어올 때에는 불신앙자로 왔다면, 이제 신앙으로 변하여 이 곳을 나가라.
하나님은 지금도 진실한 믿음의 사람을 기다리신다.
출처/박광철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