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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인생을 삽시다 (딤후 4:7~8)
우리는 저마다 주어진 일생을 살아갑니다. 사람에 따라서 사는 날수가 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삼십을 조금 넘게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값진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런가하면 모세는 120살까지 오래 살면서 보람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애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일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참 보람되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 또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거부가 되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후회스러운 인생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성공을 기준으로 한다면 솔로몬을 능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였고, 부강한 이스라엘의 군왕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고 다 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년에 저술한 전도서를 보면 후회로 가득합니다. 그는 탄식하기를 “2)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4)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고 권력자도 아니었지만 솔로몬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한 때 교회를 핍박함으로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로는 온전히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 오늘 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인지를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기독교를 이단들로부터 지켜내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저작들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주님의 일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청년시기를 매우 방탕하게 살아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또 마니교라는 사교(邪敎)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에 힘입어서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그의 지난날을 진심으로 후회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생애는 크게 두 기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는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았던 시기이고, 후기는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던 시기입니다. 전자는 후회 막급한 세월이었고, 후자는 후회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사람으로서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할 때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의 옷을 맡아 지켰습니다. 이는 그가 그 사건의 증인을 자처했음을 의미합니다. 또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옥에 넘기던 사람입니다. 이전의 그는 생명의 주님을 대적하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꾼으로 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는데 홀연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엎드려서 들으니 소리가 있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날 사울은 자기가 핍박하였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사건을 분수령으로 해서 그 이전의 사울은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했으나, 그 이후의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그는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고 했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하고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온 세월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지낸 나날들입니다. 살아생전에는 재미나게 살는지 몰라도 생을 마감하는 날, 불타는 음부에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으나,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얻어먹었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두 사람의 처지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세월이 흘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하는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얼마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르고 명당자리에 만든 훌륭한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큰 소리로 호소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후회막급이었으나 때가 늦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 뿐 아니라, 지상에 남아있는 형제들의 운명을 걱정하며 아브라함에게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후회스러운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믿지 아니한 것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은 또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과 관련이 있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상급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지만 그 소속은 하늘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대한민국 시민은 어디를 가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하고, 미국 시민은 어디서나 미국을 위해 일합니다. 만일 대한민국 백성이 조국을 불리하게 하면서 타국의 유익을 위해 일한다면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시민이므로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인정과 상급을 받게 됩니다.
지상의 삶은 비유컨대 잠시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휴가철에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여행하기 위해 타지에 집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텔이나 민박과 같은 곳에 머물다가 옵니다. 마땅한 숙소가 없으면 텐트를 치고 지내기도 합니다. 좀 불편하지만 잠시 휴가 기간에만 머물 것이므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부엌살림을 모조리 실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로 일회용 그릇을 가지고 갑니다. 잠시 여행이므로 기꺼이 견딥니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상의 삶이 나그네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민의 조상 야곱은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에 내려갔는데 바로를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고 했습니다(창 47:). 야곱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상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야곱이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을 나그네에 비유한 것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습니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보면 그의 이름이 누가, 마가, 아리스다고와 같은 충성스런 증인들의 이름과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그만 데마는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세상의 행복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쓰면서 사도의 마음은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우리는 데마가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데마가 세상을 사랑했다고 한 말을 보면 그의 믿음에 큰 손상을 입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서 이같이 권면합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룩할지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장차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에서 성공 출세한 것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번 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을 잘 가르쳐서 성공시킨 것이 상급 받을 공로가 될까요? 아니면 석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칭찬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주님께서 어떻게 평가 하실지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하려는 일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힘써 시행하십시오. 반면에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일이라면 미련을 두지 말고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면, 그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일인지, 또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인지, 또는 불신 이웃들로부터 과연 기독교인은 다르다는 칭찬을 받을 일인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 행하심으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고 했습니다.
