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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54-62
오늘 날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왜 이리 조건이 많은지 모릅니다. 조건 속에서 살다가 조건 속에 죽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하는데도 조건이 참으로 많습니다. A,B,C,D,E의 5대 조건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A는age(나이), B는beauty(외모),C는condition(건강),D는degree(지위),E는economy(경제)를 말합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무시해서는 안 될 조건입니다. 적당한 나이에 잘 생기거나 예쁘면 더욱 좋을 것이요, 건강해야 사는데 행복하겠고 어느 정도의 지위에 경제력을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결혼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조건을 모릅니다. A,B,C,D,E외에 F인 faith(신앙)와 G인God(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무조건 적인 신앙이 우선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못하고 잇다는 것이 불행 중의 불행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도 빨리 깨닫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에 크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미리 깨닫지 못한 것을 인하여 가슴 아파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몇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시각(視覺),청각(聽覺),후각(嗅覺),미각(味覺),촉각(觸覺)이라고 하는 소위<인체의 오관(五官)>입니다.
먼저는 보는데서 깨달음이 오는 경우입니다.“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이럴 때에 쓰이는 말입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깨달음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 봐야하고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 사람은 들음으로 깨닫습니다. 역시 듣되 잘 들어야합니다. 잘못된 것을 들으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합니다. 피아노 소리만 듣고“도”인지“미”인지 다 알거든요. 그런데 듣기는 들어도 민요인지 가요인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성경에 보면 듣는 것에 대한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오는데 요10장에 보면“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들음으로 오는 깨달음 아니겠습니까? 주인의 음성을 제대로 듣고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따라가야 양이 살 수 있습니다. 잘못 듣고 잘못 따라 가다가는 구렁텅이에 여지없이 빠지고 맙니다.
또한 냄새를 맡고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인들 중에 옆으로 지나가거나 말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그가 담배를 피우는지 압니다. 뭐 때문에요? 냄새 때문에 입니다. 냄새로 깨닫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맛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같은 흰색이어서 잘 모르지만 맛을 보면 소금인지 설탕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마지막 과정은 만져보고 깨닫는 것입니다.“손끝에 눈이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손으로 만져보고 무엇이든지 그 질을 알아 맞춥니다.“옷감이 부드럽다”라든지“물렁물렁하다”라든지“거칠거칠하다”는 등이 만져보고 깨닫는 것들입니다. 갓 돌이 지난 어린아이들에게는 뜨거운 커피 잔을 놓고 아무리 뜨겁다고 말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손으로 만져보고 뜨거우면 그 다음부터는 손앞에 갖다대도 만지지 않습니다. 왜요, 만져보고 깨달았거든요. 이렇듯 인간은 누구나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져보는 오관(五官)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냄새를 맡을 줄도 알고, 맛도 알고, 만질 줄도 알지만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 들 그것을 통하여 깨달아지는 바가 없다면 눈, 귀, 코, 입, 손은 액세서리(accessories)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이토록 감각기관을 통한 모든 깨달음도 중요합니다마는 정말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깨달음입니다. 내 신앙이 잘못 가고 있고 비뚤어져 가고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금이 가고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소생불능의 상태에까지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밝히 보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센스와 지각을 길러나가지 않으면 늘 잠들고 맙니다. 깨어 있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하고 성
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고 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지식이 월등해 지는 겁니다. 일자무식한 사람도 예수를 믿고 나면 유식해 집니다. 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깨달음(awakening)>과<통찰력(insight)>그리고<지각(perception)>이나<이해(understanding)>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문을 열어 주실 때 깨달음이 오고 진리를 보게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신 29:4, 사 6:9.10) 그리고 우리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우리의 강퍅함과 둔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고 순종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신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각을 깨워주실 것을 기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미련 속에 빠진 한 사람을 만납니다. 베드로이지요. 예수님을 죽을 때까지 따르겠노라 장담했던 베드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용감하게 칼을 빼어들고 달려드는 사람의 귀를 내리칠 정도로 정의감에 불탔던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법정에 끌려가는 현장에도 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베드로가 보여 줄 수 있는 자기의지의 전부입니다. 54절에 보면 멀찍이 따라 가는 비겁한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왜 그랬습니까? 