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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어머니 (딤후1:3-5)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옛날에는 ‘어머니 주일’로 지키면서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을 기리곤 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는 김치선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대창교회에 다녔는데 어머니 주일을 맞을 때마다 저와 박성환 집사님과 서너 사람이 어머니에 관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부를 때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한 사람이 만들어지는데 있어서 아마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수 많은 경우에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과 가르침이 자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세도 디모데도 어거스틴도 웨슬레도 모두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세계 최대의 부자였던 록펠러가 록펠러가 된 데는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과 가르침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록펠러의 어머니가 아들 록펠러에게 다음과 같은 10가지의 교훈을 만들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으라. 5)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6)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7)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8)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9)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10)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결국 록펠러는 위대한 신앙과 사랑과 봉사의 사람이 되었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33세 때 백만장자가 되었고 10년 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3세 때에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와 같은 사람이 된 것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받은 10가지 교훈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록펠러의 일화 중 하나만 소개합니다. 록펠러가 55세 때 불치의 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최후의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갈 때, 병원 로비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라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어머니의 가르침이 생각났고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조금 후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는데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측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는 병으로 죽어가는 딸을 입원 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곧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고 누가 지불했는지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운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록펠러는 얼마나 기뻤던지 나중에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록펠러가 도움의 손길을 폈던 그때 신기하게 그의 병도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도움의 손길을 펴는 도움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모든 아름다운 삶은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비롯했습니다.
한국의 최초의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이었고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 윤함애 사모는 자녀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1) 세상과 짝하지 마라. 2)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3) 열심히 교회봉사를 하라. 4) 주의 종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시다. 주의 종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미리암과 같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5) 상대방이 네 인격을 어떠한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짓밟고 천대와 멸시를 하더라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만 바라보며 끝까지 참아라. 6) 날마다 참으며 네가 네 자신을 죽여라. 7) 남을 용서하지 못할 때 예수님도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채의숭 장로는 매출 10억불의 대의 그룹의 회장인데 그는 자기 인생의 성공 비결은 어머니로부터 다음과 같은 철저한 신앙의 훈련을 받은 데 있다고 고백하면서 최근에 "주께 하듯 하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채의숭 장로의 어머니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주일을 성수하라. 예배를 드릴 때는 맨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십일조를 철저히 하라. 십일조를 하면 분명히 물질의 복을 받는다. 셋째, 목사님께 순종하라. 또 너의 달란트를 복음을 위해 사용하라. 채의숭 장로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성경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겼고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체의숭 장로는 인생과 사업에 있어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눈물의 어머니 모니카의 행복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이 어거스틴이 된 데는 그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어거스틴은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또 고백했습니다. 사실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 때문에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30여 년 동안 슬픔과 아픔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이 가장 큰 기쁨이 되었고 가장 큰 행복이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를 위해서 수 많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 눈물이 저의 평생의 삶의 기쁨과 축복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Monica)는 어거스틴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경건한 여인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인내와 온유의 성품으로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인내와 눈물의 기도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비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모니카는 인내와 기도와 전도로 그의 남편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했고 자기를 오해하고 미워하던 시어머니도 인내와 온유로 굴복시키고 말았습니다. 모니카는 싸우는 사람들의 화해자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그녀는 우리 모든 사람을 섬겼는데 마치 그녀가 우리 모두의 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의 고백이었습니다. 모니카는 누구보다도 어거스틴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아들의 영적 생명을 출생시키기 위해 어머니는 해산의 고통을 거듭거듭 겪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되 폭포수 같은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의 사랑의 품 속에서 자랐고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눈물을 받아 먹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17살 때 고향 타가스테를 떠나 칼타고에 가서 10여 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무명의 여자와 동거하는 정욕의 죄악에 빠졌고 마니교를 따르는 이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타락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모니카는 절망과 고통과 탄식의 눈물을 흘리며 죽음 같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어거스틴은 28세 때에는 더 큰 세상의 출세를 향하여 칼타고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 모니카를 속이고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실로 내가 떠나간다는 말을 듣고 죽음과 같은 괴로움에 사로잡혀 해변까지 나를 따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부여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든지 로마로 가려면 같이 가든지 하자고 애걸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친구가 항구를 떠나는 것을 전송해야겠다는 구실을 들어서 어머니를 속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어머니인데!... 어머니는 나 없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시켜 그 근처에서 밤을 지내시도록 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어머니 품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바람이 불어 돛을 때렸습니다. 해변이 시야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고향으로, 나는 로마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참회록」, 5권 8장 15절). 그러나 어거스틴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불행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위험한 질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몹시 괴로운 어투로 그 질병을 어머니 모니카를 버린 죄 값으로 온 ‘질병의 채찍’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는 2년 후인 384년 가을에는 로마를 떠나 밀란으로 갔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이 밀란에 갔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을 찾으러 밀란까지 달려왔습니다. 어거스틴이 31살이 되던 385년 봄이었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이 우여곡절 끝에 밀란의 감독 암브로스를 만났고 그에 대한 호감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모니카는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아들의 손을 붙잡고 암브로스 감독에게로 달려가서 함께 암브로스의 설교를 생수처럼 들이켰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위해서 울면서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전보다 더 열심히 서둘러 교회에 갔다. 그리고 암브로스의 말씀을 마치 생수처럼 들이켰다. 어머니는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사랑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그 분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참회록」, 6권 1장 1절). 어머니 모니카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눈물은 30여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의 눈물이 결국에는 기쁨과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윗도 이와 같은 인생의 비밀을 발견하고 이렇게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5,11). 이제 어머니 모니카가 지니게 된 기쁨과 행복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아들 어거스틴이 32살 때 밀란의 어느 집 정원 무화과 나무 아래서 눈물을 강물처럼 또는 폭포수처럼 쏟으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어머니 모니카는 기쁨과 행복에 겨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 후 우리는 내 어머니에게 가서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셨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렸더니, 어머니는 승리의 기쁨에 겨워 당신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모든 희망과 꿈이 산산조각이 날 때도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만큼 충분한 능력, 아니 그보다 더 넉넉한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그녀는 당신께서 그녀가 가엽고 슬프게 탄식하며 간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나를 당신께로 돌이키셨습니다. 당신은 여러 해 전에 이미 내 어머니에게 꿈을 통하여 내가 신앙의 규칙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머니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어떤 숙원이 이루어질 때 보다 훨씬 더 풍성한 기쁨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내 몸에서 날 육체의 자식들에게 얻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기쁨보다 더 아름답고 순수한 기쁨이었습니다.” (「참회록」, 8권 12장 28-30절).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옛 생애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와 같은 자기의 개종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주저 없이 인정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진리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마음, 그 밖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밖에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도록 된 마음을 주신 것은 어머니의 기도 덕분입니다. 그렇게 큰 유익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어머니의 기도였던 것을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 (「질서론」, 2권, 20장 52절).