말세에도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여기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은 성경이 우리에게 사랑하지 말라고 명한 것들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드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랑으로는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없으며,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더 추하게 만들고, 상처 입은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일컬어 사랑 장(章)이라고 하는데, 사랑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일러줍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세인들이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변질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인생일까요?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뽈레옹과 같은 사람들은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저들의 정복욕 때문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어갔고, 수많은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어서 통곡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과연 후회 없는 인생을 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후회 막급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로소 죽음 앞에서 빈손 들고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인생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실패한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이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해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접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몰려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배고픈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종국에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오로지 사랑의 동기에서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복자들이 남긴 마지막 말과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쁨으로 벅찼을까요.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주셨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고 하셨습니다. 간혹 보면, 교회에 나왔다가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교회에 사랑이 없더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이 없더라’는 말을 들을 때 주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나는 사랑을 주지 못하지만 예수 믿는 당신들은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 않느냐’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불신 이웃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을 나타내는데 힘써야 합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물론이고, 불신 이웃들에게도 힘써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혹 보면, 사랑을 나타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나 염려가 되어서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처음에는 사랑을 거절하던 사람도 변함없이 사랑을 나타낼 때 이쪽의 진심을 알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결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네 번째로,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정에서 맡은 사명이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할 일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한다면 스위트 홈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못해 출근하고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고 퇴근하는 식이 되면 안 됩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면 훈련병들에게 군인복무규율에 나오는 규정의 일부를 외우게 합니다. 거기 보면 ‘국군의 사명’이라는 항이 있는데, 그 내용인즉 “국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의 유지에 이바지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이 규정을 달달 외우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군인으로서 사명을 갖고 복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군인이 사명감을 망각한다면 국민이 그러한 군대를 믿고 편히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사명감은 비록 군인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인도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사업가도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주부도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학생들도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온 국민이 각자의 사명감을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에 부정부패가 발붙이지 못할 것이요, 선진국이 될 날도 그리 멀리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면 자기의 사명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성도라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교회의 지체로서 사명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고, 성도들을 몸의 지체들이라고 합니다. 몸의 수많은 지체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비로소 온전한 몸이 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각자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 가운데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눈이나 코나 입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도 중요합니다. 머리카락이 생각하기를 머리에 난 터럭이 나 말고도 십만 개가 넘으니까 나 하나쯤 빠져도 상관없겠지, 만일 머리카락이 저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대머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의 등에 업혀 교회에 오는 갓난아기조차도 교회의 지체로서 제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귀한 것은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그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육신의 생명을 살릴 뿐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영혼이 소중한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복음을 전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전도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신성한 사명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특히, 불신 가족을 둔 성도님들에게는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할 사명이 하나 더 주어졌습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6) 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위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직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씨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도 주일이면 교회학교 반사로서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과연, 존경받을만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받은바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영원히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은 순교를 앞둔 시점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해온 자기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한 선수처럼,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리하여 조금도 후회가 없노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원하시거든, 오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위해 살며, 사랑을 실천하며, 사명을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의 이 고백이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서도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양인 목사 설교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 주어진 일생을 살아갑니다. 사람에 따라서 사는 날수가 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삼십을 조금 넘게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값진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런가하면 모세는 120살까지 오래 살면서 보람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애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일생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참 보람되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처럼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느냐, 또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었느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거부가 되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후회스러운 인생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성공을 기준으로 한다면 솔로몬을 능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였고, 부강한 이스라엘의 군왕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고 다 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노년에 저술한 전도서를 보면 후회로 가득합니다. 그는 탄식하기를 “2)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4)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못했고 권력자도 아니었지만 솔로몬보다 더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한 때 교회를 핍박함으로 후회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로는 온전히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말년에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 오늘 저는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인지를 말씀해 드림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전혀 후회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특히, 그는 기독교를 이단들로부터 지켜내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저작들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주님의 일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청년시기를 매우 방탕하게 살아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또 마니교라는 사교(邪敎)에 빠져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에 힘입어서 회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그의 지난날을 진심으로 후회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생애는 크게 두 기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는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았던 시기이고, 후기는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았던 시기입니다. 전자는 후회 막급한 세월이었고, 후자는 후회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사람으로서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당할 때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의 옷을 맡아 지켰습니다. 이는 그가 그 사건의 증인을 자처했음을 의미합니다. 또 그는 대제사장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옥에 넘기던 사람입니다. 이전의 그는 생명의 주님을 대적하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꾼으로 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는데 홀연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엎드려서 들으니 소리가 있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날 사울은 자기가 핍박하였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메섹 사건을 분수령으로 해서 그 이전의 사울은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했으나, 그 이후의 바울은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그는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고 했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하고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살아온 세월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지낸 나날들입니다. 살아생전에는 재미나게 살는지 몰라도 생을 마감하는 날, 불타는 음부에 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으나, 거지 나사로는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얻어먹었습니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습니다. 두 사람의 처지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세월이 흘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이라고도 하는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 얼마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르고 명당자리에 만든 훌륭한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큰 소리로 호소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후회막급이었으나 때가 늦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 뿐 아니라, 지상에 남아있는 형제들의 운명을 걱정하며 아브라함에게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후회스러운 일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과 믿지 아니한 것의 차이는 천국과 지옥, 영생과 영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언젠가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나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은 또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과 관련이 있으나,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상급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지만 그 소속은 하늘에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 3:20). 대한민국 시민은 어디를 가더라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일하고, 미국 시민은 어디서나 미국을 위해 일합니다. 만일 대한민국 백성이 조국을 불리하게 하면서 타국의 유익을 위해 일한다면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의 시민이므로 비록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인정과 상급을 받게 됩니다.
