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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한 은혜를 헤아려 봅시다 (고린도후서 1:8-11)
오늘은 고린도후서 1장 8절에서 1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유익한 은혜를 헤아려 봅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 말씀을 제목으로 정하고 말씀을 드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2000년을 맞이하면서 얼마나 불안에 떨었습니까? 컴퓨터가 2000년을 해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세계적으로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Y2K문제입니다. 무사히 이 한해를 지내왔습니다. 1999년 말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2000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면서 얼마나 기세를 부렸습니까? 금년한해를 지내면서 내게 좋았던 일들만 유익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좋지 않다 싶은 일도 많이 당했지만 지내놓고 보니 결국은 그것도 유익이 된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래저래 유익이 되는 은혜를 이 시간에 하나 하나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어떤 중견 사업가가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서 방황하다가 아주 이름 있는 상담학자를 찾아갔습니다. "나는 인생을 살맛이 없고 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망한 경위를 설명했습니다. 그 말은 들은 상담자가 "당신 사업이 망해서 많이 손해를 본 것 같군요. 제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을 해 보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사업이 잘 될 때 건강했을 텐데 사업이 망하고 난 후에 그 건강을 잃어 버렸습니까?" "아니오" "당신이 사업이 잘 되어 잘 나갈 적에 당신의 재능이 아주 뛰어났을 줄 압니다. 사업이 망하고 난 다음에 그 재능을 다 잃어버리고 천치 바보가 되었습니까? "아니오" "그리고 당신 사업이 잘 되고 성공했다 싶을 때 가졌던 가정 즉 처자식들이 망하고 난 후에 다 흩어져 파탄이 났습니까?" "아니오" "당신이 진정으로 도와 줄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친구, 비밀까지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사업이 잘 될 때는 친구였는데 사업이 망하고 나니 당신을 떠났습니까?" "아니오.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예, 하나님을 참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원망스럽습니다" "그럼 당신이 잘 믿었던지 원망스럽던 지간에 그 하나님이 살아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을 리는 없겠지요" 그 때 상담자가 "그러면 당신은 잃어버린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돈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에게만 들어와서 쌓여 있으면 그것은 돈이 아닙니다. 돈은 자꾸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자꾸 써야 합니다. 그래야 돈 없는 사람들이 벌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에게만 들어와서 자꾸 쌓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돈은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을 하다가 망하는 경우도 있고 잘 되어서 돈을 버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돈은 언제고 또 들어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잃어버린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살맛이 없다고 하십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고 힘을 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습니다. 힘을 내어 살다보니 정말 인생을 바로 살게 되었고 다시 사업을 해서 성공을 하고 잘 되었습니다. 상담사례 중의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여러분 일년 동안 지내오면서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입니까? 잃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얻었다고 해서 다 좋기만 한 것인가? 나에게 무엇이 유익되었는가를 가만히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고난의 유익 (8-9)
구약 성경에 보면 욥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욥이 얼마나 고난을 당합니까? 얼마나 겹겹이 고난을 당했는지 세상에 저렇게 불행해질 수 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 못합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요,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도 제법 믿는다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까? 하루 아침에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알거지가 됩니다.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10남매의 자녀가 하루 아침에 다 죽고 아내는 떠나버리고 자신은 문둥병에 걸립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그에게 주셨습니까? 고난을 당할 적에는 그렇게 고통스럽기만 했지만 욥도 고난을 지나 놓고 보니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자기에게 믿음의 플러스가 되고 좋은 일이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욥에게 고난을 주셨겠습니까? 욥의 겉은 멀쩡해 보여도 두 가지 문제를 안고 믿음의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첫째는 내가 부자요, 아들딸들이 잘되고 집안이 행복한대 이런 집안에 재난이 닥쳐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난은 오지도 않았는데 만약의 재난을 생각하면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믿음의 찌꺼기였습니다.
욥기 3장 25절 상반절을 보면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고난이 근처에 오지도 않았을 때 그것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 하고 두려워하던 일이 지금 욥에게 닥쳤다는 뜻입니다. 왜 앞당겨서 자꾸 걱정을 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까? 분명히 믿음의 찌꺼기였습니다.
욥기 3장 25절 하반절을 보면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될 까봐 무서워했던 그것이 기어이 내게 오고야 말았다는 뜻입니다. 왜 무서워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욥을 단단히 훈련시켜서 저런 버릇을 고쳐 놓아야겠다'하시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둘째 나는 죄가 없고,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욥40:8). 내가 너에게는 의롭다 할는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고약했겠습니까? 욥이 잘 믿는 것 같았지만 이런 믿음의 찌꺼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고난을 통해서 욥을 연단 하셨습니다. 욥이 비로소 그 때 그것을 깨닫고 단단히 회개하지 않습니까?
