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44
창37:1-11
오늘은 교회창립33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교회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1974년 3월 10일 개봉동 한 복판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개봉동은 서울의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하여 서울시가 발전할 때 가장 늦게 개발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기가 좋고 살기가 좋은 곳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은 큰 뜻이 계시어 교회를 세우셨고 지난 33년 동안 큰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 동안 기쁘고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 교회의 연수만큼 믿음이 성장하고, 물질의 복도 받고, 삶이 달라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도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뒤 26년 이상 한결같이 목회 하셨던 故 김태환 목사님이 세상을 떠난 것이 교회 역사에 큰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이사를 하면서 고인의 때묻은 흔적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일 때마다 신실하셨던 목사님을 추억해 보았습니다. 개척 때부터 교회의 건물을 세워 가는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 2층 교회에서 지금의 부지로 옮겨 어렵게 교회를 신축하던 일, 점점 큰 건물과 주변의 땅을 매입하며 확장해 나가는 일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몇 번의 물난리를 겪어 교육관이 물에 잠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온 성도들이 자기들의 집을 제쳐두고 교회로 모여 물을 퍼내었던 기억이 납니다.
울고 웃으면서, 기쁘고 어려운 일도 지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시려고 새 성전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번 주부터 본격적으로 철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한 시대를 믿음으로 살던 성경의 사람들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믿음을 더욱 키워야 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에 이어 오늘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떤 믿음의 사람일까요? 요셉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꿈을 꾸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창세기의 족장가운데 요셉의 이야기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요셉의 이야기와 기록에서 가장 돋보이고, 또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꿈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꿈으로 시작되어, 꿈의 진행을 보여주고, 결국 꿈이 실현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17세의 소년으로 나타나 110세로 삶이 마칠 때까지 요셉의 이야기는 꿈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꿈은 요셉의 생애에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37장에서 형제에게 공개한 두 개의 꿈을 시작으로, 40장에서 감옥에 있을 때 두 관원의 꿈 이야기, 그리고 41장에서 애굽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한 이야기 등, 모두가 꿈과 관련해서 생애 전환점을 이루었습니다. 꿈을 꾸고, 꿈을 해몽하고, 꿈을 위해 살다가 꿈 안에서 그는 인생을 마친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와 기록에서 꿈이 빠지면 남는 것이 없고, 아무 것도 없을 만큼 꿈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모습입니다. 꿈을 갖는 것이 결국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꿈이 있는 인생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처럼 비참한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는 원동력은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포기하고, 절망하는 순간 인생은 끝납니다. 꿈이 살게 하고, 꿈이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셉의 믿음은 꿈을 꾸는 믿음이고, 그 꿈의 성취를 위해 꿈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는 것입니다. 충분한 대가, 어떻게 보면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꿈만 말하고 대가를 강조하지 않으면 그것은 요셉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17세에 꿈을 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30세였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에서 선명하게 꿈꾼 나이와 이루어진 나이를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꿈을 꾸고 13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기간은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날들입니다. 성경의 인물가운데 요셉만큼 고난을 받은 사람이 드뭅니다. 애굽으로 팔려 가는 순간부터 그는 한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의 세월을 자기와 싸우며 보냈습니다. 이 과정 없이 요셉은 요셉이 아닙니다. 이것을 빼고 꿈의 실현이라는 결과만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요셉은 꿈을 위해 대가를 치렀고, 남보다 열심히 주어진 상황에 충실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절로 꿈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건 성경적 믿음이 아닙니다. 대가없이 꿈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꿈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말의 꿈을 영어로 Dream 혹은 vision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꿈이라는 말이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이 두 단어의 공통점은 물론 둘 다 미래적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믿는 자의 경우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준다는 것 측면에서도 역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대가의 차이입니다. dream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vision은 다릅니다. 대가를 치르는 꿈을 vision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꿈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바로 vision입니다. 성경은 vision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비전이 없으면 망하고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이 방자히 행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꿈은 비전을 가리킵니다. 꿈에 대한 대가가 지불된 뒤에 얻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꿈은 돼지꿈을 꾸고 복권을 사서 하루아침에 일확천금,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꿈을 꾸고, 그 꿈에 대해 확실하고 충분한, 그리고 때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곧 꿈을 꾸는 것입니다. 요셉처럼 꿈을 꾸는 자, 비전을 갖는 자가 되십시오. 개인과 가정은 물론이고, 특히 교회에 대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성전을 꿈꾸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것을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매번 드리는 예배마다 가득 채우는 자리를 꿈꾸어야 합니다. 그 꿈과 비전을 위하여 요셉처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었든지 힘써야 합니다. 꿈을 꾸고, 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사랑 받는 믿음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꿈도 중요하지만,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은 자로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아버지, 부모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본문 3절에 그것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큰사랑, 깊은 사랑 안에서 자란 자녀입니다.
