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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점 (창세기 22:1-14)
어느 도둑이 부잣집을 털고 다음 집에 들어갔는데 모자간의 얘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들아, 먹을게 하나도 없구나." 너무 가난한 집이다 싶어 도둑놈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엄마, 그럼 똥이라도 먹어요." 도둑은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 문 앞에 돈 보따리를 놓고 나갔습니다. 나중 알고 보니 모자간에 화투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귀로 들었다고 다 들은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다 본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는 5속교회 체육대회 → 번성하는 2속교회 체육대회)
파란 썬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면 온 세상이 파랗게 보입니다. 빨간 썬글라스를 끼고 보면 온통 세상이 빨갛게 보이겠지요.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안경으로 세상을 봅니다. 여기 자신이 쓰고 있는 안경을 우리는 관점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가진 많은 직간접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안경 즉 관점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인간이 쓰고 있는 안경들은 모두 죄로 물들고 오염되어 있기에 세상을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보고 싶어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안경을 벗고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경 벗어 던지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안경을 내게 주십니다. 내 안경을 얼마만큼 벗어던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책의 서문을 자신의 막내딸이 서너 살쯤 되었을 때 엘리베이터에서 함께 가진 경험으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어린 딸이 엘리베이터를 타자 잘 장식된 내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층 한층 사람들이 밀려들고 엘리베이터 안이 사람으로 꽉 찼을 땐 예쁜 장식들 대신 사람들의 무릎, 허리띠, 엉덩이만 보였습니다. 그때 당황한 아이가 아빠 토미 테니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안아주세요. 답답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잘 보였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안아 아빠의 눈높이 만큼 올려주자 아이는 아빠가 보는 것만큼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토미 테니는 "아빠, 안아 주세요. 아빠 눈높이 만큼 보고 싶어요." 이것이 신앙이요 기도요 예배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아빠의 품에 안겨 아빠와 같은 눈높이 즉 아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겁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으로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이사야 40: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열정적 예배는 우리의 관점을 높이 올려 줍니다.
오늘은 「베스트 셀러에 담긴 영혼의 양식」 그 여섯 번째 시간 토미 테니의 「하나님의 관점」이란 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오늘 앞 벽면 예배센터엔 등이 하나 달려 있습니다. 이 등은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관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창공에 오르면 아래 있는 것들은 뭐든지 크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집도 학교도 아파트도 산들도 작게만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높이 올라가면 이 땅에서 그렇게도 크고 중요하게 보이던 것들이 모두 작아 보입니다. 가정, 직장, 돈, 갈등, 고민, 문제 등등 모두가 작아 보입니다. 왜요? 관점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낮은 곳에서 보는 것과 높은 곳에서 멀리 보는 것과는 다르게 보일 수 밖에요. 때문에 신앙생활의 목표는 낮은 차원의 관점을 높은 차원의 관점 - 즉 하나님의 관점까지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관점의 산 - 모리아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내어놓고 예배와 헌신의 절정을 경험했던 사건입니다. 성경연구가 제임스 스트롱은 "모리아"라는 뜻이 "야(Jah)께서 보신다 - 야훼께서 보신다"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모리아"는 「하나님의 관점의 산」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가 모진 시험과 고난의 산 인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산, 하나님의 관점을 얻은 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높은 시험의 산, 고난의 산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이 나를 망하게 하는 산, 나를 죽게 하는 산인 줄 알고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오르는 시험의 산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 내 안경, 내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관점을 얻는 내 인생의 모리아 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신약 최대의 사건이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었다면 구약 최대의 사건은 모리아산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크다는 것입니다. 큰 시험을 주신 이유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기까지 시험은 고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아브라함을 잔인하리만큼 높은 벼랑 하나님의 관점의 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관점의 산 - 예배의 절정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관점을 주시기 위해서.