욥은 욥기 23장 10절에서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정금은 찌꺼기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찌꺼기가 많으면 쓸 데가 없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욥이 모든 믿음의 혼잡물을 제거하고 보니 마지막에는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할 때는 그렇게 괴로웠지만 지나 놓고 보니 자기에게 믿음의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난도 욥에게는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에서 9절을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살 소망이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또한 사형선고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게 됩니다. 아시아에서 얼마나 고통을 심하게 당했는지 바울은 거듭 거듭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살 소망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에게 왜 그렇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그런 고난이 닥칩니까? 왜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주십니까? 바울사도는 고난을 당해 이제는 죽었구나 싶을 때 살고자 하는 자기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고 자신의 살고 죽음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온전히 의뢰했더니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살길이 열려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난을 통해서 "내가 내 자신도 의뢰하고 믿을 바가 못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하나님밖에는 믿을데가 없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바울사도는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 믿는 법을 배웠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런 고난을 통해서 믿음의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고난의 유익입니다.
김창인 목사가 평생 살아오는 동안에 언제 예수를 진짜 잘 믿었을 것 같습니까? 제 믿음이 항상 한결같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항상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6·25사변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그 다음에 국군과 UN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습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는 까닭에 국군과 UN군이 후퇴를 했습니다. 그 당시 평안북도에서는 10월말부터 후퇴를 했고 평안남도는 11월 달에 벌써 다 후퇴를 하였고 황해도는 11월 말 12월 초에 다 후퇴를 하고 38선 이남으로 넘어갔습니다. 해가 바뀌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 놓고 후퇴를 하게 됩니다. 이것을 1·4후퇴라고 합니다. 저는 1·4후퇴 때까지 내 고향 황해도에서 피난을 못 나왔습니다. 그런데 도망갔던 동네 공산당들이 들어오고 내무서원들이 돌아와서 이 잡듯이 토벌을 했습니다. 얼마나 토벌이 심하였는지 사촌지간에도 어디에 숨었는지 알려 주지를 않았습니다. 사촌이 잡히면 두들겨 패고 자백을 받아 어디에 숨었는지 알아내기 때문입니다. 살길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겨울에 어디에 굴을 파겠습니까? 아궁으로 기어 들어가서 구들장 밑에 파놓은 굴에서 6월 15일까지 꼭 6개월 동안을 갇혀서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6개월을 굴속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살겠습니까? 여름은 가깝고 참 난감했습니다. 황해도에는 높고 큰 구월산이 있습니다. 거기에 올라가서 숨어있던 제 당질 조카가 이때 마침 양식을 가지러 밤중에 내려왔을 때 연결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구월산에 올라가다 보니 준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 제가 3일째 되는 날 밤에 내려오겠습니다. 산에서 지낼 준비를 해 주십시오"그리고는 산에 올라갔습니다. 3일의 약속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저에게는 실감나는 내용이었습니다. 산에 올라간지 하루 지나고 이틀 지나고 삼일 째 되는 날 점심을 먹고 그때부터 산을 내려오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어두워질 때 산밑에까지 내려오고 벌판 건너 집에 가서 준비한 것을 갖고 다시 산으로 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여명이 구월산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거기에 총을 가진 8240유격대원이 한 명이 있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점심을 먹고 나니 유격대원이 40명을 모아 놓고 자기는 본부의 명령을 받고 지금 서해에 있는 섬으로 철수해야 할 상황이니 나를 따라 섬으로 들어갈 사람은 따르고 떨어질 사람은 떨어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거기에서 떨어질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따라 나섰습니다. 그렇게 따라 나선 다음 아버지 어머니와 다시 만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재작년에 평양에 가서 동생들을 만나보니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 열 여덟이었습니다. 얼마나 날고 뛸 나이입니까? 그런데 6개월 동안 굴속에 있었기 까닭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따라갈 재간이 없었습니다. 깊고 높은 산을 타고 넘고 넘어갔습니다. 죽을 힘을 다 했으나 꼴지로 겨우 따라가고 있었지만 자꾸 떨어집니다. 낮에는 뒤를 돌아 봐 주고 기다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밤이었습니다. 밤이 되니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떨어지고 열 걸음 스무 걸음 떨어집니다. 어떻게 합니까? 거기가 어디라고 소리를 지르겠습니까? 그렇게 떨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앞서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깊고 깊은 산중이요,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꼼짝 못하고 있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 부르는 것입니다. 너무 난감하고 한치 앞을 바라다 볼 수 없을 극한 상황입니다. 정신을 잃을 지경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부른들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 때는 내 수단과 방법으로는 살길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는 것도 그저 "주여!" 뿐입니다.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 손에 있었습니다. 내가 나를 믿을 바가 못 되고 누구를 믿을 바도 못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최고로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100퍼센트 하나님만 믿고 찾았습니다. 정신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시계도 없을 때입니다. 30분이 갔는지, 한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는데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 그곳은 길이 있는 산이 아닙니다. 높고 험한 산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엎드려 보니 총을 메고 앞장섰던 그 분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이 분이 한참을 가다가 쉬면서 점검을 해 보니 제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되돌아서 저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속으로 '천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돌려보내시니 그 아저씨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저씨를 따라 섬으로 들어와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난감하고 큰 절망 상태에 있을 때 의지하고 의뢰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예수 믿는 법을 거기에서 배웠습니다. 그 사건이 저에게는 얼마나 믿음에 유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일년 동안 살아오면서 아주 난감한 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죽고 싶었던 일을 당한 적은 없었습니까? 당할 때는 정말 기가 막히지만 당하고 나면 예수 믿는 좋은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믿음에 유익이 되고 은혜의 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체험의 유익 (10)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을 보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하였습니다.