둘째, 아들이 개종 후 세례를 받고 고향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밀란과 로마를 떠나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길에 오스티아라는 항구에 머물면서 아들과 함께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면서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누렸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정원을 바라보는 창 문턱에 기댄 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그윽한 기쁨을 나누며. 우리가 ‘그분의 지혜’를 애기하면서 그것을 헐떡거리며 사모하고 있을 때 한 순간 우리는 진심을 기울여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어떤 소리도 아니요 천사의 소리도 아니요 천둥 소리도 아니요 비유의 어두운 의미도 아닌 바로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음성만을”(「참회록」, 9권 10장 23-25절). 어머니와 아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이미 천국을 맛보고 있었습니다. 모니카의 기쁨과 행복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이내에 모니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9일간 병상 생활을 하는 동안 모니카는 간혹 눈을 떠서 자기 아들을 축복하고, 어거스틴에게서는 평생 싫은 소리 한번 듣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손으로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메었습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질 뻔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머니가 주는 커다란 위로를 잃고 말았습니다(「참회록」, 9권 12장 31절). “모친이 매장되던 날, 나는 종일 무거운 슬픔을 참고 있었습니다. 나는 주님의 여종에 대한 과거의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친이 주님과 대화할 때 얼마나 경건하고 사모하였는지를 기억했습니다. 모친이 나와 대화할 때 얼마나 부드럽고 자상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런 기억을 되살리며 주님 당신 앞에서 모친에 대해서, 또 모친을 위해서, 나에 대해서, 또 나를 위해서 울면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참회록」, 9권 12장 32-35절).
셋째, 어머니 모니카는 천국에서 아들의 평생의 삶과 사역을 내려다 보면서 너무너무 큰 기쁨과 행복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참회’와 ‘환희’와 ‘기쁨’과 ‘슬픔’의 아들이 388년 고향 칼타고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종’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어거스틴은 76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아프리카의 무지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바치면서 저들을 섬겼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살던 아들이 아프리카의 사람들과 주님을 섬기면서 한 평생을 불사르는 모습을 천국에서 바라보면서 어머니 모니카는 기쁨과 행복에 겨워서 주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들 어거스틴이 그렇게도 자신만만했었는데 히포의 감독이 된 중년의 어거스틴이 자기의 무능과 죄성을 깊이깊이 참회하는 참회의 사람이 된 것을 천국에서 바라보면서 어머니 모니카는 기쁨과 행복에 겨워서 주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악한 슬픔이 나의 선한 기쁨과 싸우고 있는데 승리가 어느 편에 돌아갈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보시옵소서 나는 내 상처를 감추지 않습니다. 당신은 의사이시며, 나는 병든 사람입니다.”(「참회록」10권 28장 39절).
또한 그렇게도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착에 사로잡혔던 아들 어거스틴이 천국을 사모하고 간절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모니카는 기쁨과 행복에 겨워서 주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 마지막 권 마지막 부분에서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천국의 평화를 다음과 같이 간절하게 간구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당신의 평화를 주시옵소서. 평온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안식의 평화를 주시옵소서. 저녁이 없는 평화를 주시옵소서.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모두 매우 선하지만, 그것들은 그들의 과정이 지나면 다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거기에는 모두 아침과 저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없고 석양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날을 영원한 날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창조의 사역 후에 일곱째 날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생의 안식의 때에 당신 안에서 쉬게 될 것입니다.”(제13권 35장 50절).
오늘 아침 어버이 주일을 맞아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물론 손양원 목사님은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으로부터 깊은 신앙의 감화와 감동을 받았고, 손동희 권사님은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깊은 신앙의 감화와 감동을 받았고, 주광조 장로님은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깊은 신앙의 감화와 감동을 받았고, 이사례 권사님은 아버지 이기풍 목사님으로부터 깊은 신앙의 감화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신앙과 사랑의 부모님들을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부모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우리들도 자녀 손들에게 깊은 신앙과 사랑의 감화와 감동을 끼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