III. 하나님의 관점을 가로막고 있는 것: 우상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우리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재산이 귀했겠습니까? 이제 와서 건강이 귀했겠습니까? 명예가 귀했겠습니까? 독자 이삭입니다. 가장 귀한 것, 생명 보다 귀한 것 -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내게 하나님의 관점을 빼앗아 가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건 우상입니다. 내가 지금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어 그것이 내 눈을 가리고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1. 본문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 것" -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이요 우상이요 잘못된 관점이 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끊임없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것이란 존재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엇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바치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점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신앙없이 그 무엇을 받아도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삭이라는 안경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하나님이요 곧 관점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그것을 내려놓으라 말씀하십니다.
2.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하나 뿐인 것 - 바로 아브라함의 급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치셨습니다. 잔인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신앙생활에 이 급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① 물질의 급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물질이라는 관점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② 자기 생각, 자기 경험, 자아가 급소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죽이기 전까지 하나님의 관점을 얻을 수 없습니다.
③ 자존심, 명예가 급소인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급소가 하나씩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관점이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자기관점이라는 우상이 십자가의 피에 적셔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짤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새싹이 돋아납니다.
IV. 예배: 관점의 변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이러한 요구를 아브라함이 순종하기엔 풀기 어려운 난제가 있었습니다.
번제란 제물의 각을 떠서 온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불로 태운다고 하여 화제라고도 하고, 온전히 태워 연기를 드리는 제사라 하여 온전 제사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시지도 않고 무조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겁니다.
가령 "이 땅에 죄악이 너무 관영하여 짐승으로는 안되겠다. 가장 소중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겠다" 하셨다면 못 알아들을 아브라함도 아니지요. 혹 "그 아들은 내가 준 선물인데 네가 아들에게 빠져 하나님의 관점을 갖지 못하는구나. 그러니 도로 바쳐라" 하셨다면 "예, 드려야지요"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앞으로 엄청난 복을 받기 위해서 커다란 희생제사가 필요하니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더라면 생각해 볼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 바치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해가 안되었을 것입니다. 용납이 안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확인되는 순간 왜?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왜 바쳐야 합니까? 항거하지 않았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진실한 성도는 언제나 "왜"라고 묻지 아니하고 "무엇을 할까요?"라고 묻는다."
분명히 하나님께 "왜 이렇게 합니까?" 따지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왜?"를 묻지 않았습니다.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만 물은 것은 "무엇을?"입니다. 지금 여기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만을 물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주님, 제가 겪는 이 고난속에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게 이유를 묻지 말고 버려라.」
내 관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건을 보고 문제를 보고 인생을 보기로 결단하는 것 - 이것이 예배입니다. 성공적인 예배는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도록 만들어 줍니다. 능력있는 예배를 경험한 사람은 인생의 두려운 현실위로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달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 주님의 보좌가 임합니다. 주님의 관점이 임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되고 그토록 시원하게 탁트인 고지에서 하나님의 관점을 선사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골짜기에 묶여 살고 있는 것은 나의 "이삭", 나의 "우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자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믿으십시요. 당신이 모리아 산에 올라 성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순간 하나님은 당신을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관점으로 당신의 문제, 당신의 인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미래를 보고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세상사가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너무 크고 두렵게 느껴지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갈등할 것도 없고 힘들 것도 없고 풀리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기준과 가치가 이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V. 하나님 크게 보기(Magnify)
1. 아침에 일찍이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브라함도 인간이었습니다. 때문에 간밤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순종에의 길을 나섰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이 즉각적인 순종이 시험을 이겼습니다.
허나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날 밤은 몇 년처럼 길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인줄 알아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드리기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나귀에 실고 갈 물건들을 준비합니다. 장작을 쪼개는 노족장의 모습을 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환과 노족장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갈기갈기 찢기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보다 더 모질게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사흘길
순종은 순간적인 결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들의 손을 붙들고 사흘길을 걸어야 하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은 브엘세바에서 45km정도 떨어진 곳이니 걸어가면 아마 3일쯤 걸릴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삼일간의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버리기 위해 그 자식을 끌고 사흘길을 걸어가는 아비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광야 길 가는 아브라함을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브론 광야길은 적막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비의 마음보다 적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흘 길을 마치고 모리아산 아래 도착하자 하인들을 떼어놓습니다.
하인들이 순종과 예배에 방해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 어린양은?