큰 죽음이 있고 작은 죽음이 있습니까? 죽음이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지 않습니까? 어른이 죽으나 어린 아이가 죽으나 죽음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큰 사망'이라고 했습니까? 얼마나 바울이 혼이 났으면 이런 표현을 했겠습니까? 큰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죽음, 꼭 죽었다 싶은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사도가 이제는 꼭 죽었구나 할 때 하나님께 전적으로 생사를 맡겨 의뢰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같이 자기를 살려 주는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지금도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자기를 건져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것을 바라는 희망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사역을 가리킵니다. 희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희망이 없으면 한강에 가서 죽는 것 밖에 더 있습니까? 바울은 죽어 죽어 하는 극한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희망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지난날의 체험에서 나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성경은 공부하라는 책이 아닙니다. 그대로 살아가라는 책이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을 생활 속에 체험하면서 살아가라는 책입니다. 성경을 절대 배우는 데서 끝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믿음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 생활 속에 그대로 열매맺는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여러분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믿음의 큰 유익을 주는 은혜입니다.
셋째, 기도의 유익 (11)
본문으로 돌아가서 11절을 보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들이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돕는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말씀은 기도가 최고의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도움이 최고의 도움이라는 까닭은 사람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로 그 기도의 능력, 기도의 역사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많은 사람의 간구로 인하여 받은 은사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기도할 때 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씩만 해 주어도 내가 하나님의 큰 도움을 받을 것이요,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를 보고들은 이웃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유익이요, 기도로 도와주면 도와 줄수록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Max Handel이라고 하는 사람이 "기도는 전기 스위치를 키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전기를 만들지는 않는다. 단지 전기가 흐르도록 통로를 만들어 줄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발전소에서 생산해 내는 전기가 전선을 타고 여러분들의 대문 밖에 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여러분들의 집안으로 전기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전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장만해 놓은 모든 가전 제품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키는 순간 전기가 계속 흘러 집안 구석 구석에 넘쳐서 가전 제품을 모두 쓸 수 있게 합니다. 이렇듯 스위치는 전기가 흐르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스위치를 끄면 전기는 끊어집니다. 스위치를 키면 연결이 됩니다. 여러분들의 공장 대문 밖에 까지 전기가 와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치를 키지 않으면 그 어마 어마한 공장 시설이 쓸모가 없습니다. 전기가 없는 설비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스위치로 연결을 시키면 그 엄청난 전기가 공장으로 들어가서 공장의 기계를 전부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이런 스위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스위치가 절대 전기를 만들지는 않으나 전기가 흐르는 통로를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 그리고 어마 어마한 축복의 약속들이 여러분의 문 앞에까지 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사업장 대문 밖에 까지 와 있습니다. 그 때 기도라는 스위치를 켜 놓으면 여러분의 사업에,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과 능력이 들어가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스위치를 내리면 절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은 여러분의 집안 구석에 미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통로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꼭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복신앙이라고 할런지 모르나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만큼 강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에스겔 36장 3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같이 너희들을 회복시키는 축복을 주시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셨지만 그래도 너희가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기를 내게 기도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약속은 하셨을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오늘로서 40일 특별철야기도회를 마쳤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35여년 동안 연말에 40일 특별철야기도회를 한적이 있습니까? 새벽기도회는 했습니다. 특별철야기도회를 시작해 놓고 안되면 뭐가 되느냐 싶어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먼저 두 달 동안 제가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우리가 40일 특별철야기도회를 시작한 후 본당의 아래층 위층을 꽉 채우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그 기도가 스위치와 같아서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 사업에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전기 흐르듯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본문이 가르쳐 주는 유익한 은혜는 첫째로 고난도 유익을 주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연단을 받으면 정금같은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체험은 큰 은혜가 됩니다. 지난날의 체험은 소망 중에 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기도는 믿음에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은혜입니다. 기도는 스위치를 키는 것과 같은 까닭입니다. 금년 200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오늘이 또한 주일이기도 합니다. 지난 일년동안에 유익했던 은혜를 헤아리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창인목사설교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