또한, 요셉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자로 강조합니다. 그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모습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절정에 달합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왕도 그를 가장 총애했습니다. 왕이 요셉을 향한 사랑이 절정에 달할 때, 왕은 요셉에게 자기에게 남은 것은 자리뿐이라고 하면서 요셉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사랑했던 것을 봅니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종종 주격이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보여집니다만 구약성경에서는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요셉의 생애는 한마디로 사랑을 받는 생애였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믿음이었고, 삶이었습니다. 이 사랑 받는 삶과 믿음이 요셉의 생애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랑이 요셉을 살게 했고, 요셉의 어려운 과정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었고, 꿈을 이루는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해 그는 사랑을 받을만한 행동과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도 부모를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부모의 근심이나 걱정이 아니라 자랑과 면류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요셉은 사람들을 위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특히 그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칠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던 것을 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는 늘 신전의식(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바르게 살려고 누구보다도 몸부림치며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모든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랑 받는 자로 소개됩니다. 이것이 그들의 삶이고,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 받는 삶을 위하여 그들은 사랑 받을만한 행동과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여러분, 사랑 받는 것이 결국 삶이고, 믿음입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먼 사람들, 가족과 형제와 이웃에게 사랑 받는 자가 되십시오. 특히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믿음의 사람들, 사랑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용서하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요셉의 꿈을 보여주고, 사랑 받는 모습도 알려주지만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반응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8절과 11절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 그 꿈과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그 형들은 시기하되...”
요셉의 이야기는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이런 반응으로 시작을 합니다. 결국 그 반응이 요셉의 생애가 고난으로 들어가는 서곡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 이후에 요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형들의 미움과 시기로 그는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부모와 고향을 떠납니다. 남들처럼 편안하고 호화롭게 산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고생고생하며 살았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찾아온 인생의 외로움은 아마 무엇보다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들어갑니다. 잘못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힙니다. 얼마나 힘들고, 지치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이것이 꿈을 이루기 전에 나타난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고생으로 밤마다 눈물로 범벅이 될 때마다 아마 형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것입니까? 피를 나눈 자기의 형제들로 인해 여기까지 팔려온 것입니다. 얼마나 원망스럽고 분노가 치밀었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지금까지의 고생한 것을 고스란히 갚아 주겠다고 이를 악물고 살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성공하면, 고향을 찾으면, 형들을 만나면 지금까지 고생한 것 배로 갚아 주겠다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형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모든 시종들 앞에서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요셉이 나중에 형들을 만나 본 뒤 변화가 와서 형들을 용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요셉은 형을 만나기 전부터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총리가 된 순간부터, 아니 그가 고향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는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과거는 이미 청산이 되었고, 아픈 과거는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의 위대한 믿음을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나중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을 때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잊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모든 아픈 과거를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이것이 요셉의 삶이요, 또한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본질을 논하고, 믿음의 사람을 말할 때, 가장 강력하고 돋보이는 것에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고, 그 믿음이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믿음의 대명사인 주님이 걸어가셨던 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하면서 용서하지 않으면 아직까지 먼 것입니다. 용서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떨리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용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해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결국 나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억압과 고통과 분노에서 놓아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유인으로 살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요셉의 믿음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꿈을 꾸는 믿음, 사랑 받는 믿음, 그리고 용서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