아브라함은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사흘길까지 무사히 마쳐 모리아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지금까지 모든 승리를 수포로 돌릴 수 있는 한 펀치가 날아옵니다. 바로 이삭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버지의 동정 - 부성의 관점으로 자식을 보게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말은 - 지금까지 참고 참아 왔던 아버지의 심정의 뇌관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자기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만 원문에는 "위하여"라는 말이 없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입니다. 이 말은 위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에 오르듯이 - 하나님의 아들이 등에 십자가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 골고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 죽으러 가는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아들 이삭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계시요 예언이었습니다.
언덕 정상에 오른 아브라함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장작더미 위에 눕힙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늙은 아비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올릴 때 몹시도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죽여 바치기 위해 그 자식을 들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만큼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황급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1절-12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 이제야, 이제야! 자기의 마지막 우상,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이 순간까지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고 그의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 말할 수 없으며 그의 판단을 하나님의 관점이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당신의 "이제야"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마지막 남은 우상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이제야는 어느 순간, 어느 때 입니까? 언제까지 머뭇거리시겠습니까?
당신에게 마지막 하나님의 관점은 언제쯤 생길 수 있을까요?
나의 이삭, 나의 관점이 죽어지면 하나님의 관점이 살아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죽어 냄새가 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나님의 관점의 산 - 모리아는 세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가까이하는 산입니다. 모리아산은 돋보기 산입니다. 돋보기로 보면 작은 것이 크게 보입니다. 돋보기 산 - 모리아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크게 보이고 나의 문제는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의 안경으로 보면 하나님은 작게 보이고 문제만 크게 보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게 본다. 확대하다"는 말을 영어로 Magnif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찬송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Magnify God - 하나님을 찬송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면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안경은 참 신비합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보입니다. 문제, 고난, 환란은 시시하게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분만 크게 보입니다. Magnify God! 하나님을 확대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할렐루야!
VI.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보십시요. 자식도 죽이고 자기도 죽어 하나님께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죽이셨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 제물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면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을 확대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눈이 있기 전에 빛을 준비하셨습니다. 코가 있기 전에 공기를 준비하셨습니다.
발이 있기 전에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입이 있기 전에 먹을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갈데아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건강을 준비하시고, 마음이 공허한 사람에게 하늘 위로를 준비하시고,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평안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게 새힘을 주시고 근심있는 사람에게 평강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죄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사죄의 은총을 준비하시고, 가난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부요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내 인생의 내일을 보는 자세입니다.
어디서? 여호와의 산에서입니다. 아무 산에서나 바치면 되는게 아닙니다. 본문 2절에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입니다. 그곳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여호와의 산 - 모리아가 어디입니까? 이삭이 바쳐진 자리요 예루살렘 성전이 선 자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신 자리입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교회입니다. 여기가 여호와 이레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일이면 부지런히 달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 달려온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을 바꾸어 하나님의 관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주일마다 이곳으로 달려와 하나님의 관점을 사 가지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VII. 하나님의 관점 그 결론: 예수 그리스도를 얻다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신앙은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이 모순될 때,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과 아들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모순될 때, 신앙과 현실이 갈등을 빚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무조건 하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신약성서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삭을 바치는 이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성경상 최초로 부활을 신뢰하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복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요.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분명히 아이와 "함께" 라고 말하고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말합니다. 둘이 가서 하나를 죽이고 둘이 함께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내가 죽으면 하나님은 나를 살린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점, 신앙의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삭을 대신하여 준비해 주신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삭을 드리면 하나님은 내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고 아들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까지 얻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결론입니다. 종종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해 불평하다가 내 힘으로만 살려고 하다가 순종 한번 못해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잃게됩니다. 세상 다 얻고도 예수 잃으면 망한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얻어야 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 그것은 세상을 내려놓고 내가 얻어야 할 신앙의 절정입니다.
이 시간 오염된 눈을 내려 놓으십시요.
죄로 물든 내 안경을 벗어 버리십시요.
예배의 절정 - 모리아 산에 올라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내려가십시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너를 보고, 나를 보고
문제를 보고, 세상을 보고
어제를 보고, 내일을 보십시요.
마지막으로 토미 테니의 절규를 외치며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 열정적으로 예배하라!」
출처/류영모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