지상의 삶은 비유컨대 잠시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휴가철에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며칠 여행하기 위해 타지에 집을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텔이나 민박과 같은 곳에 머물다가 옵니다. 마땅한 숙소가 없으면 텐트를 치고 지내기도 합니다. 좀 불편하지만 잠시 휴가 기간에만 머물 것이므로 불평하지 않습니다. 여행을 떠나면서 부엌살림을 모조리 실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로 일회용 그릇을 가지고 갑니다. 잠시 여행이므로 기꺼이 견딥니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지상의 삶이 나그네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민의 조상 야곱은 요셉의 초청을 받아 애굽에 내려갔는데 바로를 알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고 했습니다(창 47:). 야곱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지상의 삶을 나그네 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야곱이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을 나그네에 비유한 것은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의 충실한 동역자였습니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에 보면 그의 이름이 누가, 마가, 아리스다고와 같은 충성스런 증인들의 이름과 함께 나옵니다. 그러나 그만 데마는 초지일관하지 못하고 세상의 행복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 쓰기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쓰면서 사도의 마음은 매우 아팠을 것입니다. 우리는 데마가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데마가 세상을 사랑했다고 한 말을 보면 그의 믿음에 큰 손상을 입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5절 이하에서 이같이 권면합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룩할지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장차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에서 성공 출세한 것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돈을 많이 번 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을 잘 가르쳐서 성공시킨 것이 상급 받을 공로가 될까요? 아니면 석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그러면 주님께서 칭찬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무슨 일을 하시든지 주님께서 어떻게 평가 하실지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님들의 하려는 일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힘써 시행하십시오. 반면에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할 일이라면 미련을 두지 말고 중단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하면, 그 일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일인지, 또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인지, 또는 불신 이웃들로부터 과연 기독교인은 다르다는 칭찬을 받을 일인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 행하심으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고 했습니다.
말세에도 사람들이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합니다. 여기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은 성경이 우리에게 사랑하지 말라고 명한 것들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드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사랑으로는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없으며,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더 추하게 만들고, 상처 입은 마음을 더 아프게 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본질을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일컬어 사랑 장(章)이라고 하는데, 사랑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일러줍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세인들이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변질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인생일까요?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뽈레옹과 같은 사람들은 군대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저들의 정복욕 때문에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죽어갔고, 수많은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어서 통곡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과연 후회 없는 인생을 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보면서 후회 막급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로소 죽음 앞에서 빈손 들고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인생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실패한 인생으로 생을 마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이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무력으로 남의 나라를 정복하려고 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해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접 받으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몰려오는 병자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배고픈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종국에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귀한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오로지 사랑의 동기에서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복자들이 남긴 마지막 말과 주님의 마지막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쁨으로 벅찼을까요.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 주셨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고 하셨습니다. 간혹 보면, 교회에 나왔다가 시험에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교회에 사랑이 없더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이 없더라’는 말을 들을 때 주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말은 하지 않지만 ‘나는 사랑을 주지 못하지만 예수 믿는 당신들은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있지 않느냐’고 성도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불신 이웃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을 나타내는데 힘써야 합니다.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물론이고, 불신 이웃들에게도 힘써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혹 보면, 사랑을 나타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나 염려가 되어서 망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처음에는 사랑을 거절하던 사람도 변함없이 사랑을 나타낼 때 이쪽의 진심을 알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결코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실 것입니다.
네 번째로, 사명을 위해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가치 있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가정에서 맡은 사명이 있습니다.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할 일이 있습니다. 온 가족이 각자의 사명을 잘 감당한다면 스위트 홈을 이루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더라도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못해 출근하고 그럭저럭 시간을 때우고 퇴근하는 식이 되면 안 됩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면 훈련병들에게 군인복무규율에 나오는 규정의 일부를 외우게 합니다. 거기 보면 ‘국군의 사명’이라는 항이 있는데, 그 내용인즉 “국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의 유지에 이바지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이 규정을 달달 외우게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군인으로서 사명을 갖고 복무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군인이 사명감을 망각한다면 국민이 그러한 군대를 믿고 편히 잠을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사명감은 비록 군인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인도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사업가도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주부도 사명감을 가져야 하고, 학생들도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온 국민이 각자의 사명감을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에 부정부패가 발붙이지 못할 것이요, 선진국이 될 날도 그리 멀리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면 자기의 사명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성도라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
그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교회의 지체로서 사명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해 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 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고, 성도들을 몸의 지체들이라고 합니다. 몸의 수많은 지체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 비로소 온전한 몸이 되듯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각자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 가운데 불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눈이나 코나 입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도 중요합니다. 머리카락이 생각하기를 머리에 난 터럭이 나 말고도 십만 개가 넘으니까 나 하나쯤 빠져도 상관없겠지, 만일 머리카락이 저마다 그렇게 생각하고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대머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불필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의 등에 업혀 교회에 오는 갓난아기조차도 교회의 지체로서 제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귀한 것은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것은 그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종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육신의 생명을 살릴 뿐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냐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영혼이 소중한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복음을 전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전도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신성한 사명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특히, 불신 가족을 둔 성도님들에게는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할 사명이 하나 더 주어졌습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6) 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위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세상의 직분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씨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도 주일이면 교회학교 반사로서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과연, 존경받을만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받은바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함으로 영원히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도 바울은 순교를 앞둔 시점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해온 자기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마라톤 경주에서 우승한 선수처럼,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리하여 조금도 후회가 없노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 원하시거든, 오늘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위해 살며, 사랑을 실천하며, 사명을 위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의 이 고백이 성도님들의 입술을 통해서도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양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