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0
판 어뜨 스빼이꺼 교수 (네덜란드 기독교개혁신학대학교)
이 강연은 종교개혁에 관한 지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16세기에 전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추구했던 바, 오늘날에도 결코 놓칠 수 없는 가치 있는 사상을 명료하게 밝힐 것이다.
종교개혁 자체는 다양한 형태를 지닌 운동이었다. 아마도 루터(Luther) 가 한번 강타한 것이 스위스, 남부 독일, 영국 등에서 독자적인 방법으로 전해지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전통의 다양성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의 일치성은 교회 직제론에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난다. 비록 여기서 루터가 제기한 개인 구원의 확실성의 문제, 즉 ''내가 어떻게 은혜의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제일 먼저 관계될지라도, 많은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많은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교회직제론은 한결같이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질문에 대한 깊은 종교적인 뿌리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계층 질서적인 직제 구조와 불가피하게 얽혀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교황은 교회의 머리에 해당된다. 여기에 반해서, 종교개혁은 ''이신칭의''교리에 견고한 기초를 두고 있는 ''만인제사장직''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서 종교개혁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대립(칭)이 사라진다. 세례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서품 받은 제사장(사제)이라고 루터는 가르쳤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계층구조적인 직제 구조에 가해진 강한 펀치는 로마 카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사이의 고유한 분리에 빛을 던져 주는 힘이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사이의 결정적인 분리를 가져온 대립과 갈등은 분명히 이신칭의 교리 영역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신칭의 교리는 양자의 갈등과 대립의 최종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다. 1540년대 초에 진행되었던 종교간의 대화에서 칭의론의 문제에서는 하나의 통일안이 발전되었지만, 양자의 일치의 장애물을 가져다 준 것은 양자 서로 불일치로 끝난 교회의 직제와 구조 문제였다.
그 때에 양자의 갈등과 대립의 골이 얼마나 깊은 지 잘 나타났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종교개혁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재빨리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과 직제라는 주제는 우리를 근원으로 인도하며, 종교개혁의 신학적 근원지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서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해서 종교개혁 운동의 일치된 모습을 얻었다.
우리가 이미 말했다시피, 종교개혁자체 속에서도 다양성이 존재했듯이, 직제론에서도 다양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개혁의 직제론에서의 다양성을 보다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일치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위협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로 간주하는 루터의 직분 개념은 모든 종교개혁 속에서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직제의 다양성은 정부(국가)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형태에 따라 발전했다. 이런 모양은 개혁과 전통 속에서 나타났다.
성화와 치리(권징)와 관련된 교회 개념 속에서 전형적인 대리자로서의 장로의 기능에 대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장로회적 사상은 법과 복음이 루터의 경우와 다르게 작용하는 개혁파 전통 속에서 발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파 개신교속에서도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 다양성은 교회 직제와 국가(정부)의 관료 직제의 관계 문제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쮜리히 또는 즈네바쪽으로 향했던 개혁파 종교개혁운동이 항상 같은 방향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쯔빙글리와 불링거의 모델 또는 칼빈과 베자의 모델을 따르는 신정론은 직제의 임무와 기능의 관점에서 차이가 거의 없다. 영국 성공회의 경우에는 직제의 다양성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영국 성공회 속에서의 발전들은 이미 종교개혁 시대에 교회의 직제의 고유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감독들과 장로들 사이의 차이를 형성하는 직제 개념이 있었다.
직분과 교회에 관한 종교개혁적인 개념 속에서 일치성에 관해서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다양성도 적지 않다. 종교개혁과 직제에 관한 이 모임에서 두 가지의 요소, 즉 일치성과 다양성이 다같이 표현된다면,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남긴 한 사건, 쉽사리 한 관점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린 한 사건에 폭넓은 시야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부여하는 현실적 의미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논쟁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 주제에 관여하고 있는 우리의 모임은 이러한 현실성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직제에 관한 종교개혁적 개념의 동기들과 관점들이 다시 한 번 더 분명하게 밝혀진다면, 이것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 통해서 직제와 은사의 관계뿐만 아니라, 직제와 교회의 관계도 명료해질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의 위험성은 모든 직제 구조의 관료주의를 초래할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쯔빙글리가 그의 작품 ''목자''에서 보여주고 있는 통찰과 그의 제안들을 잘 채질하여 걸러낸다면, 정부와 사회 속에서의 직제의 성격과 기능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16세기에 설득력 있게 전파된 것처럼, 교회 역시 위기의 시기에 자신의 전적인 자립성과 독립성을 위해서 자신의 고유한 구조를 가지고 자신의 테두리 내에 머물 수 있을 것이다. 직분에 관한 종교개혁적 사상의 한 예를 우리는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의 신학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주요 관점에 관한한 우리는 부처의 직제론을 아래와 같이 8가지 논제들로 열거할 수 있다.
1. 부처의 직분론은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이름과 함께 특징지을 수 있는 그의 발전의 배경 하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그의 자신의 고유한 신학이 형성되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상황은 그의 신학 사상의 발전 속에 항상 존재했다. 그의 직분론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질서 개념에 반대하여 형성되었다. 마찬가지로, 그의 직분론은 재세례파와의 갈등, 성찬논쟁, 그리고 ''쾌락주의자들''에 반대해서 발전했다.
부처 자신의 발전은 그의 신학을 형성했던 몇 개의 노선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다. 부처가 입학했던 쉴레트슈타트에 있는 라틴어 학교는 현대경건의 전통 속에 있었다. 부처는 참된 삶의 문제를 경건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가치 있는 지식을 여기서 습득했다. 그곳에 있는 수도원에서 부처는 어느 정도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었고, 심지어 어느 정도 열광적으로 그의 신학을 칭송하기도 했다. (토마스의 영향은 특히 부처의 후기 신학 속에서도, 예를 들면, 그의 성찬론이나 선택론 속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다.) 부처의 신학적 용어 구사 방법은 그의 사고가 스콜라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처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상으로 에라스무스에 관심을 가졌고, 에라스무스의 작품들을 자신에게 받아들이고 발전시켰다. 즉, 부처는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서적 인문주의와 자유의지 등의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 그는 루터의 편에 섰다. 부처는 루터의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논쟁(1518) 때에 루터를 알게 되었고, 루터와의 비판적인 관계를 청산하는 방법으로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에 대해서 알렸다. 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 부처는 루터와는 다르게 이해했다. 부처의 신학적 발전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과정을 따라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발전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우리는 부처 자신이 형성했던 그의 자신의 고유한 신학적 스타일에 관해서 말할 수 있다. 그의 신학 스타일은 방법론적으로 아주 개방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신학을 대화의 신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종교개혁의 동기들은 현재적이지만, 종교개혁의 동기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 중심을 두고 있는 강한 윤리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부처의 직분론은 스트라스부르가 처한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서 각인된 신학 배경 하에서 발전했다. 부처는 그의 직분의 본질과 결부시켜서 1529년에 스트라스부르에 로마 카톨릭적 미사제도를 폐지시켰다. 질서를 성례전적 실재성으로 이해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여 부처는 이 실재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 원리적으로 부처는 미사는 아주 정교화된 선행이기 때문에 미사를 폐지했다. 이와 함께 성령론적 만인 제사장직으로서의 교회(회중)에 대한 위치를 제공하는 직분 개념을 위한 공간이 창조되었다.
이 같은 그의 직분 개념의 구조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 즉 재세례파와의 갈등 상황, 장기간의 성찬론 논쟁, 그의 후기의 ''쾌락주의자들''의 출현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부처의 초기 신학에는 초기의 쯔빙글리처럼 약간의 열광주의적인 경향이 없지 않지만, 재세례파와의 갈등의 결과로 말씀과 성령 사이의 뗄 수 없는 강한 연결을 주장했다. 성찬논쟁을 통해서 루터에 의해서 주장된 직제와 성례의 수단적인 성격을 배우게 되었다. 부처는 ''복음서 주석'' 제 2판(1536)속에 있는 재고에서 이 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 제 2세대가 경험한 쾌락주의자들과의 갈등은 부처로 하여금 그의 직분론에서 치리를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이를 통해서 부처는 그의 직분론에 장로라는 직제의 기능에 독립적인 위치를 부여했다. 즉,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강조점이 주어졌다.
2. 부처의 신학적 발전은 그의 방대한 주석들 속에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특별히 그의 ''에베소서 주석''과 ''로마서 주석'' 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직신학과 실천 신학 분야에서 부처의 작품중 ''목회신학''과 에드워드 6세 치하에 영국에서 출판된 ''그리스도의 왕국''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처의 신학은 그의 주석서를 통해서 스케치될 수 있다. 신학자 랑은 부처의 사상의 발전을 연구하기 위해서 주로 복음서 주석만을 사용하였다. 이 복음서 주석은 1520년대 초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행한 ''성경 읽기''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복음서 주석''초판(1530)은 두 번이나 출판되었다. 그리고 1536년에는 ''복음서 주석'' 재판이 출판되었다. 참으로 우리는 부처의 여러 번 거듭된 출판 판수들 속에서 그의 사상의 발전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의 ''에베소서 주석''(1527)에서 이와 같은 사실이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바, 부처는 그의 말년 영국에서 에베소서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이것이 부처 사후에(1551) 트레멜리우스에 의해서 1561년에 출판되었다. 여기에서 역시 부처의 전 신학의 발전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의 직제에 대한 강조는 교회 직제의 능력과 유익성에 대한 폭넓은 그의 취급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부처의 신학 속에서 이 에베소서에 대한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다른 개혁파 종교 개혁 주석가들도 에베소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 전통은 갈라디아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반면, 개혁파 전통은 에베소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부처의 주석 중에서 그의 ''로마서 주석''(1536)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부처는 원래 바울 서신 모두를 주석하기로 계획했지만, 이 로마서 주석 이상을 진행시키지 못했다. 이 로마서 주석은 부처의 폭넓은 신학적 명료성과 교부에 대한 그의 방대한 지식이 나타나고 있다. 부처의 로마서 주석은 종교 개혁이 산출한 가장 신학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에 속한다. 이미 1529년에 출판된 부처의 ''시편주석''은 유대 주석에 대한 그의 지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구약성서 주석들에 대한 그의 지식도 보여 준다.
거의 25년 내내 출판된 그의 많은 시대적 문서들 외에도 직분론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의 ''목회신학''(1538)과 영국에서 저술한 ''그리스도의 왕국''(1550)을 언급할 수 있다. 전자의 작품 속에서 부처는 관련 성서 구절의 주석으로부터 실천 적용 부분까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화란 국가교회에서 마련된 교회 성장 프로그램에서는 이 책이 사용되지 않았다. 부처의 목회 신학에서는 상담과 교회 치리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
그의 작품 ''그리스도의 왕국''속에서 부처는 그의 스트라스부르의 말기에 이미 가지고 있던 교회론을 전개하고 있다. 교회는 그 성격상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은 하나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개혁파 전통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부처 신학의 성격은 실천적이다. 교회법의 영역의 그의 수많은 활동 속에서 그의 직분론이 나타나고 있다: 순수한 설교에 대한 세심한 배려, 장로직의 재정을 통한 치리(권징)의 시행, 안수가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하는 성찬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제정, 직제(분)는 목자직을 의미했다.
부처의 신학의 성격은 특별히 실천적이다.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한 종교개혁적 사상을 본질화시키기 위해 경우마다 적절한 모든 가능성들을 관찰하고 포착할 만큼 충분히 역동적이다. 그의 일생동안 부처는 교회 치리의 영역에서 전문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수많은 충고의 글을 썼다. 심지어 그가 독일 함부르크의 행정관(1545)을 위해서 제안한 행정 개혁 보고서까지 발견된다. 이 속에서 부처는 성서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축과 성장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 조건들을 함부르크의 지역 상황과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부처가 제안한 교회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교회법들은 부처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조차도 그는 이것을 완전히 본질화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칼빈이 즈네브에서 스트라스부르에 피난 와서(1538-1541) 작은 프랑스 이민교회에서 목회했는데, 이 이민교회는 부처의 교회법 사상을 잘 반영했다. 부처가 외 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와 블라리(Blarer)와 함께 손을 맞잡고 사역했던 울룸(Ulm,1531)의 종교개혁은 교회법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고조 높은 교회기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드디어 1534년에 스트라스부르에 교회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서 부처가 제안한 대부분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부처는 헤센(Hessem)에서 더욱 더 분명한 교회상이 담긴 교회법을 제정하였는데, 그는 성서로부터 이 모든 아이디어를 제공받았다. 여기서 교회 내에서 기능하는 직제들의 구조가 한 눈에 보인다. 즉 순수한 설교에 대한 세심한 배려, 장로직을 통한 치리의 시행, 공적인 신앙고백(세례 안수)을 통해서 참여할 수 있는 성찬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 회중이 모이고, 유아세례가 베풀어지고, 각 회중들에게는 아주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결단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우리는 "자신을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에로 위탁한다." 바로 이 교회 속에 직제(분)가 기능하고 있다. 이 직분은 원칙상 목회적이고(상담적인)성격을 가진다.
4. 강한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는 성서 중심적인 신학이 태동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상황을 읽을 수 있는 성서 인용(성서적 근거)이 중요하다. 성화(성결)는 이웃에 대한 봉사를 가능케 한다.
부처에게서 성서 인용의 성격은 특별히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교회가 구축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떤 구조를 가져야 할지 성서로부터 청사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직분론이 생겨날 수 없다. 성서는 구체적인 교회에서 종교개혁을 불러일으켰던 하나님의 말씀, 즉 가장 먼저 설교된 성서이다. 이러한 첫 요구는 복음의 선포와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자유이다. 상황은 성서의 복음의 설교를 위해서 규정되지 않았지만, 이 상황은 현존하고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질문을 규정했다. 정부(국가)가 시민의 평화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많은 도시 국가들 속에서는 종교개혁이 아주 열악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성서에 대한 인용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직제와 봉사와 기능에 대한 신약 성서적인 지침들을 순수하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실현시키는데 부처가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약성서가 필수적이라고 지시하는 것의 자세한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구약성서의 소여들의 가치가 항상 성공적으로 평가된 것도 아니었다. 시정론(神政論)은 기독교 공동체(corpuschritianum)의 상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성서 소여들과 신학과 현실성과의 관계 사이의 불일치를 초래했다.
역사적 상황은 성서 중심적 신학의 도움으로 강력한 윤리적인 특징으로 나아갔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세 가지 요소는 서로 연루되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상호 효과적이 되도록 해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재적인 현실성에 대한 느낌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은 교구감독관(Kirchenpfleger)이라는 중세의 인물을 신약성서 속에 나타나는 장로(presbyter)로 개혁하려고 했다. 이 같은 일련의 노력은 실패했다. 이런 식의 시도는 성서가 새로운 형태들을 제공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실례가 되었다.
신학이 그 배후에서 큰 역할을 한다. 신학은 성서에 따라서 강한 윤리적인 특징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여기서 윤리적인 특징이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같은 도덕적 낙관주의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효광(효력성)에 대한 강한 신뢰로부터 나온다. 이와같은 신학적 방법은 성서에 대한 인용적(성서적근거)에 각인을 찍는다. 그러므로, 부처는 성서를 신학의 최고의 원리(primum principium)라고 불렀다. 신학적 원리는 성서에 모든 공간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신학적 원리는 역사적 상황 안에서 주석을 규정한다.
5. 부처의 직분론은 그의 전 신학의 광선들이 통과하는 하나의 스펙트럼이다. 여기에는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인간들을 개입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presemtia realis van Christus)이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교제)이라는 개념이 가장 중요하다. 부처는 성령론의 관점에서 만인 제사장직을 루터보다도 더 강조했다. 그러나, 이 성령론은 기독론적으로 규정되며, 그리스도의 왕직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부처의 직분론은 그의 전 신학의 거울로 간주될 수 있다. 그의 직분론은 강한 구원론적인 강조점을 지니고 있는 적용된 기독론(toegepaste christologie)이다. 그리스도 자신의 직분(제)에 대한 부처의 관점에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고양 상태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효과적인 적용을 의미한다. 부처의 신학은 바로 이점에서 루터의 신학과 다르다. 루터의 신학은 모든 부분에서 십자가의 신학과 연루되어 있다. 부처는 구원이 실현되는 구속역사적인 관점에 대한 더 큰 시각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고양되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부터 고양되신 후에 나무로부터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기독론적인 배경은 성령론적인 구성에 대한 각인을 찍는다. 이를 통해서 영적인 사람은 그의 경험과 함께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성령의 사역은 기독론의 전조하(前兆)에서 일어난다. 이를 통해서 열광주의 뿌리는 잘려나간다. 부처에게서 이와 같은 사실은 열광주의인 재세례파와의 갈등을 통해서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결코 서로 상반될 수 없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 속에서 그 평행선을 발견한다.
부처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더 증가되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셨다. 그것도 단번에 마굿간 구유에서 말이다. 그의 성육신은 소위 그와 같은 교회 속에서는 어떤 연속성도 찾아 볼 수 없다.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말하듯이 연장된 성육신이 아니다.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일으키시는 방법에 속하며, 구원이 우리 속에 분배되는 양태를 규정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의 사역자들(직분자들)의 활동 속에 현존하신다. 참된 현존성은 성례전적인 실재성을 의미할 뿐 아니라, 성례전적인 실재성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교회론적인 실재성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교회론적인 실재성인 한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성례전이 교회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성례전을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수행할 때, 그리스도가 참으로 현존하신다.
부처의 신학의 성격은 개혁파 전통 속에서 그의 사상의 독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루터도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교제)이라는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루터는 이 문제를 그의 작품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에서 제기하고 있다. 부처에게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를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루터 이상으로 이것은 성령론적으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부처는 만인제사장직을 루터와는 다르게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에게서 만인제사장직은 성령론적인 기독론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부처에게서 칭의론의 문제는 전가된 칭의 이상을 의미한다. 부처는 전가된 칭의에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효과적인 칭의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칭의와 성화는 서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고 연결되어 있어서, 성화는 칭의의 인식표지이다. (실천적 삼단논법) 루터는 만인제사장직을 칭의로부터 파악했다. 즉,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사장(사제)이다. 그러나, 부처는 만인제사장직을 성령론으로부터 파악했다.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모든 사람에 의해서 제사장직이 형성되었다.
6. 이 같은 성령론적인 강조점을 통해서 직제와 은사 사이의 일치를 위한 공간이 남게 된다. 직제(분)들은 소명 또는 파송을 통해서 규정된다. 직분들은 은사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은사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다. 소명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 자발성, 능력, 성공도, 직분은사들을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는데 기여한다.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직분자들을 인지하고 임명하는 바로 그 곳에 평신도들과의 은사와 직분자들의 은사가 분명하게 인지될 수 있다.
직분과 마찬가지로 은사도 성령의 사역의 차원에서 기능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양자의 일치가 기초하고 있다. 양자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의 직분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교회 안에서, 교회에 대해서 직분을 주신다.(엡 4장)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성령의 생산물(피조물)이다. 모든 성도는 크고 작고 관계없이 고유한 은사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직분은 자신의 은사를 가진다. 이것을 통해서 각각의 직분적 기능의 특성이 나타난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점에서 고유한 소명을 가진다. 따라서, 모든 직분은 자신의 소명 또는 파송을 가진다. 이것은 성령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가 소유하는 은사에 의해서 정해진다. 따라서, 은사와 직분은 상호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직분이 은사에 의존한다.
평신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은 역시 직분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즉 소명 또는 직무(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의해서 결정된다. 직분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특별한 직분의 경우 확실한 전문성(특성)이 나타난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자발성을 가진다. 직분자는 보다 훨씬 강할 정도로 자발성을 가진다. 이 자발성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자발성 이외에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고, 그를 특정한 직무에로 부르시지 않는다. 직무의 은사들은 은사들을 통해서 부리시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부름 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해당된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세속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그의 사역을 주님을 위해서 수행할 수 있는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는 순간들의 연속들을 의미한다.
직분의 은사들과 다른 은사들과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직분의 은사들은 보다 큰 테두리 속에서 하나님의 복을 확산시키기 때문에 공적인 차원 속에서 유익한 은사를 부여받게 된다. 또한 우리가 말했다시피 직분의 은사들은 다른 은사들을 고무시키고 활성화시킨다. 성도들 모두는 봉사에로 부름 받는다. 그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은사에 속하고 그들 자신의 특별한 부름에 책임을 다하기 위한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직분들은 공동체의 봉사를 위해서 있고, 이를 고무시키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주님에 대한 참된 봉사에로 인도한다.
이상의 개념들 속에서 우리는 부처의 직분자들의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직분자는 그의 은사에 의해서 식별된다. 교회를 통한 교회의 직분자 선거는 종교개혁적인 기본법에 해당한다. 회중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부름 받은 자에게는 성령의 인도함이 있고 성령께서 그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은 종교개혁적 기본법에 해당된다. 교회는 교리(진리)를 판단하고 이 진리에 일치하는 직분자를 임직시키고 해직시킨다. 루터에 의해서 제정된 이 종교개혁적 기본법을 부처는 받아들여서 루터와는 다르게 성령론적인 불 속에서 발전시켰다. 교회의 선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선택하셨는지를 인식하는 은사와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이런 특별한 은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7. 부처는 직분적 기능의 다양성(복수성)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결코 직분의 일치성과 교회와 직분의 일치성에 균열과 분리를 가져다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부처는 여기서 상호 동등성과 연합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직분의 기능은 교회의 훈육에 있다. 직분은 교회의 구축과 성장을 지향한다. 즉, 교리(진리)와 치리(권징)에 따르는 교회의 제정은 바로 직제로 향한다.
부처가 주장하는 직분적 기능의 다양성은 직분의 일치성을 깨뜨리지 않는다. 루터는 하나의 직분에 대해서 말했다. 그것은 말씀의 직분이었다. 이 하나의 직분 속에서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교회에 나타내신다. 부처에게서도 역시 한 직분의 신학적 우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1540년경 종교간의 대화가 진행되었을 때, 부처는 실천 속에서 이 같은 사상을 보여주었다. 만약에 모든 감독 교구에 하나님의 말씀에 봉사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따를 수도 있다. 항상 복음의 설교(선포)가 효과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을 때, 성례가 시야에 들어올 수 있고, 교회의 치리가 배후로 밀려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이 한 직분의 다양성을 주장했다. 이 다양성은 기능과 봉사의 다양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가끔 부처는 전통과 결부시켜서 7직분, 가끔은 네 직분 또는 세 직분을 언급한다. 그는 인간의 두 가지 측면을 부각시킨다 : 육체와 영혼, 목회와 봉사가 여기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목회직은 고유한 목자직과 교사직에 의해서 특수화된다. 그래서, 세 가지 직분이 구체화된다 : 목사, 장로, 집사, 부처가 직분을 어떻게 세분했던지 간에 항상 두 가지 기능 즉,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중요했다. 교리와 치리가 중심 위치에 서 있다. 교리는 복음의 선포를 포함하고, 치리는 이 복음과 일치되게 살아가는 우리의 윤리적인 삶과 관계된다. 직분적 봉사의 이 같은 두 가지 측면은 교회의 표식과 완전한 상호 일치 관계 속에 있다 : 말씀과 성례전의 집행과 교회치리의 시행, 직분적 봉사의 다양성 속에서도 역시 상호 동등성과 연합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가령 같은 목사로서 당회장, 노회장, 총회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직분 속에서의 구분들은 모든 기능들의 일치를 지향한다. 구분된 모든 직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구축과 성장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양성에 대해서 말해야만하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에 속하고 성장해간다. 교회의 직분적인 구축은 교회법적인 구조와 대립되지 않는다. 목회는 교회법의 선로 안에 움직이지만, 이 교회법의 참된 의미는 은혜의 법을 의미한다. 교리와 치리는 목회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복음에 대한 봉사와 이 복음에 일치하는 삶과 함께 간다.
8. 부처의 사상은 내용적으로 아주 풍부하고,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 기독론적 방법과 결부된 성령론적인 성격: 직분과 교회사이, 직분과 은사 사이의 갈등과 긴장이 없는 관계 : ''기독교 공동체''의 작은 그룹들을 포함하는 교회의 영적인 구축에 대한 지향성
부처의 교회 안에서의 직분론은 종교개혁 당시에는 상당히 새로운 것이었다. 부처의 직분론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계층구조에 반대될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공동체와 고립되어서 그들 나름대로의 거룩한 공동체를 수립하려는 재세례파들에게 반대되었다. 동시에 부처의 개념 속에는 위의 두 그룹 속에서는 배제된 아주 본질적인 진리의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에게서는 로마 카톨릭교회처럼 직분이 교회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서있다. 직분은 그 자체가 존재적인 본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이다. 이 직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속에서 교회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직분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회중과 직분자의 일치는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이라는 사실 속에 있다.
재세례파와는 달리 부처의 직분 개념 속에는 사회 공동체를 격리시킬 이유가 없다. 정부(국가)역시 직분을 가지고 있다. 정부의 사역자들 역시 백성의 목자들로서 간주될 수 있다. 국가의 지도자들(목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목자들)과 상호 협력한다. 두 종류의 목자직의 상호 구분 속에서 부처는 국가와 교회의 상호 구별과 연대를 기초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부처의 개념과 재세례파의 개념은 구별된다. 그러나, 동시에 부처는 재세례파 속에 있는 장점, 즉 교회의 거룩성을 진리의 요소로서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과 같이 세속화의 끝이 깊은 때에도 부처의 직분 개념은 교회가 교회의 직분 속에서 어떤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도움을 줄 것이다. 특별히 기독론과의 연결 속에서 성령론에 대한 그의 강조는 대단히 중요하다.
은사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다름 아닌 바로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한다. 개혁과 전통 속에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왕직은 영적인(성령론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섬기고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속과 생활 속에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하신다.
우리는 부처가 취급했던 직분과 은사의 방법을 사용할 때, 직분과 은사 사이의 현대적 대치 개념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직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대조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것과 은사적인 것 사이의 대조도 말할 수 없게 된다.
직분과 은사 양자 사이의 어떤 종류의 경쟁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양자의 상호 긴장이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서 교회를 구축하기 위해서 양자는 함께 일하는 한편, 양자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서로 서로를 세운다. 교회의 영적인 구축과 성장은 성령이 성서 속에서 교회의 구조와 관계하여 지시하고 유지했던 틀 안에서 일어난다. 성령과 질서는 서로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 교회의 구축과 성장은 작은 것이 하나 하나가 구조화되어짐으로써 일어난다. 부처의 교회의 구축과 성장의 이상은 그의 교회관과 직결되고, 전 교회의 기독교적 개혁에 대한 그의 외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교회를 통해서 교회의 하나됨을 조장하기를 원했다.
(seejesus 에서)