가봐서 예수가 불리하면 도망하고 기적이라도 행하셔서 보좌에 앉게 되면“나는 그의 수제자”라고 나설 참이었는지 모릅니다. 결과를 보겠다는 기회주의, 자기중심적인 신앙, 이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자기가 이렇게 나약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해 버리는 천하에 몹쓸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 과정을 보세요. 밤이 깊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알고 슬쩍 대제사장의 집안에 끼어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드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실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거나 당황하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까맣게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지은 사람은 어떻게든 표시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사람들을 피하려고 했으면 불빛이 비치지 않는 뒤쪽에라도 서 있을 것이지 성경에 보니까“불빛을 향하여 앉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불을 안고 앉아 있는 베드로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무리들과의 사이에 베드로의 얼굴이 훤하게 보인 건 말하나마나 입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봅니다. 오늘 성경에는 여종이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을“주목하여”라고 표현했습니다만 표준 새 번역에는“빤히 노려보고”라고 되어있고, 현대어성경에는“자세히 뜯어보고”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리 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몇 번이고 다시 보고 기억을 더듬고 또 다시 보고하던 한 여종이 급기야 소리칩니다.“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던 자다!”순간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하지만 재빨리 부인합니다.“이 여자가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생사람 잡고 있네!”그리고는 시치미를 떼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듯한 행동이기에 아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봐도 본 사람이기에 또 한 마디 합니다.“예수와 함께 있던 무리 가운데 한사람이 틀림없다”고하자 또 다시 베드로는 곧장 받아칩니다.“야, 이 사람아 사람 잘못 봤네”너무도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이제 시끄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구석구석에서 베드로를 두고“맞다, 아니다”하는 의견들이 분분했을법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사람이 와서 성경의 표현대로 장담하며 가로되“이 사람 말투가 갈릴리 사람말투야, 예수와 똑같은 말투잖아!”하고 강경하게 몰아붙이자 베드로 역시 강한 어조로 되받아칩니다.“아, 이 사람아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네. 글쎄 나는 저 예수라는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소리치는 순간 닭이 웁니다. 지금까지 그는 예수님께서“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확실히 기억나게 해준 것이 한 마리의 닭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머지여생동안 닭이 울 때마다 자신의 부끄러운 영적 흑암의 밤을 생각하고 눈물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베드로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고 그로 하여금 대제사장의 안 뜰에서 바깥뜰로 나가 엎드려서 통곡하게 했던 것은 닭이 울고 난 후 베드로를 바라보시던 주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오늘 말씀61,62절입니다.“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베드로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 하니라”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자마자 예수님께서 그를 돌아보십니다. 그 눈빛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베드로야 내가 그렇게 말했지 않았느냐 네가 분명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라고...그런데 너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살았구나. 어리석은 놈아..’순간 베드로의 가슴이 철렁해 졌습니다. 깨달음이 오는 순간입니다. 목구멍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아올라 옵니다. 주체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못하게 하여 뛰쳐나가서 통곡을 합니다.
말 없는 눈길에 가슴을 아리게 하는 뭉클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노려보지도 않았습니다. 원망도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기에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얼굴 표정이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서 세 번씩이나 저주와 맹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과연 울 가치나 있는 자입니까? 그런 인간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바라본들 무슨 유익이나 있긴 하겠습니까? 아예 쳐다 볼 필요조차 없는 배신의 제자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당하는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가 안타까워서 한 번 더 돌아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주님이 우리를 쳐다보고 계십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깨달음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한심한 우리들을 주님은 애처로이 바라보고 계십니다. 시험에 빠져서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신앙을 떠나 있는 우리들이 베드로처럼 깨닫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다가 통곡의 시간이 이르기 전에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서 주를 배반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고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불 신앙적이고 내의지로 사는 참으로 한심한 우리를 향해서도 그 사랑의 눈으로 깨달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 앞에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어찌 할 것입니까?
출처